저잣거리의 목소리들 - 1900년, 여기 사람이 있다
이승원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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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5

 

“Back To The Future"

작품을 읽는 내내 1980년대 중반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 제목이 떠올랐다.

전체적으로는 웃긴다고 해야 할지 아님 애처롭다고 해야 할지 도저히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의

웃음과 애환 그리고 슬픔을 느낀 그런 작품이었는데 한마디로 웃펐다.

 

근대화 초기에 발간되었던 신문의 시사만평에서 작품의 소재를 가져 왔다고 하는데,

현대의 신문도 그러하지만 시사만평이라는 것이 당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던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와 민중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속살을 가감 없이 펼치는 장으로서 - 당시는 언론의

통제가 없었나 보다 - 아무래도 당시의 사회상을 세밀히 알 수 있는 최고의 증거 자료라는

생각이 들어 작품의 소재 발굴이라는 점에서는 선택을 아주 적절했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우리나라 최초 시사만평은 19096월에 창간된 대한협회 기관지인 대한민보

실렸었다고 한다.

 

작품을 통해 느낀 단 하나의 명제를 이야기해 보라면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권력자 주변의 측근비리 이야기, 경성 고아원 사건(고아를 이용한 비리), 도박(로또, 바다

이야기) 이야기와 청산되지 않은 친일 세력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 민족의 역사적 악순환은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으며, 내일도 여전히 반복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어 그저

가슴만 답답한 시간이었다.

우선 작품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이야기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우리 사회의 변화에 대한 기본정보가 있어야 하겠다.

 

고종은 아관파천(1897) 이후 환구단(천자가 하늘에 제를 드리는 곳)을 세우고 왕에서 황제로,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변화를 꾀하는 데, 이는 단순한 변화가 아닌 세계관의 변화이자 국가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에 걸맞는 국민 계몽도 시급한 문제로 판단하여 일부 선각자들은 매체를 통한 계몽

특히 독립신문등과 같은 매체들을 활용해 연일 진정한 대한제국이 되려면 모든 국민이

깨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개화계몽 사업에 매진하게 되는데 근대화 프로젝트의 당위성

을 저잣거리 인민에게 널리 알리는 소셜 메신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서구식 교육 방법이 도입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연설, 웅변, 강연 및 토론 등이었다.

근대화 초기만해도 이런 것은 낯선 볼거리만 제공했지 그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던 시기

였으나 훗날 연설과 강연회가 인기를 끌면서 유료화를 해도 방청객 수는 1천여 명을 넘길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고 하며 1910년에 원각사에서 대규모 유료 강연회가 열릴 예정이기도 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개최가 강제 무산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러시아가 일부 부정관료와 결탁을 하면서 대한 제국의 정국은 꼬여만 간다.

마침내 1898년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대한제국의 국정개혁을 요구하는 대중 집회인 만민

공동회가 열리는데 이는 요새말로 일종의 촛불 시위'였던 것인데 이를 거꾸로 이용해 버린

친일파에 의해 만민공동회는 흐지부지 되고 정국이 친일파로 넘어가는 결정적 단초가 되고

만다.

 

본격적으로 작품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요새 정치, 경제적으로 문제되고 있는 집단이 있는데

그 집단들도 작품에서 힌트를 얻어 ‘OOO을 바라보는 저잣거리 이야기라는 타이틀로 자기반성

보고서를 써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정신을 못차리겠지만....

아무튼 개화기 우리 사회에서 이슈가 되었던 내용에 대해 언급한 말도 안 되는 사연을 살펴보면

 

[무당과 점쟁이]

- 혼란의 시기에 궁궐에 진출한 진령군(무녀)으로 인해 희대의 사기꾼 이유인이라는 작자까지

  설치면서 무당과 점쟁이가 국가의 주요 보직에 임명되는데 당시 임명된 ,차관급 인사 중

  8명이, 군수급 인사 중 18명이 무당과 점쟁이 출신이었다고 할 정도로 무속인의 진출이 심각해

  이 문제를 공진회가 지적하고 이들을 제거하려 하자 고종은 오히려 이들 편에 서서 공진회

  회원들을 박해까지 했다고 한다.

- 무녀인 진령군은 명성왕후를 등에 업고, 수련(무녀)은 고종과 명성왕후에 빙의하여 권세를

  얻으려 했으나 고종이 퇴위되어 힘을 잃게 되자 또 다른 방법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신주로

  모셔 권력을 탐하다 일제치하가 되면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 1909년은 전국적으로 전염병(콜레라)이 창궐해 종교의 힘이 평소보다 더 강력하게 요구되는

  시점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성 병]

- 대한제국 시기에 원각사, 연흥사 등과 같은 근대식 연극장이 세워졌는데 이는 계몽 지식인들이

  문명 개화를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든 이유는

  새로운 볼거리나 공연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닌 서구 문명의 활동 사진을 볼 수 있는 공간

  이라는 것과 그 곳에서는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구습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이성과의 만남을

  가져도 별 문제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공연보다 잿밥에만 관심을 갖는 장소로 인식되면서 성매매 종사자들이 연극장으로

  몰려들게 되면서 성병이 확산되었다고 한다.

 

[통변(통역)]

- 대한제국 시대에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통역의 희소성이 높아지면서 정동대감이라는 김홍륙이

  라는 자에 의해 농단 당한다.

  김홍륙은 블라디보스톡에서 고용살이를 하며 러시아어를 원어민 가깝게 익힌 인물로 운명적

  으로 고종과 만나며 국정 전반을 러시아 공사 배배르를 등에 업고 농단한다.

