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태어나 살아가면서도 이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 한 가지를 전경린은 이 소설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에서 버젓이 다뤘다. 그녀가 읽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작정하고 이 소설에서 간통죄가 지니는 문제점을 돌려 비판하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어이없는 죄가 바로 간통죄이다.

 

대한민국 형법과 일본 형법이 차이가 나는 부분 가운데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일본과 다르게 대한민국에서는 간통죄를 형법에 따른 처벌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놓고 대한민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을 난잡하다면서 비난하고, 일본 사람들은 그런 대한민국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하게 생각한다. 문화 상대주의에 따르면 대한민국이나 일본이나 서로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단지 성에 관해 보수성과 개방성이 조금씩 더 두드러질 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한민국도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열린 성문화도 자연스럽게 들어왔기에, 요즘 성문화(?)를 보면 일본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혼전 순결은 이제 옛말이 되었고, 주워들은 바로는 첫날밤에 처녀막이 터진 신부를 보고 처녀라는 것을 확인한 남자가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뻐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런 형편에 대한민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을 난잡하고 심지어 변태 같다고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내가 보기에는 그건 브리지트 바르도가 개고기 먹는 풍습을 비난하며 "내 머리는 텅 비었소" 하고 선전하는 것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아랍에서는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일본을 비난하는 것만큼 아랍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예전에 일본이 대한민국에 저지른 만행 때문이라는 설명은 뭔가 맞지 않아 보인다. 대한민국과 일본은 같은 유교 문화권이고 아랍은 다른 이슬람 문화권이라서 그렇다는 설명은 그럴듯하면서도 뭔가 부족하다. 대한민국 남자들이 아랍에서 성행하는 그 풍습을 비난하기는커녕 마누라 많이 거느려서 좋겠다는 농담까지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히 뭔가 다른 것이 있다.

 

아무리 농담이라도 적어도 여자들 보는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면 절대 안 된다. 아니, 어디서든지 그런 말은 하면 절대 안 된다. 그 말을 하는 것은 대한민국 남자들이 알게 모르게 분명히 가지고 잇는 남성 중심주의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가 버젓이 인정받고 있는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면, 그들은 어떻게 대답할까? 그들이 과연 그 제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당연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는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다. 천하에 막 되먹은 짐승만도 못한 짓이기 때문이다. 왜 짐승만도 못한 짓인가? 옛날부터 내려온 전통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전통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일관성을 좇는다면 일부다처제도 일처다부제와 마찬가지로 야만스럽고 막 되먹은 풍습이 아닐까? 그러므로 마누라 많이 거느리는 아랍 남자들이 부럽다고 말하는 대한민국 남자들은 야만스러운 풍습을 부러워하므로 야만인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나는 이 글을 읽는 대한민국 남자들을 한 번 도발해 보고자 일부러 감정을 강하게 실어서 거침없이 글을 썼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숨결이 거칠어지고 머리가 뜨거워진 남자들은 아마 지금부터 내가 새롭게 시작하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또 화를 낼 확률이 높다. 그렇지 않다고 증명해 주는 남자가 있다면 나는 욕을 먹어도 기뻐하겠다. 간통죄에 숨어있는 문제점을 인정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대한민국 남자이다. 그리고 앞에서 저렇게 글을 썼다고 해서 대한민국에 일처다부제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나 유교 문화권에서는 허용되지 않으며, 나도 굳이 그 금기를 깨고 싶지 않다. 거기에 아주 익숙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는 유교 문화권뿐만 아니라 대부분 문화권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통죄는 일부일처제를 바람직한 사회 관습으로 인정하고 있는 나라라도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과 일본을 놓고 논란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만 간통죄가 법에 따라 처벌받을 죄목이라는 사실 자체도 굳이 열을 내서 비판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내가 일하고 싶은 것은 앞에서 한 번 쓴 남성 중심주의가 간통죄에 숨어 있으며, 그런 불평등한 구조 때문에 이 소설이 유독 대한민국에서 특별한 뜻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 미흔은 출판업을 하는 효경이라는 남자를 남편으로 둔 평범한 여자이다. 어느 날 그녀는 남편이 출판업을 하면서 몰래 만나던 영우라는 아가씨가 대담하게 집에까지 찾아와 자기가 효경과 성관계를 맺어 아이까지 뱄을 정도로 깊은 사이였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미흔은 효경에게 화를 내며 어떻게 된 일이냐고 강하게 추궁하지만, 효경은 별 것 아니라는 식으로 변명하고 도시에서 하던 출판업도 잘 안 되던 차에 새로운 일자리가 생겼으니 시골에 가서 새롭게 시작하자고 한다. 너무나도 어이없는 것은 미흔은 효경이 변명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도 화가 치밀었지만, 화를 억누르고 효경이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시골로 이사한 뒤 미흔은 거기에서 오 년 전에 일어난 끔찍한 살인 사건에 관해 들었는데, 다른 것은 다 제쳐두더라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부희가 한 말에 미흔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어차피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고 그를 사랑했다. 애초부터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아서 내 손으로 키우기 위해 열아홉의 나를 농사꾼에게 팔았다. 그 삶은 한 번도 내 것이 아니었다. 아이의 아버지를 다시 만났을 때, 재회를 없던 일로 하고 그대로 살까도 했다. 그러나 난 그를 사랑했다. 그런 사랑을 하면서 이런 일이 생길 줄을 몰랐겠는가. 그날 시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내가 그 낫에 찔려 죽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늘 무서웠지만 나는 사랑을 그만두지 않았다. 나에게 남자는 당신들이 간부라고 부르는 내 아들의 아버지뿐이다. 그러니 나는 절대로 당신들이 말하는 부정한 여자가 아니다."

