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릿 - 수 세기 동안 단 1%만이 알았던 부와 성공의 비밀
론다 번 지음, 김우열 옮김 / 살림Biz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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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시간 기록을 분석해 보면 자기 수양에 제대로 투자한 시간은 제가 목표로 삼은 시간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니, 그런 현실과 그런 현실을 불러일으키는 의지가 약한 제 모습도 싫습니다. 지금까지 자기 개발에 관한 수많은 책을 읽기는 했습니다만, 모든 책에 나오는 한 결 같이 너무나도 빤한 이야기에 질렸습니다. 하지만 백거이가 나무 위에 매달린 선사와 이야기하다가 너무 놀라 말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건 너무 심한 모순입니다. 질리도록 듣고 얻은 깨달음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니요. 뭔가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그런 문제의식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만난 책이 바로 '비밀(The Secret)'입니다. 제가 그 책을 읽고 있을 때 김동현 님도 읽고 계신다고 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저와 마찬가지로 김동현 님도 너무 많이 읽고 들어서 이제는 신물이 난 그런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 책에서 별다른 흥미를 못 느꼈다고 하셨지요. 그러면서 별다를 것이 없는 책이 그토록 잘 팔리는 까닭은, 책 내용이 아닌 책 전반에서 드러나는 묘한 이미지에 사람들이 강한 호기심을 느끼도록 제작되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렇더군요. 지극히 저 혼자 하는 생각이기는 합니다만, 책 맨 뒤에 나와 있는 론다 번인가 하는 지은이 사진을 보니까 사이비 종교 교주와 같은 인상을 너무나도 강하게 풍겨서 그것도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제 마음이 너무나도 삐뚤어져 있어서 그렇다는 지적이 들어온다면 큰일인데 말이죠.

 

 

……

 

이 세상 사람은 모두 두 부류로 나뉜다. '시크릿'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

 

이 비밀은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탐내고, 감추고, 없애버리고, 훔치며, 막대한 돈을 들여 사들인 것이다. 플라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아인슈타인 등 역사상 위대했던 모든 사상가와 과학자, 개척자와 창조자들도 이 오래된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 비밀이 세상에 공개된다.

 

"비밀을 배우면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고, 얻을 수 있고, 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리라. 진실로 웅대한 삶이 자신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리라."

 

……

 

 

이 책 뒤표지에 박혀 있는 글입니다. 김동현 님도 아시다시피 이 책이 제목 그대로 그토록 대단한 '비밀'이라고 선전하는 것은 바로 '끌어당김의 법칙(The Law of Attraction)'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니 우리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끌려온다는 겁니다. 우리가 죽고 싶어 하면 우주는 우리가 죽을 상황을 만들어내며, 우리가 부자가 되고 싶어 하면 우주는 우리가 부자가 될 조건을 이끌어낸다는 거죠. 곧 생각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누구나 꿈꾸는 엄청난 부자, 강하고 멋진 조각 같은 몸매, 모든 것을 꿰뚫어볼 수 있는 지혜……그 모든 것이 원하는 만큼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강한 유혹입니까!

 

이 책 구석구석마다 정말 신비로움을 물씬 풍기는 이미지가 가득합니다. 달콤한 향기를 품은 초콜릿 같은 장미, 누렇게 뜬 파피루스와 양피지를 연상시키는 색상, 알아보기 힘들지만 뭔가 심오해 보이는 온갖 철자들, 심지어 첨단 과학을 상징하는 원자 기호와 화학식과 분자식과 뇌 구조까지, 정말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겠더군요. 저도 책꽂이에 꽂혀 있는 이 책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강한 호기심을 느꼈고,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 호기심이 절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갈수록 강해졌습니다. 물론 책을 다 읽은 순간, 그 순수한 호기심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지금 쓰고 있는 생각들이 새롭게 머릿속에 들어차 버렸지요.

 

일단 제가 보기에 이 책에서 가장 새롭고 흥미로운 주장은 '끌어당김의 법칙'은 부정어를 처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알라딘'에 나오는 램프 요정(?) 지니와 '드래곤볼'에 나오는 용신은 어떤 명령이 명령을 내린 이에게 좋은지 나쁜지 구분하지 못합니다. 곧 "나는 무엇이 좋지 않다"라는 말도 "나는 무엇이 좋다"라는 말로 해석한다는 겁니다. 아주 웃기고 이상한 녀석들이지요. 예를 들어서 "나는 고민이 너무 많아서 미치겠다."거나 "나는 고민이 많지 않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면 여기에서 지니와 용신은 "고민이 너무 많다"는 것만 알아들을 뿐, '미치겠다'는 말이나 '않으면' 같은 부정어를 절대 처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곧 "고민을 굉장히 많이 가져다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정말로 고민을 태산 같이 안긴다고 합니다.

 

이에 따르면 대부분 사람들은 이미 '비밀'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써먹을 방법도 모른다고 봐야겠지요. 수 세기 동안 어느 것보다도 심각하고 무서운 전염병이 인류를 유린한다고 햇는데, 그 이름은 '싫어(부정) 전염병'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싫어하는 대상에 관해 주로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집중하고, 행동하면서 결국 이 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지요. 좋은 것만 생각해도 모자랄 판인데, 자기도 모르게 싫은 것에만 그렇게 집착하니 무엇이든지 잘 될 까닭이 없다는 겁니다.

 

틀린 말 하나도 없으며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왜 그런지 몰라도 자꾸만 반감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책을 다 읽은 뒤에 이 책에서 주장하는 모든 것을 비판해 보려고 했지만, 사실 섣불리 반대하며 맞서기가 힘들었습니다. 자연 법칙은 완벽해서 예외도 잘못도 없다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신있게 주장하는 지은이와 그녀를 뒷받침하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주눅이 들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꾸려온 삶이 그들보다 나을 것이 거의 없다는 까닭도 있고, 저와 김동현 님 수준으로는 이해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첨단 양자물리학이 최근에 밝혀낸 성과를 자신 있게 본문에 제시했기 때문이라는 까닭도 있습니다. 모르는데 무작정 비판했다가 무슨 망신을 당할 지는 빤합니다.

 

하지만 정말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까닭은 따로 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논리를 비판하려면 그 논리를 반증할 사례가 있어야 하며, 그 사례는 제가 만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그럴 용기도 없으며 그러고 싶지도 않다는 게 가장 큰 까닭입니다. 이 책은 분명히 수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큰 희망을 안겨줄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굳이 비판해 봐야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는 생각도 계속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런 반증 사례가 되는 건 정말 우스운 일입니다. 이 책을 읽고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비밀'을 실제로 활용한 뒤 정말 놀란 사람들이 수 백 만 명이나 된다는데, 저 단 한 사람이 한 경험이 그 온갖 경험들을 말도 안 된다고 일갈할 근거가 될 만큼 대단하겠습니까?

 

세상을 좋지 않게 바라보는 습관 때문에 제가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지는 누구보다도 제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만큼 저에게 더욱 안 좋은 결과가 생기며, 얻을 수 있었던 복도 달아나 버린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탈무드'에 나오는 검은 눈동자로 세상을 바라보는 까닭에 동의하며 살아왔기에, 그런 고통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뒤에는 어처구니없게도 유태인 음모론을 즉석에서 지어낼 만큼, 정곡을 찌르는 온갖 내용을 보면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긍정하는 마음이 왜 중요한지 이 책만큼 저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한 책이 그동안 없었지요.

