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쪽같은 아들아!

    아마 사람마다 성격이 다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활발하고 적극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이 있단다.
    물론 어떤 성격이 좋고 나쁘다,
    판단을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남들 앞에
    정확히 표현할 줄은 알아야 한단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감이 필요하단다.

    자신감을 기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

    몇 가지 알려 줄 테니 잘 듣도록 해라.

    첫째, 처음 만나는 사람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먼저 악수를 청하고 ″만나서 반갑습니다.″ 라는 인사말을 건네거라.

    둘째, 평소보다 빨리 걷고 두 주먹을 불끈 쥐어라.

    느린 걸음이나 절도없는 행동은 자신감이 없어 보일 뿐더러 마음을
    게으르게 하여 자신감을 잃게 한단다.
    빠른 걸음으로 긴장감을 유지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마음을 강하게 스스로 만들어라.

    셋째, 준비를 철저히 해라.

    어떤 일에 준비를 잘 한 사람은 마음이 여유로워 자신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준비가 안 된 사람은 마음이 조급하고 불안해져서 일을 망칠 수 있단다.
    이 점을 명심하고 이제부터는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당당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어느 자리이건 주눅들지 말고 자신감을 가져라.

    "아빠가 전하는 사랑의편지 50책"중에서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06-03-08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구경도 잘 했고, 글도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이네요.
 


우리 모두는 딱 한번 살다가 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모습이던지 간에 멋진 삶을 원한다. 물론 사람마다 멋진 삶에 대한 정의가 다를 것이다.


나에게 누군가 묻는다면, 물론 세속적인 의미의 성공도 멋진 삶에 속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머리 속에 무엇을 집어 넣고 있는가, 무엇을 생각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행동하는 가도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자신이란 사람을 구성하는 컨덴츠를 바꾸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글 읽기를 생활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멋진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유한한 인간의 삶이지만 우리들은 글 읽기를 통해서 시공간을 초월해서 다양한 인물들과 사건들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틈만 나면 글을 읽는다.


며칠이라도 강연이나 그 밖의 활동 때문에 글 읽기가 소월해지면 머리가 자꾸 비어가는 느낌을 갖는다. 그런 기분이 들 때면 몇 시간 정도 집중적으로 안락한 의자에 누워서 세상만사를 제쳐주고 글 읽기에 몰입해 들어간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런 글 읽기가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본능인 정복욕도 충족시켜 준다는 점이다. 이 책 저 책을 가리지 않고 광대한 지식의 지평을 달리다 보면 어느 새 머리 속이 꽉 찬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런 충전이 수시로 이루어질 때마다 세상을 맞설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갖게 된다. 글 읽기는 이처럼 집중적인 시간을 만들어서 하지만 대개는 틈틈이 자투리 시간을 내서 행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을 기다릴 때, 잠시 머리를 식힐 때, 머리를 다듬기 위해 기다릴 때, 언제 어디서나 나는 나만의 세계로 용감하게 돌진할 수 있다. 짧은 순간이지만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된다.


글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자유와 여유를 갖는 것 만으로 행복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런데 나는 남의 지식을 얻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어떻게든지 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성과를 내는 일을 맡으면서 내가 확실히 깨우치게 된 사실은 맡겨지면 하겠지만 그런 일들에 아주 신나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구경꾼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직접 행동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오랫동안 알아왔던 지인과 나눈 대화 가운데 이런 대목이 들어 있었다. 무엇인가 만족할 수 없는 대목에 대해 그 분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이 잘 돌아가지요. 외형도 그럭저럭 성장을 하고 조직원들도 열심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직접 생산하지 않고선 그렇게 충만한 행복감을 느낄 수가 없네요.”


그분은 창조하려는 욕망이 강한 사람이다. 이따금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남에게 시켜서 남이 잘 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는 사람이 있지만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낼 때 기쁨을 더 강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 나는 내가 주어진 자리에서 해야 하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의 인물이긴 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그렇게 경영자로서 느끼는 그런 행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더욱 그 분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았다. 나는 내가 직접 만들어야 되는 그런 스타일의 인물이다.


나는 이런 단순한 사실을 몇 번의 전직으로 통해서 깊이 깨우치게 되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읽고, 생각하고, 강연하고, 쓰는 일을 게속해 나갈 작정이다. 다들 내가 다작한다고 아우성인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존재 이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질풍노도와 같은 젊은 날을 통해 내가 얻어낸 가장 큰 수확은 진정으로 내가 글을 읽고, 창조하고 그 결과물을 작품으로 내놓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나에게 그것은 노동이 아니라 환상적인 게임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오늘도 의무감에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향해서 개인을 향해서 외치고 싶은 말들을 작품 속에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읽는 작업도 열심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필이면 그때 고모네 가족이 옆집에 사셨다. 하필이면 그때 고모부께서 실직상태이셨다. 하필이면 그때 나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나이였다. 고모부가 어린 조카에게 한글을 가르치시려고 마음먹게 된 그 이유를 나는 모른다. 내가 얼마만에 한글을 뗐는지도 이젠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아는 건, 그 날부터 내가 책벌레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 서울 달동네에서 벌어진 일이었음을 생각해주시라. 유치원에 다니는 건 아주 부잣집 아이들에게만 허용된 특권이었던 시절이다. 대부분의 달동네 사람들처럼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그날 하루의 양식 걱정을 하고 살아야 했다. 고모부가 아니었다면, 내가 한글을 깨우친 것은 학교에 들어간 다음의 일이었을 것이다. 왜 그렇게 책이 신기하고 좋았을까. 누가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으랴. 그건 그냥 운명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골목길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자치기를 하며 뛰어 놀 때 나는 고종사촌 형과 누나의 책에 달려들었다.

