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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출처: http://sooosleepy.wordpress.com/2011/02/13/%eb%ac%b4%ec%97%87%ec%9d%84-%ed%95%a0-%ea%b2%83%ec%9d%b8%ea%b0%80/ 

 

무엇을 할 것인가 

(존칭은 생략합니다) 

1

  잠에서 깨어나 습관대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녀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여전히 반쯤은 잠에 취해 침대에 누워 있던 나를 사로잡은 것은 슬픔도 분노도 절망의 감정도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싸늘하고 단순한 명제에 가까웠다. 네가 하는 일이 너를 죽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은 삼류영화에 등장할것 같은 낭만적이며 비현실적인 문장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낭만적이며 비현실적인 명제가 돌연 현실 그자체가 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아니 차라리 영화같다고 치부하며 외면하던 현실이 방문을 부수고 들이닥친 것에 가까웠다. 나는 그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차라리 웃을까 했다. 그럴수밖에 없었던 것이 객관화를 하기 불가능할만큼 그녀가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와 나는 둘 다 여자였고, 부유하지 않았고, 글을 쓰는 창작자였다. 같은 학교를 다녔고 같은 수업을 들었다. 방에서 나온 나는 어머니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했다. ‘너도 이집에서 나가면 똑같이 될지도 몰라.’ 약간의 과장이 섞여 있었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사실이었다. 정말이지 우리는 너무 가까이 있었다.

2

  십대 중반에서 이십대 초반 극단적으로 돈이 없었다. 사소한 감기에 걸려도 아픈게 문제가 아니라 진료비가 문제였고 생리가 다가오면 생리통이 걱정이 아니라 생리대를 살 돈이 걱정이었다. 돈을 벌고 싶어도 열여섯살 고등학교 중퇴생이 할 수 있는 일은 뻔했다. 뻔한 모든 일을 닥치는대로 했다. 시간당 천삼백원을 받고 식당 사장에게 성희롱을 당하며 일한적도 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아니 더 악화되었다. 왕복 네시간이 걸리는 통학시간과 많은 과제와 빡빡한 수업내용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지하철 차비를 치르면 점심을 굶어야 하고 점심을 먹으면 지하철에 무단승차해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모든게 돈이었다. 연애는 커녕 친구를 만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국립학교라 학비가 쌌고 학비를 대주고 밥을 주는 부모가 있었고 잠을 잘 방이 있었고 글을 쓸 컴퓨터가 있었다. 그런 최소한의 물적 기반이 없었다면 나는 에이포 열몇장씩 하는 긴 글을 무작정 써댈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런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나아지게 된 것은 소설가로 데뷔를 하고 난 뒤였다. 난 무엇보다도 내가 돈을 벌게 된 것에 그러니까 내가 앞으로 굶어죽지 않을 가능성이 커진 사실에 기뻐했다. 소설가 타이틀을 얻었다는 사실보다 상금을 탔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더 중요했다. 육체노동으로 돈을 버는 것에 비하면 글을 쓰는 것은 쉬웠으니까. 확실히 숯불갈비집에서 열두시간동안 서빙을 하거나 화장품 공장에서 하루 아홉시간씩 화장품 뚜껑을 끼우는 것에 비하면 하루에 원고지 백장을 쓰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쓰고 싶은 걸 쓰는 거니까. 그리고 모두가 회피하는 단순노동과는 달리 소설이 잘팔리면 선망의 눈길을 받거나 유력일간지와 인터뷰를 하거나 사회명사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3