 

특히 시간이 많다고 생각해야 정말로 시간이 늘어나서 알뜰하게 쓸 수 있다는 주장은 저에게 그야말로 엄청난 충격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시간이 없다고 생각해야지 다급한 마음이 생겨서 어떻게든지 시간을 아끼고자 발버둥치고, 그 덕분에 성과를 조금이라도 더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거든요. 하루를 나름대로 미리 설계하는 건 이미 시간통계를 내기 시작하자마자 실천하기 시작했지만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무엇인지 이 책에서 정확하게 지적한 겁니다. 시간도 상황을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거지요. 상대성 이론이 말하는 심리 시간이라는 개념은 이런 논리에도 적용이 되는 것 같습니다. 

 

김동현 님도 이 책을 읽으셨으니 이 책에서 제시하는 법칙에 관하여 시시콜콜 늘어놓을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니 '끌어당김의 법칙'과 그 실천 방안에 관해서는 그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국 '생각이 모든 것을 만든다'는 주장에서 이 책을 비판할 꼬투리를 찾아냈습니다. '예외 없는 법칙과 절대 진리는 절대 없다'라는 말에 매우 공감하는 개인 성향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일단 하나를 찾아내니까 나머지도 술술 튀어나오는군요. 그게 무엇인지 지금부터 차근차근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이 책에서 '비밀'을 깨닫고 실천하고 있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우주관을 본문에서 인용한 다음 글에서 살펴봅시다. 사실 다 적을 필요는 없겠지만, 여기에 적으면서 제가 다시 한 번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저는 집중력도 기억력도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거든요. '비밀'에 나오는 '끌어당김의 법칙'에 따르면 예전부터 저는 기억력이 무척 좋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기에 기억력이 놀라울 정도로 좋아져야 했습니다만, 제 능력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공부를 깊이 있게 시작했더니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한 순간부터 제 기억력이 나빠지기 시작했다고 '비밀' 예찬론자들이 지적한다면, 그저 할 말을 잃어버릴 뿐이겠습니다만.

 

 

일전에 마시 시모프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멋진 인용문을 알려준 적이 있다.

 

"사람이 자신에게 던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이 우주는 우리에게 우호적인가?"

 

끌어당김의 법칙을 안다면 대답은 오직 "그렇다. 이 우주는 우리에게 우호적이다"가 되어야 할 것이다. 왜? 이렇게 대답하면 끌어당김의 법칙에 따라서 '우주가 우호적으로' 될 테니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이 질문을 던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누군가에게 그 질문을 던지면, 그 사람이 이를 생각하고 답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았다. 질문을 던진 것만으로 대단한 기회를 준 셈이다.

 

아인슈타인의 말을 더 깊이 파고들어가 보면,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이 우주는 근사한 곳이다. 우주는 내게 온갖 좋은 것을 준다. 모든 일에서 나를 도와준다. 내가 어떤 일을 하든지 나를 지지한다. 내게 필요한 것을 즉각 보내준다."

 

받아들여라! 이 우주가 우호적인 곳임을.

 

 

……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또 한 가지는 "원하는 자동차나 사람이나 돈을 끌어당기려면 얼마나 걸리는가?" 하는 점이다. 30분이 걸린다거나 사흘이 걸린다거나 한 달이 걸린다는 식의 규칙 같은 건 없다. 그건 우주 자체와 얼마나 조화를 이루는가의 문제다. - 조 바이런 박사

 

 

시간은 환영일 뿐이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말해준 것이다. 당신이 이 말을 처음 들었다면 받아들이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눈에 보이는 일들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가고 있으니까. 양자물리학자들과 아인슈타인은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말한다. 시간이란 없다는 점을 이해하고 그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일어나기를 원하는 모든 일이 무엇이든 지금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면, 당신이 원하는 모습은 이미 존재한다!

 

우주는 당신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당신이 경험하는 시간의 지연은 이미 이뤄졌음을 믿고, 알고, 느끼는 상태에 가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때문에 발생한다. 당신이 '받아들이는' 주파수로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이라는 말이다. 받아들이는 주파수에 있다면, 원하는 것이 나타나리라.

 

 

크기는 우주에 무의미하다. 과학적 관점에서도, 우리가 거대하다고 여기는 것을 끌어당기는 일이나 무한히 작다고 여기는 것을 끌어당기는 일이나 차이가 없다.

 

우리는 모든 일을 저절로 해낸다. 풀은 애를 써가면서 자라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자라난다. 이것이 섭리다.

 

문제는 당신의 마음이다. 우리가 "이건 크니까 시간이 좀 걸릴 거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규칙은 우리가 정한 것이다. 우주에는 이런 규칙이 없다. 지금 이미 이뤄졌다는 느낌을 전송하면 우주가 반응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 밥 도일

 

 

우주에는 시간도 크기도 무의미하다. 천 원이나 10억이나 우주에는 똑같다. 과정은 동일한데도 천 원이 10억보다 빠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당신이 10억은 큰돈이라고 여기고 천 원은 얼마 안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

 

 

사람들이 내게 늘 묻는 질문은 모두가 '비밀'을 사용하고 우주를 카탈로그처럼 이용한다면 물질이 동이 나버리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다들 그렇게 하면 은행이 거덜 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 조 바이델리 박사

 

 

비밀의 내용 중에서 멋진 점은 누구에게나 풍족하게 돌아갈 수 있다는 부분이다.

 

사람들 마음에 바이러스처럼 기생하는 거짓이 있다.

 

"세상 모두가 잘 살 수는 없어. 자원이나 물질에는 한계가 있어서 다 잘 산다는 건 불가능해."

 

이 거짓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 탐욕스럽고 인색하게 살아간다. 그러면 그 감정들이 그런 경험을 끌어당긴다. 이렇게 세상은 악몽을 꾸는 약을 삼키게 되었다.

 

사실 모두가 잘 살 수 있다. 창조적 아이디어는 충분하고도 넘친다. 힘도 충분하다. 사람 역시 그렇다. 기쁨도 그러하고. 이 모든 것은 마음이 무한하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서 비롯된다. - 마이클 버나드 백위스

 

 

……

 

 

그 무엇도, 자원이든 기타 무엇이든 한계란 없다. 오직 우리 마음속에서 한계가 생길 뿐이다. 마음을 열어 무한한 창조력을 받아들이면 풍요를 불러들이고, 전혀 새로운 세상을 보고 경험하게 되리라.

 

자원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외부 현상만 보고 만물이 외부에서 생겨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 필시 결핍과 한계가 보일 것이다. 이제 그 무엇도 외부에서 스스로 생겨나지 않고 모두 내면의 생각과 감정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알았다. 마음은 만물을 창조하는 힘이다. 그런데 어떻게 부족해지겠는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생각하는 힘이 무한하듯 생각으로 창조하는 힘도 무한하다. 이것을 '진실'로 이해할 때, 당신은 마음이 무한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

 

 

우주는 끌어당김의 법칙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무엇이든지 준다.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경험을 선택할 수 있다. 당신과 모든 사람이 풍요로울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그 길을 선택하고 이렇게 믿어라. "모두가 풍요롭게 살 수 있다." "공급에는 한계가 없다." "세상은 진정 장엄하다." 각 사람은 생각과 감정으로서 보이지 않는 무한한 공급원을 활용하고 원하는 것을 실현할 수 있다. 스스로 선택하라. 선택할 사람은 당신뿐이다.

