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관광지도 아니다. 외진 곳이라 얼씬거리는 사람도 없다. 종종 부둣가에서 애먼 낚시줄을 던지는 노인들만 있었다. 바구니에는 대개 풀 죽은 잔챙이만 두어 마리씩 들어있었다. 하늘도, 바다도 탁했고, 이따금 그 사이를 작은 배들이 물결로 무늬를 그리며 오갔다. 돌아보자 광장은 바다처럼 넓어서 더 을씨년스러웠다. 나는 하늘과, 바다와, 텅 빈 광장의 틈에 풍경처럼 앉아있었다.

 

1995년 이전 고베항은 아시아 최대 규모의 항구였다. 개항 이후 기름진 번영만 가득하던 이 곳을 괴멸적인 재해가 덥쳤다. 1995년 1월 17일 새벽 5시 46분. 리히터 규모 진도 7.2의 대지진이었다. 고베시에서만 4,484명의 사망자와 14,67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한신/아와지 지역 전체 사망자는 6,434명, 부상자는 43,792명에 달했다. 내전 수준의 피해였다.

 

보고체계는 원활히 작동하지 못했고, 부패한 일본의 관료들은 아침에 되어서야 뉴스로 사태를 접했다. 해외 봉사자들이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로와 땅 위로 누운 고가도로들을 헤치며 시민들을 구해내고 있었다. 세상은 아수라장이었고, 그 속에서 6,434명의 시민들은 영영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 2

 

내 옆에 한 청년이 앉았다. 세련된 셔츠를 입고, 멋드러진 수염을 길렀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를 찍지 못했다. 바다에 누구를 묻은 걸까. 울고 있었다.

 

도덕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天地不仁 (천지불인) 천지는 어질지 않다.
以萬物爲蒭狗 (이만물위추구)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천지는 어질지 않다. 신은 선하지 않다. 자연은 인간의 편이 아니다.

 

야훼는 모세의 손을 빌려 수 없이 많은 이집트 백성을 도륙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의 신민을 광야로 내 몰았고, 다윗은 숱한 블레셋 사람들을 쳐 죽였다. 이집트의 백성도, 가나안의 신민도, 블레셋 사람들도 모두 신의 피조물이었지만 그들은 다만 선택받지 못했다. 지금도 기니,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과 나이지리아인들은 에볼라 바이러스로 온 몸에서 피를 쏟으며 죽어가고 있다. 신, 이 씨발새끼야.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294명의 아이들이 도대체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라고 말해봐야 돌아오는 건 메아리 뿐.

 

노인의 딸은 열 아홉에 폐병으로 죽었다. 노인은 사기를 당해 무일푼이나 마찬가지여서 딸을 병원에 보내지 못했다. 대신 기도원에 들어가 11일간 미음 한 숟갈 입에 올리지 않고 밤낮 기도를 드렸다. 손가락이 말라 뼈와 혈관이 앙상하게 드러났는데도 아이는 살아나지 않았다. 그 좌절과 절망은 리히터 규모로도 표현할 수 없으리라. 40년의 시간이 흘렀고, 노인은 여전히 새벽마다 기도를 드린다.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나와, 내 옆에 앉는 청년의 자리를 눈으로 더듬었다.

 

우리의 자리는 바다나 하늘에 마련된 것도 아니었고, 광장에 마련된 것도 아니었다. 광장에서 툭 튀어나와서 바다나 하늘을 푹 찌르는 애매한 위치였다. 안개가 덮으면 하늘 같고, 파도가 치면 바다 같고, 너그럽게 보면 광장에 붙어있는 것도 같은 모호한 지점이었다.

 

그게 ‘자리’라고 이름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어쨌거나 우리가 엉덩이를 비비고 앉았기 때문이다. 하늘과, 바다와, 광장의 침묵에 기대서 말이다. 나는 잠시 노자의 통찰과, 나의 분노와, 노인의 평화에 대해서 생각했다. 모호한 우리의 자리처럼 어쩌면 그것들의 교점도 실상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흘낏 본 청년의 어깨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 3

 

그 때, 툭, 툭 하고 빗방울이 머리칼에 떨어졌다. 바다에 작은 파문들이 피었다. 30일 저녁, 고베에는 비가 왔고, 그 바람에 물결이 일어 파도가 부두를 때렸다. 그는 끝내 다 흘리지 못한 눈물을 비벼 닦고 자리를 털어야 했다.

 

서럽다 청년아.

 

천지는 불인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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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10-05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영화 [노아]를 봤는데 이런 글이라니..

