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경청 - 마음을 얻는 지혜 ㅣ 위즈덤하우스 한국형 자기계발 시리즈 2
조신영 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4학년이 된 뒤 대학 동기들은 매우 힘겨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터와 같은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들을 휘어잡았고, 대학교에서 보낸 지난 세 해를 돌이켜볼 틈도 없이 임용고시 공부를 본격으로 시작해야 했다. 마음에 여유가 없는 그들은 설사 시간이 있더라도 내 전화를 받기가 쉽지 않았고, 오랜만에 휴가를 나가서 만나자고 연락해도 잠깐이나마 만나기도 힘들어했다. 항상 무슨 일이 있었고, 설사 무슨 일이 없다 하더라도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만나기가 좀 그렇다고 어렵게 사정을 설명하는 이들도 있었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처럼 말이다.
처음으로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인사를 하고 얼굴을 익혔으며, 같이 장기자랑을 연습하고 모두 술자리에 모여 웃고 떠들던 때가 세 해 하고도 약 여섯 달 전이다. 내가 동아리와 학과를 정신없이 오고가며 힘들어할 때 그들이 나에게 힘내라고 격려해 준 때가 두 해 하고도 약 여섯 달 전이다. 내가 해병대에 간다고 했을 때 그들이 그토록 격렬하게 반대하며 나를 걱정해 주던 때가 약 두 해 전이다. 내가 해병대에 온 뒤 그들에게 전화를 걸면 정말 반갑게 받던 것은 한 해 전까지만 현실이었다.
그들에게나 나에게나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엄연한 현실은 가혹했다. 모두 각자 사회와 군대에서 자기 앞에 주어진 과제에 막중한 부담을 느껴야 했다. 그런 우리에게 대학교에서 같이 보낸 지난 두 해는 절대 돌아갈 수 없는, 그래서 더욱 아쉬운 행복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떨어져 있으면서도 바로 옆에 있었다. 각자 일이 있어서 바쁘게 따로 움직일지언정 함께 학교에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충분히 힘을 주었다.
그런데 내 동기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막상 그 행복한 시간 속에서 나는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동아리와 학과를 오고가면서 나름대로 바쁘게 사는 동안, 이 세상을 지배하는 부조리가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 깨달으면서 나는 화를 냈다. 그리고 동기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는 시간이 얼마나 즐겁고 고마운 것인지도 깨닫지 못하고 또 화를 내고 슬퍼했다. 그러면서 나는 내 동기들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이 내가 화를 내고 슬퍼하는 까닭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배려'를 읽은 뒤 이 책 '경청'을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지금까지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 이토벤처럼 행동했다는 사실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베토벤은 귀가 제대로 들리지 않은 탓도 있지만, 어릴 때부터 음악 연습만 강요하는 지독하게 고집이 센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독선과 아집을 자기도 모르게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러시아 화가 필로모프를 예로 들 수 있듯이 예술가에게 좋은지 나쁜지 지금도 논쟁이 끊이지 않는 자기만 생각하는 그런 성격을 베토벤도 음악을 하면서 더욱 견고히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주인공이 다른 사람들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붙여준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강한 별명이다.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구조 조정이라는 한파가 몰아치고 이토벤은 직장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그 위기 속에서 자기를 쌀쌀맞게 대하는 회사 사람들과 아내를 보면서 사람들이 자기에게 왜 그러는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토벤'이라는 별명 속에 숨은 뜻을 깨닫고 마음을 얻는 지혜인 경청하는 방법에 조금씩 눈을 뜨면서,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조금씩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확실히 변하는 이토벤을 바라보면서 사람들도 그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었고, 어떤 위기라도 서로 경청하고 깨달으면서 극복해 나갔다. 이야기는 결국 비극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여서 사람들에게 뭉클한 감정을 안기지만, 이토벤 아들 현이가 아버지가 만든 바이올린으로 멋진 편곡을 선사하는 장면에서는 슬프면서도 짜릿한 감동을 준다. 그 모든 이야기를 '배려'에서와 마찬가지로 차분하게 마음을 울릴 수 있도록 이끌어나간 솜씨에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냈다.
책을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토벤이나 나나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다른 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요즘과 다르게 예전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메신저를 켜서 많은 사람들과 온갖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나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거의 항상 내 이야기만 주구장창 늘어놓았다. 게다가 황당하게도 이야기하는 내가 스스로 모순에 빠져버리는데,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다른 이들은 과연 어땠을까? 아무리 참을성이 뛰어나더라도 결국은 답답하고 짜증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또 다른 진실을 깨우쳐 주려고 이야기하려고 해도, 나는 그들이 하는 진솔한 이야기를 거의 대부분 막아버렸고 어쩌다가 듣는다 하더라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래서 거의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내가 처한 현실은 항상 짜증나고 괴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경청했다면 얼마든지 새롭게 바라보면서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 나에게 닥친 새로운 현실을 원망하면서 그제서야 나는 그 사실을 깨달았고, 그들을 그리워하며 그들이 지금 잔인한 현실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할 지 걱정했다. 그들은 이런 나를 알고 있을까? 그렇다면 그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스노우퀸이 이토벤이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차가운 시선을 조금씩 따뜻하게 바꿨듯이, 그들도 나를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했을까?
배려하지 않는 사람은 경청할 수 없다. '배려'를 읽은 뒤에 이 책 '경청'을 읽은 건 정말 적절한 순서였다고 생각한다. 순서가 반대로 되었다면 이렇게 자연스럽게 생각이 흘러가지 않았을 것이다. 독후감마다 항상 다른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원칙을 지킬 수 있기도 했지만, 사실 내가 그동안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대학 동기들에 관한 한 가지 이야기를 풀어놓기에는 이 독후감이 딱 좋았다. 나는 동기들을 배려하지 않는 바람에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았고, 그 결과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많은 진실을 얻지 못했다. 이 책을 읽고 느끼는 바가 많았으니 이제부터는 그러지 않겠다.
2007년 12월 2일. 2008년도 중고등교원임용고시. 대부분 동기들은 이 고시에 응시했다. 나는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이번에 임용고시를 치는 동기들에게 이번에 무조건 합격하기를 기원하는 편지를 썼다. 그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나 때문에 그들이 실망했다면, 나는 그 실망 때문에 생긴 상처를 완전히 치료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다독거려야 할 의무가 있었다.
2008년 1월 7일. 내가 한창 정기휴가를 즐기고 있을 때 결과가 나왔다. 나는 그 결과를 보고 매우 슬퍼했다. 구포역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새마을호를 탔다. 열차 안에서 차창 밖 부산 풍경을 바라보면서, 바깥에 있는 동기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하면서 '동기사랑 나라사랑'이라는 말이 정말 맞다고 전화로나마 서로 맞장구를 치면서 웃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동기들이 잘 되어야 나도 마음이 편할 텐데, 그들이 그 결과를 보고 크게 실망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8량 편성인 열차에서 7호차에 탔기 때문에 동력차인 8호차가 최고 출력을 내면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내 귀를 자꾸만 간지럽혔다. 이제 내 동기들은 실망을 극복하고 오랜 수험 기간 동안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슬러 내가 탄 열차를 움직이는 동력 장치처럼 활동해야 한다. 그들에게 나는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혹시라도 그들이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면, 마음을 얻는 지혜인 경청을 깨달은 지금은 무엇이든지 들어줄 수 있다. 그들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도 어떻게든지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자세를 기르고자 부지런히 힘쓰겠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사랑하는 내 동기들에게 새해에는 행운만이 찾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