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 윤대녕 산문집
윤대녕 지음 / 푸르메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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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사무실 책꽂이 한 켠에 꽂아두고 읽지 못했던 이유는 남이 그가 태동하였던 삶을 마음이 어지러운 요즘에 읽어도 될까, 하는 그런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책을 손에 쥐었을 때 표지의 매끄러움은 손에서 떼고 싶지 않을 정도인지라 계속 붙잡고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렇게 그 책의 첫 장을 넘겼다. 무심코 넘긴 첫 장인데 뜻밖의 선물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렇게 시야에 들어왔다. ‘2010년 가을, 윤대녕’ 생각지도 못했던 소소하고 담백한 그의 필체다. 그리고 두어 장을 더 넘기니 새삼스럽게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에 대해서. 라며 알지도 못하는 그를 무뚝뚝하다,라고 혼자 치부해버리고 그것을 읽었다. 전체적인 느낌은 '가을'이었다. 쓸쓸하고 적막하고 고요하여 사색에 잠기기에 충분한 계절, 가을. 나는 이 책을 단풍이 곱게 물든 시월의 어느 가을에 품에 안고 읽었다는 그것에 감사하고, 또 다행이라 읊조린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작품으로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이 처음인 것도 무척이나 다행스레 생각하는데, 내가 찾아본 저자의 작품들은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신경숙 작가의 책과 견주어도 무리가 없을 만큼이나 멋스럽지 못한 표지들이 처음부터 나를 그의 문학세계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경계를 긋도록 했을지도 모르고, 샀다손 치더라도 오랜 시간동안 나의 책장 속에서 나오지 못했던 「딸기밭」과 같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라 생각되는 것이 그 까닭이다.

 

 

 

실은 난 책을 읽기 전 표지에 담겨 있던 저자에게 아무런 느낌없이 표지만 매끈하다며 좋아했더랬다. 어찌나 단순하신지. 책을 다 덮고 그 속에 담겨 있는 그를 조용히 불러보았다. 작가님... 순간, 웃음이라기에 억지 웃음을 띠고 있는 듯한 그의 얼굴에서 비감스러움이 감돌았는데, 그 점에서 발끈하는 분들도 더러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그리 생각한 것은, 아버지와 나눈 기억이랄 것도 없는 삶 속에서 아버지와 둘만이 함께 했던 것은 초등학교 때 목욕탕에 간 기억, 그 하나뿐이라서 성인이 된 지금에도 목욕탕에서 싸구려 비누나 스킨, 남들이 쓰던 수건에서 부성애의 결핍을 보충하려 했는지도 몰랐을 그가 가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욕탕에만 가면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다는 대목에서 시린 가슴을 부여잡아야만 했던 것도 그 까닭이다. 그는 더 나이들고 늙기 전에 아버지와 목욕탕에 가는 것이 오랜 소원이자 바람이라 하였는데, 오랜 부성애 결핍이 가져다준 유년시절의 크고 작은 생채기들이 그로 인해 서서히 아물기를, 그래주기를.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그에게 문학이란, 아니 모든 작가들에게 있어서 문학이란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전부터 궁금했다고 하면 거짓말일테고, 부제목을 보고 아차, 싶었다. 처음에 그가 고백하기를 더이상 갈 데가 없고 받아주는 데가 없어 소설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라고 하기에 겸손함의 극치,라고 생각했었더랬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그것은 세상에 속하고 싶은 애처로운 발버둥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보기도 한다. 스물여덟 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어렵사리 등단하고 그제서야 세상 속에 속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하였을 때, 당선 통보를 받고 작가가 된 자신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보았다고 하였을 때, 그의 기대와 설레임이 잔뜩 묻어져 나오는 열정이 한없이 부러웠다. 하지만 문학이라는 것은 곧 그에게 삶을 구속하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고, 그것에 대한 질퍽함은 곧 노동이 하고 싶어졌다 했다.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게다. 하지만 그 질긴 운명이라는 것은 그리 쉽게 그를 놓아주지 않을뿐더러 그가 문학을 하도록 그를 더욱 거세게 붙잡고, 결국 그가 문학에 항복하는데 일조한다. 문학으로 뜨거운 국과 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에 어느 날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그래, 그것뿐이었다. 지금껏 아비에게도 단 한 번  굽히지 않았던 내가 기어이 문학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제 남자 나이 마흔이 됐으니 이 일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돼버렸다. (······) 세상과 매끈하게 어울리는 재주는 없으나 땀을 흘리고 뛰어와야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는 건 안다. 그러나 입장권을 얻기 위해 고개를 숙이지는 않는다. 그것이 내가 문학을 하는 진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p161)

