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
박이도 지음 / 문학수첩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박이도, <가을이 오는 소리>


가을은 오는가

무력했던 여름

비극의 환상이 언뜻언뜻

무더위로 사라진다


이제 무엇을 더 기다리겠는가


어둠의 꺼풀을 벗고

먼동이 꿈틀대는 모습

무엇인가 살아 움직이는 것들의

순리를 보러가자


흥건히 이슬에 젖은 발부리로

이 육신을 세우고

대지를 향해 나선다

마을을 나서는 기침소리

가까이 흐르는 냇물소리


살아있는 모두의 안부를 묻는다.


차가운 소리

가을이 온다, 내 정신으로

살아온다


*******************************************************************************************

가을이 이렇게나 장엄하고 웅장한 것이었던가.

박이도 시인의 '가을이 오는 소리'는 가을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다른 시들과는 다른 느낌이다.

'가을'을 떠올리면 보통 외로움, 쓸쓸함, 그리움 등의 하강하는 정서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 시에는 그러한 감정은 단연코 들어있지 않다.

가을이 오는가 보다, 라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기어이 가을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가겠다는 화자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가을과 '결연함'은 도대체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그건 바로 전의 계절인 여름을 어떻게 살아내었는가와 관계가 있을것이라 추측해본다.

'무력했던 여름'과 '비극의 환상이 무더위로 사라진다'는 표현으로 보아,

표면적으로는 무더위에 무너졌을 수 있겠지만, 사실은 여름 동안 어떤 비극적 일들을 겪어 온 화자의 시간이 느껴진다. 그 비극을 무더위에 실어 다음의 계절로 날려보내야 할 만큼.

그 여름이 가을을 대하는 화자의 강한 의지를 불러일으킨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건, 나 또한 처절하게 무력했던 여름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수면 아래에서 수면 위로 손을 계속하여 뻗는 이의 간절함과,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던 공허한 빈 손. 그것을 지속해야만 하는 숨막힘.

간혹, 연과 연 사이에 가슴에 훅 치고 들어오는 강렬한 문장이 존재하는 시가 있다. 이 시에서도 그렇다.

'이제 무엇을 더 기다리겠는가' 

나는 사실 이 한 문장에 꽂혀서 박이도 시인의 시집을 사게 된 것이다.

이 한 문장이 화자가 가을을 대하는 태도를 온전히 담아내고 있다.

'이제 무엇을 더 기다리겠는가'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겠다는 화자의 뜻이다.

그럼, 포기하겠다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의 정반대이다.

기다리지 않고 내가 움직이겠다는 것이다. 내 의지로 나아가겠다는 것이다.

먼동이 꿈틀대는 것과 살아 움직이는 생명들의 웅장함을 포착하기 위해, 그 순리를 보기 위해.

얼마나 마음이 꿈틀대었으면 '이슬에 젖은 발부리로', 새벽부터 길을 나선 것일까.

생명의 일렁임을 강하게 품은 화자의 눈부신 설레임도 느껴진다.

그리고는 또 연과 연 사이에 있는 강렬한 한 문장, 이번에는 위에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살아 있는 모두의 안부를 묻는다.' 

자신에게서 '모두'에게로 시선이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것을 화자의 생명에 대한 '포용'이라고 부르고 싶다.

비극의 환상 속에서 무력했던 여름 내내 존재하지 않듯이 살아왔을 화자는, 이제 그 몹쓸 환상 따윈 날려보내고선 마치 만물의 생명을 꽃 피우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대지를 향해 나선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의 의지가 단순히 일시적이고 감정적인 강함이 아닌, '냉철한 이성' 속에서 나오는 의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기력했던 무거운 몸을 일으켜 당당히 가을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화자의 장엄한 발걸음이 느껴진다.

화자는 모든 것이 스러져 낡아가는 가을의 낙엽과도 같은 것들에서 오히려 생명력을 끌어내어, 그것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대들, 아직 살아있는가? 그렇다면 다시 앞으로 나아가자.' 라는 어떤 외침이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계속 귀에 들려왔다. 내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인가? 모르겠다.

강인한 생명력을 노래하는 수많은 시 중에서, 부서지고 스러져가는 것들에 대한 생명력을 가을에 담아 노래한 시는 처음 본다.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과 이제 모든 것이 없어져가는 계절과의 대비가 미묘하게 조화롭다.

시인의 언어는 이토록 아름답다.


가을이 왔다. 차가운 소리로, 차가운 공기로.

그러나 무기력했던 여름과는 확연히 다른 가을이다.

아니, 새로 태어났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간신히 잡은 감사함과 행운은 곧 손가락 사이로 모조리 빠져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눈 앞의 행복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을테다.

체념과 포기 상태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지난날과는 분명 다르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란 무엇일까?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바로 '아마추어는 자기가 좋을 때만 하고 싫을 때는 도망칠 수 있지만, 프로는 눈이 오나 비가오나 1년 365일 쉬지 않고 자신이 해야할 일을 묵묵히 한다'는 것이다. 꿈을 이루는 일에는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싫은 것들, 귀찮은 일들, 피하고 싶은 고단한 노력의 끝없는 여정 속에서 도망치지 않고 자신의 일을 꾸준히 성실하게 해온 사람들이 '프로'이다.

나는 바로 그 '프로'가 되고 싶다. 아직은 애기 수준이지만. 멈추지 않고 걷다보면 어느새 내가 그토록 살고자 했던 나의 꿈에 한층 가까워질 수 있을것이라 믿고서.

불현듯 다시 살아나는 나의 의지와 박이도 시인의 시가 맞물려, 나 또한 이 시의 화자처럼 '결연함'을 품고서 새벽의 이슬을 들이키며 길을 나선다.


-> 박이도 시인의 시집 <반추>의 서문이다. 여기에 인용된 '젊어서 쓴 시는 무의미하며 평생을 기다려 노년기에 몇 줄의 시를 써야 한다.' 는 릴케의 어록이 심장에 비수를 꽂듯, 깊이 새겨졌다. 어쩌면 아직 노년기를 맞지 않은 사람들을 안심하게 만드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은 쓸 수 없어도, 나이가 많이 들면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어줍잖은 믿음. 그것이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저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글을 잘 쓸 수는 없다. 그러나 재능이 없더라도, 혼자만이 알고 읽는 글이라 할지라도 계속 써나가고 싶다. 글 쓸 때의 자유로움. 그것은 마치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진정 살아있다는 어떠한 증명을 보여준다. 읽히기를 위해서가 아닌,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일 때.

시인은 내 최초의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다 내려놓았다. 나에게는 손 닿을 수 없는 창조의 영역이다. 시인의 언어는 깊고 푸르다. 푸른색의 '지구' 같다. 우주가 아닌 지구. 광활하고 애매모호한 우주가 아니라 생명력 넘치고 온 몸의 감각으로 제시해주는 한정된 세계. 시는 일상의 언어로 추상을 표현한다. 그리고 읽는 사람은 그 추상을 다시 눈 앞에 재현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시를 읽는 것이란.



*박이도 시인의 '가을이 오는 소리'는  그의 시집 <홀로 상수리나무를 바라볼 때>에 실린 시이다.

