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순위와  방문자수


오랫만에 서재 순위를 살폈다. 그닥 활동을 안 한 덕에 65위까지 밀려나 있고, 페이퍼 순위는 44위다. 그런데 묘하게도 방문자는 꾸준히 늘고 있고, 400명 이하로 떨어진 기미가 안 보인다. 이상한 일이다. 



햄스터가 새끼를 낳았다. 에구 이것들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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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타인을 노예로 부릴 권리는 없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도 없다. 사람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누군가의 종속되거나 수단이 아니다.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 1권을 거의 읽어 가고 있다. 그녀의 책은 남북전쟁을 일으킨 발화점이 되었다. 그녀가 했던 것은 처참한 흑인들의 상황을 열거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사람이란 사실을 일깨운 것뿐이다. 그렇다. 그들도 사람이다. 그들도 아프고, 힘들고, 눈물 흘리고, 배가 고프다. 그것을 알려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 소설의 주된 목적은 우리 미국에서 살고 있는 아프리카 종족에 대한 동정심과 이해심을 일깨우려는 것이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학대와 그들의 슬픔을 묘사함으로써, 현재 제도가 얼마나 잔인하고 불공정한 것인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저가 서문에서 한 말이다. 소설의 형식을 빌어 미국이 자국의 이익이란 명분으로 옹호하고 법적으로 제정한 노예제도가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를 말한다. 그렇다. 그건 정말 잔인한 짓이다. 다시 이렇게 소망한다.

 

"작가는 감히 이런 희망을 가져본다. 이 세상의 슬픔과 과오들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씻겨 없어지는 것처럼, 이 소설 속에 묘사된 사건들이 이제는 폐지된 제도를 상시키는 가치 있는 유물로 기억되는 그런 날이 오기를."

 

이미 왔다. 그러나 아직 오지 않았다. 공식적인 차별은 없지만 공공연하게 소수자에 대한 차별, 여성에 대한 차별, 출신에 대한 차별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차별이 아직도 엄연히 존재한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다. 철저한 이기주의자. 이 소설이 나오자 비록 불순 동기이기는 하지만 링컨에 의해 남북전쟁이 발발했고, 백년 후에 루터 킹 목사의 워싱턴 행진이 일어난다. 자유를 위해, 수단이 아닌 자유자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해. 루터 킹 목사는 백인들의 해방을 '부도난 수표'라고 표현했다. 법적으로 차별이 없는데 엄연히 학교에도 식당에도 심지어 거리도 '백인 전용'이 있다.

 




과감하게 백인의 부당함에 맞선 용감한 여인의 이야기도 함께 읽고 있다. 바로 <로자 파크스>. 그녀의 우월한 행동이 미국에서 부당한 차별을 무너뜨렸다. 누군가는 앞서 가야 한다. ‘이것은 잘못되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마음속으로만 외쳐서는 안 될 일이다. 희생도 필요하고, 손해도 봐야 한다. 진리는 항상 고통이 수반된다.

 

"검둥이 역시 비단과 보석을 두른 귀부인들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고난과 비탄 앞에서는 동일한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81)

 

가슴을 찌르는 곳을 발견했다. 버드 상원의원은 도망치는 노예 엘리자를 존이라는 사람에게 데려간다. 존일 말한다.

 

아주 여러 해 전에 나는 교회에 다녔습니다. 우리 고장의 목사들은 성경 구절을 들이대며 이 끔찍한 제도를 옹호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읊어대는 그리스의 구절과 히브리어 구절에 대적할 수가 없었지요. 하지만 나는 성경과 목사 모두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 어느 날 그리스와 히브리에 조금도 딸리지 않으면서 노예저도에 철저하게 반대하는 목사를 만났습니다. 그리 이제야 제대로 된 목사를 만나서 다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170)

 

성경이 노예저도를 찬성한다. 아니 지지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누가 이런 어리석은 소리를 하는가. 그런데도 남부의 목사들은 노예제도를 성경적인 것이라고 우겼다. 북부는 어떤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도망치는 노예를 도와주지 못하는 법률을 통과 시켰다. 그가 바로 버드 상원이었다. 그는 착한 사람이고 양심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왜 잔인한 법률을 지지했는가. 무지 때문이다.

