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타인을 노예로 부릴 권리는 없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도 없다. 사람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누군가의 종속되거나 수단이 아니다.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 1권을 거의 읽어 가고 있다. 그녀의 책은 남북전쟁을 일으킨 발화점이 되었다. 그녀가 했던 것은 처참한 흑인들의 상황을 열거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사람이란 사실을 일깨운 것뿐이다. 그렇다. 그들도 사람이다. 그들도 아프고, 힘들고, 눈물 흘리고, 배가 고프다. 그것을 알려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 소설의 주된 목적은 우리 미국에서 살고 있는 아프리카 종족에 대한 동정심과 이해심을 일깨우려는 것이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학대와 그들의 슬픔을 묘사함으로써, 현재 제도가 얼마나 잔인하고 불공정한 것인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저가 서문에서 한 말이다. 소설의 형식을 빌어 미국이 자국의 이익이란 명분으로 옹호하고 법적으로 제정한 노예제도가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를 말한다. 그렇다. 그건 정말 잔인한 짓이다. 다시 이렇게 소망한다.
"작가는 감히 이런 희망을 가져본다. 이 세상의 슬픔과 과오들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씻겨 없어지는 것처럼, 이 소설 속에 묘사된 사건들이 이제는 폐지된 제도를 상시키는 가치 있는 유물로 기억되는 그런 날이 오기를."
이미 왔다. 그러나 아직 오지 않았다. 공식적인 차별은 없지만 공공연하게 소수자에 대한 차별, 여성에 대한 차별, 출신에 대한 차별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차별이 아직도 엄연히 존재한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다. 철저한 이기주의자. 이 소설이 나오자 비록 불순 동기이기는 하지만 링컨에 의해 남북전쟁이 발발했고, 백년 후에 루터 킹 목사의 워싱턴 행진이 일어난다. 자유를 위해, 수단이 아닌 자유자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해. 루터 킹 목사는 백인들의 해방을 '부도난 수표'라고 표현했다. 법적으로 차별이 없는데 엄연히 학교에도 식당에도 심지어 거리도 '백인 전용'이 있다.
과감하게 백인의 부당함에 맞선 용감한 여인의 이야기도 함께 읽고 있다. 바로 <로자 파크스>다. 그녀의 우월한 행동이 미국에서 부당한 차별을 무너뜨렸다. 누군가는 앞서 가야 한다. ‘이것은 잘못되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마음속으로만 외쳐서는 안 될 일이다. 희생도 필요하고, 손해도 봐야 한다. 진리는 항상 고통이 수반된다.
"검둥이 역시 비단과 보석을 두른 귀부인들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고난과 비탄 앞에서는 동일한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81쪽)
가슴을 찌르는 곳을 발견했다. 버드 상원의원은 도망치는 노예 엘리자를 존이라는 사람에게 데려간다. 존일 말한다.
“아주 여러 해 전에 나는 교회에 다녔습니다. 우리 고장의 목사들은 성경 구절을 들이대며 이 끔찍한 제도를 옹호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읊어대는 그리스의 구절과 히브리어 구절에 대적할 수가 없었지요. 하지만 나는 성경과 목사 모두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 어느 날 그리스와 히브리에 조금도 딸리지 않으면서 노예저도에 철저하게 반대하는 목사를 만났습니다. 그리 이제야 제대로 된 목사를 만나서 다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170쪽)
성경이 노예저도를 찬성한다. 아니 지지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누가 이런 어리석은 소리를 하는가. 그런데도 남부의 목사들은 노예제도를 성경적인 것이라고 우겼다. 북부는 어떤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도망치는 노예를 도와주지 못하는 법률을 통과 시켰다. 그가 바로 버드 상원이었다. 그는 착한 사람이고 양심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왜 잔인한 법률을 지지했는가. 무지 때문이다.
그는 단 한 번도 노예가 백인과 같은 감정의 존재인지 몰랐다. 심지어 노예를 도와주는 이들은 마음이 약한 사람이가고 비웃었다. 피상적인 지식은 무가치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도망자에 대한 그의 지식은 도망자라는 단어의 도 자, 망 자, 자 자 세 글자뿐이었다. 아니면 기껏해야 소규모 신문에 실린 막대기와 보따리를 든 도망자의 사진, 그리고 사진 밑에 있는 ‘아래 서명자로부터 달아난 자’라는 설명뿐이었다. 그는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의 실제적인 고뇌가 어떤 마법을 일으키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도망자의 호소하는 눈, 가냘프고 떨리는 손, 도움을 얻지 못할 때의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애원 등을 직업 보지 못했다.”(164쪽)
맞다!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죄다. 그 죄가 크다. 눈물이 난다. 사람이면서도 짐승보다 못한 존래로 팔려가고 고통을 당해야 하는 그런 존재가 흑인 이었다. 지금 이 세상에도 흑인들이 많다. 학대받고 인정받지 못한다.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상실한 체 누군가에게 지배당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어느 누구도 타인은 지배할 권리도 없고, 지배다할 의무도 없다. 우리는 자유자다.
해리엇 비처의 소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미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뒤를 이어 스스로 권리르 찾아 나선 루터 킹 목사를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