  이런 삶의 궤적은 내가 예술학교와 예술계의 지배적인 분위기에 위화감을 갖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나는 끝내 예술이 위대하다거나 고귀하다는 명제를 지지할 수가 없었다. 경제적 궁핍을 경험해본 나에게 그 명제는 너무 순진하게 느껴졌다. 아주 초기부터 창작에 필요한 물적기반을 확고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남들에 비하면 정말이지 운이 좋은 케이스여서 글을 쓰고 돈을 떼먹힌적도 없고 몇번의 지원금도 받을 수 있었고 비교적 ‘젊은’ ‘여자’라는 사실이 나의 궁핍함에 대한 사회적 비난의 강도를 약화시켜주었다. (물론 그것이 결국 나에게 더 커다란 제약으로 다가온다는 걸 안다)그래서 졸업하고 이년간 아슬아슬하게 전업작가의 길을걷고 있다. 하지만 내가 벌어들이는 돈은 내가 제대로 된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다. 일년에 몇차례씩 말그대로 잔고가 0원으로 떨어지는 일이 벌어지고 앞으로 결혼을 하거나 애를 낳아 키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부모의 신세를 지고 있는 점이 스스로를 위축시킨다. 한가하게 이러고 있을때가 아니라 뭘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운이 좋은 경우다. 그래서인가 가난의 지긋지긋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은 타협할 생각이 없다. 그런데 이 말은 예술에 내 삶을 바치겠다는, 예술을 향한 낭만적인 도피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나는 위에 말한 것처럼 줄곧 정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현실이, 물적조건이 예술보다 힘이 세고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예술학교 시절 내내 세련된 취향을 가진 동료 예술가지망생들에게 맞서 우스꽝스럽게 보일 정도로 지나치게 대중문화를 옹호했고 현대예술의 부르주아적인 성격에 원색적 비난을 퍼부었다. 삶과 문학 사이에서 회의하다가 결국 문학을 떠나버리는 극단적 선택을 한 문학가들을 옹호했다. 난 도무지 예술을 긍정할수가 없었다. 그것은 내가 글따위 세상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걸 팔아먹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죄책감으로 이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글이 아니라 좀 더 가치 있는 일, 예술이 아니라 평범한 노동을 해서 살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한편 바로 그렇기 때문에, 평범한 노동이 얼마나 고된지 스스로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더욱 나는 그런 일을 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한편으로는 한여름 숨막히는 돈까스집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던 때로 돌아갈까 공포에 휩싸이며 거기에서 멀어지려고 애를 쓰고, 또 한편으로는 돈까스집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노동을 한가하고 배부른 일이라면서 비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내 나는 극단적인 두 입장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이것 아니면 저것을 택하라고 스스로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이런 내 태도가 예술을 삶보다 위에 놓는 예술지상주의자들의 태도에 맞서 삶을 예술보다 위에 놓으며 예술을 폄하하는 일종의 반예술주의적 태도라는 걸, 결국 두 태도가 동전의 양면에 다름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은 지난 여름의 일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위에 적은 나의 고민을 두서없이 털어놓고 있었다. 친구는 화가였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하고 있었다.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친구가 말했다. 그런데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과 일을 하는 것이 같다고 생각해. 그 말을 듣고 나는 망치로 한대를 얻어맏은 느낌이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유치한 관념에 사로잡혀있었던가 깨닫고 부끄러웠다. 그렇다. 나는 은연중에 예술과 노동을 분리한 다음 우열을 정하여 편가르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글을 쓰는 것은 설거지를 하는 것에 비해 더 낫거나 더 못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낫다 저것이 낫다하는 건 결국 사람들에 의해,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바보같이 사회가 나에게 강요하는 편견에 사로잡혀 갈팡질팡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게 되고 나서 나는 비로소 내가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버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삶에 절망하여 예술로 도피하는 태도와, 예술에 절망하여 예술을 떠나버리는 태도 모두가 똑같이 극도로 낭만적인 태도라는 것을 비로소 이해할 수가 있었다.