 

 

 

판도라의 상자를 열 듯 두근거리며 읽어내린 윤대녕이라는 사람의 산문집은, 그가 태동했던 유년시절부터 시작하여 일상, 여행, 문학, 독서일기로 끝을 맺기까지 어느 것 하나 꾸밈없이 담백함은 마음을 동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서 곡진한 그의 글들이 머리가 아닌 마음에 켜켜이 쌓일 때, 그 때를 나는 「이 모든 극적의 순간들」의 한 장면으로 각인시키고 싶은 욕심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표현한 책이 짙은 감동을 전해줄 수도 있구나,라는 것을 느낀 작품이기에 더욱 품에 안을 수 있는 것일런지도.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아직 접하지 않은 혹자가 어떠하냐 묻는다면 그를 여실히 표현하고 있는 산문집이 내게 당도하였을 때 그것은 이미 산문집이라는 의미를 상실한 채 윤대녕, 그대로 다가왔음은 한치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도중에 나는 그가 좋아질 것만 같다,라고 이야기했었고, 그것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짧은 가을에 그를 만난 건 대단한 행운이라 생각하며, 아쉬운 마음 가득 안고 책을 덮지만 나는 이 책을 계기로 그의 작품에 갈증이 나려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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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 바쁜 일상에 치여 놓치고 있었던, 그러나 참으로 소중한 것들 46
정희재 지음 / 걷는나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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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을 당시 컨디션이 지독히도 좋지 않았다,라고 밖에 이야기하지 못하겠다. 그래서 어쩌면 정희재 작가가 이야기해주는 힘들지만 아름다운 도시에서의 삶이 활자 그대로 마냥 아름답게만 그려지질 않았고, 삐딱한 자세에서 눈을 치켜뜨며 보는 세상이니, 내가 보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알만하지 않은가. 요즘의 내 생활은 미처 풀지 못한 스트레스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듯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데, 그때에 책을 잡고 오롯이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다. 또한 그럴 때에는 감성이 듬뿍 담긴 책보다는 소설을 읽어야한다는 것이 나의 철칙이건만, 구지 이 책을 선택했던 이유는 더 이상 미루면 안되겠다,는 이유 모를 압박감이었다. 실은 그 전에 이 책을 읽기 위해 손에 쥐었을 때, 그 때 정독했어야 한다는 말만을 뇌까린다. 하지만 점점 늘어나는 책의 압박에 못이겨서 혹은, 흥미로운 책의 유혹에 이끌려 10월이 되면 제일 먼저 읽어주리라! 하며 다짐했던 이 책은 챕터2를 채 끝내지 못하고 덮어버렸었음이, 이 책에 머물러있던 시간이 고작 그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애달파서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음에 손에 꼬옥 쥔다. 장희재, 그를 만나는 시간이 즐거웠으면 좋겠다,라며 책을 펼쳐든다.

 

 

 

 

작가가 말해주는 세상은, 또 표현들은 무척이나 섬세하여 읽는 내내 호흡을 쉬이 하지 않고 길게 늘어뜨리며 그리 읽었는데, 간혹 그의 글에 호흡이 멈출 때가 있었음을 고백한다. 작가도 나와 같은 세상을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머물러 있었는데, 그것이 내게 위안이 될줄은 미처 몰랐었다. 또한 글을 읽으며 이것은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며 감탄을 자아내며, 그렇게.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꾸만 목구멍에 생선 가시가 걸려있는 듯한 기분을 받았는데, 분명 그의 은유법은 결코 남루하지 않으나 그것이 문장을 어지럽게 만들었고, 감성을 극대화로 끌어내려는 듯한 시도가 눈에 확연하게 띄어 조금은 인위적임이 스며들어 있는 것과 같은 불편함을 감출 수 없었음이 그 까닭이었다. 메마른 현대인의 감성을 자극하기엔 조금 부담스러움이 들 수도 있었겠다,라며 조심스레 얘기해보지만, 독자라는 탈을 쓴 내 모습을 합리화시키며 작가의 어법에 왈가왈부하기엔 건방지지 않는가, 생각해본다.

