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의 가능성


오늘 그의 책을 검색해 보기 전까지 처음인줄 알았다. 순진한 것인지 잘못된 독서를 하는 것인지 분간하기 쉽지 않다. 그러니까 어젯밤 10:10분에 며칠 동안 띄엄띄엄 읽던 알랭 드 보통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를 모두 읽었다. 그리고 흥분하여 이렇게 적었다. "오늘 처음 그의 책을 읽었다. 앞으로 이 분의 책을 더 많이 읽을 참이다!"

 

여기서 더 이상 추호의 의심도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는 이 책의 뒷 표지 내지에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소개했는데 [여행의 기술]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행복의 건축]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공항에서 일주일을]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이 전부다. 그리고 오늘 이 페이퍼를 쓰기 위해 그의 책을 검색했을 턱하니 전에 읽었던 책 이 눈이 들어온다. [여행의 기술]……. 아 이 책도 보통의 책이었어? 보통이 아니네. 이렇게 난 순진하다. 순진함은 줄곧 무지와 연결되고 어리석음과 바보로 오해되기도 하지만 영락없는 바보다.

















보통은 무신론자다! 나는 지독한 개신교도다! 그럼에도 난 그에게서 친근함을 느꼈고, 그의 무모해 보이는 간섭과 타협이 결코 싫지 않았다. 그는 은근히 종교의 무용성을 주장하면서도 필요성을 역설한다. 물론 그의 필요에 따라 골라 먹는 것이 기분 나쁘지만. 이 책을 겉으론 종교에게서 얻을 것은 얻고 배타적 감정으로 배격하지 말자는 이야기다.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처럼.

 

그는 인간을 잘 알고 있다.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사유가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모호하다. 아직 그의 이력과 매력을 모른다. 다만 유명한 프랑스 작가일 뿐이라는 것 외에는. 프랑스는 곧 합리주의 계몽주의의 발원지가 아니던가. 프랑스 혁명을 통해 종교를 타파하고 인간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려 했던 나라다. 사회주의 국가는 아니면서도 그런 분위기가 짙은 곳이다. 내가 좋아하는 많은 학자들이 대부분 프랑스 출신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보통의 주장은 낯설지 않고 어디선가 본 데자뷰현상이 일어난다.


배설하지 인간은 온전하게 살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난 멋과 품위, 안정과 위엄은 모두 골방에서의 배설이 있는 다음에 주어진 보너스다. 틀에 갇힌 인간은 정신 이상자가 될 것이 분명하다. 카페가 유난히 번창하고 선술집이 지독하게 사랑 받는 이유는 배설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쾌락과 기쁨, 더러운 욕망에 사로잡힌 자신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보통은 이러한 배설적 의미로서 종교가 멋지게 해냈다고 칭찬한다. 그러고 보면 개신교의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이나 카톨릭의 고해성사 등은 은밀한 욕망을 드러낸 시간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우리가 이끌어내야 할 교훈은 이렇다. 만약 우리가 원활하게 기능하는 공동체를 원한다면, 우리의 본성에 관해서 순진한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신 우리의 파괴적이고 반사회적 감정의 깊이를 완전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혼돈을 존중해야 한다."(71-72쪽)


그의 주장에 충분히 동의 한다. 너무 과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우리는 배설하고 쏟아 내야 한다. 배설은 인간의 연약과 악함을 동시에 드러내 준다. 그러나 본성이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에게 성스러워지려는 기대가 있으니 이것또한 존중 받아야 한다. 

















그의 매력은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즉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말자는 말이다. 인간은 닮았다. 흑인이든 동양인이든 매부리코든 납작코든 인간이라면 공유적 속성이 많다는 점을 든다. 우울, 슬픔, 이별, 사랑, 감동, 감사, 기쁨 이러한 단어들은 모든 인류가 공유할 수 있다. 아니 공유 된다. 보통은 이러한 단어를 적절하게 분석하고 배열하여 멋진 이야기로 만들어 냈다. 이것이 극치가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는 아닐까. 


특히 치유를 위한 순례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남겼다. 어느 지역에 어떤 숭배는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고 어떤 곳의 숭배신은 지혜를 주고, 어떤 곳의 신은 결혼도 시켜 준다. 낯설지 않다. 우리도 그랬으니. 땅신, 산신, 나무 신.. 어머님이 장독대에서 빌었던 탓에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믿기지는 않지만 간절한 소망을 가진 인간의 모습은 표현하는 방법 만 다를 뿐 속내는 다 같다. 그래서 보통의 주장이 싫지가 않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착을 버리지 않는 그가 고맙기까지 하다. 타자화되고 배타적 공동체로 둡갑해 버린 현대의 기독교를 보면 한숨이 나오지만 이런 책은 위로와 위안을 준다. 딱 한 가지 책을 비하하는 태도는 맘에 들지 않는다. 물론 제도가 책보다 우월하다는 점은 높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것쯤은 용서하리라. 얻은 것이 많으니 말이다.