 

 

집이 가난하다는 까닭만으로 팔려간 부희는 원하지 않는 결혼에 진절머리를 내다가, 예전에 자기를 임신하게 한 정말 사랑했던 남자를 다시 만나자마자 사랑에 모든 것을 맡겼던 것이다. 책에 나온 표현 그대로 발정난 개처럼 쏘다니며 여관이고 산이고 차 안에서도, 심지어 자기 집 안방에서도 안고 뒹굴었다. 억눌려 있던 것이 폭발해 버린 것이다.

 

억눌려 있던 그것은 무엇이라고 봐야 할까? 부희가 대한민국 여자들을 상징한다는 건 터무니없는 비약일까. 이 땅에 태어난 여자들은 고려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지금보다도 더욱 평등한 조건 아래에서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으며 살았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성리학이 국가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기반 학문으로 등장하면서, 그 때부터 남성 중심으로 사회 제도와 구조가 개편되었고, 그 속에서 여자들은 500여 년 동안 온갖 수난을 겪어야 했다. 여자들은 남자들과 견주었을 때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으며, 특히 결혼한 뒤에는 지아비를 위해서 무조건 희생해야 했다. 그 희생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거창하고 그럴듯한 유교 윤리(?)였다. 사회를 이끌어간다는 윤리가 삼종지도(三從之道) 따위로 지독한 폐쇄성을 자랑했으니, 국가가 쇠락하고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해 일본 식민지로 전락하는 건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어쨌든 효경은 간통죄를 저지른 부희가 당연히 부정하다고 여기며, 사형 선고도 적절하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미흔은 몰래 바람을 피워놓고 간통죄를 인정하기는커녕 시골로 이사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처럼 여기며,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흔에게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는 효경을 보며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는다. 일에 찌들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잠시 저지른 일이 뭐 그렇게 크냐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효경을 등장시켜 작가는 대한민국 남자들이 얼마나 남성 중심주의에 찌들어 있는지 비판한다.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편에게 넌덜머리를 내던 미흔은 어느 날 우체국에서 일하는 규라는 남자를 우연히 알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능수능란한 규가 제안하는 오락에 뛰어들어, 효경이 아닌 규라는 다른 남성을 서슴없이 탐하기 시작한다. 이 책 본문이 280여 쪽인데, 무려 200여 쪽이 미흔과 규 사이에 벌어지는 위험한 오락(!)을 다루고 있다. 그 오락을 결국 효경이 알아내 버리고, 효경은 극심한 분노에 휩싸여 미흔을 사정없이 패고 응징한다. 자기는 일 때문에 잠시 정신을 놓았을 때 그랬을 뿐이지만, 미흔은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데 왜 바람을 피웠느냐면서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시킨다. 그러면서 결국 미흔이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면서 모든 죄를 미흔에게 떠넘긴 뒤 이혼해 버린다.

 

그래도 양심은 남아 있는지 아파트 한 칸 얻어서 살 돈은 준다. 하지만 옛날에는 그렇지도 않았다. 자기가 피운 바람은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효경과 같은 생각이 성리학이 500여 년 동안 대한민국 사회와 남자들에게 알게 모르게 의식 속에 깊숙이 배여 있다. 그것이 간통죄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남자에게도 은장도를 줘야 한다는 외침은 무엇을 뜻하는가? 간통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지도 않으며 양보한다고 치자. 바람을 피우는 건 내가 보기에도 옳지 않다. 그렇다면 적어도 남자나 여자나 간통죄를 저지르면 똑같이 처벌받는 판례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만이라도 만들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법이 성별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면 누가 법을 지키려고 하겠는가? 법질서 수호 차원에서나 남녀 불평등 개선 차원에서나 분명히 뜻이 있다.