 

 

 

글의 중간에 「전화하기 , 도시에서 손전화없이 살아보기」라는 장이 있는데, 그것을 읽으며 전화기만 쳐다보게 되는 사람들의 행동도 싫고, 그것때문에 사람을 조급하고 외롭게 만드는 것 같다,는 최강희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 우리 실생활은 전화기라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나,싶다. 나도 마음이 복잡하여 그 무엇도 위로가 될 수 없는 상황이 스무 살 때 찾아왔었는데, 그 땐 걱정해주는 지인들도, 심지어 가족조차도 외면해버리는 그런 상황이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중증도 그런 중증이 어디 있나 싶다. 그래서 무턱대고 전화기를 정지했었는데, 한달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살렸었더랬다. 그동안 전화기는 별 필요없다는 내 말이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깟 전화기 하나로 인해 세상과 단절되는 것이라는 게, 혼자 남겨졌다는 그것이 쓸쓸함과 적막함을 넘어 외로움으로 다가와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었는데... 결국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싶어 전화기를 정지했던 내가 사람들이 풍기는 체취에 자연스레 섞인 그 속에서 어울리고 싶어서 다시 살린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전화기가 내 외로움을 달래주느냐, 그것도 아니란 말이다. 차라리 그것 하나에 외로움을 느끼는 단순한 것이 나라는 인간이라면 얼마나 좋겠느냔 말이지. 그런 나를 약삭빠른 그가 눈치챘는지 조심스레 귀띔을 해준다. 손전화가 있어도 외롭고, 없어도 외롭다면 문제는 손전화가 아니라고.

 

 

 

