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메추리
김진호 지음 / 시공사 / 1997년 7월
평점 :
절판


나는 해병대교육훈련단 해병교육연대 제 1 신병교육대대에서 6주 동안 해병 1015기로서 해병신병훈련을 받았다. 그 뒤 KBS에서 방송하는 '인간극장' 방송분 가운데 해병대 신병교육 과정을 생생하게 담은 '해병대 D.I.' 방송분을 정말 재미있게 보게 되었다. 그 영상물을 보고 있다 보면 의식 속에 영화 필름처럼 돌돌 말려 있던 6주라는 시간이 다시 돌돌 풀려나왔고, 동기 455명과 동고동락했던 추억이 주는 아련하고 편안한 느낌에 젖을 수 있었다.

 

나와 내 동기들이 그러듯이, 공군사관학교 제 49기 생도가 된 여학생 18명도 자기들이 통과한 공사 가입교 훈련 과정을 그대로 담은 '일요스페셜' 방영분을 보면서 그랬을 것이다. 특히 여자로서 처음으로 사관생도가 된 이들이었기에 그 느낌은 남달랐을 것이다. 누가 사관학교가 여자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예상했겠는가.

 

그동안 한국 여군은 남군을 지원하는 구실에 머무를 뿐이었다. 그런데 그녀들이 공군사관학교 생도 자격을 얻은 그 때부터 장교로 진출해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첫번째 주인공으로 그녀들이 선발된 것이다. 이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굉장한 영예였다. 그 명예를 얻고자 흘린 땀과 눈물을 무엇과 바꿀 수 있으랴.

 

공군사관학교가 처음으로 여자 생도를 받는다고 공고를 내자, 그녀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3학년 여자 수험생들이 지원했다. 경쟁률은 무려 22대 1로 예상치를 훨씬 웃돌았다. 여자 지원자들은 왜 상식에 도전하고 온갖 반대를 무릅쓰면서 공군사관학교에 지원했을까. 단순히 학비가 전혀 들지 않거나 교육 과정이 좋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한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남자들도 힘들어하는 기초 군사훈련이었다. 그녀들은 그 기초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공군사관학교에 지원한 까닭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혹독한 훈련을 받으면서 이들은 남자 못지않은 강인한 의지와 절대 굴하지 않는 정신력으로 버텼다. 대한민국 영공을 지키는 전투기 조종사로서, 그리고 뒷날 여자 장군으로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고, 여자들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흔히 여자에 관하여 지니고 있던 고정 관념과 편견을 거침없이 날려버리는 상쾌한 열기가 그득했다.

 

그건 내가 해병신병훈련을 받으면서 드러낸 정신력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해병대교육훈련단에서 나는 얼마나 많이 후회하고 내가 얼마나 못난 사람인지 뼈저리게 느꼈는가. 무슨 일을 하든지 실수를 저질러 동기들 도움을 받아야 했고,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고 훈련교관과 동기들에게 빈축을 사면서도 항상 나를 중심으로 생각했다. 그런 정신 속에는 해병혼이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 해병으로서 새롭게 태어나면 어떻게 행동해야겠다는 생각 따위는 없었다. 오로지 그 모진 시간을 어떻게든지 견디고 사회로 돌아갈 그날만 그렸다.

 

그러면서 내가 만약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했다면, 고등학교 3학년 때 내가 마음먹었던 대로 교육훈련을 과연 충실히 받을 수 있었을지 자연스럽게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나는 일반 대학교에 다니던 지난 두 해 동안 내가 이뤄낸 성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관학교 정규 교육 과정을 이수한 사관생도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실력을 그저 부러워한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철저하게 통제된 공간에 들어간다면, 아무리 좋은 교육환경이 제공된다 하더라도 지금 정신 상태로는 못 견딜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군대에서 깨달은 내 본질은 그런 환경과는 상극이었다.

 

그 모순 때문에 나는 군대에서 항상 이중으로 괴로워할 수밖에 없었다. 군대가 나에게 주는 고통과 앞에서 말한 그 모순이 주는 고통에 한꺼번에 시달리면서도, 이 책 '날아라 메추리'를 읽으면서 사관학교에서 땀 흘리며 교육훈련에 열중하는 이들에게 품은 동경심을 다시 떠올렸다. 특히 공군사관학교 제 49기 여자 생도들에게 품은 동경은 단순한 동경을 넘어서는 뭔가가 있었다. '터미네이터'에서 리스 중사가 사라 코너에게 품은 연정 같기도 했다.

 

박노자 교수가 하는 '제복을 강권하는 사회'라는 비판도 그 특별한 뭔가가 나를 사로잡았을 때만큼은 설득력을 잃었다. 한 때 내가 정말 동경했던 사관학교 제복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책표지뿐만 아니라 곳곳에 자리 잡은 제복을 입은 여자 생도들이 보여주는 당당함은 아름답기 그지없어 모든 남자들을 설레게 할 만하다. 그 아름다움은 고된 교육훈련을 견뎌내며 철저하게 자기를 관리하는 보람찬 삶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서 더욱 빛난다.

 

1997년에 여자로서 처음으로 메추리가 된 공군사관학교 제 49기 여자 사관생도들은, 4년 동안 공사 정규 교육 과정을 수료한 뒤 2001년에 공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지금이 2007년이니 이미 실무 복무 기간이 7년이 다 되어간다. 7년 동안 착실하게 복무한 이들은, 이제 소령으로 진급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며, 1997년과 다르게 공군사관학교에는 이제 1학년에서 4학년까지 여자 사관생도들이 고루 포진하였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 씨를 뿌리고 순교한 뒤 기독교가 세상에 널리 퍼져 수많은 교인들이 은총을 누렸듯이, 1997년에 그녀들이 바늘구멍과 같은 문이나마 열고자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은 후배 여자 생도들이 공군사관학교에서 고된 교육훈련 속에서 메추리에서 보라매로 거듭나는데 크나큰 자양분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함께 겪는 고통은 함께 겪는 기쁨보다 사람들을 훨씬 강하게 뭉치게 한다고 누군가 그랬다. 그녀들도 그 말에 정말 공감하면서 '역사스페셜'뿐만 아니라 이 책을 보면서 힘들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배를 잡고 웃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더 큰,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기쁨은 그녀들 뒤를 잇는 50~60기 후배 여자 보라매들과 메추리들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6.25 전쟁 때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여자 조종사가 된 김경오가 공군사관학교 제 49기 여자 생도 탄생 소식을 듣고 기쁨에 겨워 이 책에 실은 축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들이 겪은 가시밭길을 생각하면 후배들이 안쓰럽기도 하겠지만 그 가시밭길을 헤쳐 나오면서 늠름하고 당당하게 성장할 것을 알고 있기에, 그녀들도 기꺼이 후배들을 격려하고 임관식 때 아낌없이 축하해 줄 것이다.

 

처음으로 보라매가 된 그녀들은 혹한기를 견딘 매화와 같은 향기를 뿜는다. 임관식장에 자랑스럽게 선 새 보라매들과 그에 앞서 임관하여 대한민국 영공을 수호하는데 온몸을 바치고 있는 향기로운 그녀들 앞에 펼쳐진 끝없는 가능성과, 그 가능성을 스스로 열어가면서 더욱 향기로워질 그녀들을 주제넘게 축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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