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기술
조승연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공부기술'이라는 책이 나왔다. 나름대로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행동이 따라주지 않아서 제법 초조해하고 있었던 터라, 호기심에 서점에 가서 그 책을 한 번 훑어봤다. 하지만 공부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생각이 매우 확고했기에 책에서 소개하는 공부 기술을 제대로 읽어보지는 않았다. 지금 그 책에 관해서 기억나는 내용이라고는 전체주의 교육이 19세기 독일에서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온 세상에 퍼지는 바람에 교육이 매우 효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따끔한 비판뿐이다.

맨 마지막에 '공부기술'을 쓴 조승연이라는 대학생을 소개하는 글을 봤는데, 그 글을 보자마자 나는 그만 질려버렸다. 뉴욕대 경영학과인 스턴 비즈니스 스쿨과 줄리어드 음대 이브닝 스쿨에 동시에 다니는 학생. 피아노와 태권도와 펜싱 실력이 전문가 수준이며 바텐더 자격증도 가지고 있는 학생.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원서를 볼 수 있으며, 고대 영어도 막힘없이 읽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춘 학생. 나이도 나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데 어떻게 그 많은 것을 이뤄낼 수 있었는지, 그리고 나는 도대체 지금까지 뭘 했는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저 훑어보기만 했던 '공부기술'을 제대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원래 지니고 있던 생각이 워낙 견고해서 깨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고, 그 당시에는 책을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 책을 읽을 시간도 내려고 힘쓰지 않았다.

그 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부산대학교 영어교육과에 합격한 뒤 나는 다시 '공부기술'을 떠올렸다. 세월이 제법 흘렀는데, '공부기술'을 쓴 조승연이 새로운 책을 썼다. 단순한 '공부기술'이 아니라 좀 더 깊이 파고들어 공부와 삶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거침없이 설명한 '생각기술'이라는 책이었다. 이번에는 주저할 까닭이 없었기에, 동보서적에 가서 책을 샀다. 차근차근 읽으면서 나는 이 책에 완전히 빠져 버렸고 수십 번을 읽었다. 그러면서 내 마음 속에 있던 어떤 것이 바깥으로 마구 빠져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뇌가 예전보다 훨씬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그대로 삶과 공부에 대한 열정과 그 둘 사이 관계에 대한 진지한 사색으로 이어졌다.

내가 앞에서 조승연을 소개하면서 '학생'이라는 말로 문장을 끝냈다. 왜 그렇게 학생을 강조했는가? '학생'에 관해 내가 책을 읽기 전까지 가지고 있던 개념을 완전히 깨 버렸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같이 효율 낮은 교육에 적응하느라고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학생들과 학부모들도 '학생'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잡지 않고 있다.

학생(學生)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정의와 설명 가운데 내 머릿속에 가장 뚜렷하게 남아있는 것은 이 책이 말하는 정의와 유영모 선생이 하신 설명이다. 함석헌 선생이 오산학교에 다닐 때 새 교장으로 부임한 유영모 선생이 학생에 담긴 뜻을 세 시간 가까이 강연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 강연이 매우 재미있으면서도 깊이가 있어서 이 책에서 말하는 학생이라는 뜻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만하다. 일단 그 이야기는 제쳐두고 이 책에서 말하는 학생을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 교육만큼 효율이 떨어지는 교육도 보기 드물다. 그 까닭 가운데 한 가지가 '학생'이라는 개념이 잘못 정의된 것이다. 학생은 그저 교실에 틀어박혀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위에서 요구하는 정보를 입력해야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 앎을 찾아나서고, 자기가 공부한 것을 삶에 적용하면서 자기 앞에 닥친 문제를 거리낌 없이 해결하는 전사와 같은 사람이 바로 학생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교육은 아이들을 그런 학생에서 멀어지도록 만들고 있다. 잘못된 교육 제도에 순응하지 않는 진정한 학생들은 우리나라에서 아예 제대로 살 수 없을 정도로 벼랑 끝으로 몰리는 일이 흔하기 때문이다. 그런 교육 제도 안에서 공부는 다양한 요소들과 멀어져 버린다. 예술, 감정, 인생관 따위와 공부가 서로 통하지 않는다. 명문대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도 사회와 자기 삶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능력이 전혀 없는 '수재 같은 바보'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다.

위대한 인물들은 의식이 깨어 있다. 항상 겉으로 보기에 떨어져 있는 것을 연결하려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려고 힘썼다. 그랬기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훌륭한 인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조승연과 같은 깨어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공부와 삶은 떼어놓을 수 없다. 교육 제도가 잘못되어서 삶과 연결된 진정한 공부를 할 수 없다면 스스로 찾아나서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지능, 수재, 공부를 잘 하는 학생, 수학과 예술 사이 괴리 따위에 관해 보통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고정 관념을 주저하지 않고 깨 버린다. 그러면서 자기가 겪은 일과 생각을 매우 풍부하게 제시하면서 자기가 하는 비판과 주장을 뒷받침한다. 매력이 넘치는 글이다.

기술을 영어로 번역하라고 말하면 흔히 'technology'라고 말하기 쉽다. 하지만 이 책 제목인 '생각기술(The Art of Thought)'에서도 볼 수 있듯이 기술은 우리가 흔히 예술 또는 미술이라고 알고 있는 'art'로 번역할 수도 있다. 전혀 통하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이 서로 통하는 세상을 학생이 만들어야 한다. 영혼과 기능, 종교와 과학, 예술과 실용 학문 따위가 교묘하게 연결된 세상을 사람들이 꿈꿨고 실제로 이뤘던 시기인 르네상스 시대를 조승연은 찬양하면서, 르네상스 정신을 지니고 진정한 학생이 되어 세상을 스스로 만들어 가라고 말한다. 사람을 다시 발견하는 과정에서 '문예 혁명'이 일어났듯이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그것을 토대로 삶을 제대로 꾸리면 누구든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쓰는 글에는 젊은이답게 열정과 패기가 넘친다. 비판력과 그에 대한 자신감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대단하다. 외국 친구들이 '공부 괴물'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괴력에 가까운 학구열과 삶에 대한 열정을 매우 적절하게, 그리고 많이 써서 그렇게 성공한 삶을 살고 있기에, 그런 열정과 패기가 글자 하나하나에 뚝뚝 묻어나는 것이다. 비록 옛날처럼 손으로 직접 쓴 책이 아니라 출판사에서 찍혀 나온 책이라서, 작가가 직접 쓴 글자에서 묻어나는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학생이다. 하지만 길들여진 온순하고 게으른 학생이어서는 안 된다. 삶과 공부를 연결할 줄 아는 진정한 학생이 되어야 한다. 그런 학생이 되는 길잡이로서 '생각기술'은 충분조건을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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