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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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세상을 살다 보면 화가 지나치게 많이 나오는 나머지 허탈한 웃음을 저절로 낼 수밖에 없는 일이 '너무나도'라는 형용사가 그 수를 드러내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할 정도로 많다. 가장 좋은 사례를 한 가지 들어보겠다. 예전에 '장발장' 서문에 관해 매우 인상 깊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쓰려는 것이 그와 묘하게 통하는 것 같다.

 

생활비가 없어서 단 돈 몇 천 원치 생필품을 훔친 이(조카에게 먹일 빵을 훔친 장발장과 같은 인물라고 볼 수 있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죽을 죄를 지었다면서 자기 앞에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대는 기자들을 미친 듯이 피한다. 그리고 그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정의로운' 법에 따라 형량을 받고 유치장에 수감된다. 차디찬 감옥에 갇힌 그가 홀몸도 아니라 아내와 자식이 있는 가장이라면, 어떻게 보면 감옥보다도 더 차가운 사회에 가장 없이 남은 그 가족은 당장 살아갈 일을 걱정해야 한다.

 

하지만 기본으로 몇 십 억 단위로 온갖 부패 행각을 저지른 뒤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 이들은 아주 자랑스럽게 사진을 찍고 당당하게 법원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그가 저지른 죄에 비추었을 때 상식으로 생각해 볼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는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재력을 동원해 보석으로 풀려나는 일이 많다. 때로는 죄가 없다는 판결이 나와서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당당하게 자기 발로 법원 밖으로 걸어나간다.

 

대한민국뿐만이 아니다. 온 세상. 그리고 지금이 아닌 지난 세월 동안 사회를 유지하고자 사람들 사이에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당위론에서 나타난 법률은, 금권(자본주의 사회 이전에는 특권이라는 말이 더 적당할 것 같기도 하지만, 어차피 정도 차이만 있을 뿐 돈과 권력은 예전에도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했으니 그냥 쓴다)을 가진 사회 지배층이 가진 것을 보호하려는 수단으로 악용되려는 성향을 때로는 교묘하고 은밀하게, 때로는 대 놓고 드러냈다.

 

그 괴물 같은 법이 삶 자체를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러 더는 참을 수 없을 때, 민중들은 그동안 안에 쌓아놓았던 것을 폭발시켜 무기를 들고 거리로 뛰어나갔다. 그러면 지배자들은 법에 따라 처벌하겠다면서 엄포를 놓았고, 법에 따라 보장된 폭력으로 생존권을 요구하는 민중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하지만 민중들은 그에 절대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웠고, 그 결과 지배자들은 하나 둘씩 무릎을 꿇었다. 그러면서 사회는 조금씩 발전해 나갔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법률 또한 발전해 나갔다. 예전에는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폐기 처분되는 일, 그리고 지금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예전에는 말도 안 된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법 속에 스며드는 일은 매우 더디지만 차분하게 이어졌다. 여기에서 매우 더디지만 차분하게 이어졌다는 뜻은, 그렇게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피를 흘려야 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지금 그 피를 먹고 자란 민주주의가 주는 자유로움이라는 설익었지만 그래도 설익은 대로 상큼한 과일을 먹고 있다.

 

내가 살아가는 대한민국도 그 피비린내 나는 더디기 짝이 없는 과정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조선 시대에 국가 통치 근간을 이루었던 경국대전을 그 당시 중국뿐만이 아닌 유럽 열강과 신생 미국까지 포함한 세계 정세에 비추어서 비판하는 건, 그 때가 국제 정치라는 개념 자체도 중국으로 극히 한정되어 있던 시대이니까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밖에 안 된다고 그냥 넘긴다고 치자.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하고 대한민국 헌법을 1949년 7월 17일에 제정한 뒤, 지난 60년 동안 대한민국 사법계가 온 세상에서 조롱거리가 되었던 사건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가?

 

대한민국이 동북 아시아에서 떠오르는 네 마리 용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다고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던 서양 세계에서도, 대한민국을 통치하던 독재 정부가 저지르는 온갖 만행을 보면서 역시 후진국은 어쩔 수 없다는 비웃음 섞인 논평을 알게 모르게 쏟아냈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인터넷과 언론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공산당 독재 체제인 중국을 비웃는 것을 보면서 나는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지난 20세기에 대한민국을 바라보던 선진국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남한에게는 공산주의와 유혈 혁명만을 외치는 북한이라는 빨갱이 괴물이, 북한에게는 자본주의와 사대주의에 물든 남한이라는 친미 괴물이 나타날 때부터 그 비극은 싹트고 있었다. 북한이야 애당초 인권을 논할 가치도 없는 세계에서 최악인 나라 가운데 하나이니 무시한다 하더라도, 그토록 놀라운 저력을 보여준 남한에서 그 따위 비극이 일어났다는 것은 절대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다. 대한민국은 북한을 욕할 처지도 아니고 중국을 욕할 처지도 아니다. 다른 이를 비난하려면 자격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그런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 자격을 애써 회복하려고 지난 10년 동안 힘썼지만, 지난 해에 집권한 이명박 정권과 그 아래 숭미숭일 수구 세력은 지금까지 간신히 길러낸 민주주의라는 설익은 열매를 너무나도 쉽게 짓밟고 있다. 출범할 때부터 '법치'를 강조하더니, 그 법을 마음대로 주물러서 민중을 탄압하고 억누르고 있다. 기만스럽고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법률 위에 올라타 국민을 가소롭게 알고 있는 이들을 몰아내고자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을 때, 수구 세력이 외쳤던 것은 '정의로운' 법에 따른 '법치'였다. 그 법을 수호하는 경찰과 검찰과 사법부는 '정의로운' 세력으로서, 이에 맞서는 이들은 정의를 파괴하려는 '불법' 시위자들이다.

