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 - 박근혜.문재인의 사과가 말해주는 것들
김욱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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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사과는 정치적 힘관계에 의해서 드러나는 잘못을 인정하는 언어적 표현이고, 불리한 힘관계가 역전될 경우 언제라도 그 언어는 반대되는 행동을 해버림으로써 철회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 언어 자체까지 '없던 일'로 될 수도 있는 가역적 이데올로기다.-29쪽

정치적 사과는 그 자체로 역사의 전리품이다. 그것이 그 자체로 모든 것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중요한 무기가 될 수 있다. 특별히 이데올로기적 정치투쟁에서는 결정적인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이데올로기적 사과는 한 번 하고 나면 나중에 입장을 바꾸려고 해도 주워 담기가 매우 힘들다. 그 사과를 뒤집는 다른 시도를 할 때마다 문제가 어렵게 된다. 따라서 그런 사과일수록 사과를 둘러싼 투쟁이 치열하다.-31쪽

영화 <26년>에서 '그 사람' 경호에 목숨을 거는 마상렬의 대사가 노골적이다. "넌 죽으면 안 되지. 넌 끝까지 뻔뻔하게 잘 살아서 내 삶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돼!"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 인생을 스스로 단죄하는 상실감을 감당할 수 없다. 차라리 거꾸로 역사와 악착같이 싸우며 '그 사람'을 잘 먹이고 잘 살림으로써 '상상된 보상'을 받고 싶은 것이다.-48쪽

우리는 왜 사죄 없는 용서가 무의미한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단지 편집증적 집착 때문이 아니다. 만약 역사의 죄인이 사죄하고 참회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리고 그 참회를 부정하는 세력이 없다면, 굳이 그를 처벌하지 않더라도 역사의 진보는 이뤄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사죄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를 두둔하는 세력이 제멋대로 발호한다면, 역사는 자신의 힘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역사적 정의의 생사에 관한 문제다.-93쪽

민주주의 제도는 '모든' 정치인에게 진정성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즉 그런 마음이 없더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제도로 강제하는 데 그 핵심이 있다. 민주주의 제도를 간단하게라도 한번 일람해보라. 불신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견제/안전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는가? 문제는' 짅넝성 있는 마음과 말'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마음이 없더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마로가 행동'이다. 따라서 우리는 박근혜의 진정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걱정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에게 진정성이 있든 없든 말에 맞는 바람직한 행동을 지속적으로 하게 하는 힘이 우리에게 있느냐 없느냐를 걱정해야 한다.-102쪽

사죄 없는 화해강요 이데올로기는 피해자에게 두 번 상처를 입힌다. 그런데 그 이데올로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 이데올로기로 누가 이익을 얻는 것일까? 그 이데올로기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즉 진심 어린 죄책감을 느끼지 앟는, 그래서 사죄 없이 용서만을 원하는 가해자의 이익을 돌보는 이데올로기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예컨대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성폭행 가해자에게 용서를 강권하는 사회적 관대함도 이와 유사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선 사죄 후 용서'라는 사회/정치/역사적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자발적 사과가 있으면 모두에게 최선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부득이한 경우 강요에 의한 상황적 사과라도 받아내야 한다. 심지어는 변명도 헤게모니 실현의 한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다.-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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