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다 이한우의 군주열전
이한우 지음 / 해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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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추천권유도 10

 

선조의 시대는 조선 건국 때부터 이어져 온 '공신 훈구' 시대의 종언을 고하고, '사림(士林)정치'의 

시대를 연 조선 역사의 전환점이 된 시대라 한다.

선조 시대를 조명하기 이전에, 중종 14년에 사림에 의해 공격을 받아 사사된 [조광조]대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조광조를 빼고서는 중종, 인종, 명종 및 선조로 이어지는 관련 역사를 

정확히 이야기할 수,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반정으로 [연산군]을 내몰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약한 자신의 권력 기반을 신진 세력을 통해 

강화하려는 구상을 하게 된다. 이때 이조판서 '안당'의 천거로 조정에 진출한 [조광조]를 활용

하고자 한다. 조광조는 도학정치의 양대 목표인 '소격서 철폐''현량과 도입'을 추진하여 

성공을 이루는 등 중종의 총애를 받으며 개혁 사업을 추진해 나가는데, 한 발 더 나아가 기득권의

아킬레스건이나 마찬가지인 '위훈 공신'삭제를 '대사간 이성동'과 함께 추진하게 된다

'위훈 공신'이라 함은 연산군을 몰아 낼 때 공훈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벼슬로 당시 시대적 

혼란상을 틈타 아무런 공적도 없는 인물들이 자신의 공적을 포장해 혹은 유력자의 공훈에 끼워

넣기 식으로 국가로부터 벼슬과 훈작을 받은 것으로 당시 '위훈 공신' 문제는 기득권 세력의 

큰 아킬레스건이었다.

이는 연산군을 몰아내는데 공을 세운 '위훈 공신'들을 견제하려는 중종의 구상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급속히 진행되게 된다.

 

훈구 세력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곱 차례에 걸친 강력한 주청 끝에 조광조는 자신의 

계획을 관철시킨다. 조광조가 추진한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수구 기득권 세력의 강한 반동을 

불러 일으킨다.

위훈 공신의 중 한 명의 자식이 바로 [희빈 홍씨]로 희빈은 당시 중종으로부터 총애를 받고 있던 

[경빈 박씨]를 통해 중종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일대 사건을 기획하게 되는데 그 사건이 바로 

조광조가 연루된 '주초위왕(走肖爲王)'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최고 개혁가 조광조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죽은 조광조의 복권을 논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불궤(不軌) , 반역을 의미하는 것과 

동일시 되던 시대였다.

 

선조가 즉위하기 전까지 형제간 왕위에 오르는 순서의 문제는 있었지만 왕후의 몸에서 나지 

않은 임금이 왕위에 오르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때문에 '방계 승통'의 문제는 늘 선조를 따라 

다니는 아킬레스 건이었다.

 

명종 18년 명종의 장자인 [순회세자]1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에 이어 두 번째로 터진 국가적인 비극이었다. 세자를 국본(國本)이라 

하여 중히 여겼기 때문에 [순회 세자]의 죽음은 왕실 뿐 아니라 조선의 장래를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비극적인 중대 사안이었다.

공교롭게도 명종에 앞선 '인종'도 후손 없이 죽었기 때문에 [순회세자]의 죽음은 조선 왕실의 

후계 문제를 오리무중으로 몰아넣는 계기가 된다. 명종이 죽기 직전 어머니인 인종의 비인 

[문정왕후]는 적장자로 명종의 계비 중에서 자신과 사이가 가장 좋았던 [창빈 안씨]자식 중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후계자로 지목하게 된다. (을축년의 하서)

 

명종 당시의 정치, 사회적인 상황을 점검해 보면 정치 세력들은 당파를 만들어 당쟁의 불씨를 

만들고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는 민심이 흉흉하여 도적(임꺽정)이 활개를 치던 시기로 선조는 

어린 나이(16)에 왕위에 즉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걸맞지 않는 영민한 행동(유모의 

궁궐 출입 사건, 환관 감축 등)으로 세인들의 관심은 물론 칭송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여기에 덧붙여 집권 초기 [영의정 이준경] 등과 같은 우직하고도 충직한 신하가 선조를 든든하게 