 

정의를 수호하는 공권력이 휘두르는 폭력은 사회 질서 유지와 법치주의 확립이라는 그럴싸한 명목으로 포장된다. 사회 전체라는 맥락에서 벗어나 특정한,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편협한 관점을 공권력이라는 법으로 정당하다고 인정받은 특수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이미 그 공권력 때문에 삶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궁지에 몰린 이들이 내뱉는 욕설과 울분과 폭력은, 정의로운 공권력을 위협하는 '미치광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한 마디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 이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막되먹은' 짓이라는 것이다.

 

이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평화롭게 저항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낼 줄 안다고 그들은 일갈한다. 하지만 그들이 평화와 이성을 강조하는 진정한 까닭은 따로 있다. 평화로운 방법으로 사람들이 저항하면 그 저항을 간단하게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화와 소통 따위는 아예 할 생각이 없는 이들이, 더는 참지 못하고 거리로 나선 이들은 대화와 소통 따위는 모르는 불법 폭력 시위꾼, 심지어 내란 선동자들로 몰아가는 작태를 보면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그들이 비폭력주의자였던 마하트마 간디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는 자체가 간디에게는 더 할 나위 없는 치욕이다.

 

민중은 인권을 존중하고 정의를 수호하는 헌법을 외친다. 하지만 헌법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 1조는 지금까지 제대로 실현된 적이 한 번도 없다. 심지어 그나마 가장 나았다고 하는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때도 부족한 점은 너무나도 많았다. 어쩌면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민중들이 해낸 일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보잘것 없으니 말이다.

 

그들은 헌법에 따라서 보호를 받는 이들이 확실해 보인다. 그들은 헌법에 따라 천부 인권을 타고난 사람으로서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살아갈 '권리'를 보장받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 그대로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대한민국은 여전히 살기 좋은 나라인데 불순 분자들이 나라를 좀먹고 있다고 생각한다. 중립이라고 외치거나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주류' 언론이 주장하는 대로 따라가는 경향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그들에게는 피해가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가 돌아가는 것이 이상하다면서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이들은 법에 따라 탄압받고 처벌받는다. 그들은 따지고 보면 소수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 불순 분자를 법에 따라 처벌하는 공권력은 더욱 정의로워 보이고, 수구 언론은 그런 공권력을 온갖 미사여구로 찬미한다. 헌법 정신이 스며들어 있다고 하는 법률이 어떻게 민중을 이토록 극심하게 탄압할 수 있는지 헌법이 지닌 정신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헌법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법치 국가를 수호하는데 적합하지 않다면 헌법을 무시할 수도 있고 한 술 더 떠서 바꿀 수도 있다는 독재 정권 시대에나 통할 사고 방식을 그대로 드러내는 지금 정부에게서, 무엇을 기대한다는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다. 단지 지금 헌법이 바뀌고 있는 헌법을 바꾸려면 국민 투표를 거쳐야 하는데, 민심이 국민 투표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렇기에 지금 부지런히 민중들 눈과 귀와 입을 모두 막으려고 언론 장악에 힘쓰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은 지금 '나는 이탈리아의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이다'라고 외치며 무솔리니와 같은 존재로 거듭나려는 이탈리아 독재자 베를루스코니와 같이 되기를 꿈꾸고 있다.

 

 

'법률은 시민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통제함으로써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법률가들이 시민의 이익 대신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길 때 사회의 정의는 힘 없이 무너지고 만다.'

 

 

책 뒤표지에 있는 이 문구만 봐도 이 책 '헌법의 풍경'이 무엇을 고발하고 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미 지난 세월 동안 헌법은 제정된 뒤부터 우리도 모르게 잃어버렸다, 아니, 지금까지 이 나라를 지배한 거의 모든 정권이 항상 헌법은 껌 씹듯이 무시해 버렸다. 굳이 내가 위에 쓴 것처럼 그렇게 길게 쓰지 않아도, 이 세상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책이 고발하는 현실이 지금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귀중한 책들을 읽고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뼈저리게 깨달아야 한다. 김두식이라는 용감한 법학자가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면, 우리는 그 비판에 따라 사회를 바로잡고 헌법을 살리고자 눈을 똑바로 뜨고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바람 앞 등불과도 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살릴 수 있다. 그러지 않을 때 앞으로 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눈을 감고 봐도 앞에 환하게 떠오른다.

 

만약 훗날 내노라 하는 지식인들조차 답이 없다고 고개를 젓는 이탈리아와 같이 변해버린 대한민국에서 누군가가 이 시대를 대상으로 '광인일기'와 같은 소설을 쓴다면 이와 같은 말이 나오면서 소설이 끝나지 않을까.

