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나 - 왕을 만든 사람들 그들을 읽는 열한 가지 코드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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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9

 

작품을 읽으며 두 가지를 재 확인한 시간이었다.

첫째는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은 자신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무엇 보다는 '하늘의 도움'

           있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 인물이 행동할 때의 시기가 시대적, 사회적 상황과 맞았기 때문에 제대로

          큰 뜻을 펼칠 수 있었음

을 다시 한 번 크게 느끼게 한 한 작품이었다.

 

'역발산 기개세''항우'가 힘이 없고, 항우의 군대가 유약하여 유방에게 중원의 패권을

넘겨 주었겠으며, 영국의 수상 '처칠'이 똑똑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전쟁

중에 수상의 자리에 올라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했으며, '나폴레옹'이 힘이 없고전략이

부재해 모스크바 전선에서 수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패했겠는가?

나는 역사의 승자에 초점을 맞추어 '성공한 인간'들을 세밀히 분석해 보았다.

역시 대다수가 보이지 않는 강력한 하늘의 도움, 주위의 도움, 환경적 도움에 의해 이루어

진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너무 하늘, 하늘하고 하늘 의존적인 인물로 비춰질 수 있으나

'하늘은 곧 운'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역사적인 인물은 바로 하늘이 내린다는 것이다.

 

작품에서 언급되는 여러 인물이 있지만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라

생각되어 진다.

세손이 호랑이와도 같았던 할아버지 영조의 그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요인이 혜성같이 등장한 '홍국영'이라는 참모 때문에 가능했다고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비록 홍국영이라는 인물이 '개인의 권력욕'에 의해 몰락은 했지만 그가 세손인 정조의 참모

로서 활동하던 시기에 보여 주었던 활약상은 높이 평가 되어야 하고 절대자인 '보스

모셔야 하는 참모들에게 크게 귀감이 될 만한 사항이 아닌가 생각하는 바이다.

나는 참모로서의 홍국영을 칭찬하는 이유를 작품에서 언급하고 있는 예화를 통해 이야기

하고 싶다.

 

정조는 추상같은 할아버지 영조의 질책에 답하는 과정에서 '통감강목' 부분 중 할아버지

영조가 그토록 싫어하는 '출신 성분'(영조는 무수리 출신 모친에서 출생)에 관한 발언을

무심코 해 버린다.

안색이 변한 영조의 모습을 본 세손은 자신의 진술에 문제가 있음을 파악하고는 영조에게

'문제가 되는 문구는 종이로 가려서 읽지 않는다'고 설명을 하지만 할아버지 영조는 이를

믿지 못하고 세손(정조)이 읽고 있는 책을 가져오라고 지시한다.

세손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고 있던 '홍국영'은 느닷없이 영조가 세손이 읽고 있던 책을 가져

오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이유를 혼자 고민하다 세손이 읽고 있던

대목에서 문제가 되는 대목이 있음을 확인하고는 재치있게 해당 대목을 종이로 가린 채

영조에게 세손이 읽던 책을 보낸다.

책을 확인한 영조는 만족을 표하게 되며, 세손을 궁지에서 구출해 낸다.

나는 이 대목에서 보스를 모시는 참모라면 그것도 하루하루가 전쟁터와 같은 비즈니스

세계의 참모라면 적어도 이런 센스와 동물적 감각 그리고 보스를 지키려는 확실한 자세가

있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어쨌든 작품은 보스와 참모간의 유기적인 호흡과 함께 그들이 팀워크를 이뤄 관련되는

일을 추진하는 순간, 절체 절명의 위기의 순간, 결정적인 순간에 어떤 사고의 기반을 갖고

결정을 내렸고 참모들이, 보스가 행동했는지를 보여 준 작품이라 생각한다.

