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와 악마 1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엄청난 대박이 터진 '다빈치 코드'를 쓴 댄 브라운이 예전에 썼던 '천사와 악마'라는 소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지만 '다빈치 코드'가 크게 성공한 덕분에 불티나게 팔린 책이다. 나는 '천사와 악마'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빈치 코드'를 읽기 전에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일단 이 책을 샀다.

몇 장을 넘기자마자 나는 이 책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시간이 흐르는 것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정신없이 읽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면 한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아무리 집중해도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 읽고 나면 쉽게 싫증을 내는 나한테는 참 대단한 일이다. 지금까지 소설을 제법 읽었지만, 완전히 빠져 정신없이 읽었던 소설은 '퇴마록',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빼고 별로 없었다. 참 오랜만에 느끼는 즐거움이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엄청나게 잘 짜인 구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좀 마음을 놓으려고 하면 내가 따라온 길이 잘못되었다고 한 방 먹이는 이야기가 튀어나와서 절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특히 일루미나티가 지니고 있는 이중성에 관한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반전은 너무 충격이 커서 끔찍할 정도이다.

대학교 1학년 2학기 때 교양 과목으로 물리학을 배운 덕분에 반물질(Anti-matter)과 입자 가속기에 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나는 이 소설 처음에 나오는 과학 이야기를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소설에서 사실이라고 밝히면서 소개하듯이 반물질은 매우 놀라운 물질이다. 현대 물리학에서 뉴트리노 입자, 초끈 이론, 암흑 물질 따위와 더불어 가장 흥미로운 주제이면서도 매우 어려운 주제이다. 이런 어려운 주제를 사람들이 어려워하지 않도록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지닌 능력이 매우 놀라웠다.

반물질을 온 세상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낸 레오나르도 베트라 박사를 죽이고, 반물질을 훔쳐 바티칸을 잿더미로 만들려는 무시무시한 음모를 꾸민 일루미나티(Illuminati)를 막아내는 로버트 랭던과 베트라 박사의 딸인 비토리아 베트라. 하버드 대학교 종교기호학 교수인 랭던은 기호학, 미술, 종교에 관한 해박한 지식으로 고대 조직 일루미나티가 만들어 놓은 비밀스러운 길을 찾아내면서 사건을 차근차근 해결한다. 막혀서 어쩔 수 없을 듯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여러 가지 단서를 토대로 생각을 유연하게 바꾸면서 결국 해답을 찾아내는 랭던을 보면서, 머리가 따라가지 않는 나는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추리 소설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그런 즐거움과 거의 같았다. 예전에 읽었던 '소년탐정 김전일', '명탐정 코난', '셜록 홈즈 전집', '도둑맞은 편지', '모르그가의 살인사건', '마리로제 살인사건', '보이지 않는 침입자' 따위가 갑자기 읽고 싶었다.

반물질은 에너지 효율이 100%로 핵융합 발전과 더불어 가장 이상에 가까운 동력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이름 그대로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물질과 전기 성질이 반대이기에, 물질과 닿기만 하면 무조건 반응해 사라진다. 그리고 그 반응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엄청나게 크다. 이 에너지를 어떻게 쓰느냐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잘 쓰면 인류는 앞으로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려고 끙끙 앓을 필요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잘못 쓰면 핵전쟁보다 더 끔찍한 공포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핵분진과 방사능 따위를 남기는 지저분한 핵무기와 다르게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쓸어버리기에, 어떻게 생각하면 차라리 낫고 한편으로는 더욱 끔찍하다.

앞에서 내가 왜 반물질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이중성에 관해서 말했는가?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이중성이기 때문이다. 소설 제목인 '천사와 악마'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천사라는 과학을 탄압하는 종교라는 악마인가? 천국에서 쫓겨난 천사가 악마로 변하기 때문에 천사와 악마는 종이 한 장 차이도 나지 않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나는 과학과 종교가 맺는 관계에 따라 나타나는 모습을 상징한다고 과감하게 말한다. 그것이 이 소설이 가장 강조하는 것이다.