 

 

"헌법을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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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리셋할 때 필요한 62가지 플러스 발상법
혼다 신이치 지음, 신주혜 옮김 / 지식여행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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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10년 중등교원임용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한 지 어느덧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공 원서 몇 십 쪽과 영어회화 모임 말고는 그다지 한 게 없다. 이제 졸업까지 1년밖에 남지 않았으니 졸업 학점도 채워야 하고, 다른 동기들에게 견주었을 때 절대 좋은 편이 아닌 학점도 어느 정도 끌어올려야 한다. 곧 이번 겨울방학과 2009년 여름방학 때 말고는 임용고시 준비에만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도 그다지 한 게 없다는 평가를 스스로 내릴 수밖에 없으니,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그에 따라 지금까지 온갖 논리를 들이대면서 애써 억눌렀던 스스로 먹고 사는 문제에 관한 불안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지금까지 그토록 혼신을 다했던 온갖 일이 어떤 뚜렷한 성과라도 나타냈다면, 그래도 지난 시간을 그렇게 헛되이 보내지는 않았다는 보람이라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한 해를 결산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모자라고 부족했는지만 뼈저리게 깨달았을 뿐이며, 그렇게 깨닫는다고 해서 새해에는 뭔가 달라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내가 한 일 덕분에 어떤 뚜렷한 성과가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토록 강조했던 자기 관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다. 따가운 시선을 감수하며 거리 위에서 목청 높여 외쳤던 처참한 대한민국 공교육을 개선하는데 필요한 주장들은 거의 모두 공염불이 되었다. 그리고 대학교에서 처음으로 깨달은 민주주의 가치는 2007년 12월 19일에 산산히 부서져 버렸다. 게다가 내가 지금까지 일했던 단체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도 실패만 거듭했고, 마지막으로 몸을 담았던 단체에서는 격렬한 충돌 끝에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만 남기고 활동을 접어야 했다.
 
임용고시 준비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된 좋은 구실이 생겼으니 한편으로는 잘 된 일이기도 하다.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한다 하더라도 자기가 스스로 벌어서 먹고 살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인정받기 힘들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기왕이면 뭐라도 성과가 분명히 나타나고 내가 그에 만족했다면,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나를 완전히 사로잡고 있는 이런 자괴감에서 그나마 자유로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안 그래도 현실이 얼마나 험난한지 더욱 뚜렷하게 인식하면서 내 등에 짊어져야 할 부담은 갈수록 커지고 있는데, 그 부담을 짊어지고 버티는데 필요한 힘을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서 생기는 자괴감과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계획하고 실천하지 못하면서 생기는 불안이 빼앗아 가고 있다.
 
이런 자괴감과 불안을 없애는 방법은 어떻게든지 내 삶은 만족스러웠다고 인정할 수 있게 근거를 대는 것, 흔히 말하는 '합리화'이다. 하지만 그 방법이 지니고 있는 단점을 내가 너무나도 싫어하기 때문에, 방법을 안다 하더라도 그대로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죽음을 피하려고 발버둥치더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벗어날 수 없는 이치를 '인생은 원래 그런 거다'라는 자조 섞인 말이 지니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그에 극렬하게 저항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합리화'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내 삶에 책임감을 지니고 더욱 열심히 살기 시작할 때부터 더욱 열심히 내 삶이 지니고 있는 뜻을 찾고자 애썼다. 그 뜻에 따라 내가 해야 할 일을 규정하고 행동하면서, 그 모든 것을 내 삶이 이럴 수밖에 없다는 근거로 삼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모든 행동을 하는 근거가 된 원칙들은 이 책 '마음을 리셋할 때 필요한 62가지 플러스 발상법'이 제시하는 것들과는 거의 정반대였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절대 만족하지 말 것, 자기를 칭찬하지 말고 항상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것,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더라도 시간만 알뜰하게 쓰면 그만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것, 하고 싶은 일이라면 능력껏 시도해 볼 것……이 말고도 원칙은 많은데, 지금까지 그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나는 매우 괴로워했다. 
 
제목이 '마음을 리셋할 때 필요한 62가지 플러스 발상법'이라고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험 가운데 하나가 눈 앞에 다가온 만큼,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 할 필요가 어느 때보다도 더 크다. 지금까지 내가 세웠던 원칙은 나에게는 '플러스'가 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마이너스'가 되었나 보다. 원칙대로 이루어진 것이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적고, 가장 건강하고 활기차야 할 20대에 이렇게 몸과 마음이 쇠약해진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고 그 까닭이 내가 지금까지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원칙으로 삼았던 것들, 곧 이 책에 나오는 내용들과는 정반대이니 말이다.
 
좋든 싫든 계기는 만들어졌고, 예전에 내 삶을 통째로 뒤바꾼 2004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고자 내가 어떤 자세를 지녔는지 돌이켜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2003년에 내가 발휘했던 놀라운 집중력과 열정을 다시 한 번 끌어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려면 지금까지 나에게 '마이너스'였던 것들은 과감하게 버리고, '플러스'가 되는 것들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것들을 이 책에서 많이 찾아낼 수 있었다. 지금까지 세 번 읽어서 겨우 몇 가지를 깨달았을 뿐이지만, 그 효과는 나름대로 크다.
 
하지만 여기에서 '플러스'라고 제시하는 것들은 지금까지 내가 그토록 경계하던 안이한 자세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단은 상처투성이인 몸과 마음을 바로잡고 새로운 힘과 열정을 끌어내는데 활용하지만, 어느 정도 삶이 안정되면 다시 내가 지금까지 지켰던 원칙을 끄집어내서 적용하기 시작해야 한다. 물론 그 때쯤이면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조화를 이루어서 예전보다 균형이 더 잘 잡힌 안정된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이 글을 마무리짓는 이 순간부터 이 쓸데없는 자괴감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다면 그 일을 하는 데만 온 힘을 쏟으면 그만이다. 가훈인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늦은 밤에 되새겨 본다.
 
