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터 - Predato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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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오래 전에 아버지와 함께 '프레데터'를 봤다. 아버지께서는 주말에 하는 영화를 빠짐없이 챙겨 보셨는데, 나도 잔소리를 무릅쓰고 아버지와 영화를 즐겨 봤다. 아버지는 드라마보다는 액션 영화나 SF 공포 영화를 즐기셨는데, 그 취향을 나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 바람에 친구들한테 나는 앞으로 데이트 잘 하기는 글렀다는 핀잔을 제법 많이 들었다.
 

사실 이런 영화에서는 줄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영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괴생명체가 영화 속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들을 마음껏 옥죄어 주는 것이다. 그러려면 자연스럽게 영화 속 사람들과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야 한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괴물이 나타날 지 알 수 없다. 온몸이 긴장하고 턱이 저절로 덜덜 떨리고 머리카락이 쭈볏한다. 나는 유난히 겁이 많은 편이라서, 한 때 공포영화를 볼 때는 반드시 이불이 필요하다. 그리고 굉장히 인상 깊은 공포영화를 본 뒤에는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잔다. 요즘에는 그나마 담력이 약간 세져서 이불은 필요없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여자친구가 생겨서 공포영화를 보러 가면 여자친구보다 더 덜덜 떨 듯 하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훌륭한 근육을 지닌 사람을 뽑는 대회인 미스터 올림피아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는 아놀드 슈왈츠 제네거가 '터미네이터'에서뿐만 아니라 '프레데터'에서도 관객들을 만족시킨다. '터미네이터'에서는 주인공인 사라 코너를 죽이려고 뒤쫓는 로보트로 나왔지만, '프레데터'에서는 반대로 외계 생명체에게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친다. 영화 속에서 아놀드 슈왈츠 제네거는 더치라는 이름을 쓴다.

 

처음에는 특수부대원들이 정글 안에 있는 게릴라 기지를 습격하는 장면을 보고 그냥 단순한 액션 영화인 줄 알았다. 그런데 구출 대상이 완전히 가죽이 벗겨진 채 매달려 있는 장면에서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사람을 그렇게 죽인다면 분명히 내가 기대하는 대단한 괴물일텐데, '프레데터(Predator : 포식자, 육식 동물)'라는 제목을 생각하면서 더욱 기대가 부풀었다.

 

어쨌든 구출 대상이 모두 죽어서 목표를 이루지 못한 대원들은 이상하게도 단 한 명만 남아 있는 게릴라, 그것도 여자를 생포한 뒤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여자 게릴라인 안나는 동료들이 죽은 까닭을 전혀 모르고 있다. 게릴라들이고 특수부대원들이고 뭐고 전부 다 프레데터한테 처참하게 살해당하는데, 이 여자는 더치와 끝까지 살아남는다.

 

나중에 안 지식에 따르면 그 까닭은 프레데터가 '전사(戰士)'로서 자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곧 적의를 보이는 것은 그 어떤 생명체라도, 그리고 나중에 목숨을 구걸한다 하더라도 기필코 죽이지만, 싸울 마음이 없는 상대이거나 형편없이 약한 상대는 죽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특수부대원들, 특히 더치와는 피 터지게 싸운다. 더치가 프레데터를 죽이고 살아남은 것일 뿐이지, 프레데터가 안나를 보호하는 더치를 공격할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쨌든 처음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에게 끌려간 희생양은, 행군하다가 쉬면서 안나를 지키고 있던 대원이다. 흐물거리는 프레데터를 대원들 가운데 처음으로 보고 공포에 떠는 빌리를 이해할 수 없던 그는, 갑자기 나타난 흐물거리는 물체에게 끌려가 버린다. 놀란 대원들이 안나를 다그치자, 안나가 공포에 떨면서 하는 대답이 걸작이다.

 

"숲이 나와서 끌고 가 버렸어요." 

 

하긴 몸을 투명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 당연히 괴물이 숲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그들은 사라진 대원이 온몸에 화상을 입은 것처럼, 곧 그들이 게릴라 기지에서 본 가죽이 완전히 사라진 모습으로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때서야 대원들은 뭔가 자기들을 사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온 몸에 전자 장비와 무기를 부착한 외계 괴물이 그들을 쫓고 있는 것이다.

 

이 생명체는 단순히 완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최첨단 기술까지 유감없이 보여주면서, 특수부대원들을 공포로 휘감으며 하나하나 처리한다. 사람처럼 생기기는 했는데 얼굴은 너무 못생겨서 역시 외계인답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거미 대가리를 본떠서 프레데터 얼굴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하다.

 

그리고 이놈은 자외선이 아니라 적외선을 감지한다. 가면 오른쪽에는 레이저 투시 장치도 달려 있다. 그래서 이놈은 밤낮에 상관없이 열을 내는 특수부대원들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은밀하면서도 빠르고 가차없는 공격에 대원들이 하나씩 죽어나가면서, 결국 안나와 더치만 남는다. 둘만 남았을 때 드디어 구조대가 도착한다. 그러자 더치는 헬리콥터에 안나를 태운 뒤, 일부러 프레데터를 유인하여 쫓긴다.

 

그런데 프레데터가 진흙을 바른 자기를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을 본다. 프레데터는 적외선을 보기 때문에 진흙을 발라 열을 숨기고 조금 발산되는 적외선도 산란시켜 버리는 더치를 보지 못한 것이다. 더치는 그때서야 프레데터를 잡을 계획을 세운다. 물론 진흙을 빈틈없이 계속 발라서 프레데터는 함정을 설치하는 더치를 전혀 보지 못한다. 

 

게다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어서 사람들은 괴물을 볼 수가 없다. 자외선이 아닌 적외선을 감지하기 때문에 자기 모습도 얼마든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더치와 맞장을 뜨기 전에 더치를 추격하다가 물에 뛰어드는 바람에 스텔스 기능이 사라진다. 그래서 진흙을 바른 더치와 싸울 때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프레데터가 감지하지 못하는 더치가 프레데터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무장도 어설픈 것 같으면서도 제대로 하고 있다. 투박하면서도 화려한 어깨와 무릎 보호대는 기본이다. 보통 단검과는 분명히 다른 예리하고 장식이 많은 단검으로 프레데터는 사람 가죽을 벗기고 전리품으로 뼈를 수집한다. 거기에다가 어깨에는 플라즈마 포탄을 발사하는 숄더 캐논(Shoulder Cannon)까지 있다. 더치는 나무 뒤에 숨어서 프레데터를 공격하다가 플라즈마 포탄 공격을 간신히 피하지만, 그만 나무에서 떨어져서 위기를 맞는다.

