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새로운 곡을 찾아도 늘 듣던 곡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이 노래를 처음 내게 알려준 이는 길상규였다. ‘별 이름 규’를 쓴다.奎 노래를 반복해 들으며 그의 덧니를 기억한다. 나는 몇 년 전 부터 그에게 연락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내 모습을 닮았다.

 

 

#. 2

 

음악을 들을 때 가사를 듣지 않는다.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대중음악은 new kids on the block의 step by step이었다. 그 곡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그녀는 한글 발음으로 가사를 적어줬다. 나는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 노래를 다 부를 수 있었지만, 끝내 가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직도, 음악의 가사를 의미 있게 듣지 않는다. 예외는 아주 드문 편이고 이 곡은 그 예외에 속한다.

 

가사의 한 결 한 결을 되새긴다. 아름답다. 아름다운 곡이다.

 

선율같은, 내 몸의 곡선처럼.

 

 

#. 3

 

열일곱 살 때였다. 부스스 눈을 떴을 때 거울에 얼비치는 허리가 보였다. 햇볕이 뽀얗게 내려앉는 아침이었고, 몸이 눈부시게 빛났다. 내 몸을 감상하느라 학교에 늦었다. 개 패듯 얻어맞았지만 아름다움을 감상한 대가에 비하면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단단하고 부드러운 내 몸을 사랑한다.

 

혐오한다.

 

사랑한다.

 

 

#. 4

 

그는 내가 글을 되새기며 고쳐쓰고 고쳐쓰는 줄 알지만, 사실 별로 그렇지도 않다. 지금 나는 한 곡당 한 문단이 넘는 분량의 글을 쓰는 중이다. 타자 소리가 박자와 맞물렸다 떨어졌다 다시 맞물린다. 무의식적으로 박자에 타자를 맞추고 있는 것 같다. 화면 가득히 생산되는 검은 글자, 하얀 바탕을 미끌어지는 글씨들. 껍질 바깥의 나는 오히려 생각하지 않으려 정신없이 의미를 생산하는 것 같다.

 

 

#. 5

 

의미는 내 머릿속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치지 않는 의미는 불면이 된다. 불면은 불안이 되고 불안은 우울이 된다. 멜랑콜리. 디프레션과 인섬니아. 내 신체의 현상을 수식하는 닥터들의 수사학는 지나치게 낭만적인 구석이 있다. 보이지 않는 방 저편을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밤 새 노려봐야 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둠이다. 그믐날 한 발 재겨 딛을 곳 찾을 수 없는 어둠이다. 사랑할 수 없는 나의 이면을 그녀는 하이드라고 불렀다.

 

떠나갔다.

 

 

#. 6

 

잡지 않을 생각이다. 햇볕은 뜨거웠고, 동료들은 기진맥진해 모두 널브러져 있었다. 수도꼭지가 있었지만 주변은 모두 축사라 그 물을 먹으면 끔찍한 꼴을 당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루 내내 보급은 오지 않았다. 참지 못한 한 녀석이 수도꼭지를 돌렸을 때 나는 내 수통을 던져 줬다. 먹어. 아직 반이나 남은 수통이었고,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분이었다.

 

굶주렸을 때 탐하지 않았고, 재우기 위해 졸지 않았다.

 

나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  

 

한 때는 그걸 영성이라고 믿었지만, 실상은 단순했다. 자기애의 결핍.

 

 

#. 7

 

걷는 사람들을 본다. 발자국엔 성격이 묻어난다. 나는 걷는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의 성격을 맞춘다. 대범함과 소심함, 여유와 조급함, 사려 깊음과 배려 없음, 삶을 대하는 태도가 걸음걸이에 나타난다. 수천가지의 삶이 수천가지의 가닥으로. 아침과 저녁마다 잠실에서 내 주변을 스쳐가는 사람들의 풍경을 관찰한다.

 

내 걸음을 관찰해본 일이 없다. 문득 내 걸음이 궁금하다.

 

 

#. 8

 

추억을 가공하지 않을 작정이다. 다가올 것을 바라볼 생각이다. 내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 불행할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담담히, 관조하면서 주어진 삶을 살아낼 작정이다. 

 

나는 젊고, 아름답고, 조금 이상한 성격이지만

 

영화를 보고, 돈을 벌고,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그랬듯 그렇게 살 생각이다.

 

아홉시를 불안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기를, 약을 먹지 않아도 달콤하게 잘 수 있게 되기를. 미친 듯이 샌드백을 두드리지 않아도 분노하지 않게 되기를. 사람들이 예쁘다고 말 한 상냥한 미소를 내 스스로에게도 지을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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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10-14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은 젊고, 아름답고, 조금 이상한 성격이지만,
잘 지내도록 합시다..

아퍼 ㅠㅠ

뷰리풀말미잘 2014-10-15 18:50   좋아요 0 | URL
: )

Forgettable. 2014-10-15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늙지 말아요. Young and beautiful 해요 우리 모두!

저 12시간 후 출국. 행복하세요. 내년 여름에 스페인와요.

뷰리풀말미잘 2014-10-15 18:50   좋아요 0 | URL
조심히 다녀와요..

선물 사 와요..

무해한모리군 2014-10-15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억을 가공하지 않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늙고 여전히 성격이 이상해도 아름다울 당신,

고운 꿈 꿔요 ♡♡♡

뷰리풀말미잘 2014-10-15 18:52   좋아요 0 | URL
저는 늙지 않습니다.

비록 성격은 이상하지만. ㅠ_ㅠ

좋은 꿈 꾸세요.

곽진언으로 하나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