 

책벌레가 된 소년은 몰랐다. 그것이 얼마나 저주받은 인생인지를. 책을 한 권 읽고 나면 뿌듯한 포만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 포만감은 아주 잠시였다. 눈 깜짝할 새에 포만감은 사라지고 지독한 배고픔이 밀려왔다. 아무리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

 

초등학교 내내 소년은 외로웠다. 남자아이들은 쉬는 시간이면 공을 들고 운동장으로 나갔지만, 소년은 학급문고에서 빌린 동화책의 결말을 어서 봐야 했으므로 책상을 떠나지 못했다. 남자아이들은 소년을 놀려댔고, 어느 날부턴가 아예 소년이 없는 것처럼 그들만의 공차기를 꾸려갔다. 여전히 가난했던 소년의 부모님은 소년에게 많은 책을 사 줄 수 없었다. 학급문고에서의 양식 조달이 끝나면 부잣집 친구의 집으로 놀러가야 했다. 친구의 어머니는 “쟤는 남의 책도 저렇게 열심히 보는데 너는 사다 줘도 안 읽냐”고 친구를 야단치셨고, 그날부터 친구는 소년을 집으로 데려가는 걸 피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안다. 그렇게 책벌레의 외로운 인생이 나 혼자만의 운명이 아니었다는 것을. 세상엔 그렇게 저주받은 책벌레의 인생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꽤나 많다는 것을. 분명히 다 읽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더기로 책을 사들이고, 낯선 도시에 가서 헌책방을 만나면 그 퀴퀴한 낡은 책의 냄새와 먼지를 코로 들이마시며 ‘책벌레라서 행복해요!’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는 것을.

 

인생의 모든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책벌레로 인생을 살게 된 건 저주다. 끝없는 배고픔보다 더 지독한 저주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그 끝없는 저주는 동시에 축복이다. 죽는 날까지 새로운 양식으로, 비록 곧 사라질망정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처럼 놀라운 축복이 또 어디 있는가. 끝없는 포만감과 끝없는 배고픔이 꽉 부둥켜안고 추는 왈츠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제는 안다. 그 끝없는 배고픔이 내 정신을 통통하게 살찌웠음을. 내가 파먹은 그 수많은 책들의 구절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탄수화물이며 단백질이며 무기질이었음을. 책을 사느라고 비싼 식당에 갈 수 없었지만, 그 덕분에 내가 비만에 걸리지 않게 되었음을. 책을 읽느라고 그 시간에 더 많은 돈을 벌 수는 없었지만, 돈 많은 자들 앞에서 적어도 스스로 초라해지지 않을 수 있었음을.

 

어쩌다 보니, 세상의 그 많은 책에 또 몇 권을 보태는 인생을 살게 되었다. 아주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몇 천은 족히 넘는 사람들의 서재에 내 책이 꽂혀 있을 것이다. 그건 정말 내 몸을 떨리게 만드는 기쁨이다. 내가 읽은 책들의 저자들이 지금 내 정신 속에서 살아 있듯, 내 책의 독자들의 정신 속에서도 내가 살아 숨쉬고 있음을 나는 안다. 책이 아니라면 그 무엇이 그토록 놀라운 ‘함께 살아감’을 가능케 하겠는가.

 

오, 아름다워라, 책벌레의 인생이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책에도 운명은 있다

‘타임머신’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한 소년이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서, 미래의 여러 세계를 두루 구경하고 다시 현재의 집으로 돌아오는 내용의 영화로 기억된다.

 