나름대로 풀어서 설명하겠다. 이 소설 제목인 '천사와 악마'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띠는 가장 기본인 성질 가운데 한 가지인 '이중성'을 잘 나타낸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물체가 입자와 파동이라는 절대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두 가지 성질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물리학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고 있는 상식이다. 이런 이중성은 결코 물리학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반물질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가장 이상에 가까운 에너지원이 될 수도 있고, 세상을 통째로 날려버릴 끔찍한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이 소설이 궁극으로 말하는 바를 떠올려야 한다. 그것은 바로 "과학과 종교는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올바르게 대답하는 것이다. 그 대답은 무엇인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이 책에 정신없이 빠져버린 더 큰 까닭이 있다. 정말 재미있기도 하지만, 과학과 종교에 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알아내지 못한 나에게 매우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검은 눈동자로 세상을 어둡게 바라보면서 어떤 것이 지닌 장점보다는 단점을 바라보는 버릇이 내가 어릴 때 이미 생겼고 그것이 매우 심하게 굳은 터라, 종교를 바라보는 시각도 그다지 곱지 않다. 특히 기독교과 이슬람 교에 관해서는 더욱 그렇다. 9.11 테러는 기독교 원리주의와 이슬람 원리주의가 대립하면서 몰고 올 혼란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기독교 원리주의자 부시와 이슬람 원리주의자 빈 라덴이 충돌한 뒤 그 충돌은 더욱 복잡해지면서 세상은 엄청나게 혼란스럽다. 나는 그 양상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면서 더욱 크게 화가 났다. 그리고 주위에서 나타나는 타락한 종교인들을 바라보면서 분노는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하면서 과학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렸던 나는 대학교에 들어온 뒤 제대로 과학을 공부하면서 원래 지니고 있던 과학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회복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관심과 종교에 대한 증오가 연결된 것이다. 종교는 이성 따위는 전혀 없는 순전한 믿음으로 구성된 어이없는 존재였고, 과학은 내가 그토록 찬양하는 이성으로 무장한 성스럽고 굉장한 존재였다. 성묵이가 나한테 지적한 것처럼 과학이 나에게 종교가 되어버린 것이다. 종교가 아무리 억눌러도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열광했다. 사실 나는 이 소설에 나오는 일루미나티에 충성하는 암살자와 같은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종교를 이해하고 포용하려고 하는 척 하면서, 현대 사회에서 차츰 힘을 잃어가는 종교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통쾌한 기분을 맛보았다. 지금 과학이 완전하지 않기는 하지만, 지금처럼만 과학이 발달한다면 결국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그 위대한 과학을 충실히 이해하려고 힘쓰는 나를 매우 위대한 존재로 생각했다. 곧 영웅 심리가 극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것은 곧 철없는 생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나는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흔들리는 나를 아예 때려눕혔다. 궁무처장이 온 세상에 하는 연설을 읽으면서, 나는 심장이 터질 듯한 감동에 휩싸였고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소설에서 궁무처장이 연설하는 것을 생방송으로 바라본 CERN에서 일하는 과학자들과 온 세상 사람들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과학과 종교는 서로 살아남으려고 맞서 싸워야 하는 그런 운명이 아니라, 서로 도우면서 인류 문명을 이끌고 살찌워야 할 의무을 지니고 있다. 그래야 애매한 듯 하면서도 결국 진리라고 할 수 있는 이중성이 빛을 본다. 과학과 종교는 서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풀어주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결국 둘 다 이중성을 띤다. 종교를 극단으로 거부하는 일루미나티나 원리주의를 따르면서 과학을 거부하는 종교나 둘 다 옳지 않다. 사람들은 열린 마음과 이성으로 과학과 종교를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두 가지가 서로 충돌한다면 그 충돌을 줄이고 서로 이해하고 같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을 닦으려고 힘써야 한다.

세상이 더욱 혼란스러워지면서 과학자들과 종교인들이 서로 이야기하려고 세상을 올바르게 다잡으려고 힘쓰고 있지 않은가? 예전에도 그랬다. 이미 깨달은 자들은 과학과 종교는 절대 대립해서는 안 되고 화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가톨릭 사제이면서 CERN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레오나르도 베트라 박사, 수녀와 사랑에 빠진 교황을 도와준 생명과학, 일루미나티가 만든 길이 나타내는 거대한 십자가 따위는 무엇을 뜻하는가? 작가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여 소설에 빠져들도록 하려는 그런 목적으로만 이중성을 상징하는 이야기를 자꾸 집어넣은 것 같은가? 내가 보기에는 절대 그렇지 않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고 작가가 강조하는 핵심이다. 과학과 종교가 서로 이해하고 같이 발전한다면 인류 문명은 앞으로 더욱 번영할 것이요, 과학과 종교가 계속 대립한다면 인류 문명은 비틀거리다가 결국 파멸할 것이다. 소설 제목과 연관지어 말한다면 과학과 종교는 인류를 구원할 '천사'가 될 수도 있고 인류를 멸망시킬 '악마'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천사와 악마' 가운데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 답은 뻔하지 않은가? 망설일 까닭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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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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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24시간 중 그 11분 때문에(말도 안 되는 소리긴 하지만, 모든 사람이 매일 밤 아내와 사랑을 나눈다고 가정할 때) 결혼을 하고, 가족을 부양하고, 아이들의 울음을 참아내고, 늦게 귀가하게 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함께 제네바 호숫가를 거닐고 싶은 수십 수백 명의 다른 여자들을 훔쳐보고, 자신을 위해 값비싼 옷을, 그 여자들을 위해서는 더 비싼 옷을 사고, 채우지 못한 것을 채우기 위해 창녀를 사고, 피부관리, 몸매관리, 체조, 포르노 등 거대한 산업을 먹여살리고 있는 것이다……