 

사실 프레데터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몸에 장착한 시한 폭탄이다. 더치가 설치한 통나무에 깔리고 얻어맞아 치명상을 입은 프레데터는 시한 폭탄을 가동시킨 뒤, 놀라서 도망치는 더치를 마음껏 비웃는다. 이 또한 전사로서 자부심이 굉장히 강한 프레데터로서 당연한 행동이었다. 상대에게 져서 치욕스럽게 죽느니 차라리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시한 폭탄을 터뜨려 자살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어쨌든 매우 재미있는 영화이다. 영화 자체뿐만 아니라 프레데터라는 외계인이 매우 큰 인기를 얻었다. 지금까지 여러 영화에 수많은 외계인이 나타나 관객들에게 인기를 끌어 보려고 나름대로 힘썼다. 그러나 프레데터(Predator)만큼 인기를 얻은 외계인도 드물다. 사람 피부 같은 약한 조직 따위는 아주 쉽게 녹일 수 있는 산성 침을 질질 흘리면서 야생 동물과 같은 두뇌 수준만으로 목표물에게 달려드는 에이리언보다는, 고도로 발달한 무기를 가지고 목표물을 정확하고 깔끔하게 처리하는 프레데터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어찌나 이 외계인에 열광했는지 나는 이 외계인을 직접 만나보고 그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내고 싶었다. 그러려면 과학자가 되어 외계인을 찾아야 했다. 그럴 준비를 한답시고 어머니가 가져다 놓은 학습지는 안 풀고, SF 공상 소설을 쓰고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을 뒤적였다. 역시 어린아이다운 철없고 순진한 생각과 행동이었다. 어머니는 학교에서 시키는 공부는 제대로 하지 않는 내 모습을 매우 싫어하셨고, 몇 번이나 호되게 혼난 뒤 나는 그 꿈을 잃어버렸다.

 

대학교에 와서 다치바나 다카시라는 사람에게 푹 빠지는 바람에, 전공과는 상관없이 과학에 열정을 불태우던 내가, 어릴 때 했던 생각을 다시 떠올려 외계생물학을 공부하려고 마음먹었던 때는 2학년 1학기였다. 자유전공 수업으로 '생명과학'을 들었는데, 수업을 열심히 듣지 않아서 성적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DNA 따위 기초 생물학이 다루는 내용은 익혔으니, 어렸을 때 알고 싶었던 외계생물학을 건드려 봐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 뒤 열심히 자료를 찾아봤지만, 외계생물학 자료라고 해 봐야 미국 몇몇 대학과 NASA 따위 기관에 등록된 몇몇 자료들밖에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어떤 특정한 외계 생명체를 직접 다룬 내용은 없었다. 기껏해야 드레이크 방정식 따위 외계 문명을 찾는 방법, 환경에 따라 예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외계 생명체 모습,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 따위 내용뿐이었다. 내가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는 미국에서 이미 외계인 시체를 많이 확보했고, 그를 연구하여 엄청난 외계생물학 자료를 축적했다는 주장이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자료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인터넷에 외계 생물체를 연구하는 곳이 있기는 했지만, 영화에 나오는 외계 생명체만 다뤄서 나를 크게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그저 잡다한 SF 지식이나 잔뜩 얻었을 뿐이다. 

 

초등학생 때 그랬던 것처럼 대학생 때도 어떻게 보면 굉장히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많은 시간을 보냈다. 물론 어느 정도 발전하기는 했지만, 확실한 결과를 내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초등학생 때나 대학생 때나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순식간에 어떤 알 수 없는 열정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상한 짓을 서슴없이 하게 할 정도로, 프레데터는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나는 영화를 보는데 이골이 난 사람이 아니라서 영화를 제대로 분석하고 평점을 줄 수는 없지만, 만약 준다면 이 영화에는 무조건 별 다섯 개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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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아톤 - Malato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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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뿐인 여동생이 2005년 2월 2일에 부산에 놀러왔다. ‘말아톤’을 보고 싶다고 난리를 쳐서 남포동 CGV에 가서 영화를 봤다. 평이 매우 좋다고 해서 기대를 어느 정도 하고 들어갔는데, ‘말아톤’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참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봤다. 지금까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일은 기껏해야 두 번밖에 없으니 ‘오랜만에’라는 표현도 참 어색하다. 예전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많이 본 것처럼 들리니까. 내가 지금까지 영화관에서 본 영화는 ‘실미도’와 지금 감상문을 쓰고 있는 영화 ‘말아톤’인데 나는 이 두 영화를 보면서 여러 번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눈물을 흘린 까닭보다는 영화를 보면서 내가 한 잡다한 생각을 더 많이 쓰고 싶다.

이 영화는 두 사람에게 초점을 둔다. 윤초원(조승우 분)과 초원이 엄마 경숙(김미숙 분)이 그 두 사람이다. 초원이는 몸은 스무 살이지만 정신 수준은 다섯 살에 멈춰버린 자폐증 청년이다. 경숙은 초원이를 지극 정성으로 보살핀다. 그러느라 집안일에도, 한창 사춘기인 둘째 아들에게도, 남편에게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나는 그런 경숙을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여기에서 많은 생각이라는 말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생각이 조금씩 바뀌어서 나는 영화를 보면서 매우 혼란스러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왜 그랬는지 한 번 이야기해 보겠다.

