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이사를 간다. 언제였던가, 이사를 할 때마다 단상을 적어보자는 생각을 했었다. 기획이 실패한 이유는 내가 게으른 탓이 절반, 이사가 너무 잦았던 탓이 절반쯤 되리라. 평생, 최소 14번의 이사를 했고. 2009년 이하로 적게 잡아도 6번 이상의 이사를 했다. 문장이 최소’, ‘적게 잡아도따위의 불분명한 수사를 포함한 이유는 이사로 쳐야 할 지 말아야 할지 모를 자잘한 것들을 과감하게 제외했기 때문이다.

 

죽기 전, 연말 영화시상식처럼 이사와 관련한 어워드를 개최한다면, 이번의 이사는 갑작스러운 이사상과, 가장 긴 거리의 이사상에 동시에 노미네이트 될 가능성이 크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사의 주체에게 이사란 환경의 총체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나는 이제 영원히 모가 만든 타일랜드식 커리를 맛 볼 수 없게 되었고 새뮤얼이 가끔 내 주는 블론드 퓨어 맥주를 마실 수 없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세바스찬의 퀘퀘한 체취와, 종종 부엌에 무리로 출현하는 개미떼들과의 굿 바이를 의미하기도 한다. 무슨 일이든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번 이사의 가장 큰 장점은 나의 존재가 자연 생태계의 일부에서 문명사회로 회귀한다는 것에 있다. 아직 자연의 숨결이 머무는 이곳은 무서울정도로 생물 다양성을 갖춘 지역, 언급했던 개미 정도는 사실 변변한 위협 축에도 끼지 못한다, 집 안에 상주하고 있는 도마뱀들은 수해를 입었을 때 한끼 비상식량쯤으로 생각한다면 그닥 귀찮을 것도 없다. 파리나 나방은 내 비상식량이 될 도마뱀의 비상식량이기에 공생의 여지가 있다. 문제는 그 다음 레벨부터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어린애 주먹만한 호주 바퀴벌레가 나와 살을 부비고 있다면? 살이 통통하게 오른 타란튤라가 무시로 욕실에 출몰한다면? 바야흐로, 생물 다양성은 삶의 질과 직결되는 문제가 되어 버린다.

 

타란튤라는 이 동네 먹이사슬 피라미드에서 상위 포지션을 점유한 절지동물로 종종 참새마저 포식하는 극강의 포스를 자랑한다. 무성한 털 하나하나마다 독성을 내재한 타란튤라가 벽을 타고 기어 내려오다 점프를 해 바닥에 착지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혹시 이들이 인간보다 근사한 진화의 루트를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결국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가 김늘보에게 의뢰하여 타란튤라 접근방지 부적까지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타란튤라는 상위 포식자인 거대 박쥐떼들에 비하면 다리 여덟개 달린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거대 박쥐떼들을 포썸과 비교한다면 그들은 사랑스러운 밤의 천사들일 뿐이다. 그 무시무시한 포썸도 블랙맘바 살모사 앞에서는 귀여운 햄스터고, 포유류들에게 공포와 전율의 상징인 블랙맘바 살모사는 레드백 스파이더 옆에서 나긋나긋한 실지렁이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레드백 스파이더마저도 불과 몇 킬로미터 앞 해변가에 서식하는 백상어에게는 등에 빨간 점 있는 애교만점 귀요미로 전락한다는 사실. 물론 백상어조차 거대 바다악어를 만나면 지느러미를 꿇고 목숨을 애걸한다는 소문이 있으나, 먼 바다의 일이라 실제로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내 생태학적 지위는 이 집의 인간들 중 가장 높은 위치다. 그러나 이종간에서는 포썸과 블랙맘바 살모사 사이의 어디쯤이다. 나는 포썸을 만나면 불같이 화를 내며 그들의 무례함을 꾸짖지만, 블랙맘바 살모사를 만나면 공손히 예를 갖추는 실리외교로써 생태계의 평형을 도모하며 인간족을 이끌어 왔다.

 

그러고 보면 사람을 뜻하는 한자 인은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형상이다. 인간의 간''도 사이, 즉 관계를 의미하는 글자 아닌가. 그래서 우리의 삶은 늘 그런 식이었던 것이다. 이사가 끝나고 도착하는 그 곳에서, 나는 또 어떤 관계 사이의 무엇이 되리라.