나는 그것이 이 시집 <반추>에 나온 줄 알고 구매했지만, 그래도 시인의 다른 시들을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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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맨즈 독 One Man's Dog
조지수 지음 / 지혜정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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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걸 작가님의 책 중에 가장 먼저 읽은 책이 바로 '원 맨즈 독'이었다.

이 책을 읽고 한국에 이러한 수필 작가가 있다는 것에 감탄했고, 작가님이 예술사와 철학을 전공한 교수님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에 작가님의 철학책도 읽게 되었고, '나스타샤'와 '마지막 외출'이라는 멋진 소설도 읽을 수 있었다.

원 맨즈 독을 거의 5번은 읽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보여서 반복해서 읽는 것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읽는 내내 작가만의 경험과 그 여정 속에서 함께 울고 웃었다. 인생은 그저 살아내는 것 만으로는 경험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경험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도무지 이겨낼 수 없을 것만 같은 고통과 인내, 체념, 포기 그리고 자신에 대한 사랑과 운명에 맞서는 용기. 이런 거대한 것들을 다 품어내야만 하고, 그 때 비로소 나만의 경험들이 생기는 것이다. 주어진 시간 속에서 그냥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다채로운 경험들이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과 운명 앞에서 처절하게 무너지게 되고,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가고, 도망가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해본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경험들이 있고, 그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반성하고, 자신을 이끌어 온 인생이 있는 것이다.

<원 맨즈 독>은 바로 이 토대 위에 쓰여진 글이다. 그러니 독자들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마주하며, 동시에 자신의 인생 또한 진실하게 마주하게 될 것이다. 무엇이든 그 실체를 알게 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두려움 속에서도 실체를 마주하고 인정하는 용기는 언제나 우리를 더 성장하게 만든다.

지금 생각해보면 삶에서 우연이 우리에게 주는 힘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나는 어떠한 계기로 이 수필집과 만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의 서문과 첫번째 챕터를 읽는 순간, 수필의 장르와 형식 안에서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었음을 느꼈다. 수필이 보여줄 수 있는 무한한 매력의 세계를 이토록 광활하게 넓혀준 작가에 대한 감사함도 느낀다. 왜냐하면 나는 수필이라는 장르를 진심으로 아끼고, 또 수필이 출판으로 이어지기에 얼마나 모호한 장르인지도 어렴풋이 알기 때문이다.

단순히 자신의 경험과 통찰을 적었다고 해서 수필이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자동적으로 가지는 것은 아니다. 대단한 문학 작품을 써낸 작가들도 수필이라는 분야에선 오히려 더 낯설어지는 경우도 보았기에, 수필이라는 장르는 참 까다롭기도 하다. 게다가 자신의 진짜 경험을 그대로 노출한다는 점에 있어서 꺼려질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수필을 쓰려면 자신의 경험에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용기' 또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경험에는 달콤한 추억만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쓰라린 상처와 이겨낼 수 없는 고통 또한 경험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작가들의 수필 작업을 정말 존경해왔다. 관심있는 작가의 작품을 접하면 반드시 그들의 수필집을 사 읽곤 했다. 내가 수필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 분야에 정통하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문학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기엔 나는 그저 조용한 '감상자'일 뿐이다.

지금까지 많은 책을 읽어왔어도 나는 서평을 거의 쓰지 않았다. 타인의 작품의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은 내 성향에도 안 맞고(남 비판하는 일은 죽어도 못한다),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뷰 중심의 마케팅 현실과 또, 좋은 작품에 리뷰나 서평이 없다면 사람들이 구매하는 것을 망설인다는 사실을 알고나서부터는, '좋은 작품을 어떻게든 세상에 알려야지' 라는 생각으로 서평을 조심스레 쓰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작품이란 그것을 접한 것으로 인해 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만든다는 것이고, '영향' 그 자체가 바로 작품이 지닌 가치라고 생각한다. 작품이 나에게 끼치는 영향과 그것이 나와 인생에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 내는 과정에서 작품과 '소통'하고 있음을 느낀다.
작품도 홀로 존재하지 않게 되고, 독자도 혼자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작품이 탄생하고, 그것을 누군가가 감상하게 되는 건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다운 사건인 것인가? 서로가 혼자가 아니게 되는,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예술 감상의 중요한 부분임을 생각해본다.

이런 점에서 조중걸(조지수) 작가의 수필집 <원 맨즈 독>은 한국 수필 문학의 역사에 기록되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수필은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통찰과 성찰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글이기에, 작가의 내면과 경험이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한 인물의 일대기를 알고자 한다면, 외부의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쓴 전기나 평전보다는 당사자가 쓴 수필을 읽는 것이 훨씬 진실에 가깝다.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진실하게 부딪혀 온 경험과 그것에서 느낀 통찰은 날 것 그대로 일수록 매력적이고, 눈부시다. 자신의 못난 모습, 잘난 모습, 기쁨, 슬픔, 고통 등의 모든 측면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에서부터 수필은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루를 시작하면서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루 동안 보게 되는, 일상의 평범한 사람들을 떠올려보자. 분명 그들 중에는 왠지 모를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틀에 박히지 않은, 자신만의 어떤 독특한 세계가 있을 것 같은 분위기의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자신만의 '경험'들로 인생이 풍부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 24시간을 그저 살아낸다고 해서 다 자신만의 경험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일상과 사건에 파고들어갈 때,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마주할 때,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도망가지 않을 때 비로소 나는 시간과 경험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말하길, '두려움'은 모든 감정에 앞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심지어 사랑과 행복 앞에서도 인간은 두려움을 먼저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눈 앞에 행복이 있는데도 불안해하며 행복을 잡는 것을 망설인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망설여서는 진정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의 '경험'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두려움을 가지면서도 행복을 선택하고,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위대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Fortes fortuna juvat.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행운은 용감한 자의 것이라는.
용감한 자만이 자신만의 경험들로 가득찬, 풍부한 인생을 살아간다.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언제나 나는 '자신만의 경험을 계속해서 만들어 나아가는 사람' 이라고 답할 것이다. 세상 어떤 부자도 내가 진실하게 추구해 온 나만의 경험이 없다면 불행할 것이며, 가장 높은 명예와 지위를 가진 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온몸으로 부딪혀 살아온 나의 경험과 인생은 얼마나 눈부신 것이며, 설령 그것이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라해도 그 속에서 사유하고 나를 이끌어온 힘은 세상 가장 값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깊이 존경한다. 그렇기에 조중걸 작가님을 존경한다.

용기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생각하는 나 자신도 사실은 매 순간이 두렵다.
오늘 하루가 두렵고, 살아갈 내일과 미래의 시간들이 두렵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헤쳐나가야 할 이 세상이 두렵다.
그러나 두려움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
주어진 운명과 우리가 살아가야 할 시간 속에서 용감하게 맞서야만, 먼 훗날 나만이 걸어온 나의 인생과 경험을 제대로 마주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정말 행복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정말 많은 힘이 된다.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이 '빙하기와 요리하기'이다.
이 부분은 정말 외울 정도로 많이 읽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불행이 닥쳤을 때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에 대한 답이 제시되어 있다. 그 중에 한 구절을 소개하며 마무리한다.