보좌하고 있었기 때문에 또 [문정왕후]와 어머니 [인순왕후]의 든든한 후원으로 비록 정통성이 

떨어지기는 하였지만 왕권의 연착륙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선조는 즉위 초기, 말수도 없고 너무 내성적이어서 신하들과 왕족의 우려를 자아냈으나 명종의 

'국상 예'가 끝나자 경연에 적극 참여하여 반론하고 질문을 하기 시작했는데 매우 논리 정연하고 

세밀했다고 한다. 이렇듯 선조는 즉위 당시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몇 가지(권한 이양 및 파천 등) 불비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국가적 재난 대처에 대한 학습이 전혀 안 되어 일어난 사항이 아닌가 생각한다.

예로서 영국의 왕세자를 비롯한 비록 형식적이지만 왕의 제도가 살아 있는 국가들의 왕위 승계 

예정자들을 보면 대개가 군 출신이거나 해당 국가의 군사학 관련 학교를 졸업한 것을 알 수 

있는, 이는 국가 위기 시에 지도자로서의 그 진가를 발휘하는 연습을 평시에 교육시켜 놓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시에 많은 위기 시 '극복 연습' '대처 방법을 훈련'하는 

곳으로 적당한 분야가 군대 밖에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선조는 그런 연습 즉, 국난 위기 시 리더로서 대처하는 연습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 아마 당시의 왕위 계승자들 대부분이 그러했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실제적으로 전 

국토가 전쟁터로 변한 당시에는 더 심했을 것이다 -

그러했기 때문에 자신의 왕세자가 적에게 인질로 잡히고, 선조 자신도 야음을 틈타 백성을 

속이고 북으로 북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비록 혜안(명나라의 쇠퇴, 왜의 재침 등)을 가진 선조라 할지라도 최전선에서 

적군과 싸우고 있는 장수에게 감 놔라, 대추 놔라 일일이 지시하는 모습과 자신의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전투 중인 장수에게 징계를 내리는 모습 또한 전쟁 중인 상태에서 왕위를 

이양하겠다고 난리를 피는 모습은 한 국가의 지도자인 왕이 아닌 옹졸하고, 치졸한 인간의 

전형이었다고 밖에는 달리 평가할 게 없을 정도로 정말 안타까움 그 자체였

하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잘못 혹은 오판으로 인한 벌어진 사항까지도 전부 신하들의 

잘못(파천 혹은 몽진)된 보필로 돌리는 모습은 왕으로서 절대 보여 주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상식을 뒤집는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하나는 여진 정벌의 영웅 [신립 장군]에 관한 것이다.

선조는 자식 중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자식으로 [신성군]을 꼽고 있었으며 나중에 신성군을 

[신립의 딸]과 혼인시켜 신립 장군과는 사돈관계였다. 임진왜란 당시 여진 정벌의 영웅이었던 

신립 장군이 강에 뛰어들어 자결하고 마는데, 이유는 자신의 판단 실수로 적에게 전략적 요충지

(충주)를 너무 쉽게 내 주어 자책감으로 탄금대에서 자결했다고 한다.

역사는 마치 신립을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인물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그의 딸이 신성군

(인조의 큰 아버지)과 혼인을 했고, 그의 매부 구사맹은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의 장인이었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렇게 밖에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언급되고 있다.

 

두 번째는 임진왜란 당시 우리를 도운 [명나라의 원군]에 관한 부분이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는 쇄국 일변도의 정책을 펼쳐 덩치만 컸지 제국이라 할 것도 없을 정도로 

엉망인 나라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따라서 명나라는 왜군과 싸울 의향도, 전략도 세우지 

않은 채 형제국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출병을 하였으나 왜군과의 싸움보다 협상을 통해 종전

(終戰)을 도모하려 했다고 한다

여기서 '기미론'이 나오는 데, '기미'란 명나라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관직을 내리고 일본의 

조공을 받아 들이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으려는 움직임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과거 역사 시간에 마치 임진왜란 당시 우리를 적극 도와 준 나라로 명나라를 들고 

있으니 뭘 몰라도 한 참 모르는 이야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역사적으로 문제가 되어 오던 가장 큰 사건을 하나 해결한다.

