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구조주의(모든 인간 행위는 무의식적인 상징적 메커니즘에 의해 조종된다는 생각에 기반을 둔 이론들)'의 시대에 알튀세는 실천적 휴머니즘에 의해 보충되어야 하는 악명 높은 '이론적 안티 휴머니즘'의 공식을 제시했다. 우리는 실천 속에서 휴머니스트처럼 행동해야 한다. 즉 타인을 자유롭고 존엄한 인간으로 대하며, 자기 세계의 창조자로 대해야 한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우리는 휴머니즘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우리 자신의 곤경을 자생적으로 체험하는 방식이라고, 인간과 역사에 대한 진실한 지식은 개인들을 자립적 주체가 아니라, 독자적인 법칙을 갖는 구조 속의 요소들이라고 항상 생각해야 한다. 알튀세와 반대로 라캉은 우리는 실천적인 안티 휴머니즘을 인정해야 한다고, 니체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고 부른 차원을 넘어서는 윤리, 인간성의 지극히 비인간적인 핵심과 대면하는 윤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인간존재의 잠재된 괴물성, 보통 '아우슈비츠'라는 단어로 포괄되는 현상들 속에서 폭발하는 악마적 차원을 두려움 없이 고려하는 윤리학을 의미한다. 

 

- 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D 라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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