 

책을 읽으며 []도 중요하지만 왕을 떠 받치고 있는 [참모]의 역할이 왕 못 지 않게 중요

한 인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운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 사회 생활을 하면서 어떤 참모였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는 그리 훌륭한 참모도, 영특한 참모도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조직이 크게 흔들리고, 힘들어 할 때 보스를 대신해 보스를 중심으로

조직원을 뭉치게 했었고, 단합된 힘을 발휘하도록 했었던 인물이라 생각하는 바이다.

나만의 착각일수 있겠지만 나는 지금도 '조직의 고목(古木)'이 아닌 '거목(巨木)'으로 우리

조직원들의 기억과 추억 속에 자리 잡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뛰고 있다.

 

*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는 정도전(조선 왕조의 설계자)와 황희(조선조 최장수 재상)

  인수대비(연산군 할머니)의 경우는 너무도 많이 알려진 인물이라 평을 제하였고, 강홍립

  (광해군의 밀명), 박자청(공사의 달인)은 후일 해당 인물에 대한 충분한 자료를 섭렵한

  다음 독서 평을 별도로 하고자 여기에서는 제외 시켰다.

 

[김유신] --- 비주류에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한 인물

- 김유신은 왕이 아닌 킹 메이커였다. 그는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의 12대 손으로 금관국

   김구해가 왕비와 세 아들 그리고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했다고 '삼국사기'

   전하고 있는데, 세 아들 중 막내 김무력이 김유신의 할아버지로 망국 군주의 일가는

   신라의 실질적 지배 계급인 '성골'이 아닌 '진골'계급에 속할 수 밖에 없었다.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은 갈문왕의 후손으로 성골로 김유신의 부친(김서현)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나눈 사이였다.

 

- 강력한 계급 사회였던 신라의 주류 사회로 진입할 수 없음을 간파한 김유신 자신은

   스스로 신라사회의 주류로 성장하는 방안을 생각하게 되는데, 방법이 혈통은 괜찮지만

   일정한 하자가 있는 왕족과 유대 관계를 갖는 것이었다. 이렇게 선택된 인물이 바로

   '김춘추'였다.

   김춘추는 왕족이었지만 조부 '진지왕'이 백성들에 의해 폐위된 임금으로 크게 주목을

   받을 수 없는 왕족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 김유신의 전략은 치밀했다. 이미 유부남이었던 김춘추를 집안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여동생(문희)과 통정을 하게 아들을 낳는데 바로 '문무왕'이다. 그러나 김춘추의 행위에

   실망한 김유신이 여러 가지 이유로 역사에서 일정 기간(629~642) 사라지게 된다.

 

- 김유신이 역사에 재 등장하는 계기는 백제 장군 윤충이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김춘추의 딸 (고타소)이 살고 있는 성을 함락하고 이들을 죽이면서 역사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김춘추는 기존 사고의 틀을 바꾸게 된다.

   적대국이었던 고구려 '보장왕'에게 백제를 침공 할 수 있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나

   김춘추는 오히려 인질로 잡힌다. 이런 김춘추를 구출하기 위해 김유신이 나서며 역사의

   전면에 다시 나서는데, 여기서 김춘추와 김유신이 의기 투합하며 외교는 김춘추가

   내치는 김유신이 맡으며 확실한 팀워크를 이룬다.

   고구려 청병에 실패한 김춘추는 다시 왜국으로도 건너가 군사를 요청하지만 왜국 역시

   친 백제계 정권이어서 실패하지만 또 다시 당나라에 백제를 칠 수 있는 청병을 요청하여

   승락을 받는다

 

- 당시 '당 태종'은 고구려 정벌 실패로 혼이 난 상태라 실제는 군사를 보내지 아니하고

   '고종' 때 군사를 보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이후 당나라가 고구려와 백제

   영토를 모두 차지하려 하자 문무왕이 당나라를 공격함으로써 '나당 전쟁'이 시작된다.