바로 "종계변무(宗系辨誣)" 수정 사건이다. 종계변무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고려 말의 

권신이었던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대명회전'에 잘못 기록된 사항을 수정하려는 숙원사업을 

말하는 것으로, 선조 이전부터 수 많은 왕들과 신하들이 중국 측과 접촉하여 그 조항의 변경을 

추진하려고 중국에서 온 사절이나, 중국에 있는 권력층들에게 줄을 대고 틈틈이 로비를 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종계변무 수정에 관여하였던 인물들은 조선의 이런 곤란한 점을 노려 

뇌물만 챙겨 먹고, 수정해 주지도, 할 의사도 없이 속만 끓여 왔다고 한다.

선조는 이 조항에 대한 변경을 무작정 요구하지 말고 중국의 역학구도가 바뀌는 시점에 집중 

로비하여 이를 바로 잡자는 전략을 세워 이를 관철시켰다고 한다.

 

종계변무의 문구 수정 사항은 잘못된 서술에 대한 문구를 수정했다는 단순함을 뛰어 넘어 

조선 건국 이래 가장 골치 아픈 사건을 해결함으로써 조상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동시에 자신 

역시 '후궁의 손자'라는 태생적 콤플렉스를 제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FK고 굳은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기의 내용은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는 내용을 나름 정리해 놓은 것인데,

나는 작품을 나름대로 분석하여 선조를, 그 당시의 정치, 경제적 사항에 대해 의미를 두기 위해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해 보았다.

 

1. 절대 권력자에게 맞서기 보다는 충성이 최선이다. 

선조(하성군)의 할머니 [창빈 안씨]는 명종비인 [문정왕후]의 절대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 빈의 자격으로 감히 왕의 총애를 독차지 하려 하지 않고 항시 온화한 성품으로 당시의 

실권자인 [문정왕후]의 총애를 받았다. 다시 말해 '알아서 기었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반대로 [창빈 안씨]보다 서열상 위인 [경빈 박씨]는 자신의 아들 '복성군'을 명종의 후임으로 

앉히고자 모사를 꾸미다 [문정왕후]에게 발각되어 아들과 함께 사약을 받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고 한다.

하여간 무조건 절대자에게는 맞서기 보다는 멍청스러울 정도로 충성을 다하는 그런 부하로 

인식되게 하는 게 상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2. 좋은 스승이 많았다.

조선 국왕 27명 중에서 가장 스승 복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당대의 석학이었던 이황, 기대승, 이이, 노수신 등과 같이 성리학의 최고봉을 자랑하는 이들이 

선조에게 학문적 기초를 놓아 주었다. 실록 어디를 보아도 선조가 하성군 시절 누구로부터 어떤 

교육을 체계적으로 개인 교육을 받았는지 언급된 기록은 없다.

전통적으로 조선 왕실에서는 자칫 권력 투쟁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에 왕과 같은 서열에 있는 

종친들의 학문 연마는 금기시 하는 것을 관례화하였다고 하는데, 특히 명종은 어린 하성군에게 

왕실의 직접적인 후계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파격적으로 '왕손 사부'를 임명하여 교육을 받도록

했다고 한다.

권좌에 오른 직후 '이준경'은 통치자로서의 기본 소양을 함양시키고자 제일 먼저 '이황'선조의 

스승으로 삼도록 천거해 이를 관철시킨다. 이황을 스승으로 천거한 이유는 '현실과 이상이 적절

하게 조화를 이루며 당면한 국리민복과 부국강병의 과제를 해결해 가는 국왕의 모습'을 만들려 

했었기 때문으로 생각되어진다.

선조가 개인적으로도 존경하였던 이황은 '소학''땅에 떨어진 ''를 바로 세우는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책'이라 하여 '소학'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고 한다. 이후 선조의 스승으로 이황의 

추천을 받은 정지연과 그의 추천을 받은 인물 '이산해''이 이'가 있었다.

