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전쟁이었다.
나는 군인이었다.
내가 속한 부대의 명칭과 편제는 잘 모르겠다. 나는 소대라기에는 좀 작았고 분대라기에는 많은 규모의 팀에 소속되어 있었다. 우리 임무는 이동중인 요인을 사살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주 전장에서 조금 떨어진 그 곳은 올림픽공원처럼 아주 커다란 공원이었다. 우리는 뭔가 시간에 쫒기고 있었고, 그래서 서툴렀다. 그래서 아직 요인과 경호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여유있게 매복하지 못했다.
풀 숲에 숨은 내 앞으로 지나가는 건 소대 규모의 호위부대와 모녀로 보이는 두 여인. 나는 소총을 가만히 들고 발사준비를 했다. 그런데 내가 겨누고 있는 소총 가늠자 끝에 보이는 건, 예전 내 동료였던 Y. 말수 적고, 운동 잘 하고, 사람까지 좋은 그 Y였다. 나는 놀라서 조금 부스럭 거렸고 Y는 예리하게 소리를 간파했다. 자세를 낮추고 주위를 경계하는 그. 그리고 지척의 거리에서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얼어붙은 우리. 그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우리 쪽의 누군가가 성급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빵- 하는 총 소리.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한 적의 강력한 역습.
순식간에 우리 팀은 전멸했다. 살아남아 도망치는 건 나와 어떤 여성 동료. 우리는 정신없이 달렸고 추격자들은 인정사정없이 연사 모드로 소총을 갈겨댔다. 그녀가 표적이 된 이유는 아마 나보다 조금 느렸기 때문이었을거다. 어느 순간 돌아본 내 시야에 그녀는 없었고 개떼처럼 뒤를 쫒는 추격자들만 있었다. 그녀는 죽었을까? 아니면 부상당한 채로 포로가 되었을까.
이상한 건 나는 그 상황이 별로 슬프지는 않았다는 거. 그래서 그 싫어하는 총을 별 죄책감 없이 계속 쏴 댈 수 있었다는 거다. 어쨌거나 숨가쁘게 도망가던 나는 마침 포탄의 자국인듯 푹 패인 구덩이를 발겼했고 당연히 뛰어들었다. 피맛에 미친 추격자들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들은 말도 안 되는 실수를 두 가지나 하고 있었으니까 1. 엄호 없이 맨 몸으로 개활지를 지나고 있었고. 2. 단 한명인 내가 매복할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참호가 되어버린 웅덩이 벽면에 몸을 기대 흔들림을 없게 하고 점사 모드로 조준했다. 탄은 충분했다. 그리고 인형 사격장에서처럼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총 소리가 날 때마다 추격자들은 인형처럼 하나씩 쓰러지더니 곧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패배도, 승리도 하지 못한 나는 총을 어깨에 걸고 터덜터덜 전장을 빠져나왔다. 정말 이상하게 커다란 늑대 한 마리가 사람은 아랑곳 없이 시체 주변만 킁킁거리고 있었다.
#. 2
나는 오래 걸었다. 그리고 뜬금없이 지하로 내려가는 철 계단을 발견했다. 시야가 미치는 사방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도대체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미지의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기로 했다. 그건 이제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벙커였다. 벙커는 지하 4층으로 되어있었는데 각 층마다 20명은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찍했다. 어느 층은 통째로 문이 잠겨져 있었다. 나는 맨 아랫층을 사용하기로 했는데 거기엔 넓찍한 침대도 있었고, 냉장고도 있었다. 나는 좀 머무르기로 했다.
며칠이 지난 것 같다.
나는 걸을 때 마다 쿵쿵 소리가 나는 철 계단을 올라 가서 주변을 탐색했다. 군인 몇 명이 벙커의 바로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아직 때가 아니다. 나는 거북이처럼 고개를 집어넣고 발 소리 안 나게 다시 지하로 내려간다. 그때 쿵- 하고 소리가 들렸다. 침입자다. 나는 총을 겨누고 어두운 곳에 숨었다. 놀랍게도 내 앞으로 지나간 건 얼굴 모르는 젊은 여자였다. 나는 여자의 뒷통수에 총을 겨눴다. 걸어.
겁에 질린 여자는 짐짓 그렇지 않은 척 하면서 내게 뭔가를 협상하려고 했다. 그녀가 열어 보인 것은 짧은 치마였고 요구 조건은 자신을 풀어 줄 것이었다.
정말 비겁한 대목이지만 나는 정말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가 그녀의 협상을 받아드리려고 했는지 아닌지. 하지만 최소한 나는 그녀를 풀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것 자체가 엄청난 리스크가 될 수 있으니까. 나는 그녀를 총으로 위협해서 맨 아랫층으로 끌고 왔고 침대에 묶었다. 도대체 나는 어쩔 생각이었을까. 나는 그녀의 처분을 고민했던 것 같다.