 

짐을 다 쌌다. 공항까지 짐을 옮겨 주기로 한 친구를 기다린다.

 

늘 그렇듯 정리는 간단하다.

 

 

#. 2

 

잠시, 사진기를 챙겨 노르만 파크에 갔다. 꾸며진 무엇 없이 그저 빈 땅과, 제멋대로 펼쳐진 잔디로 휑뎅그렁한 곳. 나는 이곳을 좋아했다.

 

 

 

 

이 고장의 하늘은 으레 무언가를 퍼 붓곤 하는데 오늘은 비 그친 하늘 햇살이다. 텅 빈 땅에 단지 햇살을 받고 있으면 내장까지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이것이 신대철 선생이 말한 천, , 인의 조화인가. 선생은 어느 수필에서 발 댈 곳 줄어가는 공지空地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 수필을 읽은 후 가끔 발길 미치는 곳에서 공지를 발견하면 반가운 생각이 들곤 했는데 노르만 파크에 이르러서는 선생을 한번 모셔오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다.

 

특유의 공손한 목소리로, 공지가 뒤지게 많네요. 라고 하실 것 같다. (존경받는 시인이자 천상병 시인의 친우였던 그는 '선생님, 천상병 시인은 왜 바보가 됐어요?' 라는 나의 질문에 '뒤지게 맞아서 그렇죠?' 라고 언급한 전례가 있다.)

 

내 외롭고 고단한 날들을 함께 해준 이 땅에 무릎을 꿇고, 키스를.

 

안녕,

 

나는 이사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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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13-02-10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알라딘님들아 자체적인 사진 편집기능좀 지원해주라. 이게 최선일까?

Mephistopheles 2013-02-11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난 베어그릴스가 한국어로 뭘 썼나 했다는..

뷰리풀말미잘 2013-02-12 10:12   좋아요 0 | URL
정말 제가 베어 그릴스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시는군요?

Mephistopheles 2013-02-12 12:51   좋아요 0 | URL
설마 애 셋 딸린 유부라는 사실을 고백하시는 거라면...

뷰리풀말미잘 2013-02-12 21:48   좋아요 0 | URL
아니, 애 셋 딸린 유부녀가 뭐 어때서. 애 좀 딸릴 수도 있지. 하지만 저는 미혼이라능.. 결혼을 혐오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요즘은 확실히 하나보단 둘이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하핫..

메피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이런건 비밀댓글로 ㅋㅋㅋ)

Mephistopheles 2013-02-13 09:07   좋아요 0 | URL
휴....쩝 먼 산(")

뷰리풀말미잘 2013-02-13 11:21   좋아요 0 | URL
ㅋㅋㅋ

Forgettable. 2013-02-11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동네 가요?

뷰리풀말미잘 2013-02-12 10:12   좋아요 0 | URL
시드니요

LAYLA 2013-02-11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대 박쥐떼들을 포썸과 비교한다면 그들은 사랑스러운 밤의 천사들일 뿐이다.
------- 뽱 터지구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말 자연속에서 살고 계시군요
저번에 올린 사진 보고 말미잘님 집이 너무 이뻐서 놀랐습니다
새 집 사진도 올려주세요~~~~

뷰리풀말미잘 2013-02-12 10:16   좋아요 0 | URL
ㅋㅋ 지금은 임시 거처에서 지내고 있고요 쭉 살 곳이 정해지면 그때 찍어올리지요. 매번 새 환경에 적응해야는게 늘 적응이 되지 않네요. (..무슨 말이지..)

Arch 2013-02-12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괜찮네요.

이러고 시크하게 서재를 나가려고 했는데 ^^

저도 지난번에 살던 동네가 참 좋았어요. 점 하나가 있다면 그 주위로만 세번 이사를 했는데 다닐 때마다 원룸을 참 그지같이 지어놓는다거나 곰팡이 없는 집에서 사는게 소원이란 식으로 바람이 달라져요. 그 전 집에선 주거환경 개선 요건이 까마득하게 많았어요. 이사를 하면서 불편한 것들이 라졌는데도 그 집과 그 골목, 집으로 오르는 계단과 햇살이 가끔 생각나요.

