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을 살다 보면 화가 지나치게 많이 나오는 나머지 허탈한 웃음을 저절로 낼 수밖에 없는 일이 '너무나도'라는 형용사가 그 수를 드러내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할 정도로 많다. 가장 좋은 사례를 한 가지 들어보겠다. 예전에 '장발장' 서문에 관해 매우 인상 깊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쓰려는 것이 그와 묘하게 통하는 것 같다.

 

생활비가 없어서 단 돈 몇 천 원치 생필품을 훔친 이(조카에게 먹일 빵을 훔친 장발장과 같은 인물라고 볼 수 있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죽을 죄를 지었다면서 자기 앞에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대는 기자들을 미친 듯이 피한다. 그리고 그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정의로운' 법에 따라 형량을 받고 유치장에 수감된다. 차디찬 감옥에 갇힌 그가 홀몸도 아니라 아내와 자식이 있는 가장이라면, 어떻게 보면 감옥보다도 더 차가운 사회에 가장 없이 남은 그 가족은 당장 살아갈 일을 걱정해야 한다.

 

하지만 기본으로 몇 십 억 단위로 온갖 부패 행각을 저지른 뒤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 이들은 아주 자랑스럽게 사진을 찍고 당당하게 법원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그가 저지른 죄에 비추었을 때 상식으로 생각해 볼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는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재력을 동원해 보석으로 풀려나는 일이 많다. 때로는 죄가 없다는 판결이 나와서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당당하게 자기 발로 법원 밖으로 걸어나간다.

 

대한민국뿐만이 아니다. 온 세상. 그리고 지금이 아닌 지난 세월 동안 사회를 유지하고자 사람들 사이에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당위론에서 나타난 법률은, 금권(자본주의 사회 이전에는 특권이라는 말이 더 적당할 것 같기도 하지만, 어차피 정도 차이만 있을 뿐 돈과 권력은 예전에도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했으니 그냥 쓴다)을 가진 사회 지배층이 가진 것을 보호하려는 수단으로 악용되려는 성향을 때로는 교묘하고 은밀하게, 때로는 대 놓고 드러냈다.

 

그 괴물 같은 법이 삶 자체를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러 더는 참을 수 없을 때, 민중들은 그동안 안에 쌓아놓았던 것을 폭발시켜 무기를 들고 거리로 뛰어나갔다. 그러면 지배자들은 법에 따라 처벌하겠다면서 엄포를 놓았고, 법에 따라 보장된 폭력으로 생존권을 요구하는 민중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하지만 민중들은 그에 절대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웠고, 그 결과 지배자들은 하나 둘씩 무릎을 꿇었다. 그러면서 사회는 조금씩 발전해 나갔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법률 또한 발전해 나갔다. 예전에는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폐기 처분되는 일, 그리고 지금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예전에는 말도 안 된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법 속에 스며드는 일은 매우 더디지만 차분하게 이어졌다. 여기에서 매우 더디지만 차분하게 이어졌다는 뜻은, 그렇게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피를 흘려야 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지금 그 피를 먹고 자란 민주주의가 주는 자유로움이라는 설익었지만 그래도 설익은 대로 상큼한 과일을 먹고 있다.

 

내가 살아가는 대한민국도 그 피비린내 나는 더디기 짝이 없는 과정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조선 시대에 국가 통치 근간을 이루었던 경국대전을 그 당시 중국뿐만이 아닌 유럽 열강과 신생 미국까지 포함한 세계 정세에 비추어서 비판하는 건, 그 때가 국제 정치라는 개념 자체도 중국으로 극히 한정되어 있던 시대이니까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밖에 안 된다고 그냥 넘긴다고 치자.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하고 대한민국 헌법을 1949년 7월 17일에 제정한 뒤, 지난 60년 동안 대한민국 사법계가 온 세상에서 조롱거리가 되었던 사건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가?

 

대한민국이 동북 아시아에서 떠오르는 네 마리 용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다고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던 서양 세계에서도, 대한민국을 통치하던 독재 정부가 저지르는 온갖 만행을 보면서 역시 후진국은 어쩔 수 없다는 비웃음 섞인 논평을 알게 모르게 쏟아냈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인터넷과 언론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공산당 독재 체제인 중국을 비웃는 것을 보면서 나는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지난 20세기에 대한민국을 바라보던 선진국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남한에게는 공산주의와 유혈 혁명만을 외치는 북한이라는 빨갱이 괴물이, 북한에게는 자본주의와 사대주의에 물든 남한이라는 친미 괴물이 나타날 때부터 그 비극은 싹트고 있었다. 북한이야 애당초 인권을 논할 가치도 없는 세계에서 최악인 나라 가운데 하나이니 무시한다 하더라도, 그토록 놀라운 저력을 보여준 남한에서 그 따위 비극이 일어났다는 것은 절대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다. 대한민국은 북한을 욕할 처지도 아니고 중국을 욕할 처지도 아니다. 다른 이를 비난하려면 자격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그런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 자격을 애써 회복하려고 지난 10년 동안 힘썼지만, 지난 해에 집권한 이명박 정권과 그 아래 숭미숭일 수구 세력은 지금까지 간신히 길러낸 민주주의라는 설익은 열매를 너무나도 쉽게 짓밟고 있다. 출범할 때부터 '법치'를 강조하더니, 그 법을 마음대로 주물러서 민중을 탄압하고 억누르고 있다. 기만스럽고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법률 위에 올라타 국민을 가소롭게 알고 있는 이들을 몰아내고자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을 때, 수구 세력이 외쳤던 것은 '정의로운' 법에 따른 '법치'였다. 그 법을 수호하는 경찰과 검찰과 사법부는 '정의로운' 세력으로서, 이에 맞서는 이들은 정의를 파괴하려는 '불법' 시위자들이다.