  문제는 나 혼자 그것을 깨닫는 것으로는 부족했다는 것이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다시 나를 부끄럽고 도망치고 절망하게 만드는 현실에 부딪혔다. 중년의 여성청소부는 화장실에 숨어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고, 식당 점원은 커튼에 가려진 부엌입구에 선 채로 꾸역꾸역 어묵을 먹고 있었다. 퉁명스러운 유럽 공항의 상점점원들과 달리 한국의 공항의 점원들은 지나치게 친절했다. 주인이 감시하는 씨씨티비가 달린 편의점에서 일해본적이 있는 나는 언제나 점원들의 친절함이 불편했다. 나는 의문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누가 당당하게 탁자에 앉아 어묵탕을 먹는 나와 주방에 숨어 어묵을 먹는 저 사람을 같다고 보겠는가? 누가 이런 광경에서 우열을 읽어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 모두는 우리들의 의도와는 달리 끊임없이 분류되고 위치지어지고 있었다. 어떤 것은 천하고 어떤 것은 고귀하다. 어떤 것은 가치있는 일이고 어떤 것은 무가치한 일이다. 계속해서 우열을 가르는 사회구조가 존재하는 한 나 자신이 좀 더 선해지는 것과는 관계없이 차별적인 게임은 계속될 것이고 거기에 속해있는 나는 때와 장소에 따라 약자와 강자의 위치를 바꿔가며 누군가를 착취하거나 착취당하며 부끄러워하거나 절망할수밖에 없을거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4

  인터넷에서 진행된 조영일과 김영하의 논쟁을 관심을 갖고 지켜 보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비평가와 예술가의 논쟁이 아니라 언젠가부터 계속되어온, 그리고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예술을 둘러싼 두가지 양립불가능한 입장간의 서로의 존재자체를 건 대립에 가까운 것이었다. 조영일의 입장은 예술을 사회적으로/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에 가깝고 김영하의 입장은 좀 더 예술의 순수성을 옹호하는 입장이다. 어떤 입장을 취하건 사실 그건 각자의 문제이고 비난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위에서 썼듯이 예술을 둘러싼 두 입장이 양립불가능하다는 것이고 따라서 논쟁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나의 입장은 조영일에 더 가깝다. 그 이유는 첫째로 위에 적었듯이 예술을 과잉되게 옹호하는 것은 과잉되게 폄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을 왜곡되게 바라보는 태도인데 나는 예술가라면 더욱더 현실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저렇게 예술의 순수성을 옹호하는 태도 자체가 하나의 입장에 불과한데 그것이 강력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어 이 시대의 예술과 예술가에게 오직 자신의 입장을 따르기를 강요하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문화예술영역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사조를 예술을 오직 예술의 자리에 머물기를 강요하는, 예술을 끝없이 낭만화하는 현대의 예술적 경향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예술의 가치를 극단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의 기원은 독일의 낭만주의 운동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독일의 상황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교육받은 일군의 젊은이들이 출현했지만 여러가지 여건으로 인해 현실사회에 진출할 통로가 차단되어 되어버린 당시 독일의 상황이 젊은이들을 절망하여 예술(문학)으로 도피하게 만들었다. 