내일부터 일찍 일어나자. 도시락을 싸자. 그리고 도서관에 가서 나오지 말자. 단순하지만 이 따위 원칙도 지금까지 지키지 못해서, 한심하게도 자책만 일삼았다. 내일부터는 반드시 원칙을 지키며 내 자신에게 떳떳해지자.
 
 
 
<마음을 리셋할 때 필요한 62가지 플러스 발상법>
 
 
1. 자신감을 갖는 방법
 
 
‘하고 싶은 일’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생각해두자!
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주문을 마련하자
인생은 어떻게든 되게 되어 있다
이번에야 말로 꼭 잘 된다
집착하는 데에도 요령이 있다
‘힘든 오늘’에서 ‘밝은 내일’이 생겨난다
아침형 인간이 인생을 현명하게 살아간다
마음을 일구는 나만의 장소가 있는가?
걷다 보면 어깨 힘이 자연스럽게 빠진다
지금은 이만큼이면 충분하다
 
 
2.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주는 사고법

 
먼저 ‘잘 되는 일’부터 시작하자
언제까지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고만 있을 것인가?
‘바보 같은 자신’을 즐기는 사람, 혐오하는 사람
싫어하는 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라면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자신에게 없는 것은 탐하지 마라
인생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
기억하기 싫은 것을 잊을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는가?
도망쳐도 괜찮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왜 ‘나다움’이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때로는 삶의 무대를 확 바꿔보자
 
 
3. 마음을 키우는 사람, 마음을 괴롭히는 사람

 
‘왜 나만 이럴까?’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인생을 자책하지 마라
잘못은 언제나 내 탓인가?
완벽하지 않은 자신을 꾸짖지 마라
마음이 메말랐을 때의 처방전
그릇이 큰 사람은 일처리 방법도 다르다
하나가 없어지면 다른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쓸데없는 욕심은 이렇게 버리자
마음의 상처는 건드릴수록 악화된다
걱정이 많은 사람에게 효과 있는 6가지 충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배우는 삶의 힌트
 
 
4. 인간관계를 아주 조금만 변화시켜보자

 부모와의 관계, 문제없는가?
자신도 타인도 희생시키지 마라
농락당한 자신을 미워하지 마라
마음속의 ‘어린아이’를 지켜주자
대화 상대를 만드는 방법
주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부정당했다면……
스스로를 믿고 살아가자
애정이란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다
부부는 ‘부족한 것’이 있기 때문에 성숙한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기 위한 기회
이런 단정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자신의 성욕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 즐기지 못하는 사람

 
 
5. 일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면 사는 것이 훨씬 편해진다
 
 
취업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라
이것저것 헷갈릴 때 먼저 생각해야 할 것들
오늘은 쉬자. 기분이 좋아지면 생각이 달라진다
사표 제출의 조건
리더쉽은 이렇게 생각하자
취직?이직의 ‘성공 지도’를 갖고 있는가?
매스컴에서 일에 대한 힌트를 얻지 마라
‘남자들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인간이 아닌 시스템이다


 
 
6. 인생은 마음만 풍요로우면 된다
 

먼저 ‘오늘을 즐겁게 사는 것’부터 생각하자
인생은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로하면 자신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줄어든다
혼탁한 도시 생활 속에서도 마음은 맑아질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뿌리를 내리자
이 ‘룰’을 지키면 틀림없다
어차피 기도할 거라면 모든 신에게 부탁하자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http://cyworld.nate.com/Lyubishev -> 더 많은 자료는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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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속도를 늦추어라
에크낫 이스워런 지음, 박웅희 옮김 / 바움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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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4년 4월 15일부터 류비셰프가 26세부터 평생동안 썼던 시간 통계법을 내 삶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 뒤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부족한 것은 너무 많다.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라는 얇다면 얇고 내용도 충분하지 않다고 볼 수밖에 없는 책 한 권을 달랑 손에 쥐고, 나는 주저하지 않고 정체조차 드러나지 않은 시간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류비셰프가 성공했으니 나라고 성공하지 못하라는 법은 없다고 굳게 믿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간단해 보였지만, 그 안에는 너무 많은 것이 얽혀 있었다. 일단 내가 처음에 파악한 문제는 수학으로 접근해서 생기는 변수 문제였다. 처음에는 몇 가지 안 되는 초기 조건이 너무 민감해서 시간 기록이 어려운 줄 알았다. 그런데 얼마 동안 기록하면서 내용을 분석해 보니까 그렇지 않았다. 예상보다 변수가 너무 많은 비선형 방정식이 시간 통계법 안에 숨어 있었다. 그 해를 찾아내는 일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그 해를 찾고자 나는 대학교에서 보낸 2년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그러다 보면 두 해 안에 뭔가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수 천 년 동안 나보다 훨씬 발달한 지성을 지닌 셀 수 없이 많은 철학자들이 매달려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남긴 시간을, 그 보잘것없는 시행착오로 모두 파악해 보겠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유치한 젊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치기였다. 해를 찾기는커녕 갈수록 늘어나는 변수를 고려하는 작업에도 엄청나게 많은 신경을 써야 했다. 한 달과 한 해를 결산할 때마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못 찾아낸 것 같다는 자책감과 안타까움에 시달리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온갖 정보가 넘쳐나는 인터넷을 뒤져봤다. 하지만 아무 것도 구할 수 없었다. 나와 같은 기록을 하면서 느꼈던 문제점을 토론할 이도 찾을 수 없었다. 류비셰프에 관하여 내가 구할 수 있는 자료는 오로지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라는 책 한 권뿐이었다. 이제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얻어낸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모르는 것은 너무 많았다. 일이 갈수록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숨만 쉬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기에는 지금까지 내가 공들여 쌓은 것들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무엇이 문제인지 처음부터 다시 차분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일은 계속 진행되는데 무엇인가 계속 어긋나고 있다면, 분명히 시작이나 과정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했던 일을 침착하게 돌이켜 보면서, 나는 지금까지 헛된 것에 너무 많은 시간을 썼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시간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일과 시간에 관련된 모든 것을 숫자로 나타내는 일은 일단 그만두기로 했다. 작업 효율과 겹치는 시간을 계산하는 방법까지 나름대로 고안해서 써 봤지만, 자기를 관리하는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숫자로 나타내는 일을 그만두자 한 가지 결론이 나왔다. 가장 근본에 가까운 문제는 숫자나 방정식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내가 전개념과 원개념 같은 추상과 현실 논리를 이어주는 방식을 설명한 '수량화 혁명'이나 '수학 유전자' 같은 걸작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숫자나 방정식을 고친다고 해서 내가 쓰고 있는 방법이 완벽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 하나만큼은 분명히 옳다고 생각했다. 류비셰프가 뛰어난 통계학자이며 유물론자였다는 사실이 오히려 내가 그를 완벽하게 이해하는데 방해가 된 셈이었다. 그런 특성을 지닌 그는 모든 것을 숫자로 파악했을 것이라고 내 멋대로 믿어버렸기 때문이다.