경숙이 초원이에게 매달리는 것은 진정한 내리사랑인가, 아니면 집착일 뿐인가?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릴 것이다. 물론 홍보물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름, 엄마’라고 나오지만 약간 삐딱하게 보자면 끝도 없다. 초원이가 마라톤 전구간인 42.195km를 뛰는데 성공하는 것을 엄마는 왜 바랐는가? 초원이도 그것을 바라고 있었는가? 초원이가 달리기를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초원이가 과연 그런 목표를 지니고 있었는가? 초원이가 달리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대한 의심은 나중에 하도록 하고, 일단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자. 초원이가 마라톤 전 구간을 완주하기를 그저 엄마만 바라지 않았는가? 서울마라톤대회에서 초원이가 3등을 했을 때 찍은 사진 속에서 경숙은 웃고 있지만 초원이는 웃지 않고 있다. 왜?

경숙은 젊을 때 초원이를 공원에서 버렸다. 그것이 아주 짧은 순간 동안 한 생각 때문에 그랬을 뿐 결코 진심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그러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자신 있다고 대답하지는 못하겠다.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왜냐하면 경숙이 나중에 초원이에게 집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봐도 집착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는 잘못했다면서 앞으로 남부럽지 않게 초원이를 잘 챙겨야겠다는 강박 관념 때문에 경숙은 결국 초원이에게 집착하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초원이를 지도하던 전직 유명 마라톤 선수인 정욱이 경숙에게 ‘자식 사랑과 집착을 착각하지 말라’고 말하자 왜 경숙은 뭐라고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는가? 정곡을 찔려서 그런 것이 아닐까?

집착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매우 괴롭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집착하는 사람이 훨씬 더 괴롭다. 그렇기에 초원이가 어릴 때 엄마가 자기를 버렸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 경숙은 어떻게 되었는가? 초원이에 대한 집착으로 괴로워하면서 생겨서 곪고 곪은 상처 때문에 결국 쓰러지지 않았는가? 수술을 받은 뒤 경숙은 남편에게 자기가 초원이에게 집착했다고 인정한다. 그 결과는 어땠는가? 한창 사춘기인 둘째 아들은 삐뚤어졌고 집안일도 제대로 못 해서 집안은 엉망이 되었다. 둘째 아들은 엄마에게 뺨을 얻어맞은 뒤 자기에게도 관심을 좀 가져줄 수 없냐고 울먹이면서 말한다. 삐뚤어진 둘째 아들은 초원이에게만 집착한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경숙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곱게 볼 수도 없었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아이들이 부모가 집착하는 바람에 꿈을 잃어버리고 자기가 원하는 길을 제대로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우울해진다. 나는 나름대로 줏대가 생긴 뒤 예전보다 훨씬 더 소신껏 밀어붙이고, 그 소신이 과연 옳은지도 항상 점검해 보기 때문에 그런 아이들을 보면 더욱 안타까운지 모르겠다. 물론 영화에서 초원이는 자기가 달리기가 좋다고 말한다. 천만다행이다. 만약 초원이가 달리기를 싫어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면 그녀는 과연 어떠했을까? 부모는 자식의 목표와 자기의 목표를 혼동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기의 목표를 자식의 목표라고 그러면서 자식에게 자기의 목표를 강요하면 둘 다 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행스럽게도 초원이는 달리기를 좋아하며 달리기에 대한 순수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정욱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지만 차츰 정욱에게 마음을 열고 정욱도 초원이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초원이는 자두건 물이건 나눠주는 법이 없다가 나중에는 정욱에게 물병을 권한다. 그러면서 초원이는 열심히 훈련하며 마라톤 완주라는 목표에 조금씩 다가가기 시작한다. 달리기에 대한 순수한 의지가 드디어 결실을 볼 때가 가까워진 것이다.

그런데 경숙이 또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자기가 초원이에게 집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뒤에도, 그녀는 자기의 목표와 자식의 목표를 여전히 혼동하고 있었다. 초원이는 일기장에 내일 할 일은 ‘말아톤’이라고 또박또박 적어놓으며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데, 그녀는 자기가 욕심을 버렸다고 해서 아들을 마라톤 대회에 못 나가게 하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초원이는 춘천국제마라톤대회에 나간다. 엄마와 동생이 쫓아와 말리지만 초원이는 선수들과 섞여 사라진다.

“초원이 다리는 몇 만 불?”

“백만 불…….”

“몸매는?”

“끝내줘요!”

아들이 자기 손을 놓고 달려가 선수들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드디어 초원이에 대한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홀가분해하지 않았을까? 그 순간이야말로 초원이와 경숙이 서로를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고 둘 다 자유로워지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멋대로 해석하자면 내리사랑과 순수한 의지가 드디어 빛을 보는 순간이라고 봐야 하는가?

결국 초원이는 3시간 안에 42.195km를 달리는데 성공한다. 마라톤이 끝난 뒤 초원이는 누구보다도 해맑게 웃는다. 그 웃음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으랴. 달릴 때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그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나는 그것도 의심했다. 과연 달리는 그 자체가 즐거울까? 차라리 정욱이 경숙에게 했던 말이 나에게 훨씬 더 와 닿는다. 마라톤이 무슨 어린애 뜀박질인 줄 아는 것일까? 그저 뛴다고 해서 즐거워서 힘든 것도 잊을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걸까? 심장에 더해지는 압박과 풀리는 근육이 과연 그에게 행복을 주는가? 달릴 때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는 느낌을 경숙은 알고 있었을까? 초원이는 과연 달리는 자체가 즐거웠을까? 달리기가 끝난 뒤에 느낄 수 있는 성취감과 평온함이 그 힘듦을 보상하고 남는다고 초원이가 말한다면 훨씬 더 그럴 듯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몸과 마음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 욕망에 집착하고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초원이를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도 내 관점으로 보는 바람에 초원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초원이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초원이가 달리기를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마라톤이 끝난 뒤 그가 지은 환한 웃음을 보라. 무엇을 더 의심하겠는가?

‘말아톤’의 실제 주인공인 배형진 군(그냥 형진이 형이라고 부르고 싶다만 원래 생판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격식을 차려서 이렇게 쓴다)이 춘천국제마라톤대회가 끝난 뒤 철인 3종 경기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자막이 나오면서 영화는 끝난다. 그 뒤 배형진 군은 어떻게 되었는가?