Arch 2013-02-12 15:57   좋아요 0 | URL
어머, 이미 추천도 했네요.

뷰리풀말미잘 2013-02-12 21:43   좋아요 0 | URL
저는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주 1회 20분의 청소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2주 1회 청소하던 시절보다 삶의 질이 한결 나아졌어요. 또 하나 삶의 질을 높이는 좋은 방법은 쓸데 없는 걸 집안에 두지 않는 것이죠. 사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정말로 필요한 건 그렇게 많지가 않은거 같애요. ㅎㅎ

우리는 끊임없이 이별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새로 만드는 시대에 사는 것 같아요. 아치님은 돌아갈 고향이 있으신가요. 그런게 있는 사람들은 이사를 그렇게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추천을 아주 빠른 속도로 누르면 두번도 됩니다. 예전에 하날리님이 가르쳐 주셨는데. 앞으로 제 글에 추천을 누르실땐 빠른 속도로 두번을 눌러주시길 바래요.

아치 2013-02-13 09:3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손이 떨리니 그 방법은 무리일 것 같아요. 로그아웃하고 추천을 누르도록 하죠.
미잘,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어? 로그아웃하고 했는데 이미 추천했다고 나오네요. 미잘 서재에는 두번 추천을 할 수가 없네요

뷰리풀말미잘 2013-02-13 11:17   좋아요 0 | URL
쳇..

2013-02-13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님 대신 제가 추천 하나 눌렀습니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이사를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는 것, 왠지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만 알아채는 사실 같네요. 전 돌아갈 곳에 돌아와 있는데, 그 다음은 뭘까요?^^

뷰리풀말미잘 2013-02-13 18:43   좋아요 0 | URL
중동의 대사상가 이븐 칼둔의 무깟디마라는 저작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도시에 정착하여 농경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도시인과 사막에서 유목하는 베두인을 언급하지요. 베두인은 척박한 사막에서 터득한 강인한 근성과 지혜로 나태한 도시인들을 공격해 결국은 도시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한편, 도시의 편안함에 길들여진 도시민들은 나태하고 미련해 베두인들에게 도시를 빼앗기고 축출되게 되어있답니다. 하지만 결국 도시를 차지한 베두인들은 결국 용맹과 지혜를 버리고 나태한 도시민이 된다고 하지요.

지금 대한민국에서 사는 사람 치고 나태해질 여유가 있는 사람은 드물겠고, 혹시 베두인들을 동경하게 되지 않을까요?

2013-02-14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빙고!! 저는 야생의 삶을 동경해요.

<파이 이야기> (영화) 보면서 주제와는 별도로, 파이가 배 위에서 생존의 사투를 벌이며 문명에 길든 나약함을 벗는, 뙤약볕과 소금물이라는 자연 속에서 살아남는 '야생성 회복'을 눈여겨 보게 되더군요. 김영갑 씨의 제주도 분투기를 읽으면서도 그렇고.

다 버리고 자연으로 갈 수 있을까. 거기서 나의 사투를 벌이고 다른 육체, 다른 정신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곤 합니다.ㅋ

뷰리풀말미잘 2013-02-14 22:51   좋아요 0 | URL
현실적으로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정글의 법칙 시청률이 그렇게 높은 것이겠지요. 리얼이네 아니네 논란도 일어나구요. 리얼이 아니어도 거실에서 과일 까먹으면서 티비 시청하는데 하등의 지장은 없으나, 대리만족의 크기는 병만이를 고생고생 시켜야 충분해지기 때문이겠죠.

변변한 험지도 없는 대한민국에서 4륜구동 SUV가 잘 팔리는 이유도, 아파트 값은 폭락해도 가평이나 양평 전원주택지 가격은 거꾸러지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제가 가끔 예리한 나이프를 책상 서랍에서 꺼내서 손톱을 다듬는 이유도 그렇겠구요.

얽매어 살고 싶지 않아서, 얽매어 살기를 그만뒀는데 지금은 또 얽매어 살던 삶이 그립기도 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