선조의 교육 방향을 놓고 [이준경][이 이]는 언쟁을 벌이게 되는데, 언쟁은 왕의 '경연장'으로

까지 번져 권력 투쟁의 장으로 바뀌고 만다. 또 하나 중대한 사항은 선조의 교과목이었다.

선조의 학습 과목 편성은 주로 '주자학' 일변도로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결국 선조로 하여금 

주자학은 물론 중국에 대해 자발적인 굴종으로 나아가게 하는 폐단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3. 이준경과 같은 멸사 봉공의 자세를 견지한 충직한 신하가 있었다.

이준경은 '실록' 등에서 평소 중망(重望)이 있어 나라 사람들이 그를 믿고 의지 하였다고 기록될 

정도로 신망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이준경은 당시 그의 형 '이윤경'과 함께 '이봉(二鳳)'이란 애칭으로 불렸다. 그는 선조 등극 초기 

명종비인 [인순왕후]에게 '수렴첨정'을 권하여 승낙을 받아 이를 시행하게 하는 등 선조 초기 

정권 안정에 기틀을 다지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선조 5년 이준경이 세상을 떠나면서 선조에게 통치에 관한 유언을 하는데,

첫째 말하는 것을 준엄하게 하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 포용하고 공손히 대하고

둘째 신하가 진언할 경우 너그러이 포용하고 예우해 주고

셋째 군자와 소인을 분간하고

넷째 사사로운 붕당을 깨트릴 것

등을 강조한다. 이렇듯 그는 죽으면서까지도 선조의 통치 기반이 영속되기를 기원하였다.

 

역사가들은 "선조의 시대를 연 것은 이준경이지만 선조의 치세를 뒷받침해 준 인물들을

길러 낸 것은 이황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4. 선조는 심성이 유약한 반면, 변덕이 심하였다.

선조의 소심함과 자신감 결여는 두고두고 신하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데 이는 결국 선조에 

대한 불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통성을 지니지 못하고 출발한 선조는 당쟁이 극에 달했을 때에 별다른 조치 내지는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항시 미온적이고 수세적이었는데 선조가 그리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대안 부재'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 권력자들 간의 당파 싸움이 어느 정도 심했는지 전란으로 인한 몽진의 와중에서도 지속

되어 선조의 심신을 끝까지 괴롭혔다고 한다. 이는 정파간의 싸움이 치열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근본적으로는 선조의 심성이 유약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또 선조의 유약한 심성을 엿볼 수 있는 행동 중의 하나가 바로 아버지에 대한 처우 문제로 

자신의 아버지인 '덕흥 대원군'을 추존왕으로 추대하지 않은 것과 [광해군 시대]의 권력 투쟁 

구도가 광해군과 신성군의 대립으로 나타난 일차적 이유가 유약한 심성의 소유자 선조에게 

있다는 것이 사학자들의 공통된 평가라고 한다.

 

반면에 선조의 변덕을 가늠할 수 있는 사건이 몇 가지 있는데,

선조 24년 자신 스스로 공론화하던 [세자 책봉 문제]를 신하인 '정철'이 정식 공론화시키자

그 이야기를 꺼낸 정철을 심하게 질책을 하였고, 임진왜란 중에 '아홉 번'에 걸친 '양위 파동'은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사건이었다고 할 것이다.

더욱 한심스러운 것은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을 속여 가며 '파천'을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단행한 

사람은 바로 '선조 자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 대신만 갖고 나무라고 있는데 왕으로서 또한 

지도자로서 보여서는 안 되는 행동을 보이고 있는 점은 한편의 희극이었다고 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할 것이다.

 

선조는 '후퇴하는 왜군을 추격해 섬멸하라'는 자신의 명령대신 방비를 하면서 전투를 벌이는 

것이 타당하다고 건의를 한 전투 현장의 장수 이순신 역시 극도로 불신하고, 미워한다.

