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세상 보기 - 하루쯤 물리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양형진 지음, 류기정 그림 / 굿모닝미디어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한 때 나는 언론이 '보통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창'으로서 객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신문이란 신문은 글자 하나도 빠짐없이 읽으면서 세상을 극히 조금씩이나마 알아가는 즐거움에 푹 빠졌다. 그러나 중앙일보에서 벗어나 한겨레 따위 다양한 신문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은 완전히 산산조각나 버렸다. 그 뒤 나는 신문을 읽을 때 굉장히 신중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그렇지 않은 분야가 있었는데, 그것은 자연과학과 관련된 기사나 사설이었다.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따위 분야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의식이 매우 크게 작용하지만, 자연과학은 그나마 앞에서 제시한 학문들보다는 객관성을 지니고 있어서 신문을 읽을 때도 그나마 좀 마음을 놓고 읽을 수 있었다.

 

중앙일보에서 주로 연재된 자연과학 사설 가운데 가장 재미있었던 것이 김희준 교수님과 양형진 교수님이 쓰신 사설이었다. 김희준 교수님이 쓰신 사설은 주로 문제가 한 가지 나오고 그와 연관하여 이야기가 펼쳐졌고, 양형진 교수님이 쓰신 사설은 주로 과학과 불교 사상과 문학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이야기가 펼쳐지는 모습이 돋보였다. 양형진 교수님이 중앙일보에 2년 동안 연재하신 사설들이 묶여 '과학으로 세상 보기'라는 책으로 나왔다. 


나는 그 사설들 가운데 일부를 신문에서 오려 공책 한 권에 잘 정리해 놓은 덕분에, 서점에 가서 책을 산 뒤 사설과 책을 대조하면서 읽어볼 수 있었다. 예상대로 사설과 책은 달랐다. 사설은 아무래도 원고 분량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문장이 줄어들고, 그 결과 설명도 충분하지 않은 일이 좀 있다. 저자가 후기에서 밝혔듯이 가끔씩 자기가 의도했던 바와 전혀 다른 내용으로 이야기가 흐른 일도 가끔씩 있었다. 그래서 저자가 내용을 고치면서, 문장을 좀 더 길게 풀어써 설명을 보충하고, 어려운 말에 대해서는 글 뒤에 따로 설명을 덧붙이고 글 전체 흐름을 다듬는데 신경 쓴 덕분에, 사설로 읽을 때보다는 조금 더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에서는 아인슈타인이 주장한 상대성 이론과 보어가 중심이 된 코펜하겐 학파에서 주장한 양자 이론이 주로 등장한다. 현대 물리학은 이 두 이론 위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현대 물리학에 대해 쓴 책에서는 절대 빠질 수 없다. 그것 말고도 물리학과 관련된 서적을 좀 읽어본 사람들이 짐작할 수 있듯이 열역학 제 2 법칙, 자기 조직화 원리, 뉴턴 역학 따위 물리학을 의논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것들이 빠지지 않고 나타난다.
 

저자는 이런 다양한 과학 이론들을 주로 불교 철학과 관련지어 과학과 철학과 자연이 얽히는 관계를 설명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끝없이 묻는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알고 무엇을 알 수 있는가? 극대와 극소가 왜 서로 통하는가? 저자는 인류 문명의 근원에 접근하는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읽는 이들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자극한다. 물론 책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면 꼼꼼하게 되씹어야 하기 때문에 어느 책을 읽든지 계속 생각해야 하지만, 이처럼 스스로 생각하도록 끊임없이 자극하려고 읽는이에게 무엇이라도 묻는 책을 나는 매우 좋아한다. 


결국 이 책이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은 과학이 이룬 성과를 문명과 자연이 함께 발전하는데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과학으로 세상을 바라본 결과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가장 뚜렷한 진리일 것이다. 과학은 인류가 자연이 드러내는 참모습에 대해서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자연이 우리에게 말하는 진리는, 분리와 적대감이 아닌 조화와 공존이었다. 나 없이는 네가 없고 너 없이는 네가 없다. 자연과 과학이 그러하며, 서로 다른 문명권들이 그러하며, 자연 속에 있는 모든 존재가 그러하다. 

 
그러나 인류는 자연에 대해 많은 것을 알수록 자연을 더욱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자연 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자연과 함께 발전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 결과 지금 자연은 온갖 상처에 시달리고 있으며 인류 또한 살아남기 힘들어진다는 위기감 때문에 공포에 떨고 있다. 함께 살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인류사에서 같은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는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고 끔찍한 일이 도대체 몇 번이나 반복되었던가?