 

지금까지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잘못된 의식을 고쳐나가고자 얼마나 수많은 여성 운동가들이 눈물을 흘려야 했는가? 남녀평등을 외치던 남자들은 엄연히 남녀 차별이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남자냐면서 내시 취급을 받기 일쑤일 정도로 기가 찬 현실이 몇 십 년 전까지 계속 이어졌으며, 수많은 피땀을 흘린 끝에 어느 정도는 남녀평등 수준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인습은 내린 뿌리를 뽑히지 않고자 저항하고 있다. 조금 좋아졌다고 해서 만족하면 안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작가도 여자인 만큼 이 소설을 쓰면서 스스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기 힘들었을 것이다. 화를 억누르기 힘들었기에 작가는 화를 냈고 화 그 자체뿐만 아니라 화를 낸 뒤 찾아오는 허탈함과 냉소까지 문체에 고스란히 담았다. 친구인 도영이 가정이란 구역질 아니면 공포라고 일갈하자 그것이 삶이 기획한 조건이라고 여기는 미흔 같은 여자가 더는 나와서는 안 된다고 작가는 돌려 말하고 있다. 물론 권태와 일탈 욕구는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대한민국에서는 절대 객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잘못된 관행에 분노하며 그 화를 이 글에 담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글을 읽고 군 복무 가산점 이야기만 꺼내면 대뜸 애 낳아보라고 발악하는 그런 여자들이 손뼉을 치며 나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그녀들이 추구하는 바에 지지를 부탁한다면, 나는 불끈 쥔 두 주먹에서 중지만 곧추세운 뒤 단번에 이단옆차기를 날릴 것이다.

 

 

……

 

 

그런데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마지막에 꼴에 반전이랍시고 준비한 셈이 되어버린 것은, 지금까지 쓴 독후감은 작가 후기를 전혀 보지 않은 채 썼다는 사실이다. 그 까닭은 끝맺는 이야기가 282 ~ 284쪽에 나와 있는데, 284쪽에는 사실 내용이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그 넓은 종이에 띄워 쓴 칸과 말줄임표까지 합쳐도 한 줄에서 반도 안 되는 터라, 나는 곧장 책장을 앞으로 넘긴 뒤, 285 ~ 286쪽에 있는 작가 후기는 태연하게 무시하고 책을 덮었다.

 

그 뒤 오랜 시간이 흘러서 이 글을 마무리할 무렵에 문득 내가 작가 후기를 안 읽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고, 갑자기 내가 작가가 의도한 바를 얼마나 잘 파악했는지 알고 싶어졌다. 주저하지 않고 책을 펼쳤는데, 작가 후기를 읽은 뒤 나는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

 

사랑은 욕망의 순수한 증여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을 갈망하지만 사랑은 소문처럼 그렇게 도처에 널린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내재되어 있으면서도 여전히 매우 예외적이고 특별한 이야기, 그것이 사랑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합법적으로 제도에 편입되어 기념비가 되는 사랑보다 삶을 무너뜨리고 얼굴을 다치며 내쫓기는 비합리적인 사랑에 매혹되었다. 그런 사랑은 야생적인 것이고 제도 바깥의 것이며 세상이 쳐놓은 휘장 너머로 무한히 열려 있었다. 거듭되고 표절되는 진부한 삶의 궤도를 이탈해 돌연한 변이를 보여주는 사랑하는 사람들, 그 섬광이 나는 늘 아름다웠었다.

 

처음에 이 글을 쓰려고 했을 때 아주 현실적이고 위험한 전형들을 통해 삶에 있어서 사랑의 허구와 실제를 건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가급적 삶과 연루되지 않는, 관능적이고 부유하는 사랑을 미화하고 싶었따. 그러나 결과적으로, 쾌락과 감상과 욕망의 비루함과 가벼움과 무상한 환멸을 기록하게 되었으니, 사랑이 왜 지리멸렬한 삶의 가랑이를 벌리고 그 살점 속에 뿌리를 박아 서로의 악성 종양을 만들어가야 하는지 이 글을 쓰면서 새삼 숙고하게 되었다.

 

……

 

 

나는 작가가 의도한 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수능 때 언어영역을 망친 건 당연한 결과였던 셈이다! 으악! 

 

http://cyworld.nate.com/Lyubishev -> 더 많은 자료는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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