다른 모든 가능성이 차단되어 버렸으므로 그들은 더욱 더 예술을 향해 도피했고 예술을 낭만화하며 예술의 순수성을 옹호했다. 나는 같은 상황을 민주화 이후 환멸과 냉소가 지배적인 정서가 되어버린 한국의 구십년대 문학에서, 혹은 점점 더 귀여운 키치가 되거나 텅 비고 세련되어지기만 하는 당대 미술의 경향에서 발견한다. 예술이 오직 예술 자신만을 반복해서 호명하는 것은 그 예술이 속한 사회의 상황이 그만큼 막다른 곳에 닿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현실에서 가능성을 잃고 절망한 예술은 현실 저 너머로 눈을 돌린다. 사회적 자살자가 되어버린 예술가들은 현실과의 끈을 잃어버린다. 그들은 그들만의 아름답고 순수한, 따라서 더없이 자폐적이고 자멸적인 왕국으로 떠난다. 어쩌면 그것은 몹시 아름다울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자멸과 절망을 향해 가는 지극히 아름다운 운동에 다름 아닌 무언가는 내가 예술에서 기대하고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술에 관한 순수주의적 입장은 예술에 대한 여러 입장 중 하나에 불과하다. 위대한 예술이 탄생하는 수많은 배경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많은 예술 작품들 중에 그 입장에 의해 탄생된 작품은 일부에 불과하다. 바흐는 왕과 교회를 위해서 작곡했다. 발자크와 도스토예프스키는 빚을 갚기 위해 썼다. 많은 위대한 화가들은 귀족과 부르주아의 청탁을 받고 그림을 그렸다. 소비에트 연합에서는 명백히 선동적 목적으로 위대한 영화가 만들어졌고, 반대로 미국에서는 명백히 상업적 목적으로 위대한 영화가 탄생했다. 물론 내가 예술가의 내밀한 예술혼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위대한 예술이란 예술가의 내밀한 예술혼과 예술가가 처한 현실상황 사이의 긴장에서 촉발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정확히 초월적 욕망과 세속적 욕망의 경계에 위치한다. 예술이란 미학과 정치, 아름다움과 윤리,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과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예술을 만들어내고 싶은 욕망 사이의 투쟁의 장에 다름아니다. 이 양립불가능한 모순적인 욕망과 상황간의 투쟁을, 적대를, 긴장을 소거해버린 예술이 도착하게 되는 곳은 아마추어들의 소박한 자기위안이나 무미건조한 관제예술 혹은 더 없이 세련된 문화상품의 세계이다. 위에 적은 예들이 단지 그렇고 그런 국가나 자본의 꼭두각시 혹은 왕이나 교회의 선전물의 세계에서 위대한 예술의 세계로 도약한 것은 바로 예술가가 가진 현실적 제약조건과 본인의 예술적 야망 사이에서의 치열한 고민과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은 다른 모든 것에 대한 미적인 것의 무한한 승리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미적인 것과 다른 것들 사이의 처절한 투쟁의 실패의 기록에 가깝다. 그리고 예술은 그 실패를 발판삼아 자신의 가능성의 범위를 확장해나간다. 그것이 우리가 예술의 역사에서 발견하게 되는 유일한 진실이다.