 

한 가지 편견에서 벗어난 뒤 나는 내가 과연 어떤 인물인지 분석하기 시작했다. 내가 과연 시간통계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되새겨 보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면서도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베르나드스키가 스물 세 살에 쓴 글에 나오는 것처럼 '지혜와 지식, 재능을 가능한 많이 쌓아 모든 면에서 부족하지 않은 지식인이 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주목했던 것은 '모든 면에서 부족하지 않은'이다. 모든 면에서 부족하지 않다는 것은 어떤 뜻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간단하게 생각하면 답은 쉽게 나온다. 말 그대로 공부뿐만 아니라 일, 사랑, 놀이, 체력, 운동 따위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잘 챙긴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람이 지닌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일생을 구성하는 시간도 분명히 제한되어 있다. 결국 우리가 달성해야 할 것은 되도록 높은 효율이다. 그것은 주어진 시간 안에 얼마나 많은 일을 제대로 해내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나는 효율을 높이는 방법을 단순히 시간만 기록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심지어 뭔가 잘못되었거나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막연하게나마 느끼고 있었으면서도, 시간을 기록하는 데만 매달렸을 뿐 자기 반성에는 소홀히 했다. 일을 하고 글을 쓰고 새로운 시간 기록 방법을 알아내고 체력을 관리하는 것은 단순한 실행 과정일 뿐, 그 실행 과정이 내 삶 속에서 밀도가 더욱 높아지는데 필요한 열정과 의지에 관해서는 연구를 소홀히 했던 것이다. 이때서야 그것은 단순한 숫자놀음이 아닌 인생 철학과 진지한 성찰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나이 24세. 아직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 정신 속에서 인생 철학이 여물어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절대 하지 않았으며, 지금도 하지 않고 있다. 단지 진지한 성찰만큼은 어설프게라도 흉내나마 내 볼 수 있었다. 그런 성찰에 도움이 되고자 수많은 책을 잡히는 대로 무작정 읽었으며, 그 가운데 이 책 '마음의 속도를 늦추어라'는 매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에서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은 가장 평범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 우리에게 왜 가장 유익한지는 뚜렷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 책을 몇 해 동안 계속 읽으면서 답을 찾기는 찾았다. 평범해지면 욕심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욕심이 사라지는 것이 왜 가장 우리에게 이로운지는 분명히 알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욕심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아내야 했다.

 

그 욕심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완벽한 지식인이 되는 것이다. 그 지식인은 류비셰프와 같이 같은 시간 안에 되도록 많은 일을 더욱 열심히 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필요한 것은 단순한 시간 기록이 아닌 시간 그 자체를 바라보는 마음가짐과 철학이다. 1분이라도 헛되이 쓰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을 현실로 옮기려면 주의를 온전히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쓸데없는 일에 쏟아붓는 에너지, 어제와 내일에 쏠려 있는 에너지를 모두 자기가 살아있는 지금으로 가져와야 한다. 그러면 그 날 하루가 주는 것을 되도록 많이 이용하는데 필요한 집중력과 의지가 생긴다. 

 

이는 내가 지금까지 저질렀던 실수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정확하게 지적한다. 나는 무슨 일을 할 지 계획을 세우는데 들어가는 시간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할 일이 없으면 실행 가능성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계획을 세우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면서 그 시간 자체는 보람이 있는 것이라면서 스스로 위로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어제를 반성하고 내일을 내다보는 것이 아니다. 어제 했던 실수를 반복하는 것일 뿐이며, 오늘 써야 할 힘을 내일을 상상하는데 써서 결국은 힘을 낭비하는 것일 뿐이다.