인류문명에 뭔가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는 신문에서 떠들어대는 것과는 달리 아마존의 삼림훼손도, 오존층 파괴도, 판다의 멸종도, 담배도, 암을 유발하는 음식도, 감옥 내의 열악한 환경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종사하는 직업, 바로 섹스였다……


'sex'를 우리말로 어떻게 나타내는가? 사랑나누기? 성행위? 성접촉? 어떻게 나타내든 상관없이 '사람'이라는 종족이 지구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 가운데 한 가지이다. 어떻게 보면 인류 문명에서 사랑은 식량과 자원보다 훨씬 중요하다. 만약 사람들이 성행위에서 전혀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나아가 사람들이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도록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미친 과학자가 인류를 협박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 온 세상 석유를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는 악당이나 지구를 통째로 날려버릴 무기를 가진 악당처럼 여기지 않을까?

나는 사랑과 연애를 다룬 소설은 거의 읽지 않고 경험도 거의 없어서, 사랑과 연애에 관해서 너무 많은 것을 모른다. 나는 매우 순진한 편이었고, 성과 관련된 쾌락을 처음 느낀 방법도 다른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방법이 아니다. 연애를 하려면 그저 무작정 좋아하면 그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연애에도 지식이 필요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요동치고 폭발하는 감정에 몸을 맡기자 결국 큰 상처를 입고 망가지기만 했을 뿐, 다른 사람들이 하는 연애 따위는 꿈꿀 수도 없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지만, 여러모로 나는 이 주제에 굉장히 예민하다. 이상하게 문명을 지탱하는 한 가지 요소라는 학술로서 접근할 때는 즐겁지만, 실제로 부딪쳐 보면 심하게 아프고 괴롭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그 아픔과 괴로움이 내 일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을 제대로 하려고 그런 주제에 관해 생각을 끊고 연정을 억눌렀다. 지금은 그 연정이 내 능력으로 어느 정도 '승화(sublimation)'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아프고 괴로워도 이것은 본능이기에 나는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나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성에너지, 곧 리비도가 특히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가두어도 이성에 관한 내 호기심은 자꾸 빠져나오고, 아무리 밀어내도 내 마음 안에 여자가 자꾸 들어온다. 멍하니 아무 것도 하기 싫고 꿈꾸듯이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거의 이성이다.

이런 나에게 '11분'은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다지 많지 않은 지식을 얻고 경험을 쌓아놓고, 그것 때문에 나를 크게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었다. 그 뒤 연애에 관해서는 정면으로 부딪쳐 보자는 생각마저 하지 않고 있던 나에게 용기를 줬다. 쉬워 보였지만 완전한 별천지로서 다가가기 너무 어려운 곳에 보잘것없는 지식과 경험으로나마 과감하게 발을 들여놓아 보자고 생각한 것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인 마리아는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다가 상처를 받고 사랑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뒤 사람들이 막연하게 거부하는 이른바 창녀가 되고 차츰 성을 깨닫지만, 성은 성일 뿐 더 큰 뜻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 안에 있는 빛을 보고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랄프 하르트라는 화가를 만나면서 나중에는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성스러운 성과 사랑을 깨닫는다. 결국은 동물인 사람 안에 어떻게 그토록 많은 것이 숨어 있을 수 있는가? 그 많은 것들은 왜 그렇게 한결같이 아름다워 수많은 사람들이 찬양하고, 한편으로는 너무 역겨워 수많은 사람들이 경멸하는가? 몸은 몸이고 마음은 마음일 뿐인가? 나는 사랑이 지닌 두 가지 면인 몸과 마음이 어떻게 서로 통하는지 얼마나 알고 있었던가? 많은 질문이 쏟아져 나왔지만 전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 내가 얼마나 한심했는지 모른다.