 

 

이 정도만 적어도 넘쳐날 정도로 충분하겠지요. 이렇게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는 까닭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는 인류가 지닌 이성이 우주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믿음, 나머지 하나는 자기들은 '끌어당김의 법칙'이라는 우주 법칙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앞에서 든 예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밀' 예찬론자들은 이 우주는 모든 생명들에게 냉혹하며 우주가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는 한계가 반드시 있으므로 모두 다 행복하게 잘 살 수 는 없다는 거짓이 바이러스처럼 기생해서 사람들을 행복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고 역설합니다. 그 거짓은 인류가 우주에 관해 아직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생긴다는 거죠. 그러니 그 거짓에서 벗어나려면 첨단 과학을 선도하는 양자물리학자들이 밝혀낸 우주에 관한 최신 지식이 자기들이 주장하는 '비밀'을 뒷받침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비밀'을 철두철미하게 믿어야 한답니다. 우주는 '비밀'이 가르치는 대로 정확하게 따르는 사람들을 절대 저버리지 않는다는군요.

 

그 말대로라면 '말로는 뭘 못하겠느냐'는 비아냥거림에 가까운 널리 쓰이는 말은 '비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걸려 있는 바이러스 같은 거짓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일단 비아냥거림은 부정하는 뜻을 품고 있으므로, 부정어를 처리하지 않는 '비밀'을 활용할 수 없게 합니다. 그리고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만이야말로 '비밀'을 현실로 만드는데 효과가 뛰어난 방법이라는 주장이 이 책에 나옵니다. 글로 표현하고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분명한 효과가 있다면, 자기 능력과 지금과 앞날을 긍정하고 바람직하게 상상하면서 그것을 꾸준하게 이야기하는 것 또한 효과가 없을 까닭이 없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비밀'은 오로지 철저한 긍정과 정신 수양으로만 찾아내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긍정하는 태도와 정신 수양이 죄악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극렬한 쾌락주의자들 말고는 없겠지요. 곧 '비밀'은 대다수 사람들에게서 절대 의심할 필요가 없는 선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긍정은 선이요 부정은 악이라는 흑백논리도 성립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긍정하는 자세로 산다면 선한 힘(Power)이 한없이 뿜어져 나와 '비밀'을 이용할 수 있게 되고, 그 덕분에 누구보다도 부유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모든 것을 부정한다면 복은커녕 악한 기운에 사로잡혀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는 일도 전혀 안 될 것이며, 그에 절망한 나머지 세상을 저주하는 악한 힘(Force)이 더욱 강해져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린다고 합니다.

 

그 흑백논리에 따르면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악한 욕망을 품은 이들이 종일 그 생각만 하면서 행동한다면, 그 상상이 '비밀'에 따라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걱정하는 이들은 기우에 빠져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대개 사악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견줄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힘을 내뿜는데, 그 원동력은 바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기 욕망에만 집중하는 그 능력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 따위는 아예 하지 않을 정도로 도덕과 양심을 철저하게 내팽겨쳤을 테니까요. 하지만 '비밀'에서 오로지 한 가지 생각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하더라도, '비밀'이 가진 효과를 불러일으키는데 반드시 필요한 영양분인 고마워하는 마음과 사랑이 그들에게 있을 리가 없으므로, 악한들은 '비밀'을 활용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비밀'을 활용하지 못하더라도 사악한 힘에 사로잡힌 이들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한 힘을 거침없이 내뿜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억지로 누르려고 하면 그들은 더욱 강하게 저항하고 따라서 없어지지 않는다고 '비밀'은 가르칩니다. 곧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비밀'을 가르쳐서 나쁜 것에 관한 생각을 아예 없애야 한다는 겁니다. 책에 나온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위대한 성녀인 테레사 수녀는 자기는 전쟁을 세상에서 없애고자 반전 집회가 아닌 평화 집회가 열리면 반드시 나가겠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이제 본격으로 딴죽을 걸어 볼까요. 우주에게 가능하지 않은 일은 없으며 우주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모두 들어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제가 어느 두 사람과 차를 타고 장보러 가고 있습니다. 장터에 거의 다 왔을 때 우리는 장터에 과연 차를 댈 공간이 있을까 하고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비밀'을 전혀 모르지만 저는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반드시 차를 댈 공간이 있을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상상하며 믿고, 나머지 두 사람은 계속 자리를 걱정하며 입맛을 다시며 차를 몰고 창밖을 이리저리 둘러봅니다. 이 때 과연 우리는 제가 원하는 대로 차를 댈 수 있을까요?

 

제가 아는 바에 따르면 그럴 확률은 계산하기 너무나도 힘들며, 설사 계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비밀'에 따르면 계산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그런 단순한 확률이 아니라 '비밀'을 아는 사람들과 모르는 사람들 사이, 그리고 '비밀'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해관계가 엇갈리고 충돌한다면, 끝이 없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초자연 존재인 우주가 과연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에 관한 속 시원한 답입니다. 하지만 그 답은 이 책에서 전혀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비밀' 예찬론자들은 우주가 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그저 외치기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비밀'을 알아낸 뒤에도, 지금까지 겪어온 온갖 일을 돌이켜 보면 '비밀'을 의심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이 얼마든지 있어서 저는 비밀을 여전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분명히 한정되어 있었지요. 게다가 뜻하지 않은 온갖 변수 떄문에 잘 굴러가거나 희망이 보이던 일이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버리기도 했지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제 시각이 안 좋은 방향으로 너무 치우쳐 있는 건가요?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한 여자를 지독하게 사랑해서 항상 그녀와 만나서 데이트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지고 좋을지 머릿속에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저를 지독하게 싫어해서 저를 꼴도 보기 싫어합니다. 그런데 저뿐만 아니라 그녀도 '비밀'을 알고 있어서 그녀는 항상 저를 안 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대신 제가 다른 여자를 만나서 행복하기만을 온 마음으로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주는 저와 그녀에게 어떻게 반응할 것이라고 김동현 님은 생각하십니까? 결국은 저와 그녀가 맺어질 것이라고 보십니까?

 

좋게 생각한다면 우주는 그녀 소원을 들어줄 겁니다. 그래야 두 사람 모두에게 좋거든요. 하지만 제가 겪은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비밀'을 몰랐지만 '비밀'이 제시하는 대로 오로지 간절하게 그녀만 원했고, 그 덕분인지 그녀도 나에게 모호하지만 분명히 긍정할 만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비밀'이 현실이 될 듯 말듯 해서 저를 너무나도 안달이 나게 했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생기는 온갖 변수 때문에 결국 현실은 저에게 쓰디쓴 실패를 안겼지요. 그녀가 다른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제 가슴이 얼마나 쓰려서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혼자서 숨죽여 가며 몰래 눈물을 흘려야 했는지 아십니까? 김동현 님도 그런 뼈저린 기억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기억은 꺼내기도 싫으시잖습니까?

 

개인이 한 사소한 경험으로는 '비밀'이 옳지 않다고 비판할 수 없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사회와 민중이라는 더 넓고 큰 차원에서 생각해 봅시다. '비밀'은 세상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토대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 사이 이해관계가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도 인정했어야지요. 우주는 그럴지 몰라도 사람을 철저하게 옭아매는 현실은 생각하고 말하는 대로 그렇게 다 술술 풀릴 만큼 그렇게 간단하고 쉽지 않으며, 인류를 지구에서 살아남게 하는 문명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 괴리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파울로 프레이리가 쓴 '희망의 교육학(원래 제목은 페다고지(Pedagogy)입니다)'이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프레이리가 거칠고 가난하기만 고된 삶에 찌든 수많은 농민들 앞에서 피아제가 주창한 체벌에 관한 이론을 장황하게 설명했다가 한 농부에게 현실을 제대로 모른다고 정곡을 찔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 미니홈피 게시판 '강한 느낌과 고민'에 옮겨놨으니 궁금하다면 한 번 보시지요.