그때 벙커에는 또 다른 침입자가 발생했다. 발소리. 나는 다시 총을 들고 층계 옆 계단에 몸을 은닉했고,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그 늙은 남자의 가슴을 겨눴다. 그는 건장했는데 군복 바지에 녹색 군용 런닝을 입고 있었다. 빵- 그는 무력하게 허물어졌고 나는 뒤를 따라 내려오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총구를 겨눴다. 그는 검정색 해녀복 비슷한 것으로 온 몸을 감싸고 있는 남자였다. (이제 알겠는데 그건 UDT가 사용하는 잠수복이었다. 꿈에서는 전혀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 잠수복 사내는 반항 없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고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총을 발사했다. 그런데 웬걸. 아무런 충격을 느끼지도 않는 그. 그 남자는 예상했다는 듯 머리위로 들어올린 총을 천천히 내려서 유유히 내게 겨누기 시작한다. 나는 몸을 날려 소파의 뒤로 피했다. 남자의 이상한 옷에는 방탄 효과가 있는게 분명했다. 이후 나의 공격은 여러차례 실패했고 좁은 공간에서 나는 금새 궁지에 몰렸다. 그는 베테랑 사냥꾼 처럼 나를 몰아갔다.
결국 나는 무력한 상태로 그와 대치했다. 죽겠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긴장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그 순간 내 시야에 보인 것은 내게 다가오는 그의 발. 그 발을 감싸고 있는 건 평범한 가죽 군화였다. 2차대전 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옥쇄를 각오한 일본군이 삶아 먹기도 했다는 가죽군화. 나는 총으로 방심한 그의 발등을 쐈다. 그리고 검은 잠수복 뒤에서 비명을 지르는 그의 작살총(웬?)을 가볍게 뺏어 던져버렸다.
그리고 잠수복의 허리를 노린 태클. 그때 잠수복 군인과 넘어져 뒤엉킨 내 시야에는 반라(왜?)의 상태로 도망가는 그 여자가 보였다. 어떻게 결박을 풀었을까. 잠깐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 잠수복 군인은 나를 밀쳐내기 시작했다. 그는 나보다 체구가 컸고 힘도 셌다. 까다로운 상대였다. 나는 그의 팔을 제압하기로 했다. 팔 얽어비틀기. 작은 체구로 무골 그레이시 가문을 제압한 기무라의 절기. 그런데 내가 그렇게 기무라록을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알았던가. 어쨌거나 나는 그의 팔꿈치와 어깨를 작살내고 그것도 모자라서 한 손의 손가락을 몽땅 부러뜨렸다. 그리고 거의 공격할 의지를 잃고 늘어진 쇄골과 턱 사이에 팔을 찔러 넣어 경동맥을 제압했다. 그의 목은 축축하고 뜨뜻했다. 배운대로라면 그가 의식을 잃는데는 7초, 뇌가 기능을 정지하는데는 몇 분 가량의 시간이 걸렸을거다.
얼마 후 나는 아직 온기가 식지도 않은 그의 목에서 팔을 빼냈는데 이제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 아침이었다.
#. 3
자기 전에 내가 읽은 책은 스푸트니크의 연인이었다. 그 자아의 분열과 찾기 어쩌고 하는 맨 뒷 꼭지의 해설이 꿈에서 내 이드와 에고를 분열시키는 암시가 됐던 것 같다. 꿈에서 내가 에고와 분리된채 어둠의 말미잘이 된 건 아마 적 중에서 Y를 발견한 이후였을거다. 그때부터 나는 아무 죄책감 없이 방아쇠를 당겨대고, 꺼리낌없이 동료를 전장에 버려두고, 그 여자를 침대에 묶어 놓기까지 (뭐, 뭘 하려고?) 했다.
분석하기로는 아마 그 벙커는 내 심층 무의식의 단면이었을거다. 실제로 내 심리의 깊숙한 곳에는 깊고, 어둡고, 음침하고, 넓고, 스스로를 아늑하게 유폐하는 그런 공간이 존재할거다. 또 내 안에는 분명 그런 에로스와, 그런 폭력의 충동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벙커에 난입한 두 명의 군인은 악역이 아니라 선역에 가까운 역할이리라. 아마도 그들은 내 에고가 파견한 에이전트. 다행인것은 어둠의 말미잘은 그들을 제압하기가 너무 어려웠고, 거의 죽음의 위기까지 몰리기도 했으니 내 에고의 수준은 무의식의 영역에서도 상당히 강력하다는 반증일거다. 그래, 나는 원래 양심적인 인간이다.
하지만 결국 어둠의 미잘은 그들의 가슴팍에 총알을 박아넣고, 뼈를 해체하고, 숨통을 끊어놨지만. 그래도 희망적인 부분은 내 또 다른 자아인 잠수복 그가 죽어가면서도 결국 그 여자를 무사히 탈출 시키는데 성공했다는거다.
크리스마스 아침이다. 나는 아직 밥도 안 먹고
이러고 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