이 책 마지막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저자가 밝혔듯이 사람은 '야누스'와 같은 존재이다.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그저 지금처럼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사는 삶을 거부하다가 자멸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존재들과 인류는 절대 뗄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려고 힘쓸 것인가? 과학으로 세상을 철저하고 깊게 분석한 결과 그 답은 뚜렷해지지 않았는가? 무엇을 주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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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단련하다 - 인간의 현재 도쿄대 강의 1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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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본에서 평론가로서 활발하게 일해 온 다치바나 다카시는 내가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지식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끝없이 공부하고 평론을 썼다. 다치바나 다카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는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는 이런 사회 문제뿐만 아니라 굉장히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글을 썼고, 그 글들이 일본 사회를 얼마나 크게 흔들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는 일본에서 확실하게 인정받는 평론가이다.


그가 1990년대 후반에 도쿄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는데, 그 강의 내용을 모은 책이 '뇌를 단련하다'이다. 내가 알기로는 원래 3부까지 나오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가 너무 바빠서 강의를 그만뒀는지 모르지만 2권은 지금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나는 지금 '뇌를 단련하다' 2권이 나오기만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도쿄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뒤 '문예춘추' 사에 들어갔다가 2년만에 그만두고 다시 도쿄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한 까닭은 간단했다. 자기 머리가 차츰 굳는, 좀 심한 말을 쓰면 '황폐'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자기를 조였기 때문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없고, 그 결과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심각한 고민은 그가 쓴 '퇴사의 변'이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어서 보통 사람들과 견주어 볼 때 대단히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정 관념에 부딪쳐 다치바나 다카시가 한 말에 대해 착각하기 쉽다. 지식을 많이 지니고 있는데 뇌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묻기 쉽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말하는 머리가 '황폐'해진다는 느낌은 머릿속에 지식이 적게 들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넓고 깊게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엄청나게 많은 새로운 정보가 몇 초 단위로 쏟아지고 지식 세계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똑똑해져야 했다. '나무 2'에서 이상용 님이 쓴 '업그레이드'에 나오는 두뇌를 가장 잘 쓸 수 있게 해 주는 '나스'라는 약물을 요즘 사람들이 먹은 것은 아니지만, 요즘 사람들은 옛날보다는 정말 똑똑하다.
 

나는 이미 고등학교 2학년 때 '상상을 초월하는 고학력 시대'라는 글을 써서 사회 구성원들이 자꾸만 똑똑해지는 일이 과연 바람직한지 의심했다. 그 의심은 이 책을 읽은 뒤 확신으로 굳었다. 너무 일찍부터 전공 공부에 매달리고 시험을 치는데 필요한 지식에만 매달리는 우리나라 대학생들을 보면 나도 같은 대학생이기는 하지만 참 문제가 많다고 느낀다.


예전에 중앙일보에서 '위기 속에서 인문학은 더욱 발전한다'라는 글을 본 일이 있다. 제목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 글 제목은 지금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에 따르면 분명히 틀렸다는 것이다. 인문학뿐만 아니라 인문학을 포함한 교양 교육이라는 거대한 교육 체계가 통째로 무너지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본이 망한다고 다치바나 다카시는 강조하는데, 그가 하는 말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이미 거의 망했다. 


내가 부산대학교에 들어간 뒤 도서관에서 그저 학문을 연구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전혀 보지 못했다. 다양한 강의 계획표를 보고 어떻게든지 많이 듣고 싶어서 안달이 나서 견디지 못하는 학생을 거의 못 봤다. 그렇기 때문에 교양 과목은 아주 많지만 수강 신청이 끝나고 나면 교양 과목 가운데 절반이 폐강되고 그나마 진행되는 교양 강좌에서도 학생이 전공과목보다 훨씬 적다. 무슨 과목이든지 들어 놓으면 도움이 된다고 말은 잘 하면서, 실제로는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면서 그 말이 과연 어떤 뜻인지 파악하려고 전혀 힘쓰지 않는 학생들이 널려 있다. 


내가 본 모습들은 부산대학교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봐도 좋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틈만 나면 우리나라 교육에 문제가 많다고 난리를 치면서 위와 같은 모습들을 비판하지만, 정작 자기는 그러한지 되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 하다.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다가, 어쩌다가 시대 흐름에 몸을 맡기지 않고 흐름을 거스르려는 사람들이 나오면 이상하다면서 아주 쉽게 무시한다. 자기들이 못했던 것을 그 사람이 해내니까 샘이 나서 견딜 수 없다는 것인가?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이 이상한 흐름은 도대체 무엇인가?  