실체를 바로 바라본다는 것은 문제의 원인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불쾌해하는 내 마음에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p143) 이 글귀를 읽으며 순간 움찔했던 까닭은 그 어떤 문장보다도 맹렬하게 심장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항상 불평·불만투성이의 사람이고, 늘 부정적인 사람인지라 누가 좋게 호의를 베풀었다해도 그 호의가 내게 좋게 다가오지 않았다면 그것은 이미 호의가 아니라고 받아들이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나의 옆에 있는 그 사람도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긍정적마인드라고 말할 만큼 나를 가열차게 비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 또한 좋게 받아들여야지,하면서도 어느 순간 삐딱하게 바라보고 있는 나를 나도 제어할 수 없으니, 미칠 노릇인데 그 때 마침 이 글귀가 내 눈동자를 고정시킨 것이다. 앞으로도 수도 없이 찾아올 불쾌함과 그것을 표출해내기 직전의 그 순간, 나의 마음을 소리없이 두드릴 친구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같은 하늘 아래 동시대에 부대끼고 허덕이며 사는 우리가 서로를 껴안고 살 수 있다면, 그래서 외로움이 조금이나마 덜어진다면 우리는 마땅히 서로를 껴안아야 할 것이라고, 비단 혼자가 아니라고, 그리 일러주고 있다. 또한 수려한 외관을, 밤에는 반짝이는 네온사인의 화려함을 한껏 뽐내는 도시라는 녀석도 외로움을 가득 안고 있구나, 라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해준 책이었다. 외로운 도시에서 외로운 사람들이 만나 살아가는 세상, 참 맛깔나지 않은가. 도시,라고 하니 이 책을 읽으며 신경숙 작가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에서 윤이 새로 이사한 그 도시에 적응하기 위해 걸어다녔다는 것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난 이 곳에서 23년동안을 살아왔고 수도 없이 걷고 또 걷고 있지만, 아직도 난 이곳에 적응해 나가기가 발에 바위덩어리를 얹은 것처럼 힙겹기만 하고, 앞으로 얼마나 힘겨울 날들이 저멀리서 기다리고 있는지 예상 밖에 있어 두렵기만 하여 어떤 것에 기대야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현재 내가 느끼고 있는 복합적인 감정 중 하나의 회로임을 고백한다. 그런 나에게 작가는 서문을 벗삼아 건네고 있다. 나와 당신, 그리고 자신에게. 당신, 참 애썼다. 사느라, 살아 내느라, 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 부디 당신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직 오지 않았기를 두 손 모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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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호의 우문현답 - 힘들고 지칠 때마다 나를 잡아준 그 한마디 공병호의 우문현답 시리즈 1
공병호 지음 / 해냄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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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두 번째이지만, 무척이나 오랜만에 읽는 듯한 공병호 박사, 그의 책. 박사라는 수식어를 과감히 떼어버리고 작가라는 타이틀을 붙여도 이상할 것 하나 없다는 듯 그의 책이 속속 출간되고 있고, 그것들은 나의 오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그렇기에 이 책이 출간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난 뒤, 한번 읽어보리라 다짐하고 있던 중에 손에 안착된 그 느낌은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며 책을 펼친 순간 그와 함께 밀려들어오는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갑갑증을 불러일으켰다. 실은 나는 그의 책 중 「에스프레소, 그 행복한 사치」라는 자기계발 한 권에 「공병호 대한민국의 성장통」이라는 경제학 한 권을 더하여 고작 두 권을 읽고, 이제 세 번째의 작품을 접하는 내가 책은 읽어보지도 않고 책의 속지들을 눈대중으로 슥 훑어보고는 실망을 한다니 나조차도 헛웃음이 나올 만큼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경제학이었다면 사전을 옆에 끼고 어려운 경제단어들을 찾아서라도 보았을 법하지만 이는 '힘들고 지칠 때마다 나를 잡아준 그 한마디'라는 부재가 붙어있고, 눈대중으로 본 책 내용 역시 그러했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자기 전 읽으면 좋은 책이라고 규정지었다. 또한 그렇게 했었기 때문에 욕심을 내어 몇 십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던 것들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하루의 마무리를 공병호 박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듯,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실은 이 책을 선택했던 것은 공병호 박사, 그가 그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며 중간중간 인상깊었던 글귀들을 발췌하여 심어놓은 책인줄로만 알고 있었지, 작년즈음 읽다가 결국 포기해버린 「365 매일 읽는긍정의 한줄」의 두번째를 보는 기분을 안겨줄 줄은 몰랐음에 적잖이 당황했던 참이었다. 아마 시간적 여유가 충분히 있었더라면 두어달동안 읽었거나, 혹은 포기해버렸을런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조심스레 해볼 수도 있을 만큼 이런 류의 책을 꺼리는 것이 내게 이 책의 가치를 실축시킨다. 그나마 내가 가장 읽을거리가 있었던 것은 중간중간 반가운 그의 이야기였는데, 실은 나는 그가 발췌한 글보다 그가 써내는 글에서 공감을 했고, 그곳에서 눈길이 조금 더 머물렀으며, 생각의 깊이 또한 조금 더, 조금 더를 외치기에 충분했다. 이를테면 과거는 이미 흘러가버린 것입니다. 좋았던 순간이든, 괴로웠던 순간이든, 이미 우리 손을 떠났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라는 것이었는데 나라는 사람은 과거에 무척이나 연연하여 그 기억을 시도때도없이 매순간 떠올려 실망과 자책과 후회와 좌절이라는 사종셋트를 수도 없이 반복하는 것이 이미 습관화된 것처럼 보인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는 말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생각과 행동이 제각각이니 나도 나를 제어할 수 없을 지경이다. 서두르면 되던 일도 그르친다고, 너무 빨리 조급하게 그것을 고치려하기보다는 조금 더 slow , slow. 하지만 심지어 이 결심을 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과거를 추억하고, 여전히 과거 속에서 '아, 조금만 더!'를 외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란 사람, 정말 못말리겠다.

 

 

 

개 중 또 하나, 잊고 싶지 않은 글귀는 생각이란 머릿속을 이리저리 떠다니는 희미한 구름 같은 것이 아니다. ······ 생각은 리허설 중인 행동이다. 당신의 생각은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잭 캔필드, 잭 캔필드의 Key」 라는 문장이었는데, 잭 캔필드, 잭 캔필드...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했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는 대표작이 있지만, 그것을 건너뛰고 「가족,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라」라는 책으로 만났던 그였다. 내가 읽었던 그 책은 많은 작가들이 총출동이라도 하듯 무더기로 '가족'이라는 타이틀로 단편을 내놓는 바람에 지루하기도 했고, 끊기는 맥이 짜증났던 그런 책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 말이 샜다. 어쨌든 「잭 캔필드의 Key」라는 책에서 마음을 흔드는 이런 글귀가 숨어있다니 당장 찾아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론다 번의 시크릿을 재연할 생각이신가, '끌어당김의 법칙'이라는 책이랜다. 아, 그냥 책에서 본 것을 감사해하며 글귀에서 그쳐야겠다,고 생각한다.