     

- 김춘추가 국외로 청병을 위해 뛰어 다닐 때 김유신은 선덕여왕(13)에 의해 대장군으로

   임명되어 백제와의 싸움에서 큰 공적을 세우지만 신라 성골 집단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으며, 성골 집단은 연이은 여왕 등극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키나 김유신과

   김춘추에 의해 진압되면서 명실 상부한 신라의 주류 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반란을 진압한지 얼마되지 않아 진덕 여왕이 죽으면서 후사를 '이천 알천'을 지명하나

   알찬이 이를 고사하여 왕권이 김춘추에게 넘어가게 된다

 

- 김춘추가 등극하나 권력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김춘추는 진골 카르텔 집단과 타협하면서

   권력을 강화를 꾀한다. '이찬 금강'을 상대등으로 삼고 권력을 강화해 가던 중, 이찬이

   죽자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자연스레 삼으면서 비로소국왕 김춘추 - 상대등 김유신 체제

   가 완성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김춘추는 자신의 딸 죽음을 계기로 삼국통일의 생각을 굳혔다는

   점이고, 김유신은 가야 제국의 재건이 아닌 강력한 신라의 완성을 꿈꾸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이 둘의 꿈은 방향은 달리 했지만 결론은 동일한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크게

   강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게 일반적인 관점이라고 한다.

 

[태조 왕건] --- 충성스런 부하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

 

- 놀랍게도 태조 왕건의 조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사료가 없었다고 한다.

   시조의 사료가 부족하다는 것은 그만큼 자랑할 내용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 신라 헌강왕 때의 서라벌은 풍요와 향락이 극치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신라 백성들의

   생활은 나아졌을지 모르지만 고구려, 백제의 옛 유민들은 더욱 곤궁했다고 한다. 확장된

   영토와 늘어난 인구에 걸맞은 통치이념과 사회 지배 체제를 수립해야 했지만 귀족들은

   사회적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이런 사회적 불만과 불안 요소가 견휜과 궁예라는 인물을 낳게 한 것이며 이들이 자립

   하고 힘을 기르면서 신라는 급속도로 해체되어 갔다.

 

- 궁예 밑에 있던 왕건은 주위의 심복 4인방(홍유, 신승겸, 배현경, 복지겸)에 의해 차기

   권력자(임금)로 추대 받아 어쩔 수 없이 왕위에 오르지만 즉위 초기 내란이 끊이지 않아

   혼란한 정국이 지속되었으나 왕건을 추대한 네 명의 공신들로 인해 권력 기반을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개국 공신들은 자신의 업적을 밑천으로 왕에게 더 큰 권력을 요구하는 게 통상

   적인 관례였으나 개국 공신 4인방은 그러지 않고 시종일관 낮은 자리나 험한 자리에서

   태조를 보위했다고 한다.

      

[소서노] --- 창조적 정권과 국가의 건국자

- 고구려 개국시조의 어머니가 '유화부인'이라면 백제 개국시조는 온조왕의 어머니인

   '소서노'이다. 소서노는 북부여에서 졸본 지역으로 망명해 내려 온 주몽에게 기득권을

   포기하고 주몽을 중심으로 국가를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

   , 고구려는 소서노라는 토착세력의 물적 토대가 주몽이라는 이주 세력의 명분과

   능력에 힘을 실어주어 건국된 신흥 국가이다.

 

- 북부여에서 주몽의 아들이 찾아오자 혼란에 빠진다. 소서노의 장자인 '비류'가 차기

   권력자가 될 것을 예상했으나 어느날 홀연히 찾아 온 '유리'라는 주몽의 아들이 대권을

   이어받게 되자, 권력 투쟁에 매달리지 않고 소서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피붙이

   장남 비류(미추홀)와 차남 온조(위례성)를 데리고 남쪽으로 이주 해 새로운 국가를 창업

   하게 된다

 

- 고구려 창업 공은 주몽에게, 백제 창업의 공은 아들 온조에게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은 이 두 나라는 '소서노'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건국되기 힘든 왕국들이었다.