'고통 없고 상처받지 않는 인생이란 없다. 또 고통 없는 인생이 더 좋은 것도 아니고. '원유회'나 '음악수업'을 보았을 때의 감동은 암울하고 애조 띤 색조에 있고, 모차르트나 바흐의 음악도 단조로의 변조에서 극적 아름다움을 지닌다. 나는 운명이 편안하고 한결같기를 바라지 않는다. 힘든 인생인들 고마운 마음으로 견딜 용기를 바란다. 편한 운명을 바란다고 삶이 항상 편하겠는가. 운명에 대고 무엇을 바라기보다는 내 마음을 다잡으려 애쓴다.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한편, 운명과 우연도 나를 도와 줄 것이라고 믿으려 애쓴다. 나 자신에게 거듭 말한다. 낙천적으로 마음먹고 인내와 끈기로 버티라고. 비관하면 고통이 더욱 견딜 수 없다고. 운명에 기만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희망을 유지하는 것이 내 과거 삶에서 중요했다.'



-> '빙하기와 요리하기'에서 감자튀김 요리법을 소개하는 부분. 감자 요리를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어쩐지 배가 고파져서 입맛 다시면서 읽었다. 역시 작가님께서 mbti 중 가장 과학자 유형인 INTJ라서 그런지 감자의 원산지에 따른 분석이 요리법에 가미된 부분이 너무 재미있었다. 요리에 대한 작가님의 통찰과 철학 또한 전적으로 공감한다. 여자든 남자든 자신의 입으로 들어가는 걸 만드는 일은 가능한 한 직접 스스로 해야한다. 밥 먹는 일을, 밥 짓는 일을 집안일 중 하나의 일로써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 보면 참 안타깝다. 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남한테 맡긴다는 건, 내 생명을 남한테 맡기는 것과 같다. 그러니 누가 나에게 밥을 지어준다면, 그 사람의 노고에 절대적으로 감사할 것이며, 되도록이면 내가 직접 요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잠버릇'에서 코골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대목. 정말 재밌었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을 자면서, 꿈 속에서 이루어보려는 것으로 이해해보는 관용적인 부분의 문장이 정말 감각적이었다. '그들 삶의 낮과 밤의 대비가 나의 마음을 쳤다. 슬프게 쳤다. 바로크 회화의 키아로스쿠로가 감상자에게 그러했듯이.'라는 문장이 너무 아름답다. 이런 표현으로 가족의 코콜이와 잠버릇을 이해해보려는 작가의 포용이 이 수필이 가진 매력 중에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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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11-06 2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왓뜨! 조중걸 작가님이 조지수???? 왜 전 몰랐던 거죠! ㅠㅠ 감사합니다!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리고요~친구신청 받아주세요~

전야제 2024-11-07 00:5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친구신청 감사합니다ㅎㅎ 맞아요! 조중걸 작가님의 수필이나 소설 쪽 필명은 조지수라고 합니다. 저도 최근에 작가님 소설이랑 수필 읽고 감동받아서 리뷰까지 썼는데 이게 이달의 리뷰로 당선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ㅠㅠ 젤소민아님의 프로필 문장 정말 멋있어요!!!ㅎㅎ 앞으로 좋은 글 많이 읽으러 방문할게요. 감사합니다^^
 

(2016년도에 그렸던 것. 손으로 그리고 색칠한 거라 어색하지만 재밌었다. 질릴만큼 그림 연습하면서 느꼈던 건, 그림에는 재능이 없구나! 라는 것. 뭐든 해봐야 안다. 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꿈도 그렇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꾸지만 말고 행동으로 바로 옮겨야 한다. 실제로 해보면 나의 길이 아닌 것과 나의 길인 것이 이렇게도 다르다는 걸 처절하게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최고로 잘 해내는 사람들에 대한 경외감도 가지게 된다. 그건 질투가 아니다. 부러움도 아니다. 그저 '존경심'일 뿐이다. 창작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는 두려움과 그것을 무던히 해낸 창작자에 대한 존경의 마음. 살면서 좋은 작품들 많이 읽고 보고 느끼는 것. 그것은 '행복한 관객'의 길이다. 창작의 고통 속에서 인생을 다 바쳐 작품을 완성해내는 '프로'의 길을 아마추어들은 절대 따라가지도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들의 여정을 알고 바라보는 우리 감상자들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프로들의 작품이 세상에 빛을 발할 수 있을테니. 무엇이든 저마다의 자리에서의 풍경이 있는 법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애써 가지려 하지 않고, 헛된 꿈으로 자신을 고통 속에 던지지 말고, 자신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 그것에서 예술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감상자들도 예술이 아닌 부분에 있어서는 오로지 자신만의 인생이 있고, 그 부분을 어떻게 헤쳐나갈지에 대한 삶의 진지한 고민들은 예술가들의 열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므로.)


#한때 꿈이었던 것들에 대한 그 첫번째 이야기 _ (1) '만화가'