 

 

 

마음을 흔들고 결심은 견고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백마디 말이 아닌 하나의 문장이라 생각하고, 과연 그러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무수한 글귀들을 나열해놓기만 한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그는 나열해놓지만은 않았고, 구절 밑에 자신의 짤막한 생각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식의 책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어떤 유명하거나 특별한 책이 아닌 손때가 묻은 책을 읽으며 찾아서 그 속에서 얻는 깨달음인데, 그것은 천군마마를 얻은 것보다 더한 감동의 쓰나미를 안겨주고, 그것은 나는 상상할 수도 없는 나의 머릿 속 어느 곳엔가 안착하여 두고두고 나를 위로한다. 하지만 글귀가 나열되있는 것은 생각보다 그 여파가 크지 않음에 책을 허투루 읽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 책을 힘겹게 읽은 후에야 나중에 다시 한번 책장에서 꺼내 들춰봐야겠다,며 생각하지만 그것은 한낱 기약없는 약속에 불과함을 모르지 않는다. 오랜만에 만난 그의 작품은 조금은 허무하고 허망하여 허탈한 기분마저 감돈다고. 애초에 전에 읽었던 에스프레소와 같은 맛이 나는 자기계발서일 것임을 확신하며 기대한 내 과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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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기린
가노 도모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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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아들고, 제목을 보고서는 갸우뚱거리는 머리를 간신히 붙잡아 고정시켜놓고, 표지를 보고 다시 갸우뚱거리는 머리를 냅뒀더니 얼룩말 열댓마리가 빙글빙글 돈 기분마저 든다. '막스 티볼리의 고백'이라는 책을 무척이나 힘겹게 읽어내린 탓에 조금은 가벼운 추리소설을 읽어야겠다, 다짐을 했더랬다. 그렇다 한들, 책에 슬럼프가 빠진 것 같다 생각되던 나를 이 책이 읽은 후에 나에게 뿌듯한 웃음을 선사할 것이냐, 라는 어이없는 물음이 제기됐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해왔는데? 우습기 짝이 없다. 우습다 못해 토악질이 나올 만큼 어리석기까지 하다. 그리하여 그저 추리소설이라는 사실적인, 또한 띠지에 붙어있는 '일본추리작가 협회상'이라는 문구를 포착하고는 그것에 의존하여 책을 한 장, 두 장 술술 읽어내린다. 정말 말 그대로 술술 잘도 넘어간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그렇게 이야기를 읽어나간다. 바로 전에 읽었던 '막스 티볼리의 고백'을 읽을 때엔 누군가가 정신을 빼앗아가고 눈길을 돌려버렸으며 책장을 넘기려는 손은 붙잡아놓은 듯 미칠 듯한 슬럼프를 느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그와는 영 딴판으로 책장이 넘어가는 손놀림이 나조차도 당황스러웠지만 오랜 만에 그런 기분을 느껴봄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참 변덕스럽기도 하여라.

 

 

 

오 마이 갓. 책을 읽었다고 하기에도 민망하리만큼의 책장이 넘어갔다. 그 때, 고작 세 장이었다. 세 장만에 안도 마이코라는 아이가 괴한에게 습격을 당하여 죽음이라는 문턱을 너무나도 쉽게 범접하고 만다. 외모, 성적때문이 아니라하더라도 - 아니, 사실은 그것이 모두라고 말할 수 있다. - 어디에서나 특출나게 잘난 사람은 있기 마련인데 안도 마이코가 그러한 아이였기에 죽은 뒤에도 아이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것으로 안도 마이코가 살아생전의 그 명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고, 사실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죽음이 한 연예인의 가십거리라도 되는 양 떠들어대는 것일 뿐, 슬퍼하는 기색은 눈을 씻고 찾아볼 수조차 없음이 애석하기만 하다. 그렇게 안도 마이코의 죽음을 밑바탕 깊숙히 맨들맨들하리만큼 평평하게 깔아놓은 채로 '범인 추적'을 아니, '안도 마이코'가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여 혼자 가득 안고는 숨기고, 숨기기를 반복한 내면이라는 것이 깨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그렇지만 한없이 투명한, 또 마냥 행복하게만 보이는 스노우볼이라고 박박 우기며 독자 앞에 내놓고 거둘 생각조차 하지 않음에 독자는 그것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그 속의 진실한 세계를 안도 마이코, 자신이 쓴 동화인 「유리 기린」과 「마지막 네메게토 사우루스」에서 그리고 여러 사람이 내놓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비로소 맛보게 되는 것이다. 헌데, 그 맛이라는 것이 여고생을 닮은 상큼함도, 달콤함도 아닌, 말로 형용할 수조차 없는 의외의 맛임에 독자는 그것을 차마 입에 넣지 못하고 그저 손으로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다.