 

'비밀'은 굉장히 매력이 넘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매력이 과연 저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중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아 보입니다. 저는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문명 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폭압과 모순 때문에 시달리는 민중들이 '비밀'로도 헤어 나올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린 역사를 분명히 인식하고, 그런 현실에 맞서 싸우는 이들 앞에서 항상 너무나도 부끄럽다는 생각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민중들이 '비밀'에 관한 가르침을 들으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들이 풍요와 번영을 외치며 사회를 긍정하고 싶겠습니까? 전우익 선생이 쓰신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에도 나오듯이 살아남는데도 벅찬 민중들은 '비밀'이나 개혁 방식을 이해할 만큼 똑똑하지 못하고 그럴 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무작정 탓할 수도 없지요. 먹고 사는 일만으로도 너무 힘든데, 한가롭게 사회 문제를 의논할 시간과 힘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물론 상황을 어떻게든지 긍정하면서 더 나은 삶을 꾸려가려는 그 생명력에 긍정하는 자세는 분명히 보탬이 되지요. 하지만 수구 세력이 그런 자세를 사회 개혁을 방해하는데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사회가 변하는 것을 절대 바라지 않으며, 그들이 만들어 놓은 구조를 민중들이 긍정하고 거기에 익숙해지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수구 세력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특히 군대와 교육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대한민국을 지배했습니다. 그들이 뿌려놓은 엄청나게 많은 씨앗에서 자라난 가시밭은 여전히 우리나라를 뒤덮고 있습니다. 교육학을 전공하고 대한민국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는 젊은이로서, 저에게는 교육과 군대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가시밭을 잘라 해체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가시밭을 자르는 칼은 세상을 긍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비판하려는 자세로서 더욱 날카롭게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얼마나 비참한 현실에 처해 있는지 깨달은 뒤 저는 지금까지 이 세상에 있는 민중들을 괴롭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현실은 수많은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기만 한다고 해서 바뀔 만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절대 아니엇습니다. 실제로 사회를 조금씩이나마 바꿔놓은 이들은 머릿속으로 생각이나 하는 이상주의자들이 아닌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열심히 뛰어다니는 행동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비밀'을 과학과 연관 지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유명한 과학자인 존 해길린 박사는 미국에서 '자연 법당(Natural Law Party)' 대표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고 합니다. '비밀'을 예찬하는 이들은 세상을 구원할 능력을 갖추고 있는 존 해길린 박사를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하겠지요. 하지만 '비밀'에 따라 그 사람이 내놓았을 한가로운(?!) 공약을 추천해 보면, 못 알아보는 게 아니고 사람들이 뽑고 싶어도 안 뽑았을 것 같습니다. 풍요와 복지와 평화를 기원하는 집회와 정책을 한가롭게 열고 추진하는 그 순간에도, 수구 세력은 얼씨구나 좋다면서 존 해길린 대통령과 민중들에게 반대하는 온갖 공작을 펼쳐 그들을 좌절시키겠지요.

 

혁신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이 책을 비판하고자 발버둥치는 이 몸부림은 '비밀'을 완벽하게 이해한 이들에게는 여전히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숱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뿜어내는 치기어린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어리석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비밀' 예찬론자들보다는 이 순간에도 어떻게 하면 부당한 기득권을 지키고 더 늘릴 수 있을까 탐욕스러운 고민만 하는 수구 세력에게 직접 맞서는 이들에게 마음과 정이 더 끌립니다. 모든 것은 제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 차원에서마저 '비밀' 같이 한가로운 생각이 통할 리는 없다고 봅니다. '비밀'이 제시하는 법칙 가운데 한 가지인 '반대하면 오히려 없어지지 않으니 아예 생각을 하지 마라'는 법칙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비밀'을 따르는 순간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확률이 1에 가깝기 때문이다.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이쯤에서 결론을 내겠습니다. '비밀'은 어느 정도까지는 분명히 효력이 있고, 실제로 '비밀'을 이용해 성공을 거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면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라는 절박한 인식이 저절로 생깁니다. 금쪽같다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로 찬란한 시기를 저는 너무나도 헛되이 흘려보냈고, 비록 상황이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부족합니다. 그렇기에 저도 '비밀'을 이용해서 제 삶을 어떻게든지 바꾸어 보려고 합니다. 긍정, 사랑, 명상……이 모든 것은 삶을 활기차고 아름답게 가꿔나갈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거절해야 할 까닭이 전혀 없습니다. '비밀' 덕분에 모든 사람들이 자기 분수를 지키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비밀' 따위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고통스러워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 고통이 단순히 그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사회 구조 때문에 생기기에, 우리는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가시덤불을 잘라내고자 예리한 칼을 갈아야 합니다. 그 칼은 '비밀'이 아닌 뚜렷한 비판 의식과 정당한 분노로 길러낼 수 있을 겁니다……

 

 

김동현 님에게 보낸 편지(2007.12.24)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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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걸작선
브램 스토커 외 지음, 정진영 편역 / 책세상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나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어느 고성 안에 있다. 그리고 내 눈 앞에서 남녀 한 쌍이 온몸에서 땀을 흘리며 뒤엉킨다. 남자가 여자를 정성스럽고 끈질기게 애무하자 여자는 야릇한 콧소리를 내면서 몸을 뒤튼다. 그 감창소리가 남자 귀에 들어가고, 그에 자극을 받아 아드레날린과 테스토스테론이 더욱 왕성하게 분비되어 핏줄 안에서 갈수록 격렬하게 요동친다. 남자는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애무를 그만 둔 뒤 여자를 꽉 끌어안은 채 꼴린 성기를 축축해진 여자 몸 안으로 사정없이 꽂아 넣는다. 자지러지는 비명이 울려 퍼져 내 귀를 강하게 자극한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두 남녀는 온몸을 거침없이 움직이고, 몸과 마음으로 서로 짜릿하게 공감한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것도 그들 사이에 끼어들 수 없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나도 흥분해 거칠어진 숨결을 가라앉히느라 애를 먹는다.
 

둘 다 거의 절정에 이른 것 같았고, 오르가슴이라는 황홀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욱 많이 강하게 느끼고자 벌거벗은 남녀는 접촉 면적을 할 수 있는 만큼 넓힌다. 남자는 여자 목에 입을 맞추고 여자는 그런 남자의 목을 힘껏 끌어안는다. 그런데 그 순간 여자는 날카로운 침 두 개가 목에 박히는 느낌을 받는다. 그 뒤 몸 안에 흐르는 피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뜨거운 흐름을 느낀다. 여자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공포에 휩싸이지만, 이미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극대치에 이른 오르가슴이 찾아와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꼼짝도 할 수 없다. 게다가 피를 빨리는 느낌이 이상야릇한 쾌감을 오르가슴에 보탰다.

 

그녀는 절정에 겨운 신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고 있다. 남자 또한 부들부들 떨고 있다. 피를 빠는 쾌락에 젖어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수 억 마리 정자를 내보내면서 뇌를 자극하는 강한 극치 쾌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눈을 크게 뜬다.

 

부들부들 떨던 남녀는 거의 동시에 멈췄다. 여자는 어느새 탄력을 잃고 새하얗게 질린 시체가 되었고, 남자는 그 위에서 극히 미묘한 절정까지 온전히 누리려는 듯이 잠시 동안 가만히 엎드려 있다.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나자 남자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만족스러운 티를 내는 입술 사이로 뾰족하고 날카로운 두 이빨이 드러나 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다. 허기를 실컷 채운 남자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옷을 깔끔하게 챙겨 입고 자리를 뜬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나는 그만 공포에 질리고 만다. 그 남자는 유서 깊은 가문 여자들을 꼬드겨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무시무시한 흡혈귀였던 것이다.

