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완서님에 대한 추억


20대 초기에 신달자님의 수필에 꼿힐 때가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왜 그랬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통 나질 않는다. 그 때 그저 그분의 글을 읽는 것이 좋았다. 뭔가 특별한 이야기가 독설이 가득했다는 생각이 날 정도였다. 그러다 성격상 수필이나 소설은 도통 손에 잡히지도 잡지도 않았다. 그 후로 수필류의 글은 아득히 먼곳으로 유배시키고 말았다.



거의 20년이 지나고 났을 때 나는 또다른 여성작가분의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감회에 빠졌다. 그분의 이름은 박완서, 이미 고인이 된 분이지만 그 분의 글을 추억과 아득한 감성적 사모함을 일으켰다.


수년 전 갑자기 그냥... [그 남자네 집]을 읽으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이 띄였다. 가슴 설레게 했던 그 사람, 어린 추억을 아련하게 떠오르게 하는 내용이었다. 워낙 소설에 관심이 없었던 터라 이분이 누군가 싶어 저자를 보니 '박완서'였다. 이름도 참 특이하다 싶었다. 여자이면서 남자 이름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된다면 이분의 책은 다시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다시 참 오래된 책인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책을 두번째로 접하게 되었다.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들을 여러 주제로 글로 쓴 것을 묶어 놓은 것이다. 저자는 머릿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기 실린 짧은 토막글들은 거의 다 살아가면서 수시로 속상해 하고 답답해 한 것을 들어내 보인 것들이다." 

읽다가 울컥했던 부분이 있다. '책 가난 고금'이란 내용으로 글을 쓴 부분인데 이곳은 분량이 상당하다. 무려 7쪽이나 된다. 저자는 어릴 적부터 어떻게 책을 접하게 되었는가를 짧막하게 소개한다. 1951년부터 시작한다.

'나만 해도 가장 나답게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겨울, 아무하고도 공유할 수 없었던 오직 나만의 겨울, 김승옥식의 감수성을 빌려와야만 말문이 열린다. 1951년 온통 어둠뿐이었다. 천신 만고 끝에 돌아온 서울이었지만, 그 시절의 서울은 살 곳이 못되었다. 밤만 되면 포성이 바로 미아리 고개 너머쯤에서 들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최전방 도시였고, 집들은 모조리 비어있었다. 무덤 같았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는 것,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는 게 바로 사는 것이고 의식주보다도 앞서는 삶의 존건이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들쥐처럼 황량한 서울 바닥을 헤매고 또 헤맸다. 

빈집에서 쏟아져 나온, 실은 훔쳐낸 별의별 세간살이, 옷가지 등을 사고 파는 노점상들이 즐비했고, 그런 것들은 엄청난 헐 값이었다. 그런 물건 중에서도 가장 천덕꾸러기가 바로 책이었다. 나는 내가 보고 싶은 책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게 황홀했다. 거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록 책값은 헐했고ㅡ 달리 살 맛이 없고 친구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후 걸신 들린 것처럼 책을 읽었다." 

글은 계속이어졌다. 이 대목이 유난히도 내 눈에 들어온 탓은 내가 책을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십대 후분에 들어서면서 제대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15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지만 책읽기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리고 다시 접한 책이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였다. 한 아이의 성장기를 다룬 추억의 진국이 담겨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과거에 대한 추억 때문에 울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필자도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어렵게 보냈기 때문에 어릴적 성장기의 아픔과 아스라한 추억들이 많다. 이 책은 그렇게 보낸 우리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시대를 넘어서도 잊지 못할 우리의 역사인 것이다.



그렇게 박완서님에게 재미를 붙여가는 도중에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슴이 찡하게 저려왔다. 추억의 한 부분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돌아가실 즈음에 나온 책중에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라는 책은 감동적인 도전으로 가득차 있다.


오래된 책이기는 하지만, 가장 박완서다운 책을 꼽으라면 단연코 [부처님근처]일 것이다. 이 책은 1973년 <현대문학>에 발표한 것이다. 분단과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아니 우리의 가족이야기이다. 처저하게 희생되고 살인적 이념속에 함몰되어 존재를 잃어버린 우리네 가족들 말이다. 


고 박완서님의 글과 소설이 가슴 싶이 저며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마흔 되어서야 갑자기 토해내는 설음은 무엇일까? 이제는 말해도 되는 나이가 된 탓일까? 내 나이도 벌서 마흔이 넘었다. 순식간에 지나버린 시간들이다. 이제 과거를 돌이켜볼 시간이 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한 문장 한 구절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이야기로 들린다. 전쟁이 포성이 멈추지 않는 곳에서 전쟁 소설을 읽는 듯한 긴장과 절박함이 담겨있다. 한 많은 조선의 여인, 아니 한국의 여인의 '그 길'을 걸었왔다. 그래서 낯설지 않는 포근함이 그분의 글 속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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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4-03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왜 이다지도 소설에 손을 건네지 못하는 걸까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