다치바나 다카시가 주장하는 바에 따라 다음과 같이 물어본다. 'Sailing to Byzantium', 'Pride and Prejudice', 'The Last Leaf', 'The Canterbury Story', 'The Waste Land', 'The Lovesong of J.Alfred Prufrock'. 'My Last Duchess', 'Heart of Darkness', 'A Prayer for My Daughter' 따위 영문학 작품들을 영어로 막힘없이 강독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갖춘 문과 학생이 있다. 그 학생에게 온도와 절대 온도를 정확하게 정의하고 열역학 제 1 법칙과 2 법칙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보라고 하면 과연 그 학생은 어떻게 대답할까? 그 반대로도 얼마든지 질문을 만들 수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항상 좀 더 넓게 보라고 했다. 데카르트가 요소환원주의를 주장한 뒤 인류가 구축한 지식 세계는 큰 틀을 잃어버렸다고 그는 주장한다. 문과 사람들은 이과 지식을, 이과 사람들은 문과 지식을 너무 모르며 서로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곧 한 쪽으로 치우친 완전하지 않은 지식 세계를 지닌 사람들이 이 세상에 너무 많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이 지식 세계를 넓게 보지 못하고 좁게만 파고들고, 이대로 가다가는 지식 세계가 근본부터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것은 인류가 구축한 지식 세계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실제로 사회에 그런 사람이 널려 있다고 다치바나 다카시는 말한다. 결국 그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말고 어디에든지 관심을 가지고 폭넓게 교양을 쌓아 진정한 실력을 쌓으라고 강조한다.  


나는 그 강한 주장을 받아들이고 이해한 뒤 지금까지 전혀 의심해 본 일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그가 말하는 진정한 실력을 쌓는데 힘썼다. 그러면서 나는 확실히 예전보다 훨씬 큰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뭔가 안다는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정신세계가 예전보다 훨씬 커지고 훨씬 활발하게 움직인다는 그런 즐거움이었다.  


'뇌를 단련하다'라는 제목은 결국 그런 뜻이다. 한 쪽으로만 너무 치우쳐 있는 정신을 다른 방향으로 많이 보내 바람을 피워보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진정으로 공부하는데서 나오는 즐거움을 맛보라는 뜻이다. 연애를 할 때는 한 쪽으로 치우친 사랑과 관심을 다른 쪽으로 마구 보내면 큰일 나지만 공부를 할 때는 전혀 그렇지 않다. 되도록 많이 바람을 피워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생각이 특정한 방향으로만 흐르기 쉽고 결국 뇌에 균형이 잡히지 않게 된다. 
 

그는 어떤 글에서든지 정말 다양하고 깊이 있는 자료들로 자기 견해를 뒷받침해, 그가 주장하는 바를 감히 반박하기 힘들다. '뇌를 단련하다'를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주와 환경을 바라보는 위상, 지식 세계 발전사, 뇌 과학, 발레리와 데카르트, 에라스무스와 종교개혁, 르네상스, 교육 제도, 에너지, 자기조직화 원리, 상대성 이론, 패리티 보존칙……책을 읽으면서 문과와 이과라는 이분법을 뛰어넘어 모든 지식 세계를 마음껏 누비다 보면 어느새 뇌가 마구 꿈틀거릴 것이다. 한 방향으로 치우쳐 굳어 있던 뇌가 몸부림치는 그 뛰어난 역동성을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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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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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태어나 살아가면서도 이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 한 가지를 전경린은 이 소설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에서 버젓이 다뤘다. 그녀가 읽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작정하고 이 소설에서 간통죄가 지니는 문제점을 돌려 비판하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어이없는 죄가 바로 간통죄이다.

