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턴이 미로에 빠진 것인가, 내가 발을 헛디딘 것인가. 도라고 불리는 것은 도가 아니라는 성현의 말씀처럼 알다가도 모를 것이 삶의 의미라는 질문에 대한 유일한 답인가. 삶의 의미란 삶 밖에 있지 않다는 말과 사랑하자는 말을 이렇게 길게 써야하는 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난생 처음 접한 서구의 교리에 감화된 자들을 지금 다시 복원하는 일은 낯설다. 그들은 나와 멀다. 우리들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으리라 짐작한다. 동정하는 듯 동정하지 않고, 아끼면서도 두려워하며 관조할 수밖에 없어 관조하는 작가의 태도가 미덥다.배 곯아 죽고, 노동과 착취가 흐르는 물처럼 끝이 없고, 가뭄에 마른 땅 위에 이따금 지나는 소나기처럼 눈물이 터지는 민초들이 위험을 알면서도 예수를 찾는 이유를, 위정자들은 모른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언어가 있어 그 바깥의 언어에 귀 닫고 눈 감는다. 귀 닫고 눈 감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언어 아닌 언어의 혀를 뽑고 목을 쳐 핏물로 흘려보낸다. 서로 통하지 않는 언어는 극과 극에 다다라 황사영의 백서로 이어지니 그 또한 피를 부르는 언어가 된다.인간의 언어가 아닌 언어의 뜻을 헤아리고픈 작가의 소망을 떠올리면 등이 굽고 외롭고 고적하다. 고뇌는 글로 남고 맑은 정신은 글로 남길 수 없으니 더 그러하다.‘여기는 배반의 삶, 저기는 구원의 꿈‘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 2년 터울로 난 근대 조선의 세 수재들을 당시 사람들은 ‘동경삼재‘로 바라봤던 모양이다. 고관 양반 가문의 홍명희, 중인 신분의 최남선, 몰락한 반가의 이광수가 서로 어울릴 수 있었던 것도 시대가 만들어내기 시작한 풍경. 사학 전공의 저자이기 때문인지 세 사람의 문학이 아닌 행적을 비평한다. 비평의 날카로운 맛은 덜하지만 세 사람을 함께 놓고 보니 우리에게 벽초 홍명희가 있었음을 자랑할 만하다.
정국이 보통 혼란스럽지 않다. 사람에 따라서는 망국의 기운을 느낄 법도 하다. 촛불을 들어도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간혹 잠을 설친다. 나도 그 분처럼 보약 같은 잠을 자고 싶다.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파악하고 미래로 나아간다는 말이 사실일까? 저마다 과거를 해석하는 눈이 다르고 현재를 이해하는 틀이 다르고 나아가고자 하는 미래가 다른데 저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어지럽다. 최장집 교수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갈등을 근본 원리로 작동하기 때문에 다양한, 특히 사회경제적 소외계층의 목소리가 갈등의 정책적 완화와 타협에 반영될 수 있는 권리와 시스템이 보장되어야 한다. 현재의 선거제도와 대통령 중심제, 정당정치의 수준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글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어쨌든 이광수를 (다룬 글을)읽게 되는 이유가 현재의 답답함 때문이라는 이유는 내가 생각해도 요령부득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민족을 위해 친일했다‘는 이 친일 작가의 변론은 이 시대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국가를 운영하는, 또 국가를 운영해나갈 힘이 될 것만 같다. 친일작가 이광수의 낙인은 오히려 우리의 판단을 흐린다(질문을 봉쇄한다). 친일은 나쁜 것이라는 프레임 이전에 도대체 무엇이 친일인가(무엇이 나쁜가)를 분명히 물어야하는 시대가 아닌가 하는 물음을 갖게 된다. 민족을 위한 친일은 시대에 맞게 옷을 갈아입는 것이 아닌가? 국가의 성장을 위해 재벌을 키웠다. 국가의 성장이 있고 인권이 있다. 박근혜 정부 이후의 우리를 위해서는 그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한국 근대문학 연구자인 하타노 세츠코는 이 책에서 그와 같은 물음을 던지지는 않지만 단초를 제공한다. 이광수라는 문제적 인물이 그런 물음을 던진다고 봐야할 것이다. 일본인 학자가 보는 이광수라는 작가는 어쩐지 연민의 대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김현은 이광수를 두고 ‘만질수록 덧나는 민족의 상처‘라고 평한 바 있다. 이광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물음을 나는 이제 막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