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지진이 일어난 걸까? 믿기지가 않는다. 여긴 지진은 커녕 추석 대목을 보려는 장사치들과 필요한 물건을 사러온 사람들로 분비기만 하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어제보다 강한 지진이 일어났다고 난리 법석이다. 뭐가 그리 요란스러운지? 난 믿을 수가 없다. 지진은 일어 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정신이 없거나, 술에 취했거나, 뭔가 잘못 안 것이 분명하다. 우리나라에게 연이어 지진이 일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지진을 그리 쉽게 입에 담는지 모르겠다."

 

만약 이런 투의 글을 쓰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황당함을 넘어 돌 맞아 죽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요즘 TV에서 종종 보인다. 저것이 사람인지 괴물인지 모를 지경이다.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곳은 잠잠하기만 하지만 여차하면 아픔의 현장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다행이 큰 사고가 없어서 다행이다.

 

십여 년 전에 아들과 이야기하다 숨이 넘어 가는 줄 알았다. 대화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 진짜 이순신 장군이 있었는가? 세종대왕은 실존 인물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아들이 황당하기만 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 답은 간결했다. 단 한 번도 본적도, 경험해 본적도 없기 때문이다. 책에서 배웠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그건 다른 사람들이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 네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국은 진짜 있는 것 같다고 물었더니 있단다. 네가 경험한 적도 본 적도 없는데 미국은 어떻게 믿느냐고 물었다. 그 답 역시 간결했다. TV에서볼 수 있고, 미국에 갔다는 사람들이 증언이 있다는 거다. 난 답했다. TV나 친구 역시 거짓말을 할 수 있지 않느냐? 그것은 불가능하단다. 역시 초딩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아무리 역사적 사실이라 할지라도 오래되고 잊히면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고요하기만 한 이곳에서 '정말 지진이 일어난 것일까?'를 의심하는 건 당연해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이들을 등교 시키고, 아버님과 함께 장을 보고 다시 나왔다. 고요한 카페에 앉아 그동안 읽지 못한 사노 요코의 <죽는 게 뭐라고><사는 게 뭐라고>를 읽고 싶어서다. 기실, 난 한 달 전쯤에 두 권을 함께 사 놓고 <사는 게 뭐라고>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서점에서는 괜찮아 보이던 책이 집에 와 보니 전혀 읽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꽃 한 송이의 생명조차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아는 것이라고는 나 자신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 시크한 문장에 벌컥 증이 걸렸는지 '뭐 이런 사람이 있어.' 처음부터 맘에 들지 않았다. 이 분이 암으로 죽었고, 시크한 할머니였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면 절대 거부하지 않았을 내용이었다. 무지가 거부로 이어진 것이다. 오늘 보니 마음을 사로잡는 문장에 첫 페이지 등장한다.

 

"6시 반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벌떡 일어나는 사람도 있다는데 믿을 수 없다. 일어나서 대체 무얼 하는 것일까? 베갯머리를 더듬거려 손에 잡힌 책 [베트남에서 온 또 한 명의 마지막 황제]를 꾸벅꾸벅 졸면서 읽었다."(11)

 

일어나자마자 책이다. 졸리는 눈을 겨우 뜨고 더듬거려 책을 찾아 읽는다. 이 분이 누구인지 알고 나니 글이 다르게 읽힌다. 애정이 가고, 문장은 대하는 자세가 진지해 진다. 이것이 앎과 알지 못함의 차이다. '정말 지진이 일어난 걸까?'하는 의심 속에는 동병상련의 아픔이 없으며, 공유된 경험이 없다는 뜻이다. 알면 사랑한다는 짧은 문장이 진리라는 사실임을 다시 증명해 준다. 알면 마음이 가고, 마음이 가니 동일한 아픔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노 요코를 더 알기 위해 책을 검색하고, 책 뒤편에 있는 사카이 준코의 해설과 옮긴이의 말도 한 문장 한 문장을 또박또박 읽었다. 독설 주의자였다. 사카이 준코는 '염세적인 태도 그대로 멋있게 떠난 사노씨. 슬프지만 당신이 있던 자리에 상쾌한 바람이 남겨진 것 같습니다.'고 고백한다. 슬픔지만 상쾌한 사람. 바로 그녀가 사노 요코 인 것이다. 참으로 기묘한 작가다. 처음엔 약간 거북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친근해 지는 욕쟁이 할매 스타일이다. 그래서 더 매력을 느끼는가 보다. 추함까지 용기 있게 고백하는 그녀의 시크함이 진실하기 때문에















사노 요코의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시즈코 상> 역시 꼭 읽어 보고 싶은 책이다. 특히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는 요코의 강열한 시크함이 스며든 문장이 별미라고 하니 기대가 된다








청춘유리의 책 <오늘은 이 바람만 느껴줘>. 책 만드는 여자 임소라의 <29> 젊은 여인들의 책이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여행이 키워드이긴 하지만, 이젠 여행을 제대로 풀어낸 감성과 지성이 어우러진 여행 에세이와 소소한 일상에 대한 사색이 더 읽히는 시대다. 사노 요코와 어떻게 다를까? 문득 신간을 찾아보며 느낀 생각. 하여튼 장바구니에 담아 두자. 언제 살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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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3 1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낭만인생 2016-09-13 22:09   좋아요 0 | URL
사실을 넘어 존재를 믿는 것이 진정한 이웃인 것 같습니다. 서로 신뢰하며 사랑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cyrus 2016-09-13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고향에 가면서도 지진 때문에 찝찝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을 겁니다.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낭만인생 2016-09-13 22:10   좋아요 0 | URL
아마 이번 지진은 트라우마까지 동반한다고 하니 다들 힘든 것 같습니다. 추석을 통해 마음까지 쉼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