 

대한민국 형법과 일본 형법이 차이가 나는 부분 가운데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일본과 다르게 대한민국에서는 간통죄를 형법에 따른 처벌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놓고 대한민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을 난잡하다면서 비난하고, 일본 사람들은 그런 대한민국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하게 생각한다. 문화 상대주의에 따르면 대한민국이나 일본이나 서로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단지 성에 관해 보수성과 개방성이 조금씩 더 두드러질 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한민국도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열린 성문화도 자연스럽게 들어왔기에, 요즘 성문화(?)를 보면 일본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혼전 순결은 이제 옛말이 되었고, 주워들은 바로는 첫날밤에 처녀막이 터진 신부를 보고 처녀라는 것을 확인한 남자가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뻐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런 형편에 대한민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을 난잡하고 심지어 변태 같다고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내가 보기에는 그건 브리지트 바르도가 개고기 먹는 풍습을 비난하며 "내 머리는 텅 비었소" 하고 선전하는 것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아랍에서는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일본을 비난하는 것만큼 아랍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예전에 일본이 대한민국에 저지른 만행 때문이라는 설명은 뭔가 맞지 않아 보인다. 대한민국과 일본은 같은 유교 문화권이고 아랍은 다른 이슬람 문화권이라서 그렇다는 설명은 그럴듯하면서도 뭔가 부족하다. 대한민국 남자들이 아랍에서 성행하는 그 풍습을 비난하기는커녕 마누라 많이 거느려서 좋겠다는 농담까지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히 뭔가 다른 것이 있다.

 

아무리 농담이라도 적어도 여자들 보는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면 절대 안 된다. 아니, 어디서든지 그런 말은 하면 절대 안 된다. 그 말을 하는 것은 대한민국 남자들이 알게 모르게 분명히 가지고 잇는 남성 중심주의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가 버젓이 인정받고 있는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면, 그들은 어떻게 대답할까? 그들이 과연 그 제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당연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는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다. 천하에 막 되먹은 짐승만도 못한 짓이기 때문이다. 왜 짐승만도 못한 짓인가? 옛날부터 내려온 전통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전통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일관성을 좇는다면 일부다처제도 일처다부제와 마찬가지로 야만스럽고 막 되먹은 풍습이 아닐까? 그러므로 마누라 많이 거느리는 아랍 남자들이 부럽다고 말하는 대한민국 남자들은 야만스러운 풍습을 부러워하므로 야만인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나는 이 글을 읽는 대한민국 남자들을 한 번 도발해 보고자 일부러 감정을 강하게 실어서 거침없이 글을 썼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숨결이 거칠어지고 머리가 뜨거워진 남자들은 아마 지금부터 내가 새롭게 시작하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또 화를 낼 확률이 높다. 그렇지 않다고 증명해 주는 남자가 있다면 나는 욕을 먹어도 기뻐하겠다. 간통죄에 숨어있는 문제점을 인정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대한민국 남자이다. 그리고 앞에서 저렇게 글을 썼다고 해서 대한민국에 일처다부제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나 유교 문화권에서는 허용되지 않으며, 나도 굳이 그 금기를 깨고 싶지 않다. 거기에 아주 익숙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는 유교 문화권뿐만 아니라 대부분 문화권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통죄는 일부일처제를 바람직한 사회 관습으로 인정하고 있는 나라라도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과 일본을 놓고 논란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만 간통죄가 법에 따라 처벌받을 죄목이라는 사실 자체도 굳이 열을 내서 비판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내가 일하고 싶은 것은 앞에서 한 번 쓴 남성 중심주의가 간통죄에 숨어 있으며, 그런 불평등한 구조 때문에 이 소설이 유독 대한민국에서 특별한 뜻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 미흔은 출판업을 하는 효경이라는 남자를 남편으로 둔 평범한 여자이다. 어느 날 그녀는 남편이 출판업을 하면서 몰래 만나던 영우라는 아가씨가 대담하게 집에까지 찾아와 자기가 효경과 성관계를 맺어 아이까지 뱄을 정도로 깊은 사이였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미흔은 효경에게 화를 내며 어떻게 된 일이냐고 강하게 추궁하지만, 효경은 별 것 아니라는 식으로 변명하고 도시에서 하던 출판업도 잘 안 되던 차에 새로운 일자리가 생겼으니 시골에 가서 새롭게 시작하자고 한다. 너무나도 어이없는 것은 미흔은 효경이 변명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도 화가 치밀었지만, 화를 억누르고 효경이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시골로 이사한 뒤 미흔은 거기에서 오 년 전에 일어난 끔찍한 살인 사건에 관해 들었는데, 다른 것은 다 제쳐두더라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부희가 한 말에 미흔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어차피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고 그를 사랑했다. 애초부터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아서 내 손으로 키우기 위해 열아홉의 나를 농사꾼에게 팔았다. 그 삶은 한 번도 내 것이 아니었다. 아이의 아버지를 다시 만났을 때, 재회를 없던 일로 하고 그대로 살까도 했다. 그러나 난 그를 사랑했다. 그런 사랑을 하면서 이런 일이 생길 줄을 몰랐겠는가. 그날 시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내가 그 낫에 찔려 죽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늘 무서웠지만 나는 사랑을 그만두지 않았다. 나에게 남자는 당신들이 간부라고 부르는 내 아들의 아버지뿐이다. 그러니 나는 절대로 당신들이 말하는 부정한 여자가 아니다."