인생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었던 시기가 언제였던가, 생각해보았더니 초등학생 때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독서를 많이 했었다. 다독이라는 관점보다는,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있었을만큼 책과 하나가 되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부모님께서 책을 좋아하셨고, 방 전체가 하나의 서재처럼 책장으로 꽉 차 있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와 동생을 위한 외국의 고전 소설 전집, 역사와 과학 백과사전 전집, 초등학생이 읽어야 할 필독도서들, 아버지 취향의 경영과 경제학 도서들, 어머니 취향의 수필과 문학 도서들. 이사할 때마다 이삿짐 센터의 직원 분들께서 오죽하면 책 때문에 돈을 더 받아야한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하시면서 우리 가족은 다같이 이삿짐을 옮기며 웃곤했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부모님께서는 책을 '많이' 읽는 것을 전혀 강요하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그저 부모님께서는 다양한 책들을 읽으며, 다양한 관점에서 다채롭게 생각하고 사람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아이가 되길 바라셨다. 책을 읽고 그 속의 인물들과 세계관을 이해한다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 갇힌 새장을 부수고 밖으로 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나는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것들을 깨부수기 위해 어떤 것이든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항상 했었다. 아마도 그건 선천적으로 생각이 많았던 기질 탓이었을 수도 있다. 그것이 고등학교 가서는 현 교육 시스템에 대한 소심한 반항으로 이어져서 다들 수능과 대학 입시에 매달릴 때, 나는 내가 평생 살아가야 할 나만의 인생과 내가 진정 되고 싶은 그 무언가의 꿈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느라 입시에 소홀했다. 그것이 학생의 본분에 있어서는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학생들의 꿈보다 대학 입시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 왜 그렇게 서운하고 실망했는지 모르겠다. 어쨋든 고등학교 3년의 시간은 내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로 인해 많이 힘들었다. 대부분이 날들이 인생에서 가장 '잿빛'의 하늘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막막한 시간들 속에서도 나는 최선을 다해 내가 좋아했던 것들에 파묻혀 살긴 했었다. 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상상 속의 이야기를 언어로만 펼쳐 놓는 것에 무언가 권태를 느낄 때가 아마 내가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언어가 보여주는 세상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지는 그동안 책을 읽으면서 많이 느꼈지만, 언어가 다 보여주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어떤 호기심과 의문이 내 안에서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 시기에 나는 새로운 친구들과 친해지게 되면서 친구의 취미 세계에 발을 들이며, '만화' 혹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에 처음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물론 어머니께서 젊은 시절 만화를 그려서 공모전에도 수상하고 온라인에 연재도 하셨을 만큼 만화에 대해 지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종이에 그려진 그림과 글의 형식이 '영상'으로 재현될 때의 충격을 그때 처음 알게 된 것 같다. 지금 한국의 만화, 특히 웹툰 시장은 일본을 압도할 만큼의 수준과 규모이지만, 내가 중학교 2학년이었던 2006년은 일본의 드라마, 만화, 애니메이션이 훨씬 우세하였던 시기라서 그 친구의 만화 세계를 구성했던 작품들도 다 일본의 것이었다. 친구가 추천해 준 일본 만화들을 보면서, 나는 언어가 다 보여주지 못하는 어떤 세상을 비로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영상으로 재현되는 만화는 시각적으로 그 작품 속의 세계관과 메세지를 전부 다 보여준다. 우리들이 통찰을 해볼 수 있는 부분도 있기야 하겠지만, 화면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우리의 상상력을 압도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인간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상상의 세계가 '어디까지' 표현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 있어서 '만화가'라는 사람은 위대한 창조자이다. 만화라는 영역이 소설과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소설이 언어로 표현될 때, 만화는 언어가 배제된 세계를 표현해내야만 한다. 만화 속 명대사들도 우리에게 수많은 감동을 선물하지만, 이것이 만화의 본질은 아니다. 대사들로 이어나가기만 한다면 만화는 만화가 아니게 된다. 하나의 장면과 그 다음, 다음으로 연속되는 장면들이 어떻게 선택되어지는지,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누구를 통해 말할 것인지, 작품 속의 시공간은 어떠한 상황인 것인지 등등에 있어 작가는 절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영역을 그림으로 전부 그려내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3D의 영상으로 다시 재탄생되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력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고단한 작업이기도 하다. 만화가가 만들어내는 캐릭터는 인간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단 하나'로써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에, 어디에도 없는 단 하나의 캐릭터를 창조한다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예술가의 진지한 작업과 다르지 않다. 만화가 비록 상업적이고 세속의 것이라고 해서 그 진실한 작업을 저평가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캐릭터와 더불어, 만화 속 세계관을 구성하는 다양하고 신비스런 요소들까지 생각한다면 그 거대한 세계가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영감이 필요한 것인지 추측해볼 수 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정도가 아니라, 만화가의 인생과 영혼을 통째로 갈아넣어야 비로소 '작품'이 완성된다. 그것을 중학생 때 경험하게 되었던 것은 나에게 참 기적같은 순간이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수단들은 만화 뿐만 아니라 참 다양하게 존재하는데, 그것이 나에게는 만화였던 것이다. 물론 모든 만화들이 작품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도 좋은 작품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있고, 이것을 분별하는 것은 사람마다 취향과 가치관의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영상으로 재현된 만화를 접하게 된 이후로, 종이책으로 그려진 만화책의 가치를 더 제대로 깊게 느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영상으로 제시된 내용이 무조건 전지전능한 것도 아니다. 단지 종이 위에 놓여진 언어와 그림들이 전해주는 감동과 매력은 화면에서 움직이는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 영상매체와 종이책이 가진 차이점들을 비교해보고 직접 느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만화와 관련하여 부끄럽지만, 중학교 때의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한다.

그 시절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 계속 다니고 있었고, 클래식 뿐만 아니라 뉴에이지 음악이라고 불리우는 현대 음악들에 푹 빠져 있었다.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겨우 피아노 하나였기 때문에, 좋아하는 곡을 발견하면 그것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에 굉장한 취미가 있었다. 마침 그때 로또 3등에 당첨된 아버지께서 내가 피아노 연주를 너무 좋아하는 걸 보고서는 그 당첨금과 돈을 더 보태어 피아노를 사주셨다. 그 돈으로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것들을 살 수 있었을텐데도 내가 좋아하는 피아노를 사주신 아버지께 감사해서라도 나는 열심히 연주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와중에 만화를 사랑하던 친구로 인해 만화의 세계를 알게 되고, 나도 나만의 만화 취향을 무의식적으로 형성하려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제일 먼저 음악을 주제로 한 만화에 빠졌었다.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마츠모토 토모' 라는 작가의 <KISS>라는 작품을 알게 되었고, 그 속에 나오는 음악들을 한시라도 빨리 들어보고 피아노로 쳐보기 위해 나는 급히 만화책방에 들렀다. 다행히도 그 만화책이 있었고 전 권을 꺼내어 카운터로 갔는데 사장님께서 대여가 안된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아니 이게 왠걸. 그때 마침 교복을 입고 있었던 터라 사장님은 내가 중학생인지 다 알고 계셨고, 나는 그 만화책이 15금인지 몰랐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만13살의 나이였으니깐. 그 만화책은 절대 야햔 것도 아니고 음악이 주제인 순정 만화일 뿐이라고. 그러니 제발 빌려달라고, 마음 속으로만 여러번 외쳤고, 사장님은 단호했다.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집에 가서 어머니를 만화책방으로 모셔와서 다시 그 책을 빌려갔다. 내가 어머니를 데리고 다시 나타났을 때의 사장님의 그 어이없는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당시에 내성적이었던 내가 굉장히 필사적이고 적극적이었던 몇 안되는 행동 중에 하나였기에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만 난다. 어쨋든 나는 그 만화책을 빌려와서 읽게 되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꼈던 감동에 설레었다. 음악이 목적이었지만, 그 만화책의 인물들과 내용에 완전히 몰입하여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원래 순정만화가 주는 설레임이 엄청난 것이지만, 마츠모토 토모의 <KISS>는 다른 순정만화와 결이 달랐다. 모든 장면에 음악이 흐르고 있어서 그럴수도 있겠지만, 인물들의 내면과 서로에게 닿는 감정과 행동의 영향들이 실제로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 같아서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작품이다. 거기에 등장했던 음악들 중에 <Say you love me> 라는 피아노 곡이 있다. 당시에 나는 그 곡에 푹 빠져서 곧바로 피아노로 연습했었다. 곡 후반부의 트릴 연주 부분은 마치 건반 위에서 손가락이 춤을 추는 듯해서 피아노를 이렇게도 생동감있게 연주할 수 있구나, 라며 감탄했었다. 이 곡의 모든 음표들이 마지막의 트릴로 이어지는 여정을 느껴보니, 음악을 진정으로 좋아하게 된 것도 이 때였던 것 같았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Say you love me를 들으면서 이 글을 작성하고 있다. 그 경쾌함이 내 귀에서 아직도 감미롭게 들린다. 이토록 어린 시절의 취향은 어른이 되어서도 변함이 없는가 보다.