더욱 압권인 것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는 '공신대감'을 선정하여 포상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책임을 '비변사''도원수'의 책임으로 하는 돌리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은 변덕과 옹졸함의 

극치를 보여 준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5. 국가 존망의 위기에 대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우찬성 최 황]이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탄 듯 결정을 내리는 선조에게 

신하로서는 도가 지나친 지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마냥 소극적인 지시로 일관하고 있다.

 

"모든 것은 비변사에 내리면 비변사가 자세히 살핀다. 내가 친히 보더라도 무슨 일을 하겠는가."

 

선조의 이 답변은 위기에 대처하는 정신 자세가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생각한다. 선조는 외세에 대비코자 이이로 하여금 군사를 양병토록 지시하는 등 나름 대비는 

하려고 하였으나 '유성룡' 등에 의한 반대로 이를 관철시키지 못한다. 왕으로서 국가의 위기 

사태가 직면하였다고 판단되면 어떠한 반대가 있더라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자세가

있었어야 되지 않은가 생각한다.

또한 왜란이 한창일 때 '몽진'을 하면서 보여 준 선조의 행동은 전혀 국가 존망의 위기를 극복해 

보려는 의자가 전혀 없어 보이는 왕으로 비춰지고 있어 못 내 아쉬운 점으로 남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더욱 웃긴 것은 전쟁 중에 있는 상태에서 나라의 왕이라는 사람이 

'권력을 세자에게 이양'하겠다고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하는 것과 여차하면 명나라 쪽으로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는 점은 정말로 그 분이 조선의 왕이었는지가 의심될 정도였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6. 발전적인 논쟁과 함께 언로가 살아 있었다. 

허접하고도 저질스런 당파 싸움말고 고차원적인 논쟁이 선조 시대에 있었다.

그런 논쟁을 한 대표적인 두 축이 바로 '이준경''이 이'.

이준경은 이 이의 급진 개혁을 위험스럽게 보았고, 이 이는 이준경이 낡은 세력의 대표자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항시 부딪혔었다. 성격적으로도 이 이는 직선적이고, 논리적

이어서 일도양단(一刀兩斷)을 좋아 했다. 조선의 맹자라는 별명은 그래서 붙은 것이다.

이 이는 이준경이 죽자 그가 선조에게 올린 '유서장'을 논박하는 '논붕당소'를 올리게 되는데

이는 이준경이 유서장에 언급하며 우려한 붕당에 대한 우려를 쓸데 없는 것이라고 반박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었으나 끝내는 이준경이 예언한 대로 붕당이 생성되어 갖은 음모를 펼치게 되자 

'이 이'는 어느 한 쪽에 서기 보다는 비교적 중립적 입장에서 붕당을 조정, 화해시키려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다고 한다.

 

선조 13년 충북 음죽에 사는 [전욱]이라는 한 진사가 선조에게 조정이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는 데 선조는 이를 묵살하지 않고 적극 수용해 진상 규명을 시키게 한 것만 

보아도 언로는 살아 있었다고 보여 진다.

 

영의정 이산해와 좌의장 유성룡 모두 동인이었다.

왜란 발발직전 조정은 이미 동인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고 동인의 대일 전략은 기본적으로 

'선린 외교'였다. 이 이가 10만 양병설을 외칠 때 유성룡이 이를 적극 반대하고 나선 것은 자신들

가 달랐기 때문에 부정을 위한 부정을 한 것이 아니라 일단 '선린 외교를 통해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해 볼 것을 강력 주청하였기 때문이다.

또 당시의 언로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는 위에서도 몇 번 언급되고 있지만 '수렴 첨정' 관한 

사항이다.

 

선조 등극 초기 명종비인 [인순왕후]에게 '수렴첨정'을 권하여 승낙을 받아내 이를 시행하는 

과정과 세월이 흘러 신하 '백인걸'이 인순왕후에게 섭정을 거둬 줄 것을 요구해 이를 관철시키는 

내용은 절대자와 신하간에 언로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언로가 살아 있지 

않았다면 언감생심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게 나의 시각이다.

 

위에서 언급한 나의 시각이 '선조'를 전부 평가할 수 없다.

- 누가 인정해 주지도 않겠지만 -

분명한 하나의 사실은 선조는 참 지난한 삶을 살았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되지를 않는다.