그랬기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매우 답답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사랑은 아름답고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나도 사랑하고 아름다워지고 싶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실패했지만, 언젠가는 이룰 수 있을까? 마음은 그저 끝없이 흔들리고 계속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방황하려는 나를 다잡을 뿐이다. 언제 이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여전히 속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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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채식주의자가 되었는가 - 채식주의자가 된 미국 최대 축산업자의 양심 고백
하워드 F. 리먼 지음, 김이숙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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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서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유아교육과에 입학하신 뒤 공부를 매우 열심히 하셨다. 집안일에 매우 바빴지만 4년 동안 한 번도 장학금을 놓치지 않으셨다. 밥 먹고 공부하는데만 몰두해도 괜찮을 정도로 여유로운 형편인 나는 장학금을 못 타고 있으니, 어머니와 견주어 보면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물론 나름대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변명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어머니께서 들으시는 수업 시간에 나오는 과제는 주로 어떤 책을 읽어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집에 가면 내 방 책꽂이 한 켠에는 예전에 어머니께서 과제를 하려고 사셨던 책이 여러 권 꽂혀 있다. '나는 왜 채식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책도 거기에 있었던 책이다. 어머니께서 이 책을 사셨을 때는 책 제목이 '성난 카우보이'였는데, 세월이 흐른 뒤 '나는 왜 채식주의자가 되었는가'로 제목이 바뀌었다.

책 내용에 따라 제목에 아주 간단하게 답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성의 없는 대답인가? 그러면 또 물어보자.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고기가 지구를 파멸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열 명 가운데 아홉 명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듣는 말인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헛소리 같다. 왜 고기 때문에 지구가 망하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일단 이 책을 읽고 나서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아야 한다. 이 책을 쓴 하워드 F. 리먼은 원래 축산업자였기에 그 실태를 놀라울 정도로 자세하고 정확하게 까발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예전부터 내려온 유기 농법을 버리고 대학교에서 배운 화학 농법과 축산법으로 소를 키우다가, 자연과 자기가 모두 죽어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뒤 유기 농법을 되살리려고 힘쓰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에서 식품의약청, 은행 자본, 축산업자, 생명과학 회사, 사료업자 따위가 모두 한통속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한통속이 되어 보여주는 역겹기 짝이 없는 행태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염된 고기를 계속 먹으면서 위험에 빠지고 자연이 심각하게 파괴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고기는 인구 부양 효과가 굉장히 낮은 식품인데도 사람들이 고기를 차츰 많이 먹는 현실을 우려하며, 이대로 가다가는 온 세상이 식량 문제로 비상이 걸릴 것이라고 경고한다. 맨 마지막에는 갈수록 온 세상에서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비만으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소식을 집어넣어, 사람들을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설득하고 있다.

토목 공사, 자동차 문제 따위는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기가 쉽다. 하지만 흔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고기 같은 먹을거리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은 이상할 정도로 부각하기가 어렵다. 그동안 이에 관해 진지한 논의가 거의 없었을뿐만 아니라, 축산업자와 생명과학 회사 따위가 이익을 지키려고 그런 논의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순히 경제 논리와 몇몇 이익 집단이 미친 듯이 좇는 이익 때문에 여러 정부가 보여주는 추태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 대표 사례로 영국에서 예전에 해면상뇌증(광우병)에 걸린 쇠고기를 계속 먹은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경고했는가? 그런데도 영국 농무성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써 가며 애써 무시했고, 그 결과 원조 광우병이 발생할 확률로 따질 때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변종인 크로이츠펠트-야콥 병에 걸려 죽었다.

크로이츠펠트-야콥 병만 문제가 아니다. 자연이 파괴되면 우리에게 어떤 결과가 돌아올지는 뻔하다. 이는 더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환경 문제 때문에 떠들썩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자연 파괴 문제는 둘째로 치고 당장 사람에게 즉각 연결되는 문제인 식량 문제를 생각해 보자.

식량 문제는 자원 문제(물론 식량도 자원이라고 볼 수 있지만 흔히 자원 문제라고 하면 석유 따위 동력 자원을 이야기하니 그냥 쓴다)와 함께 인류가 살아남는데 절대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고기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인구 부양 효과가 굉장히 낮은 음식이다.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배운 에너지 피라미드를 조금만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다. 에너지 피라미드에서는 위로 올라갈수록, 곧 고차 소비자로 에너지가 이동할수록 에너지가 많이 사라진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식물을 먹는 것보다 동물을 먹는 것이 훨씬 많은 에너지를 쓴다는 말 아닌가?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겠다.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처럼 사람들이 식물을 주로 먹고 사는 나라는, 그 나라에서 나는 곡물만으로도 온 나라 사람들이 충분히 먹고 산다. 그런데 고기를 주로 먹는 서양은 어떠한가? 곡물을 가축이 먹고 사람이 그 가축을 먹는다. 동물을 주로 먹는 서양인들은 식물을 주로 먹는 동양인들보다 에너지를 6~7배 정도 더 많이 쓰는 셈이다.