이렇게 만화의 세계에 빠지게 되고 나서 다양한 매체의 장르들을 더 폭넓게 이해하는 것도 가능해졌다고 생각한다. 작품에 접근하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 접할 수 있는 작품의 폭도 좁아지게 되고, 느낄 수 있는 영역 또한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좋은 작품들을 진정 이해하고 알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편협한 사고방식부터 개선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좋은 작품들이 많다. 죽기 전에 그것들을 다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다. 창작자의 입장이 아닌 관객의 입장에서는 조바심이 난다. 그것들을 다 보고 싶다는. 이걸 보면 이 시대의 감상자들은 행복한 것이다. 감사하게 여기고 있다. 좋은 작품들을 살아서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나는 한때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 스토리는 무궁무진하게 머릿 속에 자라나고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부족했던 건 그림 실력이었다. 그런데 그 '실력'이란,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만화가들이 캐릭터와 배경들을 세밀하게 잘 그리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이 칭송받는 것이 아니다. 자신만의 캐릭터를 창조하는 것은 그림을 잘 그리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아라카와 히로무의 '강철의 연금술사', 이사야마 하지메의 '진격의 거인', 토가시 요시히로의 '헌터X헌터' 등의 만화책을 보면 알겠지만, 그들의 그림 실력이 뛰어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작가가 만화책에서 보여주는 세계관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을 창조하는 것은 그림을 잘 그리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라는 것을 그림 연습을 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만화가의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나니,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고,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비참하지는 않았다. '만화가'라는 사람들을, 그리고 그 직업의 일을 정말로 존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든 자신의 '인생 작품'이라고 여기는 훌륭한 작품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소설,시,영화,만화,드라마 등등 다양한 장르의 것일 테고, 각자가 인상 깊게 본 작품들은 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 작품들을 접하기 이전과 이후는 정말 다른 세계라는 것이다. 내 인생을 바꿔 놓을 만큼의 강력한 작품들은 인생의 마지막까지 가져갈 수 있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 작품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왠지 나는 인생 끝까지 용기내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의 그것.


영상으로서의 명작 애니라고 한다면 역시나 일본 만화들이 우선순위에 오르겠지만, 적어도 종이책으로 출판된 만화라고 한다면 한국의 작가들이 절대 일본에 지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니, 한국 만화가들이 만화책에 있어서는 오히려 작화와 감수성, 스토리, 구성 등에 있어 일본 작품들보다 더 우아하고 세심하고 아름답다. '마스카'의 김영희 작가, '풀하우스'의 원수연 작가, '스노우드롭'의 최경아 작가, 'I Wish'의 서현주 작가, 그리고 만화도 멋지지만 그의 인생에 대한 에세이에 더 감동 받았던 이현세 작가 등등. 다 읽어보지도 못한 좋은 작품들이 너무 많아서, 앞으로 그것들을 읽을 생각에 마냥 행복하다.


그러나 이 모든 작가와 작품들을 압도하는, 나에게 있어 최고의 만화가는 바로 '하일권' 이다. 하일권 작가님의 만화책을 20살 때 처음 접했고, 그 이후의 내 인생은 마치 그의 작품 '안나라수마나라'에 나오는 '나일등' 의 자기 인식과 자기 변화와 같을 정도로,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만화에 교훈이나 메세지가 반드시 담겨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통찰들은 각자의 인생과 현실에 대한 반성을 할 수 있는 강력한 것들이기에 나는 하일권이라는 작가의 매력에 푹 빠졌다. 만화가 보여줄 수 있는 세계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라는 감동은 만화에 대한 본질과 정체성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하일권 작가님의 작품들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기도 하고, 자신있게 추천하는 작품은 바로 '안나라수마나라' 이다.

작품이 가진 가치들 중에 언제나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그 작품이 나에게 끼치는 영향과 그것이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점이다. 그것을 통해 나는 그 작품들을 깊이 이해하기도 하며, 내게 있어 소중한 작품이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 있어서 '안나라수마나라' 속의 '나일등' 이라는 캐릭터는 분명 작품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현실 속 우리들이 반성해야 할 계기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작품 안과 밖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인물이다. 나일등이 부모님과 사회가 제시해 온 엘리트의 길을, 그 차가운 아스팔트 길을, 자신도 당연하게 여기며 걸어왔던 길에서 비로소 스스로 벗어나게 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과, 온전한 자신의 의지로 개선과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점은 이 시대를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주인공들보다도 나일등이라는 인물이 더 인상 깊었다. 개과천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동적으로 살아왔던 인물이 능동적으로,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노력 이상의 것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어쩌면 나일등의 변모는 역설적인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만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현실 속에는 절대 존재하지 않기에 더 감동을 주는. 하지만, 그것이 바로 하일권 작가가 보여주는, 작품과 독자 사이의 '긴장감'이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강요가 아닌, 독자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그러나 혹독한 자기 반성을 필요로 하는.


작품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과 개선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작가는 흔하지 않다. 독자들은 달콤하고 칭찬 가득한 표층적인 위로나 아니면 철저하게 비판할 수 있는 영역을 제시하는 작가를 더 좋아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렇게 결국 자기 자신으로 향하게 만드는 작품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더 좋은 '내'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을 돌아보고 끊임없이 개선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일등의 독백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나일등이 처음으로 자기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된 장면이라 기억에 남는다. 동시에 현 교육 시스템에 대한 비판과 통찰이 아스팔트 위의 길로 비유하여 제시된다. 부조리한 시스템 속에서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전교 1등의 학생이 자신의 길에 대해 진정 생각해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아스팔트 길을 달리고 있다는 걸. 나는 아스팔트가 깔린 곧고 평평한 길을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 그 길은 일방통행이라 헤맬 일도 없고 고속도로라 차가 막힐 일도 없다. 더러운 흙기로, 혹은 구불구불하게 꼬인 길로, 항상 막히는 길로 다니는 사람들과는 달리. 난 능력 있는 부모님이 깔아주신 이 아스팔트를 달린다. 주변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린다. 달리다 보면 난 항상 1등이다.'




-> 나일등의 저 길쭉한 얼굴이 자기 인식 이후에 말끔하게 잘생긴 얼굴로 변모한다는 점이 이 만화책의 재미있는 요소들 중 하나이다. 한 캐릭터의 내면의 변화를 다채롭게 표현해내는 작가님의 능력 최고! (이 만화책이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있지만, 만화책의 가치가 드라마로 다 표현되기에는 무리였던 것 같다. 하일권 작가의 만화책은 그저 만화책 그대로 읽어야 그 감동을 백퍼센트 느낄 수 있다. 원작을 뛰어넘는 영상 작업들도 많지만, 하일권의 작품들은 종이 만화책에서 그 가치가 생생하게 살아숨쉰다.)




 

-> '마츠모토 토모' 작가의 <KISS>는 '음악을 주제로 한 순정 만화'라는 걸 다시 한번 강조한다ㅎㅎ 제목 때문에 이 작품의 가치가 오해 받기도 하지만, 이 만화를 보게 된다면 왜 제목이 반드시 이것이어야 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나저나 애장판 구매도 못했는데 절판이라니ㅠㅠ 재출간 해주신다면 바로 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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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외출
조지수 지음 / 지혜정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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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수 작가의 장편소설, <마지막 외출>


오랜만에 여운이 길게 남는 소설을 읽었다.

마지막 장을 다 읽고나서도 내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이 얽혀있어서, 그것들에 대한 답을 찾아내느라 생각을 한참 정리해야만 했다.

스스로 충분히 생각하고 답을 찾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쓴다는 건 거짓된 행위이기에.