왕위 계승, 임진란, 당파 싸움 등등등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은 되나, 준비 안 된 

왕권 계승으로 맘 고생이 상당히 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선조를 통해 진정한 리더의 표상을 다시 한 번 그려보는 계기가 되었다.

 

책으로부터 얻는 지식들

- 나라에 큰 공이 있을 때는 조(), 덕이 있는 인물이었을 때는 종()을 붙였다.

 

- 하성군이 즉위하면서 하성군의 아버지 덕흥군은 [대원군]이 된다

   조선 시대의 대원군 제도는 이때 생겨난 것이다. 다른 두 대원군은 철종의 아버지

   '전계 대원군', 고종의 친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이 있다.

 

- 태강릉이라 불리는 태릉과 강릉은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과 그녀의 아들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능을 일컫는 말이다.,

 

- 선조의 측근 기대승은 전한(典翰)이란 벼슬에 있었는데, 이는 왕의 문서를 작성하는

   지체교의 일을 하면서 경연관도 겸임하는 중요 자리였다.

 

- 어진 이를 알아보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알고서 신임하는 것이 더 어렵다.(기대승)

 

- 이이가 선조에게 올린 [동호문답]은 임금의 학문하는 방법과 정치라는 도리를 문답체로

   정리한 것이다. 또 내성외왕을 이루라며 '성학집요'도 올렸다.

 

- '선묘보감'이란 실록 중에서 선조 시대의 통치와 관련된 기록들만 따로 정리한 일종의 

   다이제스트 실록을 말한다.

 

- 홍문관 관리들이 의기투합해서 중종에게 학문과 정치, 민생을 바로 잡을 것을 청하는

   유명한 상소는 '일강구목소'이다.

 

- 중국 명나라에서는 중기부터 양명학이 지식 사회는 물론 정치세계까지 석권하다시피

   했다. 주자학은 이론을 중시했고, 양명학은 실천 중시 학문이다.

 

- 조선에 양명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인물이 남언경이며 실록에 근거해 보면 '주역'

   처음으로 공부한 국왕은 태종 이방원이다.

 

- 오활하다는 말은 '우활(迂闊)하다'에서 온 것으로 세심하지 못하고 부주의하며 덜렁거려

   일을 믿고 맡길 수 없다는 뜻이다.

 

- 태종이 처남 형제들을 몰살 시킨 이유는 왕권을 농락할 수 있는 붕당을 이루려는 조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 때와 유사한 붕당의 조짐이 있었던 것은 성종 때부터이다.

 

- '지제교'란 국왕의 공식 문서를 짓는 일을 하는 직책.

 

-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형서(邢恕)라는 인물은 배신의 대명사이다.

 

- 후궁의 서열

   (1) ---> 귀인(1) ---> 소의(2) ---> 숙의(2) ---> 소용(3

    ---> 숙용(3) ---> 소원(4) ---> 숙원(4)

- 조선 시대에는 5명의 추존된 왕이 있었는데

   1) 성종의 의경세자 -----------> 덕종

   2)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 -------> 원종

   3) 영조의 배다른 형제 ---------> 진종과 장조(사도세자)

   4) 헌종의 아버지 -------------> 익종

 

-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완성하자 선조는 관계자에게 포상을 하게 되는데,

   이 중에 동시 통역사안 [홍순언]이 들어가 있었는데 이를 통해 명나라 장수 '석성'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 친한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우리는 임진왜란이라고 부르지만 일본은 '부로쿠의 역'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고 한다

   이는 분로쿠 천왕 시대에 일어난 전쟁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정유재란은 '게이초의 역

   이라고 부른다.

 

- 원균과 그의 아들 원사웅, 원연, 원전은 모두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 맞서서 싸우다

   전부 전사했다.

 

- 왜놈의 새끼들이 부산에 첫발을 내디딘 지 67개월 10만에 전쟁이 종료됨.

 * (나의 생각) 일제 36년하고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합치고 가끔 노략질까지 합치면 거의

                   반세기를 우리를 못살게 군 놈들로 판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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