말미잘님의 30일은 그랬군요. 나의 9월30일도 특별했는데. 나는 미잘님과 전혀 다른 이유로요.

어쨌든 고베에 잘 다녀오셨나 봅니다. 주말 끝무렵이네요. 잘 보내요!

뷰리풀말미잘 2014-10-05 21:14   좋아요 0 | URL
간사이 지방에 갔었어요. 고베는 잠깐 들렸고요.

노아를 보셨군요. 성경을 재미있게 재해석한 영화죠. 러셀 크로우의 명연기가 기억에 남네요. 방주 위에서 아이를 노려보는 장면은 마치 `샤이닝`의 잭 니콜슨 같지 않습디까? ㅎㅎ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아무개 2014-10-06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 이 씨발새끼야!에 공감 백만개 드리고 갑니다.^^

뷰리풀말미잘 2014-10-06 09:26   좋아요 0 | URL
:) 읽을만한 책은 찾으셨나요? 좋은 아침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14-10-06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미잘님의 사진은 늘좋아요.

목아지에 울음이 턱하고 걸린 것 같은 요즘이네요.

뷰리풀말미잘 2014-10-06 10:12   좋아요 0 | URL
ㅠㅠㅠㅠㅠㅠㅠㅠ 휘모리님 ㅠㅠㅠㅠ 토닥토닥.

세뇨리따 2014-10-06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 존재를 믿지도 부정하지도 않지만 신이 진정 존재하고, 인간이 경외하는 만큼 초월적인 존재라면 그에게 사람은, 인간은 과히 특별한 인식일까? 하는 생각을 종종해요. 저는 젊어서는 종교보단 패기에 의지해 살기로 했으므로, 뭇 종교인들에겐 이다지도 불경스러운 발언이 없겠지만,-물론 ˝씨발 신˝ 에게 비할바는 아니지요 ㅎ..ㅎㅎ..- 흔히 하는 표현중에 사람이 개미보듯 신이 사람 보는것이 특별히 다를까? 개미가 그들만의 세상에 문명을 세우고, 문화를 만들고, 또 스스로 자멸하려는 발악을 해도, 흥미는 있으되 그것이 심각한 인지가 되지는 않는것 처럼.. 인간도 강아지풀, 심지어 강아지풀도 강아지 풀인데요!

생명도 자연, 죽음도 자연, 인간은 종종 자연을 거스른다 말하지만, 사실 그 모든것도 자연의 순환의 일부일지도 모르죠. 문명도 문화도 전쟁도 핵이나 생물학병기의 존재도 자연의 입장에선 예정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면.. 애초에 `거스를 수 있다` 는 생각 자체가 너무 오만한 생각일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어쩌면 단 한번도 자연에 거슬러 본적도 없고, 그럴 자격도 힘도 없던것이라면..
인간에게 지구의 자연이란 전부지만, 우주의 입장에선 아주 작은 자연의 일부이고 어디에서나 흔히 일어나는 현상의 일부라면.. 생각을 늘어놓다보니 어느새 생각이 말그대로 안드로메다까지 왔는데 결론은
나도 인간인 이상 살고죽는 일에 그저 초월자처럼, 방관자처럼 살수는 없는 일이고, 인륜에 관한한 자연이 아니라 확실히 인류의 소관이라, 신이야 관심이 있든지 없든지 제껴두고, 우리는 우리가 해야할 일을 해야겠죠. 그저 울고 웃는 부질없는 감정의 발악이라도, 그게 할수 있는 전부라면 어쩔수 있나요. 씐나게 웃고 세상이 꺼져라 우는수밖에,,

저도 한 일,이십년 지나서 마냥 패기에 가누기 힘들거든 종교는 하나 가져보려구요. 남들 다 기대는 종교에 제한몸 가눌 자리 없을라고요 :)
그나저나, 여행을 다녀도 꼭 음침하고 외진곳, 특별할것 없는 문화의 일상을 찾아다닌다는
비효율적인 발상은 저랑 똑같네요. 저는 고상하게 말해서 이정도지 제 지인의 일침으로는
˝멍청해!˝,˝변태같아!˝ 였죠.

휴.. 제 대신 변호해주세요, 적어도 저보다 두배는 멍청한 변태같은 말미잘님이..