본문에서도 나온 것처럼 몇몇 사람들이 스테이크와 황새치 요리를 즐길 때 나머지 사람들은 배를 움켜쥐고 굶주려 죽어가는 시대가 올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러다가 결국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 사실 '몇몇 사람들'과 '나머지 사람들'은 지금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선진국 사람들이 고급 레스토랑에서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썰고 와인을 홀짝거리는 동안, 매우 못 사는 아프리카나 동남 아시아에서는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구호품과 원조 물자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얼마나 기가 막힌 현실인가?

지금까지 말한 바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기 때문에 인류는 지구에서 사라질 수 있으며, 그 까닭은 자연을 파괴하고 식량을 부족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기를 먹지 말고 채소를 먹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굉장히 많은 환경 문제와 식량 문제를 근본에서부터 해결할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저절로 반감이 드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굉장히 많고 정확한 자료와 저자가 한 폭넓은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터라 반박하기도 힘들다. 앞에서도 계속 말했듯이 이 책을 쓴 하워드 F. 리먼은 원래는 이 책에서 비판하는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었던 축산업자였다가 큰 깨달음을 얻고 그에 반하는 길을 지금까지 걸어온 사람이다. 이 사람만큼 이 심각한 문제에 관해서 깊이 있고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내가 살고 있는 부산대학교 기숙사에서 주는 밥상에는 고기가 거의 빠지지 않는다. 국에 들어가 있든 구워놓든 볶아놓든 튀겨놓든 어떻든지 마찬가지이다. 이 책을 읽고 제대로 마음에 와 닿고 어떤 느낌을 줬다면 앞으로는 고기와 유제품을 거들떠보기도 싫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은 다음 날 아침에 나온 쇠고기장조림과 점심 때 나온 쇠고기국과 저녁 때 나온 돼지고기잡채를 맛있게 먹었다. 고기에 완전히 중독된 것 같으니 이것이 문제이다. 성경에서도 만나로 만족하지 못한 하느님의 자식들이 고기를 먹고 싶다고 모세에게 말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사람들은 거의 본능으로 고기를 먹고 싶어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대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채소만 먹어야 하는 시기는 과연 내가 살아있을 때 올 지 걱정스러울 정도로, 나는 고기를 좋아한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그런데 이 책이 말하는 바를 계속 되새기면서 자꾸 어머니가 생각났다. 집에 있을 때는 그래도 고기가 먹고 싶다는 '솟증'을 여러 번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항상 김치, 된장찌개, 콩나물, 열무 따위로 밥상을 차리셨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고기를 한 번 먹을 정도였다. 집에 안 간 지도 오래 되었는데, 어머니께서 싱싱한 채소로 풍성하게 차려진 밥상이 갑자기 그립다. 잘 익은 배추김치, 콩 건더기와 무 조각과 두부가 떠 있는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 싱싱하고 푸른 상추와 풋고추와 풋마늘이 날된장과 함께 차려진 밥상을 받고 싶다.
 

 

2008년 5월 9일. '책을 나누는 사람들' 원고

 

 

쇠고기 협상을 타결한 뒤 한미 FTA까지 총력을 다해 밀어붙이려고 하는 이들에게 국민이란 없다. 인류에서 극소수인 가진 자들이 나머지를 지배하는 사회를 당연한 것처럼 몰아가는 신자유주의자들에게 민중을 위한 철학, 역사, 민족 의식 따위는 필요없다. 무식한 것들은 그저 자기들이 주는 것이나 받아먹고 자기 말만 잘 들으면 그만이라는 오만한 태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리 국민들이 광우병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제시한 자료를 들이밀어도, 그저 눈을 가리고 귀를 틀어막는다. 그저 광우병 괴담은 근거 없으니 혹세무민하는 세력을 잡아서 처벌할 것이며 미국산 쇠고기는 안전하다고 강변하기만 할 뿐, 재협상 따위는 아예 해 볼 생각도 없어 보인다.

 

내가 그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은 '나는 왜 채식주의자가 되었는가'이다. 책 내용에 따라 제목에 아주 간단하게 답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성의 없는 대답인가? 그러면 또 물어보자.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고기가 지구를 파멸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열 명 가운데 아홉 명은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이 책에 따르면 분명히 사실이다.