영화를 보고 나서 며칠 뒤 나는 배형진 군이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관한 새로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한 사회인으로서 살아갈 능력을 키우려고 지금 직업학교에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달리기를 하고 싶어서 매우 힘들어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초원이가 다시 직업학교에서 직업 훈련을 받을 때 영 어설펐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배형진 군은 이제 마라톤 훈련을 받을 때처럼 잘 해내고 있다고 한다. 지금 배형진 군의 어머니는 예전처럼 그에게 집착하지 않으며, 그가 한 사회인으로서 정상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그 새 소식을 듣고 빙그레 웃었다.

배형진 군.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웃음과 눈물과 감동을 선사해 주기 바랍니다. 그대가 한 사회인으로서 잘 살아가고 있다는 새로운 소식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영화 정말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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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황석영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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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에 중앙아시아를 순방하고 있던 이명박 대통령을 따라간 황석영이 이명박 대통령과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는 사실 잘 모른다. 그렇기에 진보진영을 이끄는 대표 문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그가 이명박 정부가 그토록 선전하는 중도실용정부를 긍정하면서 중앙아시아, 몽골, 만주와 관련된 원대한 구상을 늘어놓다가 변절 논란에 휩싸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내는 비판을 접했지만, 알면 알수록 더욱 헷갈렸다. 이명박 정부가 구상하는 동북아 정책과 자기가 세운 구상이 일치하다면서 거침없이 이명박 정부 예찬론을 펴는 황석영을 보면서 도대체 중앙아시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만 더욱 궁금해졌다. 이문열이 촛불 장난 너무 심하게 하면 손을 데인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대한민국 문학계에서 존경받는 문인 대열에서 아주 간단하게 탈락하더니, 이번에는 남북 화해와 평화 통일에 문학이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지금까지 활발하게 논의해 온 작가 황석영이 지금까지 잘한 것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이명박 정부를 옹호하면서 끝없는 나락으로 굴러떨어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거기에 덧붙여서 '작가는 좌우를 넘나들 권리가 있다', '기억력이 나쁠수록 좋은 작가'와 같은 발언으로 지극한 후배 사랑을 보여준 김지하 시인까지 사람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서거하면서 정국이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에 휩싸여 온통 혼란스러운 마당에, 이제는 민주주의 정신을 문학으로서 뒷받침하는 문인들마저 이 모양 이 꼴이라니! 아무리 많은 글을 읽어보더라도 이명박 정부 편을 든 황석영을 이해할 만한 단초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도대체 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미 황석영은 1993년에 발표한 '사람이 살고 있었네'에서 지난 세월 동안 반공 논리에 물들어 모든 이념 지평 자체가 일그러져 버린 대한민국에서 인식하던 '괴물'이 사는 북한이 아닌, '사람'이 사는 북한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한 적이 있다. 이 책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에서는 그보다 더 나가서 북한이 어떻게 자력갱생 체제를 꾸려나가고 있는지뿐만 아니라, 남북 통일에 문학이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다루는 통일문학론과 그와 관련된 여러 깊은 논의를 보여준다. 북한 문학과 사상을 이해하려면 주체 사상과 유물론을 반드시 이해해야 하기에, 그와 관련된 논의 또한 빠뜨리지 않는다.

 

플라톤이 이데아를 강조하면서 문학 같은 예술은 저급한 것이라고 치부하며 시인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사실 그 진정한 까닭은 그 또한 문학이 지닌 크나큰 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돌이켜 볼 때,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지배한 독재 권력이 황석영을 좋지 않게 바라본 까닭 또한 그와 유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러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60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분단 체제를 겪으면서, 통일에 관한 인식 지평 또한 상당히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다. 북한이야 철저한 세뇌 교육으로써 인민들을 친미 제국주의를 숭상하는 남한 괴뢰 정권을 몰아내는 선봉에 설 혁명전사로서 필요한 정신 무장을 시킬 것이다. 하지만 남한은 북한과 견주었을 때 민주주의가 상당히 진척된 만큼, 이미 그런 세뇌 교육 따위는 절대 통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가 반공 독재 시대로 돌아가고자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있지만, 만만치 않은 저항에 부딪치고 있는 사실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지닌 그런 힘을 분명히 믿기에 황석영 또한 독재 정권에 맞서 한평생을 살아온 것이며, '펜은 칼보다 더 무섭다'라는 속담을 몸소 실천해 온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중앙아시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대한민국을 다시 철권으로 통치하려고 하는 이명박 대통령이 늘어놓는 말뿐인 구상에 황석영이 그토록 깊이 공감했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명박은 황석영에게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에 나오는 것처럼 북한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게 '비핵개방 3000' 정책을 펼치면 된다고 하고, 황석영은 이명박에게 '신화는 없다' 마지막 장에 나오는 동북아 관련 정책 구상을 실현하는데 협력하겠다고 한 걸까? 두 사람이 쓴 두 책에 나오는 내용을 이번 일과 연관 지어 생각할 때 그런 결론을 얻을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결론을 내리면서도 황석영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황석영이 지금까지 여러 저서에서 밝힌 북한론과는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비핵개방 3000' 정책 자체가 모순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과연 몰랐을까? 황석영이 그토록 비판한 독재 정권과 이명박 정부는 정말 다르다고 느꼈을까? 순진한 민주주의 운동가들이 생각하듯이 1987년 6월 항쟁이 이끌어 낸 6.29 선언이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획을 그었고 지금까지도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기에, 이제는 다시 민주주의보다 더 큰 문제인 경제 성장에 치중해야 한다는 논리에 굴복하고 만 걸까?

 

정신 없이 쏟아지는 비판을 바라보면서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아니면 뒤늦게 정말 반성한 건지는 황석영 본인 말고는 아무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는 이명박 정부가 북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핑계로 PSI 전면 참여를 선언하자, '중도실용'에 걸었던 실낱 같은 희망마저 사라졌다고 이명박 정부를 다시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이미 때는 늦은 것 같다. 윤성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진보와 보수가 같이 일할 수 없는 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이것저것 따져볼 때 이명박 정부가 보수 세력이라는데 절대 동의할 수 없는 터라 그다지 와닿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진정한 보수 또는 우파는 찾아볼 수 없었다.