 

그는 단 한 번도 노예가 백인과 같은 감정의 존재인지 몰랐다. 심지어 노예를 도와주는 이들은 마음이 약한 사람이가고 비웃었다. 피상적인 지식은 무가치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도망자에 대한 그의 지식은 도망자라는 단어의 도 자, 망 자, 자 자 세 글자뿐이었다. 아니면 기껏해야 소규모 신문에 실린 막대기와 보따리를 든 도망자의 사진, 그리고 사진 밑에 있는 아래 서명자로부터 달아난 자라는 설명뿐이었다. 그는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의 실제적인 고뇌가 어떤 마법을 일으키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도망자의 호소하는 눈, 가냘프고 떨리는 손, 도움을 얻지 못할 때의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애원 등을 직업 보지 못했다.”(164쪽)

 

맞다!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죄다. 그 죄가 크다. 눈물이 난다. 사람이면서도 짐승보다 못한 존래로 팔려가고 고통을 당해야 하는 그런 존재가 흑인 이었다. 지금 이 세상에도 흑인들이 많다. 학대받고 인정받지 못한다.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상실한 체 누군가에게 지배당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어느 누구도 타인은 지배할 권리도 없고, 지배다할 의무도 없다. 우리는 자유자다.

















해리엇 비처의 소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미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뒤를 이어 스스로 권리르 찾아 나선 루터 킹 목사를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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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가득 쌓인다. 예전에 읽었던 <작가수업>을 싼 값에 샀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미국 소설의 최고봉이다. 놓칠수는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은 노후 대착을 위해, <베서트셀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 위하여.
















<로자 파크스 나의 이야기> 미국을 흔든 책이다. 꼭 읽어야 할 책이다. 최신간 <행복하고 싶을때 마음을 비틀어라>는 김병완 작가의 최신간이다. 그의 책이 맘에 든다. 전에 읽었던 <나는 도서관에서 기적을 만났다>가 자기 이야기라면, 이 책은 일상에 찬찬히 잠겨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끊고, 버리고, 떠나면 행복해 진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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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매일성경 2014.3.4
매일성경 편집부 엮음 / 성서유니온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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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책이란?

 

세상의 모든 책은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다시 읽고 싶은 책이고, 다른 하나는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은 책이다. 나 같은 사람은 책을 두 번 읽기 힘들다. 아무리 중요한 책이라도 한 번이면 족하다. 그런데 두 번 아니 여러 번 읽고 싶은 책이 있다. 읽을 때 다르게 읽혀지는 책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헬렌 세페로의 <내 영혼을 위한 일기쓰기>란 책이 바로 그런 류의 책이다. 언제 샀는지, 왜 샀는지 알 길이 없는 살렘 왕 멜기세덱과 같은 책이다.

 

일기쓰기에 관한 책이다. 일기, 듣기만 해도 거부감이 일어난다. 초등학생 시절 방학숙제였던 일기, 글쓰기의 재미를 몽땅 빼앗아간 도둑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일기야말로 초등학생이 가장 먼저 배워야할 것 중의 하나다. 독서와 일기야말로 어릴 적부터 몸에 깊이 배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숙제라니. 듣기만 해도 싫어지다니. 이거야 말로 가장 모순(矛盾)이 아닌가. 나 뿐 이겠는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일기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이들이 없다. 대한민국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들이라면.

 

싫음은 곧 망각이며, 망각은 곧 실력이 더 이상 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알게 되고, 결국 탁월한 전문가가 된다. 그런데 처음부터 쓰기 싫었느니 누가 일기쓰기에 대가가 될 것인가. 아무도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이 책은 우리가 가장 중요하지만 잃어버린 일기쓰기에 대한 기억을 살려 낸다. 따분한 이론 서적이 아니다. 소설처럼 읽혀지고, 일상 속에서 글감을 찾아낸 글쓰기로 이어가도록 만드는 가교(架橋).