 

 

집이 가난하다는 까닭만으로 팔려간 부희는 원하지 않는 결혼에 진절머리를 내다가, 예전에 자기를 임신하게 한 정말 사랑했던 남자를 다시 만나자마자 사랑에 모든 것을 맡겼던 것이다. 책에 나온 표현 그대로 발정난 개처럼 쏘다니며 여관이고 산이고 차 안에서도, 심지어 자기 집 안방에서도 안고 뒹굴었다. 억눌려 있던 것이 폭발해 버린 것이다.

 

억눌려 있던 그것은 무엇이라고 봐야 할까? 부희가 대한민국 여자들을 상징한다는 건 터무니없는 비약일까. 이 땅에 태어난 여자들은 고려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지금보다도 더욱 평등한 조건 아래에서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으며 살았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성리학이 국가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기반 학문으로 등장하면서, 그 때부터 남성 중심으로 사회 제도와 구조가 개편되었고, 그 속에서 여자들은 500여 년 동안 온갖 수난을 겪어야 했다. 여자들은 남자들과 견주었을 때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으며, 특히 결혼한 뒤에는 지아비를 위해서 무조건 희생해야 했다. 그 희생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거창하고 그럴듯한 유교 윤리(?)였다. 사회를 이끌어간다는 윤리가 삼종지도(三從之道) 따위로 지독한 폐쇄성을 자랑했으니, 국가가 쇠락하고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해 일본 식민지로 전락하는 건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어쨌든 효경은 간통죄를 저지른 부희가 당연히 부정하다고 여기며, 사형 선고도 적절하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미흔은 몰래 바람을 피워놓고 간통죄를 인정하기는커녕 시골로 이사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처럼 여기며,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흔에게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는 효경을 보며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는다. 일에 찌들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잠시 저지른 일이 뭐 그렇게 크냐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효경을 등장시켜 작가는 대한민국 남자들이 얼마나 남성 중심주의에 찌들어 있는지 비판한다.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편에게 넌덜머리를 내던 미흔은 어느 날 우체국에서 일하는 규라는 남자를 우연히 알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능수능란한 규가 제안하는 오락에 뛰어들어, 효경이 아닌 규라는 다른 남성을 서슴없이 탐하기 시작한다. 이 책 본문이 280여 쪽인데, 무려 200여 쪽이 미흔과 규 사이에 벌어지는 위험한 오락(!)을 다루고 있다. 그 오락을 결국 효경이 알아내 버리고, 효경은 극심한 분노에 휩싸여 미흔을 사정없이 패고 응징한다. 자기는 일 때문에 잠시 정신을 놓았을 때 그랬을 뿐이지만, 미흔은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데 왜 바람을 피웠느냐면서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시킨다. 그러면서 결국 미흔이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면서 모든 죄를 미흔에게 떠넘긴 뒤 이혼해 버린다.

 

그래도 양심은 남아 있는지 아파트 한 칸 얻어서 살 돈은 준다. 하지만 옛날에는 그렇지도 않았다. 자기가 피운 바람은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효경과 같은 생각이 성리학이 500여 년 동안 대한민국 사회와 남자들에게 알게 모르게 의식 속에 깊숙이 배여 있다. 그것이 간통죄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남자에게도 은장도를 줘야 한다는 외침은 무엇을 뜻하는가? 간통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지도 않으며 양보한다고 치자. 바람을 피우는 건 내가 보기에도 옳지 않다. 그렇다면 적어도 남자나 여자나 간통죄를 저지르면 똑같이 처벌받는 판례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만이라도 만들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법이 성별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면 누가 법을 지키려고 하겠는가? 법질서 수호 차원에서나 남녀 불평등 개선 차원에서나 분명히 뜻이 있다.