 

 

 

「유리 기린」, 「3월 토끼」, 「닥스훈트의 우울」,「거울 나라의 펭귄」,「어둠의 까마귀」,「마지막 네메게토 사우루스」,「에필로그」가 삐쭉얼굴을 들이밀며 chapter마다 바뀌는 화자에 「3월의 토끼」로 넘어가는 초반엔 혹, 이대로 끝나버리는 단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것을 읽고 있던 나로 하여금 실눈을 뜨고 지켜봐야할 만큼 의구심이 차오르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이 책은 에필로그를 뺀 총 6개의 타이틀 아래 이루어진 퍼즐같은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 까닭은 시점에 따라 바뀌는 화자들의 이야기를 짜맞추어 상상하는 것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또한 그것을 읽으며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면 이 책을 바로 읽은 것이라, 이야기할 수도 있을터다. 작가가 이야기하는 것이 범인의 자취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며 읽은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기에. 나는 이 책을 읽을 때 미나토 가나에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시점이 매 chapter마다 달라진다는 것을 볼 때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과도 유사한 면을 지니고 있다 말할 수도 있고, 소녀들의 내면을 다룬다는 면에서도 미나토 가나에가 올해에 내놓은 작품인 「소녀」와도 은근슬쩍, 혹은 억지로 연관지을 수도 있겠다,싶다. 하지만 소녀들의 내면을 다룬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금이 작가의 「유진과 유진」을 따라올 자가 없을 듯 싶다. - 실은 아직 폭넓지 못한 내가 아직 딱 거기까지만 닿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지만 - 어쨌든 오랜만에 읽은 그 때, 그 시기의 아이들은 늘 보듬안아주어야할 만큼 여리고, 부서지기 쉬울만큼 외줄타기를 보는 것 만큼이나 위태롭고 불안하다는 점은 두 말하면 입아프다.

 

 

 

사실 난 이 책을 무척이나 흥미진진하게 읽고나서도 서평을 쓰기가 무척 힘겨웠는데 그 까닭은 안도 마이코의 학교생활과 나의 학창 시절의 학교생활은 영 딴판,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일런지도 모르겠다. 나의 학창시절, 난 누군가의 선망의 대상이 아니었을 뿐더러, 선생에게 인정을 받기보다는 아마 똑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 중 한 명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런 나는 학교에 당도하자마자 교복치마를 체육복으로 갈아입고는 말뚝박기에 동참하기도 했고, 힘들면 힘들다,고 온갖 짜증을 내도 받아줄 친구가 있었으며, 꽁해있다가도 매점갈 땐 룰루랄라하며 신바람 난 채로 뛰어가는 내가 기억 속 저편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그래서 다 읽고 나서도 몽롱한 상태를 유지했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잘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생각들의 꼬리가 잘려나간 채로 그대로 두기를 몇 날 며칠째, 서평은커녕 책의 줄거리라도 쓰자고 마음먹었지만 다 쓰고 난 뒤에도 아직도 머릿 속은 혼란한 상태, 그대로 여전히 자리잡고서는 두 동강난 생각들을 더 이상 끌어다모아 붙일 기력조차 부족함에 더이상은 안되겠다며 손을 놓은 꼴이다. 더듬더듬 펜으로 끄적이고 키보드를 두들기어 말도 안되는 활자들이 나동그라진 채로 있지만, 이 책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아마 이것 하나. 미스터리 소설이라면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할 냉철하고 날카로운 범인의 흔적이 작가가 발로 슥슥 문질러 희미하게만 남겨두는 것으로 봐서 범인을 잡는 것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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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승역
캐스린 포브즈 지음, 변은숙 옮김 / 반디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책을 읽고나서 어떤 것들은 무던히 애를 써도 서평쓰기가 애매한 것들이 있는데, 바로 이런 것들을 두고 일컫는 것이 아닐까 싶다. 늘 언제나 그렇듯 그런 책은 어디든 존재하지만 이 책은 무척이나 정신이 없을 때 한번씩 들춰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집중력은 제로인 상태로 봤다고 무방하리만큼, 그러나 결코 어렵지 않게 슥슥 읽었었더랬지,싶다. 그런데 다 읽고 나서 두리번거린다하여도 딱히 이을 말을 찾을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환승역」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눈길을 압도하기에 충분한 푸른 표지와 처음 마주하였을 때, 가슴 깊숙한 그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싱그러움을, 손에 착 감기는 그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음에 방방 뛰는 기분으로 이 책과 함께 할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 읽고 난 지금은 왠지 모를 허무함과 곁들여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배신감이 온 몸을 휘감고 있지만, 무임승차를 하기 위해 요리조리 갖은 수단을 동원하던 앨리의 모습에서 자신의 달러를 검수원에게 내는 앨리의 모습이 디졸브되는 순간 풉,하고 웃으며 마시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앨리에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