 

결국 '가장 평범한 사람'이라는 건 단순히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게 묵묵히 자기 할 일을 모두 해내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류비셰프가 그 사실을 깨닫는데 몇 년이 걸렸듯이 나도 결국 그랬다. 내가 시간통계라는 작업을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전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작업을 하는 자체가 보통 사람들보다 내가 더 부족하기에 괜한 시간을 더 들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더욱 겸손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작업인 시간통계 방법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네 가지로 나눠 그에 따라 시간을 기록하고, 내가 얼마나 하루를 가치 있게 보냈는지 계산했다. 굳이 분류 기준에 이름을 붙이자면 제 1 업무는 학술 업무, 제 2 업무는 생활 업무, 제 3 업무는 사교 업무, 제 4 업무는 생존 업무이다. 지금까지 제 1 업무를 뺀 나머지 시간에는 매우 적은 가치를 두었다. 특히 3-3, 곧 사교에 쓰이는 시간이 너무 많으면 곤란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 책에 따르면 제 3 업무가 지니는 가치는 자기가 어떤 이를 만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곧 자기가 도움을 줄 수 있거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이를 만나면, 그 시간은 가치가 훨씬 더 높아질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일이 그런데도 나는 유난히 사교에 들어가는 시간을 헛되이 쓰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시간을 기록하는데도 주저했던 게 사실이다. 실제로는 사교 업무에 들어가는 시간이 매우 많으면서도 말이다. 결국 사교 대상이 누구인가가 중요하다. 내가 훌륭한 이들을 따라가야 하며 훌륭한 이들이 나를 보고 쓸만한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도록 스스로 수양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을 돌이켜 보고 성찰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수단이, 바로 이 책에서 강조하는 명상이다. '선물'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현재에 집중하여 과거에서 배우고 미래를 현재로 만들고자 힘쓰는 방법을 명상과 수행이라는 방법으로써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다. '선물'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 같아서 읽고도 그다지 큰 감동이 없었는데, 이 책은 그야말로 가슴에 팍 꽂힌다는 말이 적절했다.

 

되도록 늦추라고 하는데도 나는 이 책을 계속 뒤적거리면서 읽었으니, 그저 저자가 말하는 수준에서 내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책 읽고 글 쓰기에 아주 좋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가을이 온 만큼 명상을 한 번 해 볼 만도 한데, 명상에 도전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명상을 할 시간에 글 한 편을 더 쓰겠다고 생각하는 판이니 말 다 한 셈이다. 이 책을 나는 과연 제대로 이해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졌다.

 

하지만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마음을 곧 고쳐먹었다. 시간통계가 해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답을 찾게 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명상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나름대로 차분하게 열심히 일하고자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성과는 보잘것없지만,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굳이 보잘것없다고 깎아내릴 필요도 없다. 물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지금이야 이렇게 생각을 하지만, 언젠가 지옥에서 쇠사슬에 칭칭 묶여 있는 악한처럼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친다면, 그 때는 다시 이 책을 찾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런 날이 오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이 글을 마치는 순간만큼은 정말 차분하고 평온하다. 명상이 주는 기쁨에 빠져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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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W이론 - 불확실한 미래를 희망으로 만드는 새로운 패러다임
이면우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좀 심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하루에도 수십 권씩 앞길을 예측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형편인데, 그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정확한지 판단하기에는 내 머리에 든 것이 너무 없다. 그리고 무작정 몽땅 읽어볼 수도 없었다. 그 사실에 진저리를 치고 있을 때, '생존의 W 이론'이라는 책을 조심스럽게 선택해서 읽었다. 나는 왜 하필이면 그 책을 읽었는가? 책을 쓴 사람을 내가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면우 교수를 내가 처음 안 때는 초등학교 때였다. 어머니께서 '웅진'에서 일하고 계실 때 우리집에는 '웅진출판'에서 나온 잡지가 제법 많았다. 환경 잡지인 '까치'도 있었고, 아이들에게 성공한 다양한 사람들을 소개하여 아이들이 생각을 키울 수 있도록 하려는 뜻을 담은 '생각쟁이'라는 잡지도 있었다. 나는 '까치'에서는 만화만 즐겨 봤지만, '생각쟁이'는 나름대로 열심히 읽었다. 백건우, 김진애, 황병기, 강원용, 김수환, 짐 리, 미야자키 히야오, 데즈카 오사무, 오프라 윈프리, 존 버닝햄, 휴렛, 패커드, 콜린스, 마이클 델, 앤드류 그로브, 스티브 잡스, 조지 소로스, 아스트랄드 린드그렌, 잭 웰치, 지미 카터, 에드윈 허블, 칼 세이건……셀 수 없이 많은 인물들을 알 수 있었다. 이는 나에게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그 도움을 글로 표현하려면 매우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런 것은 일단 제쳐두고, '생각쟁이'를 읽으면서 만난 사람 가운데 지금 내가 소개하려고 하는 책인 '생존의 W 이론'을 쓴 이면우 교수도 있었다. 상당히 독특한 사람이라고 책이 소개하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육체미 대회 장년부에서 우승, 서울대학교 산업공학과 교수, 특허청 등록율 1위……완벽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모두 이면우 교수 한 사람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 독특하고 대단한 이력만큼이나 그가 말하는 바도 그렇다. 미국에서 인간공학을 전공할 때 워낙 깐깐하고 강한 교수들에게 지도를 받아서 그런지, 이면우 교수가 말하는 방식 또한 남이 자존심이 상할 만큼 신랄하고 공격력이 강하다. 이 책에서도 비꼬고 깔아뭉개는 듯한 말투가 이어진다. 그런 말투로 거침없이 우리나라가 지닌 문제점을 비판한다. 그 비판이 매우 명쾌하고 전혀 주저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아서 속이 다 후련하다.