 

지금까지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잘못된 의식을 고쳐나가고자 얼마나 수많은 여성 운동가들이 눈물을 흘려야 했는가? 남녀평등을 외치던 남자들은 엄연히 남녀 차별이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남자냐면서 내시 취급을 받기 일쑤일 정도로 기가 찬 현실이 몇 십 년 전까지 계속 이어졌으며, 수많은 피땀을 흘린 끝에 어느 정도는 남녀평등 수준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인습은 내린 뿌리를 뽑히지 않고자 저항하고 있다. 조금 좋아졌다고 해서 만족하면 안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작가도 여자인 만큼 이 소설을 쓰면서 스스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기 힘들었을 것이다. 화를 억누르기 힘들었기에 작가는 화를 냈고 화 그 자체뿐만 아니라 화를 낸 뒤 찾아오는 허탈함과 냉소까지 문체에 고스란히 담았다. 친구인 도영이 가정이란 구역질 아니면 공포라고 일갈하자 그것이 삶이 기획한 조건이라고 여기는 미흔 같은 여자가 더는 나와서는 안 된다고 작가는 돌려 말하고 있다. 물론 권태와 일탈 욕구는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대한민국에서는 절대 객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잘못된 관행에 분노하며 그 화를 이 글에 담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글을 읽고 군 복무 가산점 이야기만 꺼내면 대뜸 애 낳아보라고 발악하는 그런 여자들이 손뼉을 치며 나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그녀들이 추구하는 바에 지지를 부탁한다면, 나는 불끈 쥔 두 주먹에서 중지만 곧추세운 뒤 단번에 이단옆차기를 날릴 것이다.

 

 

……

 

 

그런데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마지막에 꼴에 반전이랍시고 준비한 셈이 되어버린 것은, 지금까지 쓴 독후감은 작가 후기를 전혀 보지 않은 채 썼다는 사실이다. 그 까닭은 끝맺는 이야기가 282 ~ 284쪽에 나와 있는데, 284쪽에는 사실 내용이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그 넓은 종이에 띄워 쓴 칸과 말줄임표까지 합쳐도 한 줄에서 반도 안 되는 터라, 나는 곧장 책장을 앞으로 넘긴 뒤, 285 ~ 286쪽에 있는 작가 후기는 태연하게 무시하고 책을 덮었다.

 

그 뒤 오랜 시간이 흘러서 이 글을 마무리할 무렵에 문득 내가 작가 후기를 안 읽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고, 갑자기 내가 작가가 의도한 바를 얼마나 잘 파악했는지 알고 싶어졌다. 주저하지 않고 책을 펼쳤는데, 작가 후기를 읽은 뒤 나는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

 

사랑은 욕망의 순수한 증여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을 갈망하지만 사랑은 소문처럼 그렇게 도처에 널린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내재되어 있으면서도 여전히 매우 예외적이고 특별한 이야기, 그것이 사랑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합법적으로 제도에 편입되어 기념비가 되는 사랑보다 삶을 무너뜨리고 얼굴을 다치며 내쫓기는 비합리적인 사랑에 매혹되었다. 그런 사랑은 야생적인 것이고 제도 바깥의 것이며 세상이 쳐놓은 휘장 너머로 무한히 열려 있었다. 거듭되고 표절되는 진부한 삶의 궤도를 이탈해 돌연한 변이를 보여주는 사랑하는 사람들, 그 섬광이 나는 늘 아름다웠었다.

 

처음에 이 글을 쓰려고 했을 때 아주 현실적이고 위험한 전형들을 통해 삶에 있어서 사랑의 허구와 실제를 건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가급적 삶과 연루되지 않는, 관능적이고 부유하는 사랑을 미화하고 싶었따. 그러나 결과적으로, 쾌락과 감상과 욕망의 비루함과 가벼움과 무상한 환멸을 기록하게 되었으니, 사랑이 왜 지리멸렬한 삶의 가랑이를 벌리고 그 살점 속에 뿌리를 박아 서로의 악성 종양을 만들어가야 하는지 이 글을 쓰면서 새삼 숙고하게 되었다.

 

……

 

 