 

 

오브리의 건강이 나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루스벤 경이 그 이유를 모를 리야 없었다. 그러나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소식을 전해준 사람들이 앞에 있음에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서둘러 옛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 그 후로 자주 들러서 오브리 남매의 앞날에 대단한 관심과 애정을 과시함으로써 조금씩 오브리 양의 환심을 얻었다. 그의 위력 앞에 누군들 무너지지 않겠는가? 자세히 설명하기 어려우리만큼 그의 언변은 위험하고 매혹적이었다. 그는 유혹의 대상으로 삼은 오브리 양에게, 북적이는 세상에서 그녀 외에는 공감을 나눌 만한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유혹의 대상으로 삼은 오브리 양에게 북적이는 세상에서 그녀 외에는 공감을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그녀를 알게 된 이후 그녀의 감미로운 목소리만 들어도 살아가야 할 이유를 느낀다고까지 했다. 그가 악마의 술수에 능했기 때문이든 그것이 예정된 운명이든 간에 그는 오브리 양의 사랑을 얻는데 성공했다. 마침내 유서 깊은 가문의 작위를 손에 넣은 그는 신부 오빠의 정신 상태가 나쁨에도, 중요한 사절 임무까지 맡음으로써 결혼을 서둘렀다. 그래서 결혼식은 그가 출국하기 바로 전날로 정해졌다.

 

……

 

후견인들은 다급히 오브리 양을 구하러 나섰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루스벤 경은 자취를 감췄고, 오브리의 누이동생은 이미 뱀파이어의 허기를 실컷 채워준 희생양이 되어 있었다.

 

 

존 폴리도리(John Polidori) 지음. '뱀파이어(The Vampire)'에서. '뱀파이어 걸작선' 148~151쪽.

 

 

오싹한 한기를 느낀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그런데 내 앞에 꿈속에서나 그렸던 그런 이상형인 완벽한 여자가 나타났다. 꿈인지 생시인지 믿을 수 없었다. 그저 모호하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 여자를 바라보는 내 눈동자가 이글거리더니 불꽃을 튀기기 시작했고 온몸이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능수능란하게 몸을 뒤틀며 얇은 천 같은 옷을 알게 모르게 흘려 내리기 시작한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닌 그윽한 두 눈동자를 보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욕정을 느꼈다. 나는 그 욕정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단숨에 깨달았다. 흡혈귀에게 넘어갔다는 냉철한 판단 따위는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그토록 간절하게 원했지만 결국 실패한 뼈저린 첫사랑이 내게 주었던 달콤하면서도 야릇한 고통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 눈동자는 점점 희미해져 갔어. 안젤로는 꿈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과 자신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환영이 솟구친 골짜기 밑으로 점점 더 이끌리는 것을 깨달았지. 그녀는 더욱 가까이서 그에게 손짓하고 있었어. 그녀의 뺨은 망자와 같은 눈빛이 아니라 굶주림으로 창백해져 있었어. 달랠 수 없는 지독한 육체적 굶주림을 드러낸 그녀의 눈동자에 갇혀 그는 꼼짝도 할 수 없었지. 그 눈동자는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고 온몸에 마법을 걸었어. 마침내 그녀의 눈동자가 바짝 다가와 그를 꼼짝없이 가두어버렸지. 그녀의 숨결이 불처럼 뜨거운지 아니면 얼음처럼 차가운지 그는 알 수 없었어. 붉은 입술이 그의 입술을 불태우는지 아니면 얼어붙게 하는지도, 다섯 손가락이 그의 허리를 붙잡고 태워 들어가 재가 된 흉터를 남겼는지 아니면 서릿발처럼 맨살을 파고드는지도 알 수 없었어. 그녀가 깨어 있는지 아니면 잠들어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지. 하지만 속세와 이승을 통틀어 그녀만이 유일하게 그를 사랑하며, 자신이 그녀의 마법에 꼼짝없이 걸려들었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지.

 

 

프랜시스 매리언 크로퍼드(Francis Marion Crawford) 지음. '피는 내 생명(For The Blood Is My Life)'에서. '뱀파이어 걸작선' 262~264쪽.

 

 

나는 콘스탄스에게 유혹받는 샘 윈체스터가 아니었다. 내가 요즘에 푹 빠져 있는 미국 연속극 'Supernatural'에 나오는 한 장면도 아니었다. 쾌락에 섞여 희미하지만 분명한 고통을 인식하는 순간 저항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면서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미 엔도르핀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이 섞인 피가 흐르는 핏줄 때문에 주먹이 제대로 쥐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품은 차갑고 번뜩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미소를 보면서 나는 혼란에 빠졌다. 그 미소 속에 어느 것보다도 강한 치명타를 안길 칼날 두 개가 들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떨리는 온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형체를 알아보기 한참 전부터, 이글거리는 눈과 진홍색의 관능적인 입만은 줄곧 우리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의 무덤으로 곧장 다가갔지만, 들장미를 대하고는 딱 멈추어 섰다. 그러고는 묘의 오른쪽으로 빙 돌면서 들어갈 곳을 찾다가 우리를 발견했다. 극렬한 증오와 분노로 그녀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달콤하면서도 한층 사악한 사랑의 미소가 얼굴에 나타났다. 그녀는 우리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순간 그녀의 입가에 뭉쳐진 피거품이 보였고, 입술 아래로 기다랗고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마법을 걸 듯 달콤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는 우리에게, 특히 목사에게 기묘한 감흥을 주었다. 나는 목숨이 위태로울 만한 상황은 피하면서 최대한 뱀파이어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최면 효과가 있는 그녀의 목소리, 나는 그것을 쉽게 물리쳤지만 목사는 황홀경에 빠진 것 같았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저항하려고 몸부림을 쳤음에도 그는 그녀에게 점점 끌려가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리 와요! 이리 와요! 잠과 평화를 줄게요. 잠과 평화, 잠과 평화."

 

 

프레더릭 조지 로링(Frederick George Loring) 지음. '사라의 묘(The Tome of Sarah)'에서. '뱀파이어 걸작선' 346~347쪽.

 

 

그야말로 사악한 요물이었다. 사람이 창조해낸 괴물이 사람을 해치는 건 분명한 모순이었다. 특히 흡혈귀는 사람이 가진 세 가지 기본 욕구 가운데 가장 위험하면서도 강렬한 성욕을 교묘하게 이용하기에, 두렵지만 거부할 수 없어 상대하기 굉장히 힘든 존재이다. 그 괴물에게 금기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금기를 완전히 깨뜨리지도 않았다. 금기로 나뉜 두 영역을 아슬아슬하게 오고 가며 희생자에게 접근해 사랑을 가장한 사악한 마력으로 사로잡았다. 그 마력을 꾸준히 드러내는 데는 엄청난 인내가 필요한데, 정욕을 참아 동자공으로 활용하는 고승들처럼 흡혈귀는 피에 대한 강한 집착을 기묘한 마력으로 승화한다. 심장에 말뚝을 박고 목을 잘라 불태워버리기 전까지 그놈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얘. 마음이 상했구나. 내 정신력과 심약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할 것이 있다고 해서 나를 잔인하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줘. 너의 어여쁜 마음이 상처를 받으면 내 거친 마음에도 피가 난단다. 너의 따스한 삶 속에서 나는 굴종하며 사는 황홀을 맛봐. 너도 내 안에서 죽을 거야. 달콤하게 죽을 거야. 어쩔 수 없단다. 내가 네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너는 다른 이에게 가까워질 거야. 그렇게 사랑인 동시에 잔인한 환희를 배우는 거지. 한동안은 나와 내 것에 대해 더 알아내지 못할 거야. 하지만 사랑스러운 네 영혼으로 나를 믿어주렴."