 

[김 육] ---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했던 참 정치인

- 김육은 '대동법'의 경세가로 불릴 정도로 대동법 시행에 정치 인생을 걸었던 인물로,

   본 제도 시행에 미온적이던 '효종'에 대한 섭섭함의 표시로 영의정을 그만 두겠다는

   상소를 3회에 걸쳐 올리나 효종이 이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김육은 이에 굴하지 않고 4번째 올리는 상소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대동법의 시행 확대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을 정도로 대동법 시행에 전력 투구하였던 인물이라고 한다.

 

- 대동법은 '공납'을 쌀로 통일해서 납부 받자는 획기적인 방안으로 대동법 실시 관청의

   이름이 '은혜를 베푸는 관청'이란 뜻의 '선혜청(宣惠廳)'일 정도로 좋은 제도였으나

   전결 단위로 과세를 하면 농토가 많은 양반 사대부들의 부담이 늘어난다는 기득권층의

   반대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 대동법을 둘러싸고 서인이 '한당(漢黨)''산당(山黨)'으로 나뉘었는데, 한당은 대동법

   실시를 적극 주장하는 잠곡 김육이, 산당은 대동법의 시행을 반대하는 송시열의 스승

   김집이 주도하고 있었다.

 

- 김육은 또 한편으로는 '화폐 사용'의 장점에 대해 강조했던 인물로 대동법을 둘러싸고

   수 십 년 째 논란만 계속되는 와중에 병이 깊어진 그는 효종 9(1658)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유차(遺箚, 신하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유언으로 견해를 표명하는 상소)에서

   대동법의 확대 실시를 주장했을 정도로 대동법의 시행을 강력 건의했다고 한다.

   그 결과 대동법은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될 수 있었으며 현종 11(1670) 발생한

   유례없는 '경신 대기근'을 벗어나는 기반이 되었다는 게 역사의 평가다.

 

[천추태후] --- 전통을 지키려다 쿠테타를 맞은 인물

- 천추태후의 집안 배경을 보면 부친은 태조 왕건의 아들인 '왕욱'으로 성은 '황보'씨인데

   광종의맏아들이었던 제5대 경종과 국혼하여 '헌애왕후'가 된다.

   그녀의 동생 역시 경종과 혼인하여 '헌정황후'가 된다. 당시 결혼 풍습에 비춰 보았을 때

   자매 모두 한 남자의 아내이자 왕비가 되었는데 이는 '족내혼'의 결과로 그다지 이상한

   결혼은 아니라고 한다.

 

- 광종(천추태후 사촌 오빠)은 왕건이 남긴 호족융합정책이란 유산을 정리하기 위해

   '복수법'까지 만들며 왕건 시대에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에 대해 피의 숙청을 단행하지만

   경종은 이를 개혁정치의 일환이 아닌 아버지가 단순한 반대파 제거를 위한 아버지의  

   폭정으로 이해한 반면, 경종의 부인 헌애왕후는 남편과는 달리 피의 숙청이 아닌 태조

   왕건의 유지가 계속이어져야 한다는 정치적 신념을 갖고 있었다.

 

- 헌애왕후와 경종이 결혼할 당시 이미 2명이 부인이 있었는데, 이런 틈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우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다른 왕비들보다 먼저 왕자를 생산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

   한 끝에 마침내 왕자를 제일 먼저 낳지만 경종이 뜻하지 않게 일찍 죽으며 후계자로 헌애

   왕후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가 아닌 헌애왕후의 오빠(성종)를 후계자로 지목한다.

 

-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종과 헌애왕후의 정치적 지향점이 달랐던 게 문제였다.

   그녀는 왕건의 유훈 실천을 고려 왕실의 나아갈 길이라 본 반면, 성종은 고구려 제국의

   부활이 아닌 중국의 '유교식 정치이념'을 받아들인 제후국의 실현을 목표로 삼았다.

 

- 성종이 들어서면서 중국식 유교 사상을 강요하며 여동생들에게 수절을 강요하는 가운데,

   헌애왕후의 일가인 김치양이 승려복장으로 나타나 망설임 없이 헌애왕후와 정을 통하는

   이는 당시의 성 풍습으로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큰 흠이 되지 않는 행동이었음에도

   성종은 이를 알고 크게 노하고 김치양을 귀양 보낸다.