 

뜬금없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쓸 구상을 처음으로 한 건 2006년 8월이다. 그 때 나는 2006년 해병대 정훈퀴즈대회에서 1등을 차지해 해병대 대표로 해군본부 정훈퀴즈대회에 참가할 정도로 정훈 교육을 착실하게 받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기준을 잡고 남한과 북한을 견준 뒤, 이 책에서 북한을 서술하는 논조를 비판하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구상만 해 놓고 까맣게 잊고 있다가, 무려 3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 황석영이 언론에 떠들썩하게 보도되면서 이 책이 다시 떠올렸다. 그 바람에 처음에 한 구상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이 글에 집어넣게 되었다. '여러모로' 씁쓸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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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 폭력과 추방의 시대, 촛불의 민주주의를 다시 묻는다 당비의생각 2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 산책자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2008년 8월을 기점으로 그토록 뜨겁게 여름밤을 달궜던 촛불은 저물어 갔다. 그렇게 쇠잔한 촛불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부산대학교 총학생회실에 근저당 형님이 찾아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 2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나는 전공 원서를 덮고 한달음에 총학생회실로 뛰어 내려갔다. 8월까지 이어졌던 촛불 예비군 활동이 거의 중단되었는지라 예전에 같이 활동하던 형님 또한 한동안 뵙지 못했기 때문이다.

 

총학생회실에 들어갔더니, 정림이 누나, 진성이 형, 혜원이 누나, 수성이 형과 같은 주요 간부들이 근저당 형님이 준비한 슬라이드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때 근저당 형님은 일단 부산에 있는 대학교 총학생회를 결집시켜서 한계에 처한 촛불에 새로운 동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연대 활동을 전개하려는 소망을 품으신 터라, 매우 열성 있게 슬라이드에 담긴 촛불 투쟁 발전 이론을 설명하고 계셨다. 촛불 시위를 대하는 이명박 정부와 수구 세력을 바라보면서 매우 분개하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결심한 분만이 보여주실 수 있는 열정 넘치는 모습에 저절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 때 근저당 형님이 설명하셨던 촛불 투쟁 발전 이론은 매우 논리정연했기에, 지금까지 100여 차례 벌어진 촛불 시위가 띠는 양상을 체계를 갖춰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 책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를 읽으면서 그 안에 담긴 온갖 분석이 지니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데도 유용했다. 그렇기에 일단 여기에 그 이론을 간략하게 설명한 뒤에, 그에 비추어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한 바를 제시하고자 한다.

 

* 이 이론에서 제시하는 시제(과거, 현재, 미래)는 내가 이 강의를 들었던 2008년 10월을 현재로 잡은 것이다.

 

 

1. '촛불 - 그 첫 번째 이야기(과거)' = 'Candlelight - Season 1(The Past)'

 

2009년 4월 15일에 교육과학기술부에서 학교 자율화 정책을 발표한 뒤, 놀랍게도 10대 여고생들이 처음으로 거리로 뛰쳐나와 목소리를 높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들이 누구보다도 더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거리에서 밝히는 모습을 본 시민들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2009년 4월 18일에 발표된 한미 쇠고기 졸속 협상 결과는 시민들을 경악 속으로 몰아넣었고, 이 정부가 지닌 문제점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달은 시민들은 더는 10대들에게 부끄럽지 않고자 이명박 정부를 규탄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벌이는 집회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광우병 괴담론'만을 설파하던 이명박 정부를 보면서, 시민들은 단순히 한미 쇠고기 협상 그 자체만 문제로 삼지 않고, 이명박 정부가 지니고 있는 근본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촛불 집회는 갈수록 규모가 커졌고, 그 안에서 다뤄지는 주제 또한 매우 다양해졌다. 결국 청와대를 태울 기세로 타오르는 촛불 수 십 만 개 앞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형식으로라도 고개를 숙여야 했다.

 

하지만 다양한 주제를 포괄해서 이명박 정부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연대 조직을 구성하지 못하는 바람에, 온갖 논란만 촛불 안에서 거세져 촛불이 타오르는 동력을 떨어뜨렸다. 이뤄야 할 것은 많았지만 촛불만 들고 청와대로 계속 돌격한다고 해서, 아예 귀가 없는 듯한 이명박 정부가 달라질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는 회의론이 우세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엠네스티 인권침해 감시단이 한국을 떠난 뒤 다시 반정부 세력을 격렬하게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촛불 집회만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의견이 더욱 강하게 제기되었다. 그렇게 촛불은 차츰 사그라들었다.

 

 

2. '촛불 - 그 두 번째 이야기(현재)' = 'Candlelight - Season 2(The Present)'

 

촛불 집회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촛불 집회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자 그 까닭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도 전망했다. 100만 명이나 모였는데도 그냥 고개 한 번 숙이고 권좌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 이명박 대통령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명박 대통령을 끌어내리기보다는 이명박 대통령을 비호하는 한나라당과 친일 수구 세력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하는 좀 더 근본에 가까운 처방을 내려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게다가 이명박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촛불 집회에 관해 내놓는 의견을 분석한 뒤, 무작정 촛불만 들고 정권 퇴진을 외치지 말고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 지지율을 떨어뜨리고자 다양한 사업을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그러면서 촛불 집회가 한창일 때 각자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던 이들이 지역별, 단체별, 분야별로 나누어져 온갖 강연회, 폼보드 전시회, 영상 상영, 바른언론운동, 자원 봉사, 교양/학습모임 운영, 전단지 배포, 1인 시위 따위 온갖 사업을 진행했다. 대한민국이 지니고 있는 온갖 모순에 관해 사람들이 깨달아야지, 자기 또한 수구 세력들이 벗겨먹고 부려먹을 현대판 노예 수준에 지나지 않으면서 자기를 봉으로 아는 수구 세력을 죽어라 지지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면서도, 틈틈이 열리는 온갖 집회에는 웬만하면 빠지지 않고 참석해 힘을 보탰다. 아무리 집회로는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명박 정부에게 시민들이 여전히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으로서 집회는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한 단체에서 주최하는 집회에 다양한 단체들이 모여서 한 목소리로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몇 번이고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연대의식을 강조하는 좋은 효과를 냈다.