 

이 책을 쓴 하워드 F. 리먼은 원래 축산업자였기에 단순히 경제 논리와 몇몇 이익 집단이 미친 듯이 좇는 이익 때문에 여러 정부가 보여주는 추태를 놀라울 정도로 자세하고 정확하게 까발릴 수 있었다. 그는 예전부터 내려온 유기 농법을 버리고 대학교에서 배운 화학 농법과 축산법으로 소를 키우다가, 자연과 자기가 모두 죽어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뒤 유기 농법을 되살리려고 힘쓰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에서 식품의약청, 은행 자본, 축산업자, 생명과학 회사, 사료업자 따위가 모두 한통속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한통속이 되어 보여주는 역겹기 짝이 없는 행태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염된 고기를 계속 먹으면서 신종 질병인 광우병에 걸릴 위험에 빠지고 자연이 심각하게 파괴되고 있는지 절대 과장 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고기는 인구 부양 효과가 굉장히 낮은 식품인데도 사람들이 고기를 차츰 많이 먹는 현실을 우려하며, 이대로 가다가는 온 세상이 식량 문제로 비상이 걸릴 것이라고 경고한다. 맨 마지막에는 갈수록 온 세상에서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비만으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소식을 집어넣어, 사람들을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설득하고 있다.

 

인간 광우병에 관한 다양하고 해박한 지식뿐만 아니라, 대규모 축산업 자체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까지 다루며 신자유주의까지 거침없이 비판하는 이 책은 분명히 경고한다. 정말 깨끗한 환경에서 자란 값비싼 국산 명품 한우나 호주산 청정우로 만든 스테이크를 썰고 프랑스에서 공수한 최고급 와인을 홀짝거릴 능력을 지닌 극소수 기득권에게 국민 건강 따위는 고려할 가치가 전혀 없다고. 사람들이 일어서지 않는다면 그 피해는 무조건 돌아올 것이라고. 기득권을 지키는 데만 눈이 먼 저들에게 국민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줘야 한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나는 이 세상을 바꾸고자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고 행동하고 있는지 돌이켜 보지만, 그럴수록 이 따위 짧은 글 한 편 쓰는 데도 알 수 없는 수많은 혼란에 시달려야 하는 데서 오는 끝없는 환멸만이 자기를 죄어와 어려움을 겪으니 그저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쓸데없는 잡념 따위는 집어치우고 내일은 반드시 거리로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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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장승수 지음 / 김영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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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우리집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이라서 여러 번 읽었고 읽은 지도 꽤 오래 됐다. 내가 1999년에 이 책을 읽었으니 중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 읽은 셈이다. 어머니께서 내가 그 책을 읽는 모습을 보고 책에 나오는 장승수처럼 제발 공부 좀 열심히 하라고 야단치신 기억이 난다. 책을 읽고 어릴 때 어느 정도 감명을 받았는지, 아니면 평소와 다르게 야단이 워낙 효과가 좋았는지 중학교 1학년 때는 그래도 성적이 제법 괜찮은 편이었다. 1학년 2학기 기말고사 때 전교 3등을 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세월이 매우 많이 흘러서 내가 대학생이 된 뒤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 이렇게 독후감을 쓰는 까닭은 간단하다. 내가 자라는 동안 머릿속에 새로운 정보가 많이 들어오면서 많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릴 때는 그저 공부 잘 한다고 감탄하고 부러워했지만, 대학생이 된 뒤에는 이 책을 생각할수록 뭔가 비판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졌다. 그런 욕구 때문에 나는 손을 부지런히 놀린다.