5

  그러니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하는 것이 나를 죽일수도 있다는 절망적인 현실에 맞닥뜨린 우리 예술가들이 택해야 하는 길은 무엇인가. 예술로의 더 급진적인 도피,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쩔수 없이 종종 발생할 안타까운 희생에 대한 아름다운 애도인가? 더없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비명같이 탄생하게 될 예술의 가능성만이 남아있나? 우리에게 남은 길은 오직 그것뿐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또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예술을 둘러싼 오직 하나의 입장에 굴복하는 것이다. 여전히 다른 선택지들이 남아 있다. 그 중 하나는 삶과 예술 모두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미 지난 세기,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은 타오르는 예술혼 이전에 그 예술혼을 지속적으로 불태울 돈과 자기만의 방이라고 말한 적 있다. (물론 그것은 여성 예술가를 향해 쓴 것이지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우울하고 예민한 여성예술가의 대명사로 불리는 그녀지만 이렇게 창작작업의 물적 기반에 대해서 냉철하게 인식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예술가는 별난 종족이 아니다. 다른 모든 인간들처럼 먹고 살 돈이 필요하다. 이런 필요에 대한 요구가 예술을 천박하게 만들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노골적으로 액수까지 제시하며(500파운드) 글을 쓰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속물이었지만 동시에 위대한 소설가였다. 이 예를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렇다. 국민소득이 이만불에 달한다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다가는 굶어죽을지도 모르는 이런 엉망진창인 이 사회에 대해 혹은 문화예술계의 말도 안되는 관행에 맞서 목소리를 높이고 투쟁한다고 해서 예술가들의 순수한 창작욕이 타락되거나 고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새로운 예술의 발판이 될 수도 있다. 지독한 절망만이 예술의 탄생요건은 아니다. 예술혼에 불타는 미친 예술가는 예술가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일 뿐이다. 다른 예술은 가능하다. 패배가 아니라 승리에 대한, 환멸이 아니라 가능성에 대한 예술은 가능하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수많은 실패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실패는 각자 골방에 갇혀 순수하고 자폐적으로 창작욕을 불태우는 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지금 우리 예술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절대 패배하지 않는 자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자의식 전체를 뒤흔드는 투쟁이다. 그 투쟁은 예술 안과 예술 밖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 왜 우리는 예술과 삶 둘 중에 하나만 택해야 하는가? 이건 삶에 예술을 저당잡히라는, 장사꾼이 되어 예술을 팔아먹으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예술을 위해 삶을 희생하고, 혹은 살아남기 위해 예술혼을 팔아먹어야 하는 끔찍한 현실과 맞서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삶과 예술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 왜 예술가는 지금 당장 나서면 안되는가? 왜 예술가는 오직 예술가여야 하는가? 우리들이 예술가이기 전에 인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예술가는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게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이런 소박한 진실에서, 그리고 이런 소박한 진실을 왜곡하는 것들과의 투쟁 속에서 위대한 예술이 탄생할 수 있음을 믿자. 내가 하는 것이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고 그것의 실현에 나서야 한다. 그것은 개인들 각자의 이미 패배가 정해진 외로운 싸움이 아니라 개인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연대를 통해 가능할 것이다. 그것을 해내는 것 그것만이 죽은 그녀에게 살아있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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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구조주의(모든 인간 행위는 무의식적인 상징적 메커니즘에 의해 조종된다는 생각에 기반을 둔 이론들)'의 시대에 알튀세는 실천적 휴머니즘에 의해 보충되어야 하는 악명 높은 '이론적 안티 휴머니즘'의 공식을 제시했다. 우리는 실천 속에서 휴머니스트처럼 행동해야 한다. 즉 타인을 자유롭고 존엄한 인간으로 대하며, 자기 세계의 창조자로 대해야 한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우리는 휴머니즘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우리 자신의 곤경을 자생적으로 체험하는 방식이라고, 인간과 역사에 대한 진실한 지식은 개인들을 자립적 주체가 아니라, 독자적인 법칙을 갖는 구조 속의 요소들이라고 항상 생각해야 한다. 알튀세와 반대로 라캉은 우리는 실천적인 안티 휴머니즘을 인정해야 한다고, 니체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고 부른 차원을 넘어서는 윤리, 인간성의 지극히 비인간적인 핵심과 대면하는 윤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인간존재의 잠재된 괴물성, 보통 '아우슈비츠'라는 단어로 포괄되는 현상들 속에서 폭발하는 악마적 차원을 두려움 없이 고려하는 윤리학을 의미한다. 

 

- 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D 라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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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쓰는 것이 정신분석적 글쓰기 인가요?
원래 무의식을 표현해내는 '정신분석'에는 의식의 특정 기준을 '재현'하는 정확한 모델은 없다. 그러나 내가 아는 모델로 <프로이드>의 작품분석 스타일과 꿈해석 스타일, 증상 해석 과정들이 있다.
여기에 과거 7년간 대학교에서 꿈해석 보고서로 받은 학생들의 생생한 글쓰기 모델이 있다.

요약하자면, <전치 & 압축> 글쓰기가 곧 정신분석만의 고유 스타일이다.