 

그렇게 열정적으로 말할 때면 그녀는 떨리는 손길로 나를 더 세게 껴안고 부드럽게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왜 그리도 흥분하는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멋쩍은 포옹이 있을 때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손길에 따르면서도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맥이 풀려서 그러지도 못했다. 귓가에 자장가처럼 전해지는 그녀의 속삭임이 도망치려는 나를 황홀경으로 이끌었고, 언제나 그녀가 팔을 놓아주고 난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그처럼 야릇한 분위기에서는 그녀가 싫어졌다. 때때로 기이하면서도 격렬한 쾌락의 흥분, 그리고 막연한 공포와 혐오심이 뒤섞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런 기분이 지속되는 동안은 그녀에 대해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지만, 애정이 점점 커져 숭배가 되고 혐오가 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모순임을 알지만 그때의 감정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

 

기이하고 아름다운 내 친구는 한 시간 내내 냉담하다가도 어느새 내 손을 잡고 다정히 어루만질 때가 있는데, 그때는 좀처럼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약간 홍조를 띤 얼굴, 나를 황홀히 쳐다보는 나른하면서도 이글거리는 눈빛, 드레스가 살랑거릴 만큼 가쁜 숨결, 그것은 연인의 열정과도 같아서 나를 당혹하게 했다. 혐오스러웠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는 흡족한 눈빛으로 나를 끌어안고 뜨거운 입술로 내 뺨 구석구석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거의 흐느낌에 가깝게 속삭였다.

 

"너는 내 거야. 내 것이어야 해. 너와 나는 영원히 하나야."

 

 

조셉 세리든 레퍼뉴(Joseph Sehridan Le Fanu) 지음. '카르밀라(Carmilla)'에서. '뱀파이어 걸작선' 46~47쪽.

 

 

내 앞에 있는 여자는 분명한 흡혈귀이다! 그녀가 부드럽게 나를 감싸 안고 입을 맞춘다. 공포에 휩싸였으면서도 나는 그녀를 거부할 수 없다. 클라리몽드처럼 피를 빨기 전에 눈물을 흘리면서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내가 완전히 사로잡힌 것을 확인한 그녀는 내 입에 은근하게 퍼붓던 키스를 목으로 옮겼다. 갑자기 키스가 날카롭게 변했다. 내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지 정액이 빠져나가는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따끔한 느낌과 그 때문에 몰려오는 무시무시한 공포였다.

 

"총 기상. 총 침구 걷어. 조별 과업 병사 떠나 5분 전."

 

눈을 번쩍 떴다. 호접몽이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실제로 따끔한 느낌을 받은 까닭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버둥거렸다. 침낭을 말다가 어제 자기 전에 일기를 쓴 뒤 장판 옆에 아무렇게나 놔 둔 수첩과 샤프를 발견했다. 이리저리 뒹굴다가 그만 샤프 끝에 찔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 책 '뱀파이어 걸작선'도 내 머리맡에 있었다. 찬물에 세수를 한 뒤 책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현실과 꿈을 넘나드는 모호한 공포가 더욱 두려워졌다. 이러다가 정말 흡혈귀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나는 꼼짝없이 죽음을 부르는 애무 속에서 신음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피를 빨려 바싹 말라버릴 것이다.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지만 그런 공포를 쫓아다니면서 느끼는 쾌감도 만만찮기에 나는 여전히 이런 책을 즐겨 읽는다. 그리고 다행히 지금까지 흡혈귀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걸작들만 모아 놓아서 그런지, 흠잡을 부분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내용이 치밀하고 묘사도 굉장히 뛰어나다. 이미 앞에서 여러 번 인용한 부분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은밀하게 사람을 매혹하는 더욱 뛰어나고 많은 문체로 수놓은 이야기를 만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기를 적극으로 추천한다. 더욱 강하고 화려하게 진화한 흡혈귀와 마주치면서 공포와 뒤섞인 쾌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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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달리는 소녀
츠츠이 야스타카 지음, 김영주 옮김 / 북스토리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와 마찬가지로, 이 책 '시간을 달리는 소녀' 한 권에 단 한 가지 이야기가 아닌 세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길고 맨 처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시간을 달리는 소녀'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다치바나 다카시가 이 책을 쓴 츠츠이 야스타카에게서 영향을 받았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모른다. 어쨌든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에서 다치나바 다카시가 자세하게 이야기한 인류 지성사 개관과 예측을, 서기 2660년에서 온 후카마치 가즈오가 요시야마 가즈코에게 그대로 들려준다.

 

평범한 여학생 요시야마 가즈코는 어느 날 과학실에서 라벤더 향기를 맡은 뒤 정신을 잃는다. 깨어난 뒤 그녀에게 시공간을 뛰어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는데……과연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나름대로 재미있고, 여운을 남기는 결말이 특히 강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텔레포테이션(Teleportation), 포스 배리어(Force Barrier), 타임 리프(Time Lift), 텐션(Tension)……서기 2600년을 넘어선 미래에 개발되는 시공간 이동 기술을 설명하는 데는 아예 영어로 도배를 해 놨는데, 이건 번역한 사람이 우리말로 좀 더 깔밋하게 옮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악몽>

 

인간 심리가 얼마나 신비로운 것인지 깨달을 수 잇는 이야기이다. 주인공 마사코는 동생 요시오가 분명히 봤다고 주장하는 손에 가위를 든 여자 귀신과 피 묻은 남자 머리가 왜 나타나는지 밝혀내고, 자기가 왜 반야 가면과 난간을 싫어하는지도 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더듬어가며 조금씩 깨달아간다.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모든 것이 분명해지고 마사코가 꾸던 악몽도 사라진다.

 

 

<The Other World>

 

다원우주, 그리고 동시존재.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연속된 시간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역사를 가진 세계를 한 가닥의 날실로 본다면, 시간이라는 것은 그 날실을 무수히 가로지르는 수없이 많은 씨실이라 할 수 있다.

 

한 장의 직물을 생각해 보라.

 

그 작물은 무수한 날실과 무수한 씨실로 짜여 있다. 그 씨실이 바로 시간이다. 우리의 일생, 혹은 세계의 역사,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무한히 잘게 나누고 있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그리고 날실 중 한 가닥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많은 날실들은?

 

그것은 또 다른 세계, 다른 공간에 있는 우주, 그리고 다른 우주에도 지구가 있고 당신이 있다.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당신이…….

 

이것이 다원우주라는 개념이다.

 

서로 이웃한 두 가닥의 날실은 거의 비슷하다. 바로 옆에 있는 시간, 씨실끼리 서로 비슷한 것처럼……. 일 초 전의 이 세계와 일 초 후의 이 세계가 거의 비슷한 것처럼…….

 

이웃한 두 가닥의 날실에 있는 두 명의 당신은 역시 거의 비슷하다. 둘 다 같은 직업일 것이고, 만약 당신의 손에 상처가 있다면 또 한 명의 당신도 똑같은 곳에 상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무 가닥, 서른 가닥, 그리고 수백 가닥 떨어진 날실에 있는 당신은? 거기에 있는 당신은 학생일 수도 있고 발명가일지도 모른다. 또는 총리대신일 수도 있다.

 

이것이 동시존재라는 개념이다.

 

……

 

노부코가 도착한 세계. 그곳은 노부코가 내심 이러이러했으면 좋겠다고 바라왔던 세계였다. 사고가 났을 때 노부코가 바라던 세계가 원래 세계에서 밀려나온 노부코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것이다.