나는 작가가 의도한 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수능 때 언어영역을 망친 건 당연한 결과였던 셈이다! 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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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가안보국 NSA 1
제임스 뱀포드 지음, 곽미경 외 옮김 / 서울문화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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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손자병법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고 적은 모르지만 나를 알면 승률이 절반이고 적을 모르고 나도 모르면 반드시 패한다‘ 일 것이다. 그리고 손자병법의 마지막 단원은 간첩에 관한 것이다. 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간첩이고, 간첩들에게는 일반 장병들보다 월등히 후한 대우를 해 줘야 한다고 손무는 말했다. 간첩들이 수집해 온 정보를 바탕으로 작전 계획이 세워지고 그 계획대로 전쟁이 진행되어야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정보화 사회라고 흔히 말한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가치 있는 정보를 얼마나 빨리, 그리고 많이 입수하느냐에 따라 경쟁력의 차이가 생기고, 경쟁력의 차이는 정보화 사회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의 크기를 결정한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다음 물음에 대답해 보자. 왜 미국은 항상 이기는가? 우리는 미국이 항상 다른 국가들보다 좀 더 쓸모 있는 질 좋은 정보들을 더 많이 입수하기 때문이라고 쉽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에 관한 답변도 해 보자. 미국은 어떻게 그 많은 훌륭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가? 아마 우리는 막연하게 ‘간첩 파견, 도청 활동 따위를 통하여‘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대부분 국가들이 자체 정보 기관을 두고 정보 수집을 위해 스파이를 파견하고 중요한 통신을 도청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국에도 정보 기관이 있다. 그 정보 기관은 설립이래 끊임없이 진화하여 우리는 지구에 있는 한 그 정보 기관의 감시망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 정보기관의 이름은 NSA(National Security Agency-국가안보국)다. 이 기관에 관해 책 소개 내용을 인용하여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952년 트루먼 대통령의 대통령령에 따라 미 국방부 소속 정보 기관으로 발족, 통신감청을 통한 정보 수집, 암호 해독을 전문적으로 수행해 왔으며, 메릴랜드 주 포트미드에 크립토 시티(Crypto City-비밀의 도시)로 불리는 본부를 두고 있다. 현역군인 및 민간인으로 구성된 3만 8천여명의 조직규모는 CIA의 2배에 달하며 예산과 영향력 면에서도 CIA를 훨씬 능가한다. 연방기구이면서도 대통령 등 극소수만 알고 있었으며 창설 30년 후에야 그 존재가 공개될 만큼 지금까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왔다.‘ 



실제로 NSA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NSA(No Such Agency-그런 기관 없음)이며 아는 사람들에게도 NSA(Never Say Anything-아무 것도 말하지 마라)였다. 그래서 NSA가 지금까지 세계사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사건들에 깊이 연루되어 있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몰랐다. 이 책은 보통 사람들이 모르는 수많은 사건들에 NSA가 어떻게 개입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의 구성은 상당히 짜임새 있다. NSA라는 거대한 기관을 한 인간으로 간주하고 몸의 각 부분의 명칭으로 단원의 제목을 붙이고 관련된 내용을 배치했다. 작가는 수집한 수많은 자료들을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필체로 정리하고 중간중간에 작가의 의견을 덧붙이고 있다. 작가가 수집한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읽다 보면 이런 일도 있었는가, 또 우리가 알고 있는 사건 뒤에 이런 내막이 있었는가 하는 생각에 저절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그리고 객관성이 확보된 엄청난 자료 덕분에 굉장한 힘이 있는 작가의 짤막한 의견은 이 책의 백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NSA는 지금도 전세계를 상대로 최첨단 첩보활동을 벌여 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며, 팍스아메리카를 꿈꾸는 미국 정부 관리들의 소망을 살찌게 만들고 있다. NSA가 수집한 정보는 전쟁뿐만 아니라 테러리스트 색출, 무역 협상 등 미국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폭넓게 이용되고 있다.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속으로는 현대 로마 제국의 위상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미국의 두 얼굴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최근에 제기되고 있는 이라크 전쟁 증거 조작 가능성에도 NSA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는 NSA의 감시망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모든 정보를 NSA는 마음만 먹으면 거머쥘 수 있으며 그 정보들을 이용하여 우리를 옭아매고 지배할 수도 있다. 곧 미국이 우리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미국은 항상 이기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제 확실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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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셰익스피어 이야기
찰스 램.메리 램 지음, 아서 래컴 그림, 나선숙 옮김 / 자유로운상상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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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싫어하고 비판하는 학벌 구조 속에서 영어교육과에 다니는 학생이랍시고 은근히 덕을 보고 있는 것도 스스로 보기에도 꼴사나워서 부끄럽기 짝이 없는데, 영어교육과에 다니는 학생으로서 알아야 할 것도 제대로 모르는 주제에 영어교육과 학생이라고 대접받는 현실을 나를 너무 부끄럽게 한 나머지 오랫동안 굉장한 스트레스를 안겼다. 전공부터 확실하게 챙겨놓고 다른 공부를 해야지 그나마 그럴듯해 보이기라도 할 텐데, 이것저것 건드리기는 해도 제대로 해내는 건 거의 없고 전공 수업도 말아먹어 버렸으니,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 얼마나 한심해 보였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이제부터 내가 교육학에만 죽어라고 매달리겠다는 건 아니다. 진정한 교수 기법은 되도록 많은 경험을 쌓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가르침을 받고 때로는 내가 가르치기도 하면서 스스로 깨우치는 것이지, 책상에 앉아 교육학 이론을 아무리 많이 외워봤자 머릿속에만 남아있을 뿐 실천할 수 없는 공허한 지식이 될 것이라는 신념이 내 머릿속에 뿌리 깊게 박혀있기 때문이다. 임용 고시를 공부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달달 외우면서 공부해야겠지만, 보통 고시생들이 준비하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공부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그 전에 일단 사람들이 상식으로 인정해 주는 영문학부터 챙겨야겠다고 나는 영어교육과 교과 과정을 보면서부터 생각했다. 영어를 가르칠 때 교수 이론은 아이들에게 들려줘 봐야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본다. 하지만 서양 역사 수 천 년 동안 이어 내려온 문화와 정신 유산이 고스란히 반영된 영문학은, 영어를 가르치면서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과 연관된 영문학 작품이나 이론을 쉽고 조리 있게 설명한다면, 그 풍요로움과 즐거움이 아이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영문학 지도법 연구'라는 수업도 있지 않은가?