 

 

3. '촛불 - 그 세 번째 이야기(미래)' = 'Candlelight - Season 3(The Future)'

 

수많은 사람들이 각 지역과 분야에서 다양한 사업과 투쟁을 벌인 끝에, 이명박 정부가 지니고 있는 근본 문제와 그 심각성을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깨닫게 된다. 그 뒤 초기 촛불 집회 때 드러난 문제점을 보완하는 작업이 대부분 끝나고, 사업과 집회가 조화를 이룬 새로운 촛불 동력으로서 아고라에서 그토록 꿈꾸던 거대한 집단 지성이 나타난다. 그 집단 지성은 대한민국에서 수구 세력이 더는 발을 붙이지 못하게 이명박 정권뿐만 아니라 그 존립 기반 자체까지 초토화시킨다.

 

 

지금까지 제시한 이 세 단계를 하나로 묶어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명박 정부가 저지르는 실정 규탄하며 촛불 집회 시작 -> 이명박 정부와 수구 세력이 온갖 희한한 논리 들이대며 촛불 집회 탄압 -> 촛불 규모 확대 -> 촛불 집회 탄압이 더욱 거세짐 -> 촛불 규모 축소 -> 촛불 집회 한계와 좀 더 근본에 가까운 운동 방향 인식 -> 이명박 정부와 수구 세력 실체를 폭로하는 갖가지 사업 전개 -> 민주주의 의식 고양과 이명박 정부와 수구 세력 퇴진 분위기 조성 -> 예전과 다른 훨씬 더 이론으로든 결속력으로든 강하게 무장된 촛불 민주주의 운동 시작 -> 이명박 정부 퇴진 -> 한나라당과 뉴라이트로 대표되는 수구 세력 소멸 -> 정권 세대 교체와 진정한 민주주의 정부 수립

 

 

그러나 역시 현실은 이론과는 다르게 전개되었다. 위에서 설명한 틀을 갖다대자면 이미 '촛불 - 그 두 번째 이야기(현재)' = 'Candlelight - Season 2(The Past)'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다고 봐야 한다.

 

예전에는 촛불 집회에 모인 그 자체만으로 아무리 지금까지 이념이 달랐다고 하더라도 어떻게든지 유기체처럼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민주주의 의식을 일깨우고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어떤 실체를 띠는지 깨닫게 하려는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각 단체마다 자꾸만 문제가 생겼다. 사람들이 그토록 강조하던 새로운 민주주의 생명체로서 촛불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보여주던 그 유기성과 역동성, 그리고 그 덕분에 빛났던 개념들이 알게 모르게 사라지고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사실 여기서부터 글을 쓰기가 극도로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초기 촛불 집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논리로 그 뜻을 부여했다. '집단 또는 대중 지성', '웹 2.0에 기반한 민주주의', '지금까지 찾아보지 못한 새로운 지성체'……그렇게 찬양받던 촛불 집회가 사실상 막을 내린 뒤 이제는 냉철하게 비판받아야 할 처지에 이르면서, 예전에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던 그런 개념들 또한 그저 한 때만 유효했던 것이었다고만 단정하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새롭게 비판받아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대개 이런 논리를 제시하면 분명히 거부 반응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 예전에 잘못했던 것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설파하면, 옛날과 지금은 다르다든가 어떻다든가 온갖 희한한 논리를 들이대면서 그들이 믿었던 빛바랜 가치들을 떼어놓기 힘들어한다. 물론 나 또한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런 면이 단순히 개인에게만 해를 끼치는 것과 다른 사람, 조직, 단체, 심지어 국가에도 해를 끼치는 건 분명히 차원이 다른 일이다. 그렇기에 내가 관련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따질 것은 철저하게 따지고 넘어가야 한다. 특히 나와 연관되어 있는 것은 더욱 냉철하게 따져야 한다.

 

나는 지난 한 해 동안 민주주의를 살리고자 여러 단체에서 활동했다. 처음에는 혼자서 촛불 집회에 참가하다가 7월에 촛불 예비군에 들어갔고, 촛불 예비군이 활약할 공간을 잃어버린 뒤에는 부경 아고라에 몸을 담았다. 그 가운데 내가 가장 많은 신경을 쏟았던 곳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부경 아고라이다. 그 안에서 나는 전 촛불 예비군이었다는 까닭으로 처음부터 호응을 얻었고, 본격으로 부경 아고라 사업에 참여하면서부터는 그 안에서 활동하던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 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인정하기 싫은 현실이지만, 분명히 촛불은 꺼졌다. 2008년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지금 상황에서는 집회다운 집회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물론 집회가 아닌 사업으로 이명박 정부에 대항하는 추세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 사업 규모가 너무나도 초라해 보인다. 이명박 정부와 수구 세력을 몰아내고자 어떻게든지 힘을 합치고 연대하자는 목소리는 공허하기 짝이 없다. 여기저기에서 찢어진 단체들은 그저 민주주의 사업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부 문제 때문에 싸움만 일삼는다.

 

나 또한 그 싸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그 결과는 항상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부경 아고라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올해 7월에 우연히 다시 들어간 그 곳에서 나는 예전에 내가 주장했던 바를 다시 역설했지만, 예전과 마찬가지로 공허하기 짝이 없는 논쟁만 일삼아야 했다. 일은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한 채 제풀에 지쳐서 부경 아고라에서 다시는 활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선언하고 말았다.