 

그러나 저러나 다음 책은 뭘로할까? [불안]이 좋을까 [영혼의 미술관]이 좋을까. 아무래도 신간부터 읽는 것이 우선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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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토리 2014-01-14 1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알랭드보통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 감명받아서
보통님의 책을 다 읽었어요^^

낭만인생 2014-01-15 11:39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저도 이 책은 보통의 처음 책이었습니다. 좋아서 계속 읽고 있습니다.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강도현의 [착해도 망하지 않아]를 읽으면서 찾아낸 공간 이해 관련 서적


언젠가 트위터 친구가 공간에 대한 조언을 해주면서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을 추천해 주었습니다. 단숨에 읽었죠. 많은 영감과 통찰을 얻었는데 특히 계단에 대한 강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꿈꾸는동네'에서 바로 '공간의 시학'을 읽었습니다. (76쪽)


요즘 주목하는 신간 중의 하나님 [공간이 마음을 살린다] 역시 공간에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준다. 공간에 대한 이해 한 권더. [공간과 장소] 공간과 장소를 구분하여 어떻게 엮어지는 보여준다. 한 권은 읽었으니 나머지 세 권도 필독서 목록에 올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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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이래서 산다

 

부산을 소개한 딱 한 권의 책을 고르라면 유승훈의 [부산은 넓다]를 고를 것이다. 지금까지 부산에 대한 책 중에 가장 탁월하고 풍성하기 때문이다. 국지전이 아닌 전면적이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부산의 거의 모든 역사의 궤적을 따라가며 한 권의 책으로 풀었다. 두 번째 책은 동아대교수로 있는 강영조교수의 [부산은 항구다]을 추천한다. 항구 도시로서의 부산을 서사적으로 기술하면서 낭만을 더해준다. 세번째 책은 정길연의 [나의 살던 부산은]이다. 과거의 유물처럼 전시된 부산의 오래된 흔적을 찾아 나선 작가의 아련한 추억이 글로 풀어진다. 마지막 책은 임성원의 [미학, 부산을 거닐다]이다. 오늘은 부산을 넓다를 소개한다.















부산은 항구다. 이 문장처럼 부산을 적절하게 드러낸 말이 있을까. 물론 목포도 항구고, 마산도 항구다. 그러나 부산이 항구란 의미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항구도시 부산은 일제강점기를 기점으로 한국 근대 역사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필자 또한 부산과의 첫 데이트는 항구를 통해서다. 80년대 말 대를 타고 입항에 자갈치에 첫 발을 디뎠다. 그 때의 설렘과 흥분은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깡촌에서 올라와 한국 2의 도시 부산을 밟았으니 무슨 말로 형용이 될까. 그것도 부산의 최고의 중심지인 자갈치와 남포동, 국제시장을 대면했으니 말이다.

 


부산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여러 단어들이 존재한다. 항구, 산동네, 가라오케, 자갈치, 해수욕장, 국제시장,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 복잡한 도로 등 다른 도시에서는 생각도 못할 단어들이 즐비하다. 거기에다 역사적 맥락 속에서 찾아낸 영도다리 자살 사건이나, 고관의 일본 사람들 이야기, 여객선이 아닌 연락선으로 명명된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연결하는 관부선까지 언급하면 부산은 그야말로 한국의 근대를 받아낸 주체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해양성, 개방성, 민중성(50쪽)을 부산항의 인문정신으로 꼽은 저자의 옳은 판단은 부산은 잘 드러내 준다. 항구도시이니 해양성을 빼고 부산을 말할 수 없을 터이고, 일제강점기와 육이오를 통해 외부인들의 출입이 수시로 일어나 개방성은 절로 이루어졌고, 피난민들에 의해 형성된 서민중심의 도시가 바로 부산이다. 부산의 특성은 곧 한국발전의 시초가 된 해외수출의 발판과 저력을 만들어 낸다.