나는 내 인생에 대하여서도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해왔고, 내 앞에 들이닥치는 끝없는 질문들에 대하여서도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해왔다. 그리고 그 답을 찾아내기까지 때로는 발걸음 닿는 대로 걸어야만 하는 긴 여정도 마다하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오롯이 나의 진실한 마음과 의지가 담겨있지 않다면, 그 선택이 초래할 결과와 미래는 내 것이 아닐 뿐더러, 그것들 앞에서 나는 불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 잘못된 방식이 아니라는 것도 이 소설을 읽으며 다시금 깊숙히 느낄 수 있었다.

좋은 소설은 좋은 삶의 방식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한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이 결국 놓쳐버린 진실한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다보면, 누군가를 진실하게 사랑하는 '마음'과 그 대상을 사랑하는 '방식'이 같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며,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과 개선이 없는 태도와 올바르지 못한 사랑의 방식은 사람의 인생을 파멸로 이끈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는 방식과 방법에 대해서 우리들은 이토록 서툴고 어리석을 수 있다.

잃고 싶지 않은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그를 제대로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나 자신에 대하여서도 진지하고 깊숙하게 통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소설의 여주인공처럼 생의 진실한 사랑을 찾았으면서도 결국은 제 손으로, 기어이 자신의 의지로 놓쳐버리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

비극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에서 오는가? 아니면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의도하지 않은 뜻밖의 것들에서 오는가?

비극은 이 우주 속에 존재하는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오겠지만 진정한 비극이란 건, 나 자신이 정답을 다 알면서도 내가 원하지 않는 다른 것들을 선택하는 것에서 비로소 오는 것 같다. 결국 '내'가 원인일 때 거기서 오는 비극과 그것이 초래하는 파멸이라는 감정은 인생을 벼랑 끝으로 내몰 수도 있는 강력한 절망을 최대치로 끌어낸다.

여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에서 소울메이트라고 할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인 K교수라는 사람을 우주 속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그녀의 의지로 사랑했다. 오로지 '그'만을 선택할 수 있었던 기회가 정말 여러번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제고 다른 사람을 선택하고 거짓 사랑을 했다. 심지어 다른 남자들을 만나면서도 K교수를 사랑했다. 이것이 그녀가 결국 인생의 전반에 걸쳐 불행했던 이유였다. 그녀가 만났던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준 불행이 아닌, 그녀의 온전한 의지로 선택한 불행이니, 불행은 결국 자기 자신이 불러낸 것이다. 나는 그녀가 참 싫었고, 이해되지 않았고, 답답했다. 그러나 그녀의 독백과 자기 고백적 언어들을 따라가다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과 자기 자신에 대한 많은 반성과 통찰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의 진정한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대학생이었을 때 K교수에게 고했던 이별이 그녀의 어리석은 첫번째 선택이자, 이 거대한 '비극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그녀가 K교수와 동시에 만나고 있었던 D라는 남학생이 K교수와 헤어질 것을 종용하는 장면에서 그녀는 기어코 D의 명령대로 K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이별을 고한다. 아, 정말 왜 그랬을까? 그녀의 선택을 이해해보려고 참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우선 그녀는 아직 대학생의 나이였다. 많은 공부를 했더라도 사회적으로 사리분별이 미숙한 나이였고, 어리숙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짐작은 해본다. 그녀는 1년 정도 K교수와 함께 하며 그의 학문적 성취, 그의 내면과 가치관 등등.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이해했다고는 하지만, K교수라는 사람에 대해서 맹목적인 신뢰를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성 편력이 심한 남자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용기만을 가지고는 어려운 법이다. 반대로 남성 편력이 심한 여자를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헌신하는 남자가 있을까? 앞으로 이 사람만을 사랑하겠노라는 맹세와 다짐을 명확히 보여준대도 그것이 사랑을 굳건히 지속시키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사랑한다'는 말 만으로 사랑이 시작되거나 완성되지는 않는다. 언어보다는 그 사람 전체를 보게 되어 있다. 물론 그조차도 현실에서는 서로의 허상 속에서 길을 잃으며, 닿을 수 없는 실체에 다가가려다 사랑에 실패하고 말지만. K교수와 함께 할 미래를 그려보는 것에 있어서 그녀는 확신이 없었던 것 같다. 그에 대한 믿음도, 그를 사랑하는 그녀 자신에 대한 믿음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주인공이 아직 대학생이었을 때 K교수에게 이별을 고한 것은 나름대로 설득이 되고 이해를 할 수 있다.

누군가를 진실되게 사랑하기 위해선 그 대상에 대한 나의 '믿음'이라는 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에 앞서서 존재해야만 하는 것 같다. 사랑이 시작되고 나서도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드는 연인들의 투정과 싸움을 오랜시간 관찰해온 나로서는, 사랑이 흔들리는 이유의 본질이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에 앞서는, 대상에 대한 '믿음'의 부존재에 있다고 판단해왔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 대상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믿게 되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게 된다.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언제까지고 계속 지속해나갈 수 있다. 만약 그 대상이 믿음에 배반되는 행동을 하여 사랑이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고 해도, 그 사람을 믿은 건 '나 자신'이기 때문에 그를 사랑했던 나의 '선택'만을 후회하거나 비난할 수 있게 된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그 대상이 나의 것이 되기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자신으로서의 '그'를 사랑하겠다는 것이므로.

진정한 믿음이란 자기 자신에서 시작하여 자신에게로 귀결되는 가장 고귀한 것이기에, 사랑의 파멸 앞에서도 대상이 아닌 오로지 '나'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여주인공은 K교수를 사랑하는 데에 있어 바로 이 '믿음'이 부족했다. 아니, 애초에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 다시 K교수와 재회하여 그와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때에도 여전히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지 않았고, 자신의 불행했던 결혼생활에 대한 보상 심리로 더욱더 K교수에 대한 소유욕이 커지게 된 것이다. K교수를 그 사람, 존재하는 그 자체로 바라보고 믿었더라면, 그녀는 K교수와 행복한 결말을 맺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고자 하게 되고, 구속하게 되고, 그를 자신의 뜻대로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사랑을 망치는 이유'이다.