 

부산에서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민주주의를 살리는 과업을 하는 곳이 부경 아고라와 부산희망촛불 말고는 찾아보기 힘든 데다가, 둘 다 나에게는 껄끄러운 곳이 되어버렸다. 곧 다시는 부산에서 촛불을 드는 사람들과는 사회 운동을 함께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누구도 나를 비난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 말을 절대 믿지 않았다. 그토록 목소리를 높여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교묘한 견제와 껄끄러움을 누구보다도 더 절실하게 부경 아고라에서 체험했다. 그 안에서 나는 더욱 옹졸해지고 초라해졌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촛불을 끄고 말았다. 그 뒤 이 책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를 읽으면서 지금까지 나와 이 사회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끼쳤던 촛불 집회에 관한 온갖 단상을 접했다. 촛불 집회가 다룬 주제는 매우 많았기에, 그 주제마다 한 사람씩 나서서 많은 비판을 가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조금씩 지쳤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는 힘이 다 빠져버려서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활기차고 모든 더러운 것을 쓸어버릴 것 같았던 촛불 집회 안에 그토록 많은 한계가 도사리고 있었다고 하니, 솔직히 그 안에서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녔던 사람으로서 믿을 수 없었다. 결국 대한민국은 그들 위에 있는 이명박 정부와 그 권력층이 계획하는 술책에 굴복하고 이리저리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걸까.

 

흔히 글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한 가지가 일관성이라고 한다. 하지만 자크 데리다는 모순과 불완전함이 글 자체에 반드시 나타나는 고유한 특성이라고 했다. 과연 자크 데리다가 한 말이 이 사회에도 적용되는 것일까.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따지고 보니 결국 상식과는 거리가 먼 우리들만이 상식이라고 생각했을 뿐인 것들이었던가. 이 책에서 비판하는 촛불 집회가 지닌 문제점을 하나씩 이해하다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대한민국에서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이 그랬다면, 부경 아고라에서 나는 어땠는가. 내가 상식 문제까지 거론하고 싶었을 정도로 이상한 쪽으로 이야기가 흘렀던 논쟁 사례를 여기에 일일이 들면서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고 이야기하는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 잘못을 알고 있기에 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을까.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도 서거하면서, 고인들이 한평생 구현하고자 힘썼던 민주주의를 살리고자 다시 뭉쳐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고 있다. 민주당에서는 이번에 서거한 두 전 대통령 영정을 같이 걸어놓으면서, 그동안 내부에서 벌어졌던 분란을 참회하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지금 상황에서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항할 수 있는 단 하나뿐인 정치 세력이 민주당인지라 응원해 줄 수밖에 없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갈등을 빚을 때 지금 민주당에서 지도부로 있는 의원들이 보여준 작태를 생각하면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들만이 권력 암투 현장에서 수구 세력을 막을 수 있는 단 하나뿐인 세력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렇게 따지면 부경 아고라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나 또한 내가 가지고 있는, 결국 따지고 보면 옹졸하기 짝이 없기만 한 이 적개심을 버리고 부경 아고라에서 다시 활동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근근히 사업을 이어가고 있는 단체들 또한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든 간에 연대해서 이명박 정부와 수구 세력과 맞서 싸워야 하지 않을까. 대운하 착공과 양산 재보선 선거가 40여 일밖에 남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 연대가 지니는 중요성은 더욱 크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한다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상황에서는 결국 아무 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결국 나는 부경 아고라를 비판할 자격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랬기에 부경 아고라에서 나갈 것이면 부경 아고라에 관해서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렸던 것이리라.

 

그래서 나는 결국 입을 닫았다. 그리고 정말로 촛불을 놓았다. 4기 카페지기를 뽑으려고 하는 부경 아고라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어떻게든지' 굴러갈 것이다. 그렇게 '어떻게든지' 유지될 부경 아고라에서 내가 지금까지 저지른 과오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그런 과오를 인정하지 못하고 여전히 옹졸하게 버티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는 없다. 그 자괴감은 아마도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아. 이런 내가 미친 듯이 싫다. 지금 이런 내가 밉다.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내가 촛불을 들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내 생각을 관철시키려는 불 같은 성격과 독단만 있을 뿐, 어떤 일을 차근차근 해 나가는 의지 따위는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느 조직에 들어가든지 해만 끼칠 뿐입니다."

 
"정말 촛불을 놓으실 건가요."


"언젠가는 다시 들 겁니다.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촛불을 떠나서는 절대 살 수 없습니다. 어디에선가 분명히 일은 하고 있겠습니다. 꺼진 촛불은 어떻게든지 다시 살려야 합니다. 그럼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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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파? 눈먼 돈, 대한민국 예산 - 256조 예산을 읽는 14가지 코드
정광모 지음 / 시대의창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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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면으로 가려고 80번 버스를 탔다. 80번 버스를 타고 부산대학교에서 서면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온천장이 나온다. 온천장 곳곳에서 보도 벽돌을 갈아끼우는 공사가 한창 이어지고 있었다. 공사 현장 주변에서는 돌가루가 펄펄 날렸고, 인부들은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벽돌을 나르다가 양푼이 비빔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돌을 자르는 기계가 시끄러운 소리를 냈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차와 부딪칠까봐 조심스럽게 인도와 차도 경계를 걸었다.
 

워낙 보도 벽돌 교체 공사를 자주 본 탓인지, 이제는 보기만 해도 짜증이 밀려온다. 하지만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그 짜증이 괜한 짜증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괜한 짜증이 아니라는 말은, 공사 때문에 시민들이 보도를 걸어갈 때 단순히 불편해서 불만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 보도 벽돌 교체 공사를 그렇게 자주 볼 수밖에 없는 까닭에 있다.

 

왜 그렇게 보도 벽돌을 천편일률로 갈아끼우는 공사를 해마다 일정한 시기만 되면 밥 먹듯이 하는 걸까? 오세훈 서울특별시장처럼 최소한 여성용 굽 높은 구두 뒷굽이 끼이는 문제를 막고자 보도 벽돌 틈새를 아예 없애버리는 정도라면 그나마 시민들에게 호평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 최소한 심의도 없이 멀쩡한 벽돌을 갈아엎어 예산을 헛되이 쓰고 시민들을 불편하게 하는 한심한 작태는 도대체 왜 벌어지는 것일까?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대부분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는 듯하다. 분기마다 기획예산처에서 심의한 대로 각 행정 단체가 예산을 배정받는데, 예산 집행 실적에 따라 다음 분기에 배정될 예산 총액이 정해진다. 만약 예산 집행 실적이 저조해서 예산이 남았다면, 새로운 예산이 집행되기 전에 반드시 그 예산을 중앙 정부에 다시 돌려줘야 한다. 그리고 지난 분기보다 더 적은 예산을 배정받게 된다.