그런데 그 영화를 통해 본 미래의 장면 중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어느 집 거실 한쪽 서가에 꽂혀 있던 책들에 대한 장면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간 소년이 서가에 꽂힌 책을 꺼내면 책들은 모두 꺼내는 족족 먼지가 되어 바스라져버린다. 나중에는 서가가 무너지고 책들이 모두 먼지로 화해버린다. 책은 이미 좀이 쓸고 썩어 책의 형태만 유지한 채 그대로 서가에 꽂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폭삭 사그라지는 책의 소멸을 보며 몹시 충격을 받았다. “미래엔 책들이 없어지다니! 미래의 사람들은 책이 없어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니!” 하는 충격에서 잠시 동안 헤어나오지를 못했다. 나는 그것이 처음엔 미래는 책조차 필요없을 만큼 행복한 세계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이해되었다. 미래인들의 행복을 역설적으로 책의 소멸을 통해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실제로 그 영화에 나타난 미래인들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몹시 행복한 모습이었다. 책의 소멸 따위를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나신에 가까운 옷을 입은 채 술을 마시며 서로 껴안고 사랑하고 섹스를 즐기기에 바빴다. 일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먹고 사랑하고 행복하다는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곰곰 생각해보면 그 책의 소멸 장면은 미래의 행복보다는 미래의 불행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책조차 버리고 살게 된 미래인들의 불행한 모습, 정신의 괴로움보다는 물질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미래인들의 삶의 한 단면을 통해 현재인들에게 책의 소중함을 경각시킨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간은 책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으며, 책과 더불어 살아가야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인간에게 책이 없으면 돈이 없는 것과 같다. 돈이 없으면 배가 고파도 밥을 먹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책이 없으면 마음의 배가 고파도 그 배고픔을 달랠 길이 없다. 나는 육체의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지만 마음의 배고픔은 더 더욱 견딜 수가 없다. 무엇이든지 읽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지 못한다.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이 인간인 것처럼 때가 되면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책은 인간이다. 책에도 운명이 있다. 시대는 급속히 과학화되고 정보화되어 책의 운명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제 곧 이 지상에서 종이책이라는 매체의 한 형태가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도 대두되고 있고, 또 전자종이와 전자책의 등장으로 그런 조짐도 보인다. 그러나 과연 책이 사라진 세상, 책이 필요없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 책을 읽는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없는 날이 올 수 있을까.

 

나는 단연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날이 바로 인간의 죽음의 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책의 죽음은 곧 인간의 죽음이다. 만일 그런 날이 온다면 인간은 영혼을 잃게 될 것이다. 책은 인간 영혼의 한 구체적인 모습이다. 인간의 영혼을 찾아볼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책이다. 우리는 책을 통해서 인간의 가장 순수한 영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책은 인간의 영혼의 먹이이자 모유다.

 

가야산에서 열반한 성철스님도 책이라는 모유를 통해서 큰스님이 되었다. 성철스님의 법력이 높고 깊은 것은 일찍부터 책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열 살이 되기 전에 사서삼경 등 모든 경서를 독파했으며, 청소년기엔 서울 총독부 도서관을 찾아가 책읽기에 대한 갈증을 풀었으며, 읽을 책이 다 떨어지자 다시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 중앙도서관과 동경대학 도서관에서 몇 달씩 책에 파묻혔다. 당시 수백마지기의 땅을 팔아 불교 서적만을 사들였던 천석꾼 김병연 씨는 자신이 사 모은 책들을 읽고 이해할 만한 사람을 찾고 있다가 성철스님에게 아낌없이 그 책을 전부 물려주었다. 결국 성철스님이 입산 출가를 결심한 것도 한 권의 책 때문이다. 우연히 노승이 지나다가 그에게 영가대사의 <중도가> 한 권을 주었는데, 그는 그 책을 받아 읽고 심안이 밝아짐을 느껴 ‘시원한 것이 여기 있구나’ 하고 결국 수행자의 길로 들어섰다.

 

책은 한 인간의 일생과 영혼의 모습을 결정짓는다. 우리는 책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름다워질 수 없다. 그래도 인간은 책을 읽을 때가 참으로 아름답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인간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면, 책을 읽는 노인의 모습 또한 아름다운 모습이다. 햇살이 따스한 뜰에 나와 손자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슬그머니 의자에 앉아 돋보기 안경을 끼고 책장을 펼치는 노인의 모습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도 가끔 한 권의 책이라는 인간이 되고 싶다. 이른 아침 창가로 햇살이 스며들 때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한 권의 책. 시집이면 더 좋겠다. 시집이 되어 사랑하는 여인의 책상 위에 놓여 봄햇살을 쬐고 싶다. 나를 넘기는 여인의 손가락과 눈빛의 향기를 마음껏 맡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책 읽는 아이
 
토끼풀 같은 아이야, 장차 무엇이 되고 싶니
선생님이 되고 싶니 발명가가 되고 싶니
시인 혹은 장군이 되고 싶니
너의 고사리 주먹에 쥐어진 한 권의 책이 지금은 무겁겠지만
그 속에 네가 가야 할 길이 있고 하늘이 있다
무거우면 네 연한 무릎 위에 책을 세우고
첫봄 개나리꽃 같은 아이야
별을 읽어라 바다를 읽어라 우주를 읽어라
네 눈빛이 책 속에 있는 동안
들 가운데는 자운영꽃이 피고 파랑새가 더 멀리 날고
고래가 바다를 횡단한다
네 가슴이 책을 꿈꾸는 동안
세계는 발자국 소릴 죽이고 네 숨소리를 듣는다
파도가 가라앉고 폭풍이 잠자고
태백산봉에는 흰 구름이 핀다
자두꽃 같은 아이야, 네 상상 속엔 지금
사슴이 자나느냐 연어가 돌아오느냐
들판 끝에 송아지가 우느냐
언젠가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될
이 세상의 별인
책 읽는 아이야


* 이기철 시집 『가장 따뜻한 책』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