뷰리풀말미잘 2014-10-06 15:10   좋아요 0 | URL
놀랍게도 저는 신을 믿습니다. 그것도 기독교의 신을 말입니다. 세뇌교육이라는 게 참 무서운 것이죠. 물론 교회를 나가지 않은 건 오래 된 일이지만 그 종교에 대한 이해도는 뭐 제법 되는 것 같습니다. 별 일이 다 있죠. 이미 종교를 가진 입장에서는 종교를 그다지 추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뇨리따님은 종교를 가지게 되겠죠.

자연이라는 말 자체를 이해하면 진짜 자연이 뭔지 자연히 알게 되지요. 自스스로 자에 然그럴 연. 스스로 그러한 것이 자연입니다. 초록의 숲이 자연이 아니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자연이 아니죠. 이런 관점에 따르면 님이 생각하시는 많은 부분들을 자연의 범주에 자연스럽게 포함시키실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변태라는 점을 간파하셨네요. 오사카 신장서점(서점이.. 꼭 다 비슷하게 생긴 건 아닙니다. 극한에 다다른 오타쿠들의 막장이라고나 할까요..)의 마지막 층을 찍고 돌아왔습니다. 변호는 무슨. 변태는 어쩔 수 없어요. 그게 자연인 것을요. 벗어나려고 하지 마세요. 포기하세요. 이성의 끈을 놓아버려요. 포기하면 편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한다는 말이 와 닿습니다.

세뇨리따 2014-10-07 14:44   좋아요 0 | URL
결코 놀랄일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미잘께서 종교인 이라는 것은 확실히 의외예요. 그 기독교적 지식도 사실은 흥미본위에 오지랖 넓은 관심폭에 기인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세뇌까지 인가요! 종교가 무서운 것은 언제나 신에 미친 사람들 때문이지, 신을 섬기는 사람들 때문은 아니예요. 오히려 그 종교적 신념에 기인한 도덕관념은 아주 존경스러운 사람도 많죠. 이를테면 현 교황처럼, 종교적 관점을 떠나서 분명히 위대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예요.

누군가 은근한 비아냥으로, 그러나 경외를 꽉꽉 담아 말했죠.
성경은 가장 위대한 소설이라고.
인간의 솜씨를 벗어난 문학적 가치가 분명 있어요.
오죽 잘 썼으면 오히려 픽션이라는걸 증명하고 설득할 노력을 해야 할 판이죠.
만약 성경이 거짓이라고 전제한다면, 성경은 존재만으로 문학의 가치와 위대함의 증명이겠죠. 글로 완벽한 세상 하나를 창조해 낸 것이니까요.

저는 있는 현상이 아니면 믿으려 하지 않았고, 과학만이 진실이라 믿고 있지만,
근래 들어서는 오히려 그 믿음때문에 종교나 귀신같은 것 들에 대해 긍정의 가능성을 갖게 되더군요. 아는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현주소에서, 인류의 얕은 지식으로는 어떤것도 부정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 십년 백년 후에는 신이나 귀신도, 우주도 지금 우리가 아는것 처럼 과학적 설명이 가능해질날도 있지 않을까 하는.. 지금으로선 아이러닉 이지만요.


간파까지 할 필요도 없었어요, 덕후 미잘님.
이래도 저래도 변태여야 한다면,
저는 아름다운 미잘님보다 멋있는 변태가 되겠어요.

뷰리풀말미잘 2014-10-08 23:15   좋아요 0 | URL
성경은 정말 대단한 책입니다. 역사, 논설, 소설, 시, 수필, 판타지 온갖 장르의 심히 창대한 쾌감을 동시다발적으로다가 느낄 수 있으니깐요. 저도 과학도, 종교도, 귀신도 다 좋아합니다. 그 친구들이 사이들이 좋은 편은 아닌데 제가 골이 비어서 그런지 머릿속에 자리가 많이 남아요. 다 들어와서 한판 벌여도 여유가 있는 편입니다.

맨날 댓글만 남기고 사라지고. 서재 좀 열어주세요.

세뇨리따 2014-10-09 02:01   좋아요 0 | URL
제 서재는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특히 아름다운 분들께는 더욱 활짝요. 다만 아무것도 없다 뿐이죱 :)

그러고보니 말한적 없던가요? 저는 인터넷으로 책 잘 안사요. 사람 손떼 탄 중고는 좋아하는데, 직접 그 질감을 느껴보고 한두페이지 직접 손으로 넘기고 난 후에야 사죠. 제가 알라딘에 가입한 이유는 전적으로 말미잘님 서재에 글남기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 서재에 처음들른날, 이 서재를 통해서 회원가입했었죠. 쑥스러워 하셔도 좋아요,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