 

……

 

 

평범한 학생이었던 노부코가 서기 3921년에서 일어난 광자 대량 생산 장치인 베라트론이 폭발하는 사고 때문에 자기가 있던 세계에서 다른 세계(The Other World)로 이동하고 만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노부코는 다원우주에 있는 수없이 많은 노부코라는 동시존재 가운데 한 명일 뿐이다.

 

 

이 책을 쓴 츠츠이 야스타카는 어릴 때부터 영재 교육을 받았다고 하고, 그가 지금까지 쓴 모든 작품마다 천재성이 번득인다고 했다. 그러나 이 책만으로는 그 말을 인정하기 힘들다. '파프리카', '베트남 관광 공사', '은령의 끝' 같은 다른 작품을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새로운 우주론을 아주 얄팍하게나마 더욱 자세히 이해할수록 내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더욱 커지는데, 그 물음표 속에 담겨 있는 수많은 모호한 이미지는 나중에 글로 확실하게 정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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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싸이월드(http://www.cyworld.com)에 드나들기 시작한지 벌써 3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2003년에만 하더라도 수도권에서만 주로 즐기는 미니홈피 사이트로 알고 있었고, 게다가 어쩌다가 주말에 시간을 내서 컴퓨터 앞에 앉으면 세이클럽 문학 동호회인 '글사랑'과 다음카페인 '철도동호회'에 푹 빠져 다른 사이트에는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싸이월드에 가입한 뒤에도, 한동안 '글사랑'에 올릴 글을 보관하는 자료실로만 썼다.

 

그런데 내 홈피에 찾아와 일촌을 신청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차츰 사교 공간으로써도 쓸모가 커졌고, 게다가 자료실을 채우고 관리하는 재미를 새롭게 깨달으면서 나는 싸이월드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다. 거기에 음악 듣는 재미까지 깨달으면서 싸이월드를 본격으로 시작한 지 몇 달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싸이월드 폐인 수준에 이른 내 모습을 발견했다. 싸이월드에 중독되는 사람들이 어떤 심리를 가지고 있는지 분석한 글을 읽고 발끈하여 나를 예시로 삼아 반론했던 대가 2004년 7월인데 그 뒤 석 달만에, 곧 2004년 10월에 나는 하루에 평균 8시간 넘게 싸이월드 홈피 관리에 매달리는 폐인이 되었다.

 

그렇게 폐인 수준에 이른 2004년 9월부터 지금까지 나는 23년 평생(?)동안 내 손으로 쓴 거의 모든 글을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입력해 보관하고 있다. 옛날에 내가 종이에 썼던 글은 온 집, 심지어 아파트 폐지 수거함(내가 사는 아파트가 세 동밖에 안 되는 작은 규모라서 종합 폐지 수거함이 하나밖에 없었기에 그나마 시간이 적게 걸렸다)까지 뒤져 찾아내 입력해 놓았다. 2004년 초까지 관리하던 세이클럽 미니홈피는 안에 있던 자료를 싸이월드로 다 옮긴 뒤 닫아버렸다.

 

그렇게 왕성하게 자료 입력과 보관에 정력을 쏟았더니, 알게 모르게 여러 사람들에게서 내 게시물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요즘에 싸이월드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주위에서 내 게시물이 홈피에만 처박아 두기에는 아깝다는 의견이 자꾸 나오면서, 홈2나 다른 사이트에 블로그를 만들어 볼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단 군대는 거기에만 온 힘을 쏟을 만한 조건을 전혀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일단 그 조언에 따른 계획은 한동안 계획으로만 남겨두기로 했다.

 

어쨌든 지금 내 싸이월드 홈피에는 음악 감상, 사교, 자료 보관, 크게 이 세 가지 주요 기능이 있다. 이 가운데 사교가 차지하는 비율은 군대에 온 뒤 크게 늘어났는데, 그 때문에 나는 예전과 다르게 게시물 조회 수에도 은근히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회 수에 신경 쓰지 않고자 아예 게시판을 닫아버리고 사진첩만 제대로 관리할까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역시 글 쓰는 건 게시판에 쓰는 게 제 맛이라서 그냥 게시판에 계속 글을 썼다.

 

애당초 남이 읽어주기를 기대하는 자체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단 남들이 들락날락하고 자기가 애착을 가지는 공간인 만큼, 조회 수가 크면 클수록 좋은 건 당연하다. 하지만 내 홈피가 연예인 홈피이거나 글 좀 많이 읽어달라고 홍보를 하는 건 절대 아닌지라, 게시물에 따라 조회 수도 들쭉날쭉할 수밖에 없다. 게시물이 꽤 많아지고 내 글을 몰래 읽고 퍼 가는 사람들도 생기면서 나는 어떤 게시물이 인기가 좋은지 한 번 분석해 봤다. 그러면서 몇 가지 사실을 알아내 조회 수 관리에도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사실은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제목에 따라 게시물 조회 수가 확연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수많은 제목 가운데 주로 인기가 좋은 건 사회에서 인기를 얻은 책 제목(내 홈피에서 예를 들자면 '천사와 악마', '다빈치 코드', '가시고기' 따위가 있다)과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랑과 성 이야기(예를 들자면 독후감을 올려놓는 게시판인 '나름대로 읽기'에서 한동안 조회 수가 10을 넘어가는 게시물이 없다가, '첫사랑'을 읽고 쓴 독후감은 단번에 조회수 10을 넘어섰다. 물론 내 첫사랑 이야기는 그 글에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다) 따위가 있다. 만약 내가 '야동 사이트 무료 감상'이라는 제목으로 낚시용 글을 올린다면, 그 조회 수가 얼마나 될 지는 보나마나 빤하다. 그 밑에 추한 악성 댓글이 달리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아마 이 책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를 읽은 뒤 이 독후감을 올리면, 조회 수가 최근 평균 조회 수 4뿐만 아니라 10도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예상한다. 그런데 '첫사랑'을 읽고 쓴 독후감이 그렇듯이 여기에도 내가 여자를 그리워하는 이야기는 전혀 없다. 제목만 보고 보기 좋게 속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내가 이 책 표지를 보자마자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갔듯이 말이다. 누가 표지를 본 뒤에 이 책이 2004년 제 57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 2004년 제 4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 2004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따위 온갖 수상 경력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중대 책꽂이에 애거시 크리스티가 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원제 'And There Were None')'가 있는데, 읽으려고 해도 어째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뒤 갑자기 계획이고 뭐고 따지지 않고 무조건 먼저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을 정도로, 이 책은 추리소설이 사람을 즐겁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다. 사람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온갖 속임수를 한 치 오차도 없이 깔밋하게 담아낸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나루세 마사토라, 아사미야 사쿠라, 안도 시로, 후루야 쎄스코, 안도 지에, 세리자와 기요시, 구다카 아이코, 구다카 류이치로……이들이 얽힌 관계와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을 알고 싶다면 당장 이 책을 읽어라! 사기 조직을 추적하는 주인공 뒤를 따르라!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제목이 이야기와 완전히 동떨어진 것도 아니다. 결말은 제목 그대로이다.

 

 

……

 

 

"당신 이름은 안도 시로잖아요."

 

"아니. 난 나루세 마사토라야."

 

"하지만 당신은 저에게 안도라고……."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지? 그건 당신이 혼자 그렇게 생각한 거겠지. 히로오의 역무원에게 듣고."

 

"그럴……."

 

이렇게만 말하고 더는 말을 잇지 못한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듯한데, 아랫입술을 실룩거릴 뿐 말을 꺼내지 않는다.