 

예산 집행 합리화 정책은 분명히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그 정책이 의도하는 대로 정말 국가 발전과 시민 복지 향상에 필요한 정책만이 실행되고, 그 실행 계획이 이치에 맞게 짜여 예산이 절약되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보도 벽돌 교체 공사를 하고 그에 따라 예산을 배정하면, 분명히 예산은 집행된 것이다. 그렇기에 집행 실적 그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 집행 내역이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 상부 기관에서는 따져보지도 않는다는 말인가? 예산 집행 결과 보고를 받는 상부 기관이 보통 시민들도 다 알고 있는 문제점을 하부 기관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를 보고 판단할 능력조차 없다는 것인가?

 

명백한 예산 낭비 사례는 기획예산처 자체 감찰단이나 감사원 같은 상부 기관에서 분명히 지적하는 게 원칙이다. 지적한 뒤에는 다음 분기 예산 편성 때 예산 총액에 반영하는 식으로 반드시 벌칙을 줘야 한다. 그렇게 남는 예산은 국가에 위급한 일이 생기거나 국가 재정 정책이 변동되면서 급히 더 많은 자금을 끌어와야 할 경우가 생길 때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는 비상 국고로서 비축할 수도 있으며,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방안을 마련해 유익하게 쓸 수 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예산 낭비 방지 방안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경제에 관해서는 '경제학원론'도 제대로 모르는 거의 일자무식에 가깝기 때문에, 경제신문을 읽더라도 여전히 그 복잡한 내용을 명쾌하게 이해할 수 없다. 과학과 마찬가지로 경제도 주요 교양 서적과 주요 인터넷 경제 카페에 올라오는 게시물을 부지런히 읽을 뿐이다.

 

그런데 그 수많은 글 가운데 국가 예산과 관련된 내용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내가 자주 가는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http://cafe.daum.net/kseriforum)'은 내가 알고 있는 경제 관련 인터넷 사이트 가운데 가장 정확하고 수준 높은 토론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알고 있는데, 이 곳에서 가장 많은 게시물이 올라오는 '경제현안', '부동산정책'란에서는 예산과 관련된 게시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설사 게시물이 올라온다고 하더라도 국가 예산에 관해 세밀하게 파고든 게시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개 언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혈세를 낭비하는' 온갖 전시 행정과 정책을 향한 여러 가지 지적과 비판을 담고 있을 뿐, 그 예산 기획과 집행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 문제점은 무엇인지 밀도 있게 포착한 게시물은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 같다. 혹시 누군가가 자료를 제대로 찾아보지 않고 글을 쓴다고 실제 사례를 제시하면서 질타한다면 할 말이 없다만, 어쨌든 내가 읽어본 게시물 범위 안에서는 그렇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인터넷 서점에 이 책 '또 파? 눈 먼 돈 대한민국 예산'이 올라오자마자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책을 사서 한 장씩 넘길 때마다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흔히 언론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갖가지 예산 관련 비판을 몇 가지 주요 주제로 묶어서 그 핵심 논리에 자기 생각을 덧붙여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솜씨며, 내가 지금까지 가장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국가 예산과 관련된 온갖 구조 문제에 관해 저자 정광모가 정부에서 일한 경험을 토대로 명쾌하게 파헤친 논리력이며, 나무랄 것이 하나도 없다.

 

이 책에 나오는 여러 가지 내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저자가 제시하는 '예산실명제'이다. 예산과 관련된 모든 정책 입안과 집행 과정에 실명을 기재한 사람이 책임을 지도록 하는 제도이다. 승객들에게 안전 운전과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운수업계에서 운행실명제를 실시하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볼 수 있다. 난폭운전을 하거나 승객에게 친절하지 않은 기사를 고발하고 싶으면 자기가 탄 버스 정보를 회사에 알려주고 문제를 지적하면 되는 것처럼, 예산안 계획과 집행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다면 그 계획과 집행을 담당한 사람에게 책임을 물으면 되는 것이다.

 

이는 국가 예산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고위 공무원 사회가 지니고 있는 온갖 병폐를 송두리째 개혁할 수 있는 매우 좋은 방안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 공무원 사회가 지닌 막강한 권력이 보여줄 수밖에 없는 치부를 건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그만큼 저항 또한 극렬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이 좋은 제안이 현실로 옮겨질 가능성을 짐작하기도 조심스럽다. 그렇기에 책을 읽으면서 감탄사를 연발하면서도 이 책에서 지적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어떻게든지 개혁하려고 하지 않는 부패한 기득권 구조에 분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대한민국 예산을 좌지우지하는 고위 공무원 사회가 저지르는 작태를 고발한 CHAPTER 13~14를 읽다 보면, 체념하는 버릇을 지닌 사람들은 또다시 한숨만 푹푹 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내가 앞에서 이야기한 것보다도 더 심각하게 생각하는 문제는, 이렇게 값어치 있는 책이 주요 서점에서 그다지 많이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항상 언론은 '혈세 낭비' 논란을 부추기고 사람들은 그에 분개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작 그 혈세가 마구잡이로 쓰이는 실태와 그 까닭을 명민하게 분석해 놓은 자료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렇게 분개하면서도 막상 그런 현실 속에서도 사람들이 어떻게든지 콩고물을 챙겨먹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내가 대한민국에 얼마나 극심한 환멸을 느끼고 있는지 판단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나 또한 그렇게 화를 내면서도 결국 어쩔 수 없이 그 안에서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떻게든지 적응하면서 극히 어렵더라도 '점진적' 개혁을 해 나가는데 조금씩 보탬이 되어야 하는 게 사실이다. 사회 곳곳이 조금씩 바뀌어 나가는 희망찬 증거를 끊임없이 찾으면서, 이 책에 나오는 예산실명제가 실행되고 예산 기획과 집행 과정이 갈수록 투명성과 합리성을 더욱 많이 띠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이 책 표지에 나오는 그림이 풍자하는 것처럼 제발 멀쩡한 보도 벽돌 좀 그만 파내고, 특히 이 미친 정부에서 추진하는 대운하 또한 첫 삽조차 뜨지 않기를 간곡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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