사랑을 망친 장본인이 그녀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미 K교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은 언제나 그 대상을 완전히 잃고 나서야, 자신이 진정 사랑받았음을 깨닫는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마츠코라는 캐릭터에서도 이 면모가 드러난다. 사랑받기 위해서 올바르지 못하게 대상들을 사랑해왔던 마츠코는 어느새 파멸해가고 있던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진정 사랑 받았음을 깨닫는다. 그 땐 이미 너무 늦었고, 다시 세상을 사랑해보려고 용기냈을 때는, 자신조차 남아있지 않게 된다. 믿음과 비극의 관계는 세상 어느 문학과 예술에서나 파국적으로 드러난다.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종교적인 믿음에 대해서는 잘 모르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감정에 앞서 그 대상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임을 안다. 그래야만 그 대상이 온전한 그 자체로 있을 수 있게 되고, 사랑을 지킬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진정한 믿음이란 자기 자신에서 시작하여 자신에게로 귀결되는 가장 고귀한 것이기에, 대상을 온전히 믿고 사랑한다면 그 대상 또한 그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나와 대상이 각자 독립하여 자신으로서 존재하면서도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의 사랑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이 드넓은 우주 속에서 K교수라는 사람의 진면목을 알게 된 그녀였기에. 그리고 K교수 또한 그녀가 진정 어떠한 사람인지 다 알면서도 사랑했기에.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은 참 드물다. 사랑하면서도 서로의 가치를 알아주고 인정하는 관계는 정말 이상적인 것이라서 두 사람의 사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이 비극적 결말에 얼마간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그녀가 남편과의 관계가 좋지 않고, 원만한 결혼생활을 할 수 없었던 것도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다. 서로에 대한 진실한 이해와 믿음에 기반하지 않은 결혼은 그저 남편과 아내라는 '역할'에 충실한 것만이 결혼의 전부이게 된다. 그 사람만의 고유한 가치를 서로가 알아주고 인정하는 것 없이, 그저 가정에서의 역할과 위치에서 서로를 바라보게 되니, 이것이 불행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얼마전 추석 연휴에 친구를 만나 그 친구의 연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 또래의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일자리의 경쟁에 치여 취직이 늦는 세대라서, 다들 결혼 시기가 많이 늦어졌다. 친구는 원래 비혼주의자였고, 연애를 하면서 조금은 결혼에 대해서 생각이 열렸다고 한다. 30대 초반이 되면서 또래의 여자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하고 있다. 그 중에는 서로 오랫동안 사랑한 끝에 결혼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사랑에 기반하지 않은 소개팅이나 맞선으로 인연을 맺고 결혼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소설과 영화에서만 사랑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는 사랑이 이토록 더 어렵고 힘들다. 누군가를 천천히 알게 되고, 그 사람만의 진가를 보게 되고, 한 사람의 세계를 품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이렇게 사랑을 쌓아나가는 오랜 과정들 없이 소개팅이나 맞선 자리에서 사람을 알게 되고 결혼하는 건 내 기준에 있어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맞선 자리에서 본 사람을 정말 운명적으로 사랑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그러한 운명적인 일이 있던가? 맞선이나 소개팅은 '결혼'이 목적인 이유가 대부분이기에 모든 만남의 과정이 결혼에 맞추어 흘러가게 된다. 그 사람이 진정 어떠한 사람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탐구보다는, 그 사람이 결혼하기에 적당한 사람인가에 대한 판단이 중요하게 된다. '적당히'라는 말은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있어서 절대로 판단 기준이 되면 안 되는 것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적당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30대 초반 아직 미혼으로 남은 사람들에게 사회가 요구하거나, 결혼에 조급한 사람들이 세상과 타협하게 되는 기준이 되어버렸다. 적당한 사람이라는 기준에는 결국 그가 가진 배경, 재력, 능력 등등 그 사람의 본질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한 사람이 가진 고유한, 진정한 가치들은 '적당한 사람'이라는 조건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도 마찬가지이다. K교수와 헤어지고 나서 결혼한 남편이 그녀에게 있어 어떠한 사람인가? 남편의 진면목과 가치를 인정하고 그를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해서 한 결혼이었나? 아니다. 그녀도 결국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을 따지고서 그녀가 생각하기에 '적당한 사람'이라는 기준에 적합한 사람이었기에 남편과 결혼한 것이었다. 그러니 그 결혼 생활은 오로지 '조건'들이 유지되기 위해서만을 위해 흘러갈 뿐, 애정이나 신뢰같은 정신적인 가치같은 것들은 애초에 결혼생활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K교수를 진정 사랑하게 되면서 자신이 어떠한 사람을 사랑하고 어떠한 가치들을 중요하게 여길 수 있는지 분명히 겪었다. 한 사람이 가진 가치를 알아보고 품을 줄 아는 진실한 사랑을 했던 그녀라면, 선택도 그러했어야 한다. 결국 생각 뿐이었고 행동은 그것을 반영하지 못했다. 그녀가 물질적 가치들만이 중요한 결혼을 선택했다는 것이 그녀의 두번째 비극인 것이다. 역시 그녀가 자초한.

진정한 사랑을 버리고 그 자리에 매번 거짓된 사랑을 채워 넣은 것이 그녀의 세 번째 비극이다. 그녀 자신의 진실한 사랑에 배반되는 행동과 선택이 남성편력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 마음도 점점 무너져 내려갔다. K교수의 여성 편력과는 또 결이 다른 것 같다. 그녀는 남자들을 사랑한 게 아니라 그저 이용한 것 같다. 언제나 자신의 감정, 욕구, 위선, 사회적 지위 등에 가치를 부여하며 보여주기 식의 사랑을 해온 것이다.

정말 K교수를 사랑했다면,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해도 평생 마음 속에 그 사람을 품고서 혼자서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내 가치관대로 그녀를 판단하면 안되겠지만, 그녀는 욕심이 참 많은 사람이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절대 사랑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 사랑은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하는 것이라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대학생일 때의 어느 정도의 순수함마저 잃어버린 그녀는 K교수와 재회하고나서 그와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통제할 수 없는 소유욕에 미쳐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K교수를 조현병으로, 죽음으로 몰고 간다. 사람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그녀의 잘못된 사랑의 방식이 한 사람을 파괴했다.

그녀가 K교수를 사랑하는 마음에 문제가 있었나? 아니다. 그녀는 진실하게 그를 사랑했다. 그를 사랑하는 방식에 결국 문제가 있었다. 이것이 맨 처음 말한 '믿음'과 절대적으로 관련이 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K교수를 믿지 않았고, 그가 캐나다의 건강식품점 여자에게 간 것에 눈이 뒤집혀 그를 추적하다가 그와 충돌하게 되고, 그를 파멸로 이끌게 된다. 결국에는 그녀 자신의 파멸이기도 한. 그를 끝까지 믿지 않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모욕을 던진 것이 그녀의 마지막 비극인 것이다. 


사랑을, 사람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정말 많은 비극을 만들어내지만, 그 중에 가장 큰 비극은 그 사람이 가진 고유한 빛과 가치를 잃게 만든다는 것이다. 한때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이유였던 것들이 점차 빛을 잃어가고 중요하지 않게 되는 건 그 사랑의 대상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내 것으로 만들고, 내 뜻대로 통제하고 편하게 여기게 되어버렸기 때문인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가진 진정한 가치가 그 빛을 잃지 않을 수 있도록, 언제까지나 반짝반짝 빛날 수 있도록 지켜주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사랑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소중한 것임을.


이 소설 여주인공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과 사랑하는 마음의 변모를 함께 따라가다보면, 진정한 사랑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외출>이라는 소설의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독자들도 마음껏 소설 속의 인물을 비평해보기도, 자신을 반성해보기도 하면서, 사랑에 대한 자신만의 통찰을 해볼 수 있길 바란다.



->꽃에 투영된 철학 이야기가 너무 귀엽다.


*개인적으로 여주인공의 독백과 자기고백적 언어 위주의 흐름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시선으로 본 K교수와 다른 인물들의 묘사 또한 인상 깊었다.

통찰 부분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양이 많지만,

자신의 시간적 여유에 맞게 호흡을 나누어 천천히 읽으면 될 일이다.

책의 가치라는 것을 평가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동안 서평을 쓰진 않았지만,

많은 책들을 읽어온 지금에서 느끼는 건

어떤 책을 읽기 전과 후의 나 자신은 분명 다르다는 것이다.