전치처음에 의식에 외견적으론 '사소'하게 지각되지만 뭔가 여운을 남기는 어떤 말-이미지-생각-느낌이 (뭔가에 추동된) 우연한 <연상>작용에 의해 전혀 뜻밖의 '숨겨진 사실'에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하는 기제이다. "머리 스타일을 <지그재그>로 해봐!"라는 꿈속 친구의 (평범하지만 여운을 남기는) 말 뜻을 연상하다가 우연히 유치원때 모르는 남성에게 집근처에서 성추행 위협에 놀라...<지그재그>로 정신없이 집에온 그 기억....과 그로인한 이후 이성관계에 심각한 문제를 겪었던 어느 학생"의 글쓰기 사례는 그것을 보는 독자로 하여금....." 저리 사소한 단서에서 저토록 큰 사실을 어찌 발견하게 되었지?....'연상'이라는 게 참 대단한 거구나...!"라는 놀라운 경탄과 함께 자신의 숨겨진 상처를 발견, 치유할 수 있는 어떤 비법을 얻은 듯한 감동이 일어난다.

마찬가지로 "우리집에서 Party해요"라는 꿈속 언어와 연관해 떠오르는 생각을 자유연상하다가 <어떤 강한 추동력에 힘입어> <무의식의 방어막을 뚫고> '파티'라는 사소한 단어에 교묘하게 <압축된> 무의식의 억압된 내밀한 의미들을 다중으로 연상해내고 동료들 앞에서 당당히 표현해내 자신의 과거를 용기있게 통합해낸 어느 학생 사례도 꿈수강생들은 기억할 것이다.

<압축>을 풀어내는 글쓰기는 (의식 표면자료에서 전의식의 중간자료를 거쳐 무의식의 심층 자료들에로 추적해 나아가기 때문에) 독자의 마음에 마치 점점더 흥미로움을 주는 탐정소설을 읽어가는 듯한 느낌과 더불어 '예기치못한 무의식의 발견'에서 오는 감동과 경탄을 준다. 보통사람은 해낼 수 없는 <방어막을 뚫은> 발견에 찬사를 보내고픈 마음이 자연히 공명하듯 든다.

전치와 압축은 논리적 사고과 이데올로기적 습관사고에 길들고, 딱딱한 방어막에 고착된 보통 사람들과 성격장애 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결코 해낼 수가 없다. 그래서 정신분석 글쓰기가 귀한 것이고, 희소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상식의 굴레를 넘어서 뭔가를 본 자유인과 현자의 글쓰기이고, 수십년간 갇혀온 증상적 방어막의 함정을 뚫고 나온 영웅의 글쓰기 이다.

보통의 학생들로 하여금 그 영웅적인 글쓰기를 가능하게 했던 추동력에는, 방어막이 뚫려도 안전할 수 있을거라는 느낌을 주는, 오랜 수업을 통해 무의식이 감지한 <선생에 대한 신뢰, 인정받고픈 욕구,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기존 한계와 대결해 넘어서고 싶은 욕구, 동료들과의 경쟁에서 낙오되고 싶지 않은 욕구....., 우수한 학점..>등의 다양한 욕구가 압축되어 있다.

사소한 자료에서 뜻밖의 비밀(보물)스런 자료를 발견하게 하는 기발하고 자유로운 <지그재그>적 전치 글쓰기,
표면에서 심층을 향해 <방어막을 뚫고 나아가는> 영웅적 지하동굴 탐사작업인 압축 글쓰기...(글이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더 무의식을 두드리는 뜻밖의 깨달음과 더 음미하고픈 여운을 남기는...글쓰기)
이 두 글쓰기가 반영되어야....자신과 독자의 무의식을 공명시키는 정신분석 고유의 글쓰기가 창조됨을 음미하여.

예술작품 분석에 관한 마지막 글쓰기 마무리를 하기 바랍니다.


* 이미 '깨달은 자의 관점'에서 저자-작품-자기 분석을 하지 말고,
깨달음에 도달하는 그 복잡미묘한 과정과 심정....을 '구도자의 관점'에서 서술하기 바래요.

* 그리고 새로 발견된 '무의식의 자료'를 외부에 드러내기 어색하게 느껴지는 경우는.... 다시 압축-전치하고 미적으로 승화해서 표현하기 바래요.
'은폐'의 요소보다 '당당한 승화' 비율이 큰 <미적 표현>일수록, 독자와 자신에게 더 깊은 여운을 준답니다.