단 한 마디로 이 책을 요약할 수 있다고 본다.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인이 되는데 온 힘을 쏟자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충분히 그런 잠재력을 지니고 있지만, 워낙 우리나라에 잘못된 것이 많기에 그런 것들을 뜯어고치고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지 이야기한다.

이면우 교수는 신사고 이론, W 이론, 신창조론 따위 독특한 이론을 제시하기로 유명하다. 이 책 어디서든지 그가 강조하는 것은 독창성이다. 도시가스, 캐시밀론 이불, 냉장고, 비닐 봉투, 용달차, CD, 카페, PC방 따위가 이미 새로운 틀로 나타나고 있는데 여전히 연탄, 솜이불, 얼음 가게, 종이 봉투, 소달구지, LP, 다방, 탁구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과 똑같다고 비유를 든다. 기업은 어디에서도 따라올 수 없는 신기술을 개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여전히 기술을 모방해서 상품을 잘 만들어 팔아먹는데만 익숙하다.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그저 입시 제도가 변하는데 적응하고 사회 분위기를 따라가는데 급해서 세상을 좀 더 넓게, 그리고 멀리 바라볼 줄 모르고 큰 꿈과 목표도 없이 산다. 여전히 낡아빠진 틀(paradigm)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면 우리나라가 더는 희망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렇게 사람들이 독창성이 없고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줄 모르는 까닭을 설명하자면 우리나라 교육제도를 뺄 수 없다. 그렇기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들여 우리나라 교육제도가 파탄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교육철학이 없는 교육 정책 속에서 교육자와 학생과 학부모가 모두 공범이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 민족에게 알맞은 독특한 교육철학을 하루빨리 정립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올바른 교육 정책이 수립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독창성은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이면우 교수는 우리 조상들이 보여주었던 그 위대한 독창성을 제시한다. 에밀레종, 거북선, 단청, 석가탑, 다보탑……우리 조상들이 지니고 있었던 그 위대한 독창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비록 지금은 우리나라에 너무 많은 것이 잘못되어 있기에 그것이 제대로 안 드러나고 있지만, 우리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고 한다. 그 끝없는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야만 우리나라가 피도 눈물도 없는 끝없는 경쟁으로 뒤덮인 시대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그 쉴 새 없는 주장과 비판은 결국 나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졌다. 내가 지닌 문제점을 소름끼칠 정도로 정확하게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어서 읽다가 내 자존심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그리고 내가 지니고 있던 상식을 하나하나 다 깨 버렸다. 너무 머리가 어지러웠고, 정신을 좀 차린 뒤에도 감히 반박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자존심이 팍팍 구겨졌지만, 나는 홧김에 책을 덮지는 않았다. 끈기 있게 책을 읽다가 드디어 마지막 장을 넘긴 뒤 나는 '생각쟁이'가 왜 이 교수를 주목할 만한 사람으로 소개했는지 이해했다. 올바르게 비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주목받을 수 있는 것이 상식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루빨리 정신차리고 힘을 소모하지 말고 생산성 있는 일에 써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유를 부릴수록 게을러지고 결국 생산성이 떨어지는 법이다. 절대 여유를 찾지 말고 이런 비판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기와 사회가 지닌 문제점을 고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절대 발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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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교육학
파울로 프레이리 지음, 교육문화연구회 옮김 / 아침이슬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교육사회학 수업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파울로 프레이리가 무엇을 했던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 교육사회학 수업이 있는 금요일에 행사가 많아서 그 수업에는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금요일에 오랜만에 수업에 들어갔더니 과제가 나왔다. 책, 영화, 시 따위 온갖 것을 교육사회학 관점으로 바라본 뒤, 문제를 제기하여 그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써서 내라는 과제였다. 교수님이 책을 지정해 주셨는데 그 가운데 '희망의 교육학'이 있었다. 1학년 때 응용영어학 수업을 들으면서 노엄 촘스키라는 사람을 처음으로 알았고 그가 쓴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을 읽어보려고 마음먹었는데, 그 전에 이 책을 만났다. 그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는 따질 필요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과제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관심 없이 읽었지만, 차근차근 읽다 보니까 조금씩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한국사 수업 시간에 나온 과제를 하려고 'NEXT SOCIETY'를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라틴 아메리카는 아프리카와 더불어 나에게 매우 흥미로운 땅이다. 하지만, 일단 아프리카는 제쳐 두고,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것이 없다. 고등학교 때 세계사와 세계지리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배우고 공부한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히 알고 있는 점은, 라틴 아메리카에는 민주주의가 완벽하게 들어서지 못해서 독재 정권이 판을 치고 있으며, 민중들이 그에 맞서 여전히 강하게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던 1960~1980년대에 나타난 모습이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여전히 현실이라는 것이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꿈을 지니면서 현실주의자가 되어 기득권을 잡은 썩어빠진 세력을 몰아내자고 외쳤던 체 게바라뿐만 아니라 수많은 혁명가들이 활동하고 죽은 곳도 이 라틴 아메리카이다. 