어디 영문학뿐이겠는가. 인류가 남긴 위대한 유산들은 영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문학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거늘. 단지 내 전공이 영어교육이라서 영문학에 관해서는 좀 더 깊이 알아야겠다고 마음먹을 뿐이다. 어차피 인생 말년에 소설을 제대로 한 편 쓰겠다는 계획도 세워놓고 있으니, 문학 기초를 탄탄하게 다져놓아야 하고 전공 학문 가운데 하나인 영문학은 모조리 꿰뚫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영어교육과 학생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내가 영문학에 관하여 제대로 아는 것은 거의 없으니 큰일이다.



군대에서 이 책 '셰익스피어 이야기'를 읽으면서 새삼스레 또 위기의식이 나를 휘어잡았다. '공부기술'과 '생각기술'을 쓴 조승연처럼 셰익스피어 작품을 고어로 읽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영문은 줄줄 읽고 완벽하게 이해할 수준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내 실력을 진단해 보면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겨우 절반만 알고 있을 정도로 형편없다. 책을 읽지 않았다면 그런 문제의식도 계속 머릿속에 푹 파묻혀, 바깥으로 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남긴 주옥같은 명작을 산문으로 다시 각색하는데 매우 큰 어려움을 겪었고, 그렇게 공들였지만 원작과 견주어 볼 때 매우 부족한 점이 많을 것이라고 지은이인 찰스 램과 메리 램은 서문에서 몇 번이고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나는 매우 재미있게 이 책을 읽어서 왜 이들이 그토록 양해를 구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서 래컴이 그린 삽화에서 셰익스피어가 쓴 작품이 주는 느낌을 되도록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힘쓴 흔적을 엿볼 수 있었고, 책을 정갈하게 우리말로 옮긴 나선숙 씨도 참 고생하셨다고 생각했다.



'노튼 영문학 개관'은 수업을 들을 때 반드시 필요하다고 해서 겸사겸사 산 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 수업 시간에 조금씩 읽었을 뿐 혼자 다 읽어보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책은 꾸준히 읽기에는 좀 부담스럽다. 하지만 이 책은 전혀 어렵지 않고 셰익스피어 이야기 전반에 담겨 있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주제를 거듭 확인하면서 마음속에 스며들게 할 수 있으므로, 몇 번이고 다시 읽을 책 가운데 한 권으로 정하겠다. 그리고 나중에 반드시 원서를 구해서 읽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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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8-12-20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찰스 램과 메리 램의 이 책은 눈여겨 보고 있는 책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을 우리나랏말로 번역해 놓은 것도 애를 쓸수록 왠지 웃기고, 산문으로(이거 산문으로 풀어 놓은거 맞지요?) 그것도 찰스 램이 쓴 책이라면, 어떤 색깔일지 궁금합니다. 가뜩이나 우리 나라에 번역된 찰스램의 작품들은 거진 다 셰익스피어 작품이어서, 그거라도 읽어야 하는 독자이니 말입니다.

lyubishev 2008-12-31 13:32   좋아요 0 | URL
저도 글에서 적었듯이 일단은 반드시 원서를 구해서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원서를 읽어봐야 역서에 나오는 문장이 얼마나 깔끔한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나름대로는 괜찮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각색이 너무 지나치다면 그것 또한 탈이 되겠죠. 의견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