장승수는 매우 보잘것없는 조건에서 시작했다. 그저 미친 듯이 싸우고 오토바이를 타고 동네 오락실을 기웃거리던 건달이었다. 집은 찢어질 듯이 가난해서 홀어머니 혼자서는 생계를 이어갈 수 없어서 온갖 일을 하면서 공부해야 했다.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한 뒤 막노동 따위 온갖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가며 여러 대학을 지원했지만 떨어지다가, 결국 1996년 서울대학교 인문계열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는 서울대학교에 합격하기 전에 자기가 살았던 삶과 그 속에서 느꼈던 것들을 담담하면서도 진솔하게 풀어놓았다.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온갖 고난을 겪어본 사람이기에 그가 하는 말은 나에게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험한 밥을 먹어가면서 몇 년 동안 막일을 했던 경험은 그가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말을 이 책 제목으로 삼도록 했다. 그가 한 경험으로만 따져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객관으로 따져봐도 삶에서 가장 쉬운 일은 공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그다지 걱정이 없었던 학창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아닌가? 사회에 나와서 생계를 스스로 꾸려가면서 엄청난 걱정에 시달리다 보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예전과 견주어 볼 때 세 끼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있고 나름대로 문화도 즐길 수 있는 풍요로운 조건 속에서, 자기만 제대로 마음 먹고 시작한다면 공부를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앞에서 말한 풍요로운 조건이 어느 정도 갖춰진 사회 속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장승수처럼 성공할 수 있어야 한다. 경제에 관한 논란이 요즘 같은 심각한 때도 없었지만, 분명히 예전보다는 삶 수준이 많이 높아졌기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한 번 생각해 보자. 가난을 딛고 여러 번 도전한 끝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있으면 언론이 크게 보도하면서 난리를 치는 일이 예전에는 몇 번 있었는데 요즘에는 전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사실 환경이 어려워도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여 성공하는 사람들이 제법 흔해서 눈에 띄는 새로운 소식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워야 한다. 그래야지 제대로 된 사회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사회는 그렇지 않다.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은 이미 옛말이 되어 버렸다. 부자는 자기가 가진 것을 이용해 더욱 큰 부자가 되고 자식에게 부를 물려주고, 가난한 자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후손에게 가난을 물려주는 세상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왜 세상이 그렇게 변해 버렸는가? 교육이 자본과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어 기득권을 이어가는 도구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장승수 같은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 또 이와 같은 책이 나올 수 있을까? 그렇기에 이런 책이 나왔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이 책 전체를 칭찬하는 것은 아니다. 삶에서 배운 것을 활용하려는 자세는 높이 평가할 만 하고, 또 마땅히 본받아야 할 자세이다. 하지만 뒤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잘 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책에서 많은 분량을 쓰면서 책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 수능이 이미 학생들을 진정한 공부에서 멀어지게 하는 주범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쓸데없는 시험이기에, 'JSS식 학습법'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한 많은 내용은 몇 가지 주목할만한 의견 빼고는 그다지 가치가 높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학벌 때문에 매우 문제가 많은데, 그런 학벌을 언론이 앞장서서 부추기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사실 언론이 그렇게 크게 보도를 해 주었기에 이 책이 제대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개천에서 용 났다'라는 말도 삐딱하게 해석하면 매우 안 좋은 말이 된다. 용이 도대체 무엇인가? 명문대에 합격한 사람만 성공한 사람인가? 어떤 사람은 공부 못하는 사람을 패배자로 만들지 말라고 했는데, 그 말도 나에게 상당히 와닿았다. 자기가 힘써서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사회에서는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지만 자기는 스스로 만족하고 자기가 일군 것에 대해 뿌듯한 긍지를 가지고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이 빛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저 서울대학교 같은 명문대에 합격한 사람들만 언론이 크게 보도하는 것 같아서 영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일 때 장승수는 제 45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그가 자기를 관리하는 능력은 정말 감탄할 만 하다. 절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권투로 체력을 관리하며 오로지 사법고시 준비에만 몰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했기에 사법고시 합격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맛볼 수 있었으리라. 그가 사법고시를 합격한 뒤에 이 책이 다시 크게 인기를 끌었는데, 뒤에는 신경 쓸 필요가 별로 없다. 그가 걸어온 길을 담담하게 이야기한 앞과 중간을 자세히 읽어보면, 자기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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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기술
조승연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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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공부기술'이라는 책이 나왔다. 나름대로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행동이 따라주지 않아서 제법 초조해하고 있었던 터라, 호기심에 서점에 가서 그 책을 한 번 훑어봤다. 하지만 공부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생각이 매우 확고했기에 책에서 소개하는 공부 기술을 제대로 읽어보지는 않았다. 지금 그 책에 관해서 기억나는 내용이라고는 전체주의 교육이 19세기 독일에서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온 세상에 퍼지는 바람에 교육이 매우 효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따끔한 비판뿐이다.

맨 마지막에 '공부기술'을 쓴 조승연이라는 대학생을 소개하는 글을 봤는데, 그 글을 보자마자 나는 그만 질려버렸다. 뉴욕대 경영학과인 스턴 비즈니스 스쿨과 줄리어드 음대 이브닝 스쿨에 동시에 다니는 학생. 피아노와 태권도와 펜싱 실력이 전문가 수준이며 바텐더 자격증도 가지고 있는 학생.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원서를 볼 수 있으며, 고대 영어도 막힘없이 읽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춘 학생. 나이도 나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데 어떻게 그 많은 것을 이뤄낼 수 있었는지, 그리고 나는 도대체 지금까지 뭘 했는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저 훑어보기만 했던 '공부기술'을 제대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원래 지니고 있던 생각이 워낙 견고해서 깨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고, 그 당시에는 책을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 책을 읽을 시간도 내려고 힘쓰지 않았다.

그 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부산대학교 영어교육과에 합격한 뒤 나는 다시 '공부기술'을 떠올렸다. 세월이 제법 흘렀는데, '공부기술'을 쓴 조승연이 새로운 책을 썼다. 단순한 '공부기술'이 아니라 좀 더 깊이 파고들어 공부와 삶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거침없이 설명한 '생각기술'이라는 책이었다. 이번에는 주저할 까닭이 없었기에, 동보서적에 가서 책을 샀다. 차근차근 읽으면서 나는 이 책에 완전히 빠져 버렸고 수십 번을 읽었다. 그러면서 내 마음 속에 있던 어떤 것이 바깥으로 마구 빠져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뇌가 예전보다 훨씬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그대로 삶과 공부에 대한 열정과 그 둘 사이 관계에 대한 진지한 사색으로 이어졌다.