 

정의를 수호하는 공권력이 휘두르는 폭력은 사회 질서 유지와 법치주의 확립이라는 그럴싸한 명목으로 포장된다. 사회 전체라는 맥락에서 벗어나 특정한,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편협한 관점을 공권력이라는 법으로 정당하다고 인정받은 특수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이미 그 공권력 때문에 삶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궁지에 몰린 이들이 내뱉는 욕설과 울분과 폭력은, 정의로운 공권력을 위협하는 '미치광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한 마디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 이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막되먹은' 짓이라는 것이다.

 

이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평화롭게 저항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낼 줄 안다고 그들은 일갈한다. 하지만 그들이 평화와 이성을 강조하는 진정한 까닭은 따로 있다. 평화로운 방법으로 사람들이 저항하면 그 저항을 간단하게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화와 소통 따위는 아예 할 생각이 없는 이들이, 더는 참지 못하고 거리로 나선 이들은 대화와 소통 따위는 모르는 불법 폭력 시위꾼, 심지어 내란 선동자들로 몰아가는 작태를 보면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그들이 비폭력주의자였던 마하트마 간디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는 자체가 간디에게는 더 할 나위 없는 치욕이다.

 

민중은 인권을 존중하고 정의를 수호하는 헌법을 외친다. 하지만 헌법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 1조는 지금까지 제대로 실현된 적이 한 번도 없다. 심지어 그나마 가장 나았다고 하는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때도 부족한 점은 너무나도 많았다. 어쩌면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민중들이 해낸 일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보잘것 없으니 말이다.

 

그들은 헌법에 따라서 보호를 받는 이들이 확실해 보인다. 그들은 헌법에 따라 천부 인권을 타고난 사람으로서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살아갈 '권리'를 보장받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 그대로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대한민국은 여전히 살기 좋은 나라인데 불순 분자들이 나라를 좀먹고 있다고 생각한다. 중립이라고 외치거나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주류' 언론이 주장하는 대로 따라가는 경향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그들에게는 피해가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가 돌아가는 것이 이상하다면서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이들은 법에 따라 탄압받고 처벌받는다. 그들은 따지고 보면 소수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 불순 분자를 법에 따라 처벌하는 공권력은 더욱 정의로워 보이고, 수구 언론은 그런 공권력을 온갖 미사여구로 찬미한다. 헌법 정신이 스며들어 있다고 하는 법률이 어떻게 민중을 이토록 극심하게 탄압할 수 있는지 헌법이 지닌 정신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헌법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법치 국가를 수호하는데 적합하지 않다면 헌법을 무시할 수도 있고 한 술 더 떠서 바꿀 수도 있다는 독재 정권 시대에나 통할 사고 방식을 그대로 드러내는 지금 정부에게서, 무엇을 기대한다는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다. 단지 지금 헌법이 바뀌고 있는 헌법을 바꾸려면 국민 투표를 거쳐야 하는데, 민심이 국민 투표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렇기에 지금 부지런히 민중들 눈과 귀와 입을 모두 막으려고 언론 장악에 힘쓰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은 지금 '나는 이탈리아의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이다'라고 외치며 무솔리니와 같은 존재로 거듭나려는 이탈리아 독재자 베를루스코니와 같이 되기를 꿈꾸고 있다.

 

 

'법률은 시민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통제함으로써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법률가들이 시민의 이익 대신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길 때 사회의 정의는 힘 없이 무너지고 만다.'

 

 

책 뒤표지에 있는 이 문구만 봐도 이 책 '헌법의 풍경'이 무엇을 고발하고 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미 지난 세월 동안 헌법은 제정된 뒤부터 우리도 모르게 잃어버렸다, 아니, 지금까지 이 나라를 지배한 거의 모든 정권이 항상 헌법은 껌 씹듯이 무시해 버렸다. 굳이 내가 위에 쓴 것처럼 그렇게 길게 쓰지 않아도, 이 세상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책이 고발하는 현실이 지금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귀중한 책들을 읽고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뼈저리게 깨달아야 한다. 김두식이라는 용감한 법학자가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면, 우리는 그 비판에 따라 사회를 바로잡고 헌법을 살리고자 눈을 똑바로 뜨고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바람 앞 등불과도 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살릴 수 있다. 그러지 않을 때 앞으로 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눈을 감고 봐도 앞에 환하게 떠오른다.

 

만약 훗날 내노라 하는 지식인들조차 답이 없다고 고개를 젓는 이탈리아와 같이 변해버린 대한민국에서 누군가가 이 시대를 대상으로 '광인일기'와 같은 소설을 쓴다면 이와 같은 말이 나오면서 소설이 끝나지 않을까.

 

 

"헌법을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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