 


"항구의 심장박동 소리와 산동네의 궁핍함을 끌어안은 도시" 부제로 달린 문구가 마음을 찡하게 한다. 영도에 살 때는 밤이면 가끔씩 북항에서 출항하는 상선의 뱃고동 소리가 들린다. 뿌~웅! 처음엔 무슨 소린가 싶어 궁금했지만 이네 감 잡고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부산역에서 잠깐 만 시간 내어 산 쪽으로 돌아가면 초량동과 수정동을 만났다. 십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서 산동네가 시작 된다. 가파르고 좁은 도로를 비좁고 올라가면 어느새 수정동 산복도로를 만난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부산항을 내려다보면 옛부산의 풍경은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

 

부산은 참 특이하다. 서울은 경관이 좋은 곳에 부자들이 살지만 부산은 반대다. 경관이 좋은 모두 산동네고 판자촌이다. 산이 많고 평지가 적은 부산은 평지에 대한 집착과 부러움이 있다. 평지에 살면 부자인 셈이다. 부산에 오래 살다보니 자전거타고 다니는 게 꿈이다. 그만큼 자전거 탈 수 있는 평지가 희소하다. 그러니 평지에 세워진 아파트나 주택은 프리미엄이 붙는다. 아이러니하게 말이다.

 

 

 

 

읽는 재미가 소소하다. 추억이 이슬비처럼 소리 없이 밀려온다. 부산에 산지 어언 22년. 부산에서 대학도 다니고, 결혼도하고, 삶의 터전을 일구었다. 블로그 이름도 부산은 항구다로 정하고 부산에 좀 더 천착했다. 이 책은 그러한 나의 마음을 읽기나 한 듯 그동안의 부산 이야기를 재미나 이야기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찾아낸 사진과 사건을 잘 정리해 엮었다.

 

아직 부산에 대해 부족하다. 부산역도 없고, 40계단 이야기도 없고, 부산과 영화 이야기도 없다. 하단과 동아대 앞 추억도 다루지 못했다. 신평 이주민 이야기도 없다. 한 책에 담을 수는 없었으리라. 다음 책을 기대해 본다.


그나저나 내친김에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나 들어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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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 연민하며 저항하는 사랑의 주를 찾아서
엘리자베스 A. 존슨 지음, 박총 외 옮김 / 북인더갭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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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예수는 어디 있는가?

 

단언컨대 한국교회는 예수를 잃어 버린 것이 분명하다. 교리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지만 교리의 본질이신 예수는 잃어 버렸다. 그가 무엇을 말을 했고,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지 않는다. 비극이다. 예수를 잃어버린 결과는 비참하다. 부와 권력을 손에 잡고 건축에 수천억을 쏟아 붓지만, 예수가 찾아갔던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없다. 이것이 비극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래서 한 권의 책을 추천한다. 


영어 원제는 Quest for the Living God로 살아있는 신에 대한 탐구 정도로 번역이 가능하다. 욕쟁이 예수로 유명한 박총과 북인더갭 안병율 대표가 함께 번역했다. 제목이 그리 탐탁하진 않지만 책의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한 글자가 빠져 있다. 그런을 집어 넣어야 한다. 문장을 완성해 보자. ‘신은 그런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제목은 질문을 요구한다. ‘그럼 신은 어디에 있는가?’ 부제에 그 답을 달았다. ‘연민하며 저항하는 사랑의 주를 찾아서’ 이 땅에 거한다.

 

저자가 말하는 낙원은 누가복음에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약속한 그 ‘낙원’이 아니다. 오히려 개념화되고 철학적 사유 안에서만 정의되는 낙원이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를 잃어버린 이 땅의 권력과 야합한 기독교다. 고통당하는 저자거리의 사람들에 무관심하고 아편처럼 낙원만을 약속하는 비열한 종교 지도자들의 거처로서의 낙원이다. 신은 그런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받고, 억압받고, 착취당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사는 땅에 거한다. 그들은 불쌍히 여기고 그들과 고통당하며 착취하는 권력자들에게 대항-프로테스트-한다.

 

땅에 집요할 정도로 천착(穿鑿)한다. 중세는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가지고 세계를 해석했다.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는 것, 즉 성과 속으로 구분했다. 거룩한 장소가 있고, 거룩하지 않는 장소가 있다. 거룩한 직업이 있고, 거룩하지 않는 직업이 있다. 거룩한 사람이 있고, 거룩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원론적 사고는 거룩한 것은 거룩하고, 거룩하지 않는 것은 거루하지 않게 해도 된다는 오해를 낳았다. 교회는 거룩하니 교회에서는 거룩한 삶을 요구 받지만 교회를 떠나면 온갖 악과 부정을 저질러도 괜찮다. 결국 중세의 타락과 몰락은 일상을 잃어 버린데서 시작 된다.