책이 지닌 가치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이 바로 이것인 것 같다.

책을 읽고 나서의 변화는 쌓이고 쌓여 한 사람의 성장을 구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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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희망
고희석 지음 / 청동거울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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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복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현직자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 이야기를 찾아보다가 알게 된 고희석 작가님의 에세이 '절대희망'.

작가님은 물리치료사이면서 동시에 사회복지사로 30년을 근무해오셨다고 한다.

원래 신학대학에서 공부를 하시다가, 28살에 슈바이처의 '나의 생애와 사상'을 읽고, 의료봉사의 삶에 매료되어 뒤늦게 입시 준비를 하시다가 현실적 여건에 부딪히게 되면서

물리치료학과로 진학하시게 되고, 물리치료사로서 사회복지시설과 신망애재활원 등에서 장애인을 위한 치료와 사회복지 업무를 평생 해오셨다.

이 에세이에 담긴 이야기들은 작가님께서 평생을 장애인과 함께 시설에서 생활하시면서 겪었던 것들을 모은 것이다.

예전에 고 이태석 신부님의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라는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다.

고희석 작가님께서 슈바이처의 책을 읽고 의료봉사의 꿈을 가진 것처럼, 나는 이태석 신부님의 책을 읽고 의료봉사의 삶을 꿈꾸었다.

그 책에서 결정적으로 감명받은 한 구절이 있다.

전쟁으로 버려진 땅인 남수단의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얼까 생각해봤더니, '그들과 함께 사는 것'. 이것만이 의식주,교육,의료 등 모든 면에서 열악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남수단의 사람들에게 신부님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국제적 여론의 그 어떤 '말'보다도, 역시 직접 '실천'으로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신부님의 책에서 배웠고, 이 책 '절대희망' 에서도 다시 한번 배우게 되었다.


작가님은 물리치료사로서 재활원에 근무하셨지만, 사회복지업무에 대한 뜻이 강하셔서 생활재활교사 업무에 지원하셨었다고 한다. 생활재활교사의 업무가 얼마나 고된 것인지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작가님 또한 가장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는 한 경험을 소개하셨다.

백명이 넘는 장애인들을 모시고 어느 단체의 초대를 받아 서울의 유명 아트홀의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다고 한다. 관람 중에 한 지적장애인 분께서 대변실금을 하셨고 작가님께서 그분을 급히 모시고 화장실로 가서 바지를 타고 흘러내린 대변을 닦아내고 씻기고 하시는데, 한참을 그렇게 땀범벅이 되어 해결하고 나왔더니 공연 중이라 다시 못 들어간다는 안내에, 밖에서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공연장 안에서 들리는 유명인사들의 축사 소리를 듣는데, 방금 화장실에서 타인의 대변을 닦느라 힘들었을텐데도, 작가님은 자신이 한 일이 저 공연장 안의 연설보다 더 값지고 귀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렇게도 꿈꿔왔던 봉사의 삶을 사는 것, 지금 누군가의 똥을 닦는 일에서 보람과 가치를 느꼈다고. 이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내가 진정 느꼈던 두가지는, 사회복지시설의 생활재활업무를 담당하시는 사회복지사의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와, 말로써 봉사의 삶을 외치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그것을 실천하는 삶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였다. 작가님은 그 업무를 3년간 하시고 다시 물리치료의 일로 복귀하셨다고 한다. 단지 월급 때문이라면 그 고된 일은 절대 못할 것이다. 희생, 헌신, 사랑 이런 것들이 없다면 사회복지사로서의 삶은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 현장에서 평생을 일해오신 모든 사회복지사분들이 정말 존경스러웠다.


'오롯이 오늘을 사는 분들이기에, 오늘의 행복을 만들어 드리는 것이 사회복지사가 해야 할 일인 듯 싶다.' 라고 하신 부분에서 참 많은 것을 느꼈다.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사회복지사 본인의 헌신은 그 행복 이상으로 커야만 겨우 전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품고 있는 사랑이 얼마나 강하고 커야만 누군가의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걸까? 봉사의 삶이란 정말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고희석 작가님께서 재활원의 장애인 환자들을 치료하실 때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하셨다고 한다.

'신체'를 치료한다는 관점과 '사람'을 치료한다는 관점. 복지시설의 환자들은 소위 세상 끝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어떻게해서든 세상의 '안'으로 밀어 넣고 싶으셨다고 한다. 사람을 지탱하고 세상의 안으로 밀어 넣는 일, 이것이 '사회복지'의 일이다. 작가님은 자기자신을 시설의 '일부' 라고 생각하시면서 장애인 환자들의 치료에 임했다고 하신다. 시설과 시설의 장애인 분들과 '하나가 되는 삶'을 살아오신 것이다. 그 오랜 세월 속에서도 항상 배우시고 행복하셨다고 한다. 이처럼 실천하는 삶을 살아오신 작가님의 '직업'으로서의 물리치료, 사회복지 일은 사랑과 헌신 그 자체의 삶인 것 같다.


작가님께서 신망애재활원에서 장애인분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그들에게서 배우고 싶은 세상이 있다고 하셨다. 첫째는 '뛰어난 현실 수용력', 둘째는 '욕심이 없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속도 대신 흐름을 선택한다' 는 점이다. 특히 세번째에서 나는 정말 많은 것을 느꼈다.

비장애인들의 사회에서는 '속도'가 곧 생명이다. 빨리 성공하고, 지위를 획득하고, 성취하기 위해 살아간다. 몇개월 안에 자격증을 따고, 시험에 합격하고, 몇년 안에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몇년 안에 집을 사고, 몇년 안에 승진을 하는 등등. 신체적 장애를 가지지 않은 비장애인들은 최대한 빠른 기간 안에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부단히 움직이고 노력한다. 이런 꿈들이 장애인이라고 없겠냐마는, 장애인에게 있어 속도에 해당하는 '느림'과 '빠름'은 선택 사항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흐름'에 삶을 맡긴다. 순간순간 존재의 욕심과 한탄이 있지만 결과에 바로 순응한다. 신체의 장애로부터 오는, 겪을 수 밖에 없는 현실에 곧바로 순응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운명'이라는 것은 절대 남한테 맡겨서는 안되는, 오로지 내가 선택하고 끌고가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결정할 수 없는 장애인의 삶과, 그들의 삶을 헌신과 희생으로 지탱하는 사회복지사들의 삶을 이 책에서 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남에게 기꺼이 맡기는 것과 그 운명을 따뜻하게 감싸고 돌보는 거룩한 공동체가 있음을 보았다. 희망으로 온전히 극복되는 것만이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절대희망'이라는 것이 장애인과 그들을 지탱하는 복지시설의 많은 종사자들의 가슴 속 한 켠에서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는 걸 이 책에서 배웠다.

사회복지 일을 꿈꾸는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그 공동체에서 잘 해낼 수 있을지 두려움을 가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고희석 작가님께서 20대 시절 의료봉사의 꿈을 품게 되고 평생 실천해오신 것처럼, 나도 그 일을 쉽게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라는 말이 이처럼 위로가 되는 날도 있다. 꿈을 포기할 순 없기에, 이젠 정면돌파 할 일만 남았다.

이 책을 쓰신 고희석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희망은 역시 약한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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