꿈-예술선생 

 

출처: http://www.freudphil.com/06community08.php?code=in_asoophilartfreud&mode=vie&page=8&number=205&keyfield=&k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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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상호 수동성은 헤겔의 '이성의 간지' 개념과 정반대다. 이성의 간지에서 나는 타인을 통해 활동한다. 타자가 나 대신 행동하는 동안 나는 수동적으로 뒤에서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있다. 내가 해머로 쇳덩이를 내려치는 대신 기계가 그 일을 한다. 내가 물레방아를 돌리는 대신 물이 그 일을 한다. 내가 다루는 대상과 나 사이에 다른 자연 대상을 끼워 넣음으로써 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유사한 일이 인간관계의 차원에서 발생한다.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그를 다른 사람과 싸우게 함으로써 나는 편안하게 둘이 서로 치고 박고 싸우다 박살나는 걸 지켜볼 수 있다.(이것이 헤겔의 절대 관념이 역사를 관통하여 지배하는 방법이다. 절대 관념은 인간의 열정들끼리 서로 투쟁해서 절대관념을 대신하는 일을 하게 하는 동안 열정들 간의 투쟁 바깥에 남아 있다. 고대 로마가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바뀐 역사적 필연성은 카이사르Julius Caesar의 열정과 야망을 수단으로 실현된다.) 반대로, 상호 수동성의 경우 나는 타자를 통해 수동적이 된다. 나는 내 경험의 수동적 측면(즐김)을 타인에게 양보하는데, 그동안 나는 계속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녹화 비디오가 내 대신 수동적으로 즐기는 동안 나는 저녁에도 계속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나 대신 곡비가 애도를 표하는 동안 나는 죽은 자의 유산을 처리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를 가짜 행위(false activity)란 개념으로 데려다 준다. 사람들은 뭔가를 바꾸기 위해 행동할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 위해 행동할 수도 있다. 거기에 강박신경증자의 전형적인 전략이 있다. 그는 실재적인 것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죽기 살기로 활동한다. 이를테면, 어떤 폭발 직전의 긴장 상태에 있는 집단에서 강박적으로 행해지는 대화는 항상 어색한 침묵 상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이루어진다. 그 침묵 상태가 참석자들에게 잠재된 긴장을 대면하도록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 치료 중 강박신경증자는 분석가에게 끊임없이 사건 사고, 꿈, 자기 인식의 말들을 쏟아낸다. 하지만 그의 끊임없는 발화 행위는 만약 잠시라도 말을 멈춘다면 분석가가 진실로 문제 되는 것을 물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지속되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들은 분석가를 꼼짝 못하게 하려고 말을 한다. 

 

 

  오늘날 진보 정치의 많은 부분에서 직면하는 위험은 수동성에 있는 게 아니라 유사 능동성, 즉 활동과 참여의 몰입에 있다. 국민들은 항상 개입하여 '뭔가를 하고자' 애쓰고, 학계는 끊임없이 의미없는 논쟁에 참여한다. 진정 어려운 것은 한발 물러서서 활동을 그만두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때론 비판적인 참여를 침묵보다 선호한다. 그들은 우리를 대화에 참여시켜 우리의 불길한 수동성이 파괴되었음을 확신시킨다. 실제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게 하기 위해 항상 활동 중에 있는 이런 상호 수동적 상황에 맞선 비판의 첫걸음은 수동성 속으로 물러나는 것, 참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첫걸음은 진실한 활동, 즉 좌표계 전체를 실질적으로 바꿀 그런 행위의 토대를 밝혀준다. 

 

 

- 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D 라캉>





  한때 넘쳐흐르곤 했던 나의 진지함은 이렇게, 지젝(이 말하는 라캉)에 의해 강박신경증임이 밝혀졌다. '뭔가를 하려고 애쓰는' 것이 도리어 상호 수동적으로 이용당한다면, 물러나야 한다?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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