  당시 러시아어와 일어는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권력을 좌우하는 무기였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특히, 헌병 보조원, 정탐꾼, 통변은 대한 제국을 좀 먹고 인민의 생활을 뜯어먹는 세 마귀라고

  불리웠는데 그 중 통변의 횡포가 가장 심했으며 당시의 신문 사설도 그들의 무지 막지한

  횡포를 이야기 했다고 한다.

  김홍륙의 권력 농단이 심해지자 고종은 김홍륙을 태형에 처하고 흑산도로 귀양을 보내지만

  김홍륙은 자신의 심복인 공흥식을 동원해 고종을 독살하려다 실패하여 처형된다.

 

[만민공동회]

- 쇠약해져가는 대한제국을 새롭게 재건하려는 서민들의 꿈과 희망의 총집합체가 바로 만민

  공동회였다. 만민공동회 결과 정부와 만민공동회 측은 의회를 개하고 자주적 국정개혁을

  추진하고자 했으나 이에 불안을 느낀 친러 보수파가 기득권 보호를 위해 흑색선전을 벌이게

  되는데, ,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의회를 설립하고 대통령으로 박정양을 부통령으로

  윤치호를 세워 공화정을 추진한다는 내용이었는데,

  황제는 분개해 곧장 독립협회를 해산시키고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고 황국협회 보부상들을

  용역 깡패로 동원하여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철저히 탄압해 수포로 돌린다.

 

[도박, 부정축재]

- 대한제국 시대의 농상공부대신과 내부대신을 역임한 이지용은 화투대신이라는 별호를 얻을

  정도로 도박에 빠졌다고 한다.

  이지용외에도 이완용, 이용규, 박의병 등은 집을 돌아가며 국사는 제쳐두고 애첩들과 함께

  큰 판돈을 걸고 도박에 빠졌었다고 한다.

- 여흥 민씨 척족인 민영휘(본명 민영준)는 황실내탕금은 물론 직위도 뇌물로 부여하는 등의

  비리를 저질러 당시 중국에 수 천만원의 예금은 물론 자산만 현재 가치로 1조 원대에 이르렀다

  고 한다

- 한성미술품제조공장 대표이사는 고종의 총애를 받던 이봉래라는 자를 임명하였는데 그는

  을사 오적 송병준과 짜고 황실 문화재를 몰래 내돌려 팔아먹은 파렴치한 놈이며 황실 재정을

  총괄하는 내장원경 이용익은 대표적인 탐관오리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인민의 고혈을

  짜냈음은 물론 황실 재산을 관리하고 황실을 위한 세금을 걷는다는 명목으로 혹독한 세금을

  징수해 자신의 배를 불렸다고 한다.

 

[생계형 일제 협력자들]

-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에서 나인영(나철)과 오기호는 을사오적 암살단을 결성해 활동에

  들어간다. 이때 '망보는' 임무를 서창보라는 인물에게 맡기는 데 서청보가 구속이 되어 겁을

  먹고 을사오적 암살단에 대한 비밀을 실토한다.

  1년의 구속생활 중 친일 조직인 일진회의 논리에 감화 받은 서창보는 열렬한 한일합방 추종자

  로 변질되어 황국협회 회원이되어 만민공동회를 탄압하기까지 한다.

  그는 일진회로부터 생활비를 받으며 철저한 친일로 돌아선다. 나중에는 일본 내각과 통감부에

  직접 편지를 써서 꼭 한일합방을 이뤄달라고 청원을 할 정도였다. 서창보의 이런 행동이

  소문나자 시민들에게 두들겨 맞는 것은 다반사였는데 그가 맞은 이유 중 또 한 가지는 편지좀

  그만 쓰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 여러 친일단체가 있었지만 이용구의 일진회와 이완용의 국민연설회가 그 중 가장 막강했다.

  하지만 이 둘은 서로가 견제하는 단체였다. 그 이유는 일진회가 한일합방 청원서를 통감부에

  먼저 제출해 선수를 빼앗겼다고 느낀 이완용이 이인직을 앞세워 국민연설회를 만들어 일제

  협력 서열 제1위의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개 소탕작전]

- 광견병에 대한 문제로 일어난 일로 생각되는 데 개 소탕 작전이 박중양이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후견인이자 양아버지로 두고 활동했다고 한다.

  , 당시 개를 기르는 사람은 개의 모양, 색깔, 종류 등과 주인의 성명, 거주지 등을 자세히

  기록하여 경찰서에 보고할 의무가 있었고 사람이 호패를 차듯 개 역시 개 목걸이를 차도록

  했는데 그런 표식이 없으면 바로 도살해 버렸다고 한다.

  지위와 체면을 중시한 고위 관료들은 개목걸이에 자신의 이름을 써 넣는 것을 여간 찝찝하고

  불쾌한 일이었는데 을사오적이나 탐관오리의 개들이 지나가면 그 개 주인의 이름을 개 뒤에

  붙여서 조롱하고는 했다고 한다.

 

[박람회]

- 1903년 오사카 내국권업박람회에는 학술인류관이라는 것이 설치 되었는데 이는 식민지관

  으로서 한국인을 비롯한 32명의 이민족을 전시하기도 했다.

- 1907년 도쿄 박람회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일제는 조선인이 야만의 표본으로 조선

  여인을 내세우려 했으나 정부가 나서서 이를 무산시킨 사실도 있다

- 1907년 경성박람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해에는 헤이그 밀사사건, 고종의 강제 퇴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전국 의병 봉기 등 비상시국으로 일본은 불안한 시국을 잠재울 방안으로 박람회라는

  이벤트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건들과 작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연계해 보면 비슷해도

아주 비슷한 사건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니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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