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기억의 저주



-합의된 망각만이 역사에서 잊혀진다.

 

보르헤스의 단편 중에보면 완벽한 기억력을 가진 여인의 이야기가있다. 그녀는 행복할까?  물론 비극이다. 사람들은 높은 지능을 동경하지만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망각이다. 행복은 잊혀짐으로 획득되어진다. 탁월한 기억력을 소유한 사람을 현대인들은 천재라고 부르지만 그들은 결코 천재도 아니며 행복하지도 않다. 제프리 무어의 [기억술사]는 실제로 있었던 사람을 극화 시킨 이야기다.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그는 편집증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잊혀지지 않음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우리가 완벽한 기억을 갖게 되면 더 이상 일반화하고 추상화할 수 없게 되고, 과거의 사소한 부분에 빠져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억은 충격스러운 저주다." 쇤베르거, <잊혀질 권리>


 











아르헨티나가 낳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서른 살 때부터 시력을 잃기 시작하여 말년에는 완전히 잃어 버렸다. 시각을 잃어버린 보르헤스는 그 후에 더욱 깊은 사고와 상상력을 통해 위대한 사상을 쏟아냈다.

 

그는 사고로 인하여 과거의 모든 것을 기억해내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다. 그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지는 의심이 가지만 이 여인의 이야기를 역설적 존재이다. 학습의 가장 위대학 능력은 '기억'하는 것이다. 공부도 결국 '기억하는 것'에 불과하다. '지능은 곧 기억이다'라는 명제 있을 정도로 망각을 막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은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몇 년 전 미국에서 보르헤스의 망각하지 못하는 여주인공과 같이 과거를 거의 기억하는 여인과의 인터뷰가 있었다. 그녀의 삶은 과연 행복일까? 천만에 그녀는 '불행하다'고 말했다. 고통과 아픔의 상처를 잊지 못해 고통당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벗어나오지 못하고 미래를 소망하지 못하는 과거의 종이 되어 버린 것이다.




 










"보르헤스의 허무주의적 단편적 사고들은 그의 체념 속에서 일어나는 야속한 고민인지도 모른다.  그는 시각을 잃어감으로 과거의 환상에 더욱 사로잡혀 더이상은 보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인간의 사고라는 것이 시각을 넘어서야 하지만 또한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검정 고무신만을 보아온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고무신은 검다라는 사고에 잡혀있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흰 고무신, 노란고무신을 상상하지만 그것은 단지 상상에 불과하다. 어떤 면에서 사고란 과거에서 탈피하면 새로운 이상을 꿈꾸는 것이지만, 늘 과거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과거이다. 보르헤스의 허무주의는 바로 이러한 과거에 근거한 상상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



망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근대는 기억하는 문화이다. 아니 기록하는 문화이다. 쿠텐베르크의 인쇄활자의 시작은 정보의 기하급수적 증가와 기록 즉 기억은 힘이요 능력으로 인식되었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기억의 저주는 더욱 강화 되었다. 하루에도 수억테라바이트가 넘은 무한한 정보가 축적되고 있다. 이것은 인테넷 상에서의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감시되고 기록되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기억과 망각이라는 순기능을 파괴하는 디지털 시대의 과잉기억 현상은 현대인들을 병들게 한다.

 

망각권(the right to be forgotten)은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를 파기하는 것을 말한다. 디지털시대에 망각권은 유명무실(有名無實)하다. 몇 년 전 아내를 살해하고 자신도 목매달아 죽었던 유명 블로거인 황씨의 블로그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있다. 잊혀질 수 없는 것이다.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도 과거에서 구출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치 시지푸스의 신화처럼 영원한 저주를 말한다.


7년 전 김태희씨는 매스컴에서 ‘독도는 우리(한국) 땅이다’라고 발언한 것이 화근이 되어 현재 일본에서는 반한류열풍과 더불어 김태희씨를 반대하는 운동이 드세게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왜 일본은 스스로를 잊으려 하는 것일까? 김태희씨의 말은 기억하면서 자신들이 벌인 추악한 일은 망각하려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기억이란 것도 결국 공평하거나 정의로운 것은 분명 아니다. 무엇을 기억하느냐는 '그가 누구인가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된다.' 그들은 김태희씨의 말은 기억하면서 자신들의 죄악은 잊어버리는 야누스적 이중기억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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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됨으로 규정지어진 것이다. 인간이 그토록 갈망하고 추구한 기억이란 결국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저주의 온상이 될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망각은 서로 합의하에서 사죄와 용서의 역학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독일 전후 분명한 사죄와 기념을 통해 합의적 망각을 얻어낸 것 처럼 말이다. 합의할 수 없다면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일방적인 망각은 어리석은 것이며, 절대 기억으로의 도전이다.












용서는 잊는 것이다. 

사랑은 잊어 버리는 것이다. 

평화란 망각에서 가능하다.

다만 '합의된 망각'에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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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2-29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일은 쿨하게 과거의 잘못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국민적 합의하에 이루어냈고
이로인해 상대방의 마음을 얻어
프랑스와는 역사교과서를 공동연구 집필하여
함께 사용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위에서 말씀해주신 대로
일본이 망각하려는 태도를 지속하는 한
평화는 일궈낼 수 없을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기억의 작동법입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