 

일기쓰기는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旅程)이다. 일기는 자기만의 독백(獨白)이며 발설(發說)이다. 언어가 아닌 글로 표현할 뿐 자기 독백과 다르지 않다. 상담사의 역할을 조언을 해주기보다 먼저 경청(傾聽)하는 사람이다. 들어주는 것이 말하는 것이다. 듣지 않으면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자신이 말하려 할 때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다. 그러니 먼저 들어주어야 말할 수 있다. 일기쓰기는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다.

 

답은 밖에 있지 않다. 안에 있다. 문제가 안에서 발생했다면 답도 여전히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친구에게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이야기하다보면 스스로 답을 찾는 이치(理致).

 

때로는 친구나 상담가 또는 영적 지도자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결국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이야기의 핵심을 파악하는 경우가 있는데, 일기야말로 그런 영적 친구요 상담가가 될 수 있다.”(59)

 

글을 통해 자신을 발설하고 객관화(客觀化) 시킴으로 자신을 직시(直視)하게 한다. 이러한 과정은 결국 자신의 문제를 바로 보게 하고 바른 답을 찾게 해 준다. 글이란 참 묘한 것이다. 생각만으로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던 것들이 글로 표현되는 순간 답이 된다. 문장은 불가피학 논리적이다. 처음 시작하는 일기쓰기는 어수선하고 중구난방(衆口難防)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체계를 갖추게 되고 절제와 인내, 논리와 사유의 깊이를 더하게 된다.

 

일기를 쓰노라면, 종이에 뭔가를 적음으로써 어수선한 것들이 정리되고 우리의 삶과 주변 세상을 좀더 명확하게 분별하게 된다.”(27)

 

일기는 여기서 나간다. 섬세한 안목을 갖게 해 준다. 속도는 피상성의 폐해(弊害)로 귀결(歸結)된다. 백 킬로미터의 속도로 주변을 보는 것과 3킬로미터의 속도로 보는 것은 다르다. 깊이보고 자세히 보려면 천천히 가야하고 때론 서야하고,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후 곧바로 십자가로 가지 않았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부모와 30년을 함께 살았고, 3년의 공생애 동안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과 외로운 자들을 찾아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말씀하시고, 대화하시고 논쟁하셨다. 때론 거저 주시고, 때론 목숨을 요구하는 결단을 촉구했고, 때론 거절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올랐다. 즉 이 땅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구체적인 것, 현실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우리 기독교 신앙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하나님은 창조세계의 세세한 다양성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신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형체 없는 추상적 존재로 오시지 않았다. 그분은 탄생과 사역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인성이라는 현실속으로 들어오셨다. ... 영성훈련에서 구체적인 사물에 집중하는 것은 현실을 사랑의 눈길로 오랫동안바라보는 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48)

 

단순하게 시작된 일기쓰기에 깊은 철학과 자기 확장의 가능성이 있다. 저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자기를 찾는 여정은 곧 하나님께 머묾이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소명을 펼치는 것이다. 일기쓰기는 이러한 부르심의 소명을 도와주는 친구이자 선생님이다


일기는 역사다. 수년전에 읽었던 위지안의 <내가 살아갈 이유>도 결국 일기다. 암에 걸려 죽어가면서 자신의 생각을 허투르지 않게 일기에 담았다. 책을 읽으면서 삶의 소중함을 더욱 깊에 체득했다. 


우리에겐 소중한 것이 있다. 그러나 건강할 때는 소중한줄 알면서도 소중하게 다루지 못한다.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일기는 이러한 오류를 잡아 준다. 진정한 가치에 시간을 투자하게 한다. 


다시 읽고 싶은 책은 바로 이런 것이다. 전정한 가치를 찾아가는 여정. 가장 고귀한 것을 사랑하는 마음. 내가 수단이 되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도록 하는 것. 일기가 이것을 도와 준다. 난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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