내가 앞에서 조승연을 소개하면서 '학생'이라는 말로 문장을 끝냈다. 왜 그렇게 학생을 강조했는가? '학생'에 관해 내가 책을 읽기 전까지 가지고 있던 개념을 완전히 깨 버렸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같이 효율 낮은 교육에 적응하느라고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학생들과 학부모들도 '학생'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잡지 않고 있다.

학생(學生)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정의와 설명 가운데 내 머릿속에 가장 뚜렷하게 남아있는 것은 이 책이 말하는 정의와 유영모 선생이 하신 설명이다. 함석헌 선생이 오산학교에 다닐 때 새 교장으로 부임한 유영모 선생이 학생에 담긴 뜻을 세 시간 가까이 강연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 강연이 매우 재미있으면서도 깊이가 있어서 이 책에서 말하는 학생이라는 뜻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만하다. 일단 그 이야기는 제쳐두고 이 책에서 말하는 학생을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 교육만큼 효율이 떨어지는 교육도 보기 드물다. 그 까닭 가운데 한 가지가 '학생'이라는 개념이 잘못 정의된 것이다. 학생은 그저 교실에 틀어박혀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위에서 요구하는 정보를 입력해야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 앎을 찾아나서고, 자기가 공부한 것을 삶에 적용하면서 자기 앞에 닥친 문제를 거리낌 없이 해결하는 전사와 같은 사람이 바로 학생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교육은 아이들을 그런 학생에서 멀어지도록 만들고 있다. 잘못된 교육 제도에 순응하지 않는 진정한 학생들은 우리나라에서 아예 제대로 살 수 없을 정도로 벼랑 끝으로 몰리는 일이 흔하기 때문이다. 그런 교육 제도 안에서 공부는 다양한 요소들과 멀어져 버린다. 예술, 감정, 인생관 따위와 공부가 서로 통하지 않는다. 명문대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도 사회와 자기 삶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능력이 전혀 없는 '수재 같은 바보'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다.

위대한 인물들은 의식이 깨어 있다. 항상 겉으로 보기에 떨어져 있는 것을 연결하려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려고 힘썼다. 그랬기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훌륭한 인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조승연과 같은 깨어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공부와 삶은 떼어놓을 수 없다. 교육 제도가 잘못되어서 삶과 연결된 진정한 공부를 할 수 없다면 스스로 찾아나서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지능, 수재, 공부를 잘 하는 학생, 수학과 예술 사이 괴리 따위에 관해 보통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고정 관념을 주저하지 않고 깨 버린다. 그러면서 자기가 겪은 일과 생각을 매우 풍부하게 제시하면서 자기가 하는 비판과 주장을 뒷받침한다. 매력이 넘치는 글이다.

기술을 영어로 번역하라고 말하면 흔히 'technology'라고 말하기 쉽다. 하지만 이 책 제목인 '생각기술(The Art of Thought)'에서도 볼 수 있듯이 기술은 우리가 흔히 예술 또는 미술이라고 알고 있는 'art'로 번역할 수도 있다. 전혀 통하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이 서로 통하는 세상을 학생이 만들어야 한다. 영혼과 기능, 종교와 과학, 예술과 실용 학문 따위가 교묘하게 연결된 세상을 사람들이 꿈꿨고 실제로 이뤘던 시기인 르네상스 시대를 조승연은 찬양하면서, 르네상스 정신을 지니고 진정한 학생이 되어 세상을 스스로 만들어 가라고 말한다. 사람을 다시 발견하는 과정에서 '문예 혁명'이 일어났듯이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그것을 토대로 삶을 제대로 꾸리면 누구든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쓰는 글에는 젊은이답게 열정과 패기가 넘친다. 비판력과 그에 대한 자신감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대단하다. 외국 친구들이 '공부 괴물'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괴력에 가까운 학구열과 삶에 대한 열정을 매우 적절하게, 그리고 많이 써서 그렇게 성공한 삶을 살고 있기에, 그런 열정과 패기가 글자 하나하나에 뚝뚝 묻어나는 것이다. 비록 옛날처럼 손으로 직접 쓴 책이 아니라 출판사에서 찍혀 나온 책이라서, 작가가 직접 쓴 글자에서 묻어나는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학생이다. 하지만 길들여진 온순하고 게으른 학생이어서는 안 된다. 삶과 공부를 연결할 줄 아는 진정한 학생이 되어야 한다. 그런 학생이 되는 길잡이로서 '생각기술'은 충분조건을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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