 

종교개혁의 시작은 성과 속을 구분을 깨고 일원화 시키는 것에서 시작된다. 루터의 수도원에서 일상으로의 귀환, 금지된 수도사와의 결혼이 그것이다. 뒤를 이어 칼빈은 거룩한 직업과 거룩하지 않는 직업의 경계를 허물었다. 모든 직업은 거룩하다고 선언한다. 부엌 일도 거룩하고, 청소하는 일도 거룩하고, 목회도 당연히 거룩하다. 근대는 성속의 이원론적 구분을 허물고 성과 속의 일치를 이루어 낸다. 성속의 일치를 통해 치명적인 약점이 등장한다.

 

중세가 성이 속을 지배 했다면, 근대는 성이 속과 결탁한다. 철저하게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주장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정교결탁(正校結託)이다. 불가피한 선택이라 하기에 변명의 이유가 억지스럽다. 루터의 이신칭의나 개혁주의 하나님 주권사상은 지배계층의 교리다. 사랑과 통치의 이중성을 지표로 삼았음에도 잘못된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그들은 통치를 섬김과 사랑이 아닌 물리적인 정치(政治)의 개념으로 이해한 것이다. 종교개혁은 철저하게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아닌 위로부터의 결탁에서 의해서 이루어졌다.

 

저자는 이러한 근대적 종교실상의 허점을 추적하고 근본적으로 복음서의 예수로의 귀환이 불가피하다고 선언한다. 신은 그런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고통받고 억압당하는 이들과 함께 하신다. 그들을 연민하며 긍휼히 여기신다. 그들과 함께 신분과 차별의 벽을 넘어 식탁 교제를 나누었다. 오해와 편견의 경계를 넘어 사마리아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다.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의미를 찾아낸다. 가난과 흑인, 여성들의 하나님을 만난다. 신비한체 내버려둔 삼위일체 교리 안에서 사랑을 도출해 낸다. 재단(裁斷)하고 정죄하는 교리가 아닌 사랑하고 살려내는 교리로 치환(置換)시킨다.

 

정의를 잃어버린 한국교회 안에서 예수의 거처를 다시 물어야 한다. 예수는 종교 지도들과 결탁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가셨다. 드높아진 교회, 수천억의 건축비용을 지불하느라 정의와 사랑을 상실한 한국 교회에 경종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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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론
FR.슐라이어마허 지음, 최신한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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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숙한 하나님에 대한 변증이다. 헤겔과 더불어 독일의 지성인으로 최고봉으로 인정받는 슐라이어마허가 하나님을 변증했다. 책의 부제는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들을 위한 강연’이다. 18세기 독일은 합리주의와 이성의 힘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시기다. 종교를 미신과 그릇된 사고에서 비롯된 불합리로 무시했다.


이러한 도전에 대해 슐라이어마허는 변증을 위한 강연을 시작한다. 그는 종교(기독교)란 계몽주의자들이 말하는 형이상학과 도덕과 구별되며, 직관과 감정이 종교의 본질이며, 무한자인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특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는 요일4:18 말씀을 강조하며 기독교야 말로 진정한 종교임을 천명한다.


그의 강조점은 교양인으로 자부하는 계몽주의자들의 인식의 틀에 갇힐 수 없으며 초월하는 타자이다. 이성으로서는 신과 접촉할 수 없고 감정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를 옹호하려했던 그의 열정은 칭찬 받아야 마땅하지만 그의 변증이 오히려 기독교를 오해하고 감정 안에 제한시키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합리적 사유로서 하나님을 인지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주장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모호하게 만들고 말았다. 후대의 신학자들은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첫째 강연은 계몽주의적 종교 비판에서 종교를 옹호하고, 둘째 강연은 종교의 본질을 규명한다. 셋째 강연은 종교형성의 가능성과 교육에 대해 묻고 무한자를 체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넷째 강연은 종교의 외적. 사회적 현상인 교회와 성지에 대한 기술한다. 마지막 다섯 번째 강연은 역사 속에서 개별 종교를 분석하고 진정한 종교로서의 이상을 제시한다. 자유주의와 비평신학의 문을 연 본서를 조심스럽게 읽을 필요가 있다.


밑줄 긋기

“종교는 자기 안에 어떠한 법전도 지니지 말아야 한다.”

“종교는 연역이 결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은총은 무엇인가? 모든 종교적 감정은 우주를 통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한에서만 종교적이기 때문에 초자연적이다.”

“우주는 모든 방식으로 직관되고 숭배되어야 한다. 무수한 형태의 종교가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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