 

 

……

 

 

아마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게 읽은 사람은 사쿠라처럼 될 것이다. 그러면서 몇 번이고 다시 책장을 뒤적거리며 자기가 작가 손바닥에서 얼마나 제대로 놀아났는지 확인한 뒤,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거나 이마나 무릎을 탁 치며 소리칠 것이다. 어쨌든 상관없다. 제멋대로 뒤섞인 퍼즐 조각이 쏙쏙 맞춰지는 그 느낌이 어찌 좋지 아니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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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메추리
김진호 지음 / 시공사 / 1997년 7월
평점 :
절판


나는 해병대교육훈련단 해병교육연대 제 1 신병교육대대에서 6주 동안 해병 1015기로서 해병신병훈련을 받았다. 그 뒤 KBS에서 방송하는 '인간극장' 방송분 가운데 해병대 신병교육 과정을 생생하게 담은 '해병대 D.I.' 방송분을 정말 재미있게 보게 되었다. 그 영상물을 보고 있다 보면 의식 속에 영화 필름처럼 돌돌 말려 있던 6주라는 시간이 다시 돌돌 풀려나왔고, 동기 455명과 동고동락했던 추억이 주는 아련하고 편안한 느낌에 젖을 수 있었다.

 

나와 내 동기들이 그러듯이, 공군사관학교 제 49기 생도가 된 여학생 18명도 자기들이 통과한 공사 가입교 훈련 과정을 그대로 담은 '일요스페셜' 방영분을 보면서 그랬을 것이다. 특히 여자로서 처음으로 사관생도가 된 이들이었기에 그 느낌은 남달랐을 것이다. 누가 사관학교가 여자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예상했겠는가.

 

그동안 한국 여군은 남군을 지원하는 구실에 머무를 뿐이었다. 그런데 그녀들이 공군사관학교 생도 자격을 얻은 그 때부터 장교로 진출해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첫번째 주인공으로 그녀들이 선발된 것이다. 이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굉장한 영예였다. 그 명예를 얻고자 흘린 땀과 눈물을 무엇과 바꿀 수 있으랴.

 

공군사관학교가 처음으로 여자 생도를 받는다고 공고를 내자, 그녀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3학년 여자 수험생들이 지원했다. 경쟁률은 무려 22대 1로 예상치를 훨씬 웃돌았다. 여자 지원자들은 왜 상식에 도전하고 온갖 반대를 무릅쓰면서 공군사관학교에 지원했을까. 단순히 학비가 전혀 들지 않거나 교육 과정이 좋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한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남자들도 힘들어하는 기초 군사훈련이었다. 그녀들은 그 기초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공군사관학교에 지원한 까닭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혹독한 훈련을 받으면서 이들은 남자 못지않은 강인한 의지와 절대 굴하지 않는 정신력으로 버텼다. 대한민국 영공을 지키는 전투기 조종사로서, 그리고 뒷날 여자 장군으로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고, 여자들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흔히 여자에 관하여 지니고 있던 고정 관념과 편견을 거침없이 날려버리는 상쾌한 열기가 그득했다.

 

그건 내가 해병신병훈련을 받으면서 드러낸 정신력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해병대교육훈련단에서 나는 얼마나 많이 후회하고 내가 얼마나 못난 사람인지 뼈저리게 느꼈는가. 무슨 일을 하든지 실수를 저질러 동기들 도움을 받아야 했고,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고 훈련교관과 동기들에게 빈축을 사면서도 항상 나를 중심으로 생각했다. 그런 정신 속에는 해병혼이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 해병으로서 새롭게 태어나면 어떻게 행동해야겠다는 생각 따위는 없었다. 오로지 그 모진 시간을 어떻게든지 견디고 사회로 돌아갈 그날만 그렸다.

 

그러면서 내가 만약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했다면, 고등학교 3학년 때 내가 마음먹었던 대로 교육훈련을 과연 충실히 받을 수 있었을지 자연스럽게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나는 일반 대학교에 다니던 지난 두 해 동안 내가 이뤄낸 성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관학교 정규 교육 과정을 이수한 사관생도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실력을 그저 부러워한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철저하게 통제된 공간에 들어간다면, 아무리 좋은 교육환경이 제공된다 하더라도 지금 정신 상태로는 못 견딜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군대에서 깨달은 내 본질은 그런 환경과는 상극이었다.

 

그 모순 때문에 나는 군대에서 항상 이중으로 괴로워할 수밖에 없었다. 군대가 나에게 주는 고통과 앞에서 말한 그 모순이 주는 고통에 한꺼번에 시달리면서도, 이 책 '날아라 메추리'를 읽으면서 사관학교에서 땀 흘리며 교육훈련에 열중하는 이들에게 품은 동경심을 다시 떠올렸다. 특히 공군사관학교 제 49기 여자 생도들에게 품은 동경은 단순한 동경을 넘어서는 뭔가가 있었다. '터미네이터'에서 리스 중사가 사라 코너에게 품은 연정 같기도 했다.

 

박노자 교수가 하는 '제복을 강권하는 사회'라는 비판도 그 특별한 뭔가가 나를 사로잡았을 때만큼은 설득력을 잃었다. 한 때 내가 정말 동경했던 사관학교 제복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책표지뿐만 아니라 곳곳에 자리 잡은 제복을 입은 여자 생도들이 보여주는 당당함은 아름답기 그지없어 모든 남자들을 설레게 할 만하다. 그 아름다움은 고된 교육훈련을 견뎌내며 철저하게 자기를 관리하는 보람찬 삶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서 더욱 빛난다.

 

1997년에 여자로서 처음으로 메추리가 된 공군사관학교 제 49기 여자 사관생도들은, 4년 동안 공사 정규 교육 과정을 수료한 뒤 2001년에 공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지금이 2007년이니 이미 실무 복무 기간이 7년이 다 되어간다. 7년 동안 착실하게 복무한 이들은, 이제 소령으로 진급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며, 1997년과 다르게 공군사관학교에는 이제 1학년에서 4학년까지 여자 사관생도들이 고루 포진하였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 씨를 뿌리고 순교한 뒤 기독교가 세상에 널리 퍼져 수많은 교인들이 은총을 누렸듯이, 1997년에 그녀들이 바늘구멍과 같은 문이나마 열고자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은 후배 여자 생도들이 공군사관학교에서 고된 교육훈련 속에서 메추리에서 보라매로 거듭나는데 크나큰 자양분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함께 겪는 고통은 함께 겪는 기쁨보다 사람들을 훨씬 강하게 뭉치게 한다고 누군가 그랬다. 그녀들도 그 말에 정말 공감하면서 '역사스페셜'뿐만 아니라 이 책을 보면서 힘들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배를 잡고 웃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더 큰,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기쁨은 그녀들 뒤를 잇는 50~60기 후배 여자 보라매들과 메추리들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6.25 전쟁 때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여자 조종사가 된 김경오가 공군사관학교 제 49기 여자 생도 탄생 소식을 듣고 기쁨에 겨워 이 책에 실은 축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들이 겪은 가시밭길을 생각하면 후배들이 안쓰럽기도 하겠지만 그 가시밭길을 헤쳐 나오면서 늠름하고 당당하게 성장할 것을 알고 있기에, 그녀들도 기꺼이 후배들을 격려하고 임관식 때 아낌없이 축하해 줄 것이다.

 

처음으로 보라매가 된 그녀들은 혹한기를 견딘 매화와 같은 향기를 뿜는다. 임관식장에 자랑스럽게 선 새 보라매들과 그에 앞서 임관하여 대한민국 영공을 수호하는데 온몸을 바치고 있는 향기로운 그녀들 앞에 펼쳐진 끝없는 가능성과, 그 가능성을 스스로 열어가면서 더욱 향기로워질 그녀들을 주제넘게 축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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