 

- 성종 역시 후사없이 38세에 급사를 하게 되면서 후임으로 헌애왕후의 아들인 '목종'

   지명하고 자신의 어머니인 황보씨를 '왕태후'로 높이자 높은 신분을 갖게 된 헌애왕후는

   성종의 잘못된 정책을 되돌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천추태후의 고려 전통부활정책은 성종

   과 중국식 유교정치체제를 지향했던 유학자들의 실권을 의미하게 되면서 목종과 천추

   태후가 추진하는 모든 사안에 대해 기득권 층은 사사건건 반기를 들게 되고 급기야

   쿠테타를 모의하고 무인인 '강조'를 꼬드겨 반란을 일으킨 후 헌정왕후가 사통해 낳은

   대량원군을 옹립시키고 목종과 천추태후를 퇴출시킨다.

 

- 강조에게 쿠데타를 종용한 세력들은 '강조'가 죽자 쿠데타에 대한 모든 책임을 강조에게

   돌리고 자신들이 축출한 천추태후의 모든 정책은 은폐한 채 김치양과의 사통관계만

   강조해 음녀로 각인시켰던 것이다.

 

[홍국영] --- 참모의 과욕이 부른 참모의 말로

- 인조반정 이후 150년간 정권을 장악해 온 노론은 세손의 등극을 반대하지 않은 시파

   (홍봉한이 영수)와 적극적인 반대파인 벽파(홍인한 영수)로 나뉜다. 이런 와중에 목숨을

   걸고 세손을 옹위하고 나선 인물이 '홍국영'이다.

 

- 홍국영은 정조로부터 외척(풍산 홍씨, 경주 김씨)를 떼어 놓는 목표와 노론의 원수들인

   소론과 남인을 떼어 놓는 것이 목표였다.

   첫째 목표인 외척의 분리는 성공했으나 노론이 장악한 조정에서 우익 노릇을 하는

   '소론'남인'을 분리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정조 취임 이후 사도세자의 죽임을

   방관한 노론에 대해 우익 세력인 '소론''남인'이 자꾸 상소를 올리자 이에 격분한

   정조는 상소를 올린 자들에게 과도한 형벌(사형)을 내린다.

 

- 격변의 와중에 홍국영은 노론의 영수가 되는 야욕을 불태운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론의

   정신적인 지주인 '송시열'을 등에 업지 않고서는 불가능함을 알고 국가 차원에서 송시열

   의 추승을 주도해 자신이 노론의 새로운 영수임을 부각하려 한다.

 

-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이는 계획을 세워

   조카를 왕으로 만들려는 야욕에 불타지만 여동생이 일찍 죽으며 계획이 수포로 돌아

   간다여동생의 죽음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이유로 궁중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고 나아가 정조의 제1비인 효의왕후도 의심하는 행태를 보인다.

   홍국영이 이런 오만 방자함의 배경에는 송시열의 조카인 '송덕상'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

   인데 그는 바로 송시열의 조커였던 것이다. 송덕상은 정조의 나이 27, 효의왕후 25

   에 후사가 없자 임금에게 양자를 들여 후사를 이으라는 권유를 했던 인물이다.

 

- 정조는 원빈(홍국영의 누이) 장례 때 사도세자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아들 이담에게 부여

   했던 장례식 때의 직책과 홍국영이 부르는 호칭을 듣고는 홍국영의 야심의 본질을 꿰뚫

   어 보고는 홍국영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31세인 홍국영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다.

   하지만 조정은 이미 홍국영의 잔당들이 남아서 홍국영의 복귀를 줄기차게 정조에게 끊임

   없는 요구를 하지만 정조는 홍국영의 잔당들을 처리하며 그의 복귀를 원천 봉쇄해

   버리게 되는데, 자신의 재기가 어려운 것을 간파한 그는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 해당 작품은 지난 2013년에 작성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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