파울로 프레이리는 그런 현실을 보고 아파하면서 젊을 때 이미 평생 동안 교육에 몸 바칠 것이라고 마음먹고 삶을 꾸려나가면서 그 결심을 꾸준히 행동으로 옮겼다. 사회에서 권력이 등장한 뒤부터 잘못된 권력에 맞서 싸우는 움직임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근대와 현대만큼 격렬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시기도 드물다고 본다. 프레이리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지식인들과 노동자들과 토론하고 같이 살기도 하면서 거기에서 얻은 바를 글로 썼다. 그런 책이 20여 권이 있으며, 그 책들은 모두 프레이리가 교육이 궁극으로 지향하는 바라고 생각한 '인간 해방'을 만들 수 있는 교육을, 어떻게 만들고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토론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희망의 교육학' 또한 마찬가지다. 이 세상을 걱정하고 진정한 교육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리라. 



프레이리는 희망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교육은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교육이 과연 그러한가? 우리나라 교육 제도는 이미 사회 불평등을 고착하고 기득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유지하는 통로로 변해 버렸다. 교육열과 교육비는 온 세상에서 첫째이지만, 그 효율은 거의 꼴찌에 가깝다. 너무 많은 학생들이 평생 동안 패배 의식을 지니도록 하는 경쟁 구도 속에서 성공한 이들이 다시 기득권을 쥔다. 기초 학문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단지 실용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사람들 대부분을 그저 시키는 일만 할 수 있는 단순한 노동자로 만들어 버린다. 희망을 줘야 할 교육이 오히려 사람들이 지닌 희망을 꺾고 모순된 사회 구조 속에서 그저 가만히 살아가도록 강요한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이 모든 것을 신자유주의가 만들고 있다. 더욱 무서운 일은 이 신자유주의가 교육에 스며들어 학생들에게 이런 사회가 당연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를 보라.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바가 당연한 것처럼 나와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온 세상사람 가운데 2할이 나머지 8할을 먹여 살리는 시대가 온다는 말이 있다. 그것이 윤리 교과서에 버젓이 나와야 할 내용인가? 사회 구성원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가르쳐야 할 윤리 교과서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그런 피 튀기는 경쟁 속에서 살벌해지는 사회가 당연한 것이라니! 



신자유주의를 보면 지금 사회에서 필요한 교육이랍시고 온 세상에서 시행되고 있는 교육 제도를 설명할 때 기능론보다는 갈등론이 훨씬 더 설득력이 크다. 교육에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깊이 스며들어 있는가? 프레이리는 갈등론을 강하게 지지하면서 신자유주의가 몰고 오는 무섭고 끔찍한 흐름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경쟁하지 않는 자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피도 눈물도 없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미친 듯이 세계를 휩쓰는 신자유주의는, 기득권을 지닌 자들이 즐겨 쓰는 논리이기에 당연한 일이다.  




……한 줌의 희망도 없다면, 우리는 투쟁을 시작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투쟁이 없다면 존재론적 요구로서의 희망도 사라지고,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며, 마침내는 희망 없음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희망 없음은 비극적인 절망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희망의 교육학이 필요하다. '희망의 교육학'은 그런 책이다. 분노와 사랑이 없으면 희망도 없기에, 이 책은 분노와 사랑으로 썼다…… 




파울로 프레이리는 부정부패에 찌든 기득권에 대한 분노와 민중에 대한 사랑을 가득 담아 이 책을 썼다고 여는 말에서 분명히 밝혔다. 희망이 있기에 투쟁이 있고 투쟁을 하면서 새로운 희망이 생긴다. 그리고 세상에 판치는 부정과 불의, 예를 들자면 신자유주의와 그것을 이용하는 가진 자들에 맞서 싸우는 민중들에게 교육으로서 희망을 줘야 한다. '희망의 교육학'이란 결국 그런 뜻이다. 사회 불평등과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쓰이는 교육학은 필요 없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잘 사는 아름답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려면 사람들은 계속 싸워야 하고, 싸우려면 사람들이 올바른 교육을 받아 의식 수준을 높이고 세계를 제대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올바른 교육을 하는데 필요한 '희망의 교육학'이다.  



에콰도르에서 사법부를 멋대로 주무르고 좌파 공약으로 당선된 뒤 우파 정책을 시행하며 강하게 독재했던 구티에레스 대통령이 의회에서 탄핵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내가 이 독후감을 쓰고 있는 2005년 5월 9일에 도착했다. 의회는 민중을 대표하는 기관이기에 민중이 힘을 쓴 것이며, 민중들도 가만히 있지 않고 거리로 나가 독재를 비판했다. 썩어빠진 기득권에 맞서 싸우는 민중이 있으면 그들이 바로 희망이다. 우리도 희망이 되어야 한다. 



이제 이 책을 다 읽었으니, 내가 읽어야겠다고 오래 전부터 마음먹었던 책, 곧 노엄 촘스키가 쓴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부터 일단 읽어봐야겠다. 읽어야 할 책은 산더미 같이 쌓여 있고 평생 동안 책만 읽어도 읽고 싶은 책을 다 읽을 수는 절대 없으니, 게으른 나를 채찍질하면서 서둘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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