 

 

 

열 살의 앨리 혹은 앨리스, 아이는 마냥 천진난만하여 아이스크림과 휘핑크림과 같은 종류의 군것질을 하기 위해 무임승차를 꾀하지만, 그날따라 검수원의 눈빛은 사납고 주변 사람들은 싸늘하기만 하다. 가까스로 도착한 집에서 왜 늦게 들어왔느냐는 말에 '배고파'라는 말로 둘러대보지만,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않아 자신의 말은 들으려고도 안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그에 분노한 엄마 릴리와 로티 이모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 또 노동조합운동으로 이상을 쫓는 아빠 해리가 있지만 그를 이해하지 못한 엄마와는 이혼이라는 종착역에서 마주보게 되고 그럼으로써 아빠와는 두달에 한 번꼴로 앨리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 속에서 페글리라는 하숙인의 서랍에서 훔쳐먹은 초콜렛은 입 안을 달콤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지만 그로 인해 고약한 그가 걸어놓은 쥐덫에 손이 물려 달달 떨어야만 했고, 세상에서 뭔가 좋은 일을 하면 나중에 반드시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다.(p209) 라며 미니가 좇고있던 신념이 그녀에게서 냉정하게 돌아섰을 때, 어른들은······, 가끔 어른들도 힘이 없고, 또 길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p293) , 때때로······, 때때로 어른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돌본다는 것을. (p303) 이라는 마음에 내키지 않는 그것들을 깨닫게 되며 세상의 이치들을 하나, 둘 배워나가기 시작한다. 또한 할머니에게 채 가 닿지 못한 라벤더 향이 나는 비누가 손에 덩그러니 놓여있지만 그것은 곧 라벤더 향을 좋아하는 다른 노파가 주워갈 것이고, 그는 라벤더 향을 풍기고 다니다가 어느 순간 앨리와 마주할지도 모르지.

 

 

 

글쎄, '환승'이라는 의미의 어원을 찾아가려니 갈아탄다, 라는 의미말고 또 어떤 의미로 작용할 수 있을지 한참 동안을 머릿 속에서 굴려보아도 여섯 가지의 숫자만이 새겨져있는 주사위처럼 정해져있어 다른 상상이 끼어들 틈은 물론이거니와 그조차 이미 결핍된 상태이다. 하지만 아마 작가도 그것을 삶에 반영하여 그런 제목을 지었겠지, 라는 생각이 드니 풉,하고 웃음이 터져나온다. 책을 다 읽고도 어떤 벅찬 느낌을 받지 못하였는데 고작 제목 하나에 작가와 교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우스워서. 하지만 곧 웃음을 거둘 수밖에 없었는데, 찰지지 못한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본 세상조차 추악하리만큼 역겨움의 산물들이 넘실대고 있음에 읽어내리기에 거북함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라서 책을 중간에 내려놓고 읽기를 반복하며 결국은 휴,하고 내뱉어지는 한숨을 걷잡을 수 없었던 이유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아이가 세상의 이치들을 하나씩 깨닫는 즉시 세상에 대한 환멸감이 물밀듯 차오를 것이고 그 때에 아이의 순수성은 휘발되고 말 것이다. 그랬을 때 아이들이 무사히 환승역에서 갈아타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성장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꽤 어둡다,고 말할 수 있는 「환승역」의 앨리가, 나의 유년 시절이, 그리고 인생에 수없이 환승할 기회가 찾아올 우리의 인생이 안녕하기를.

 
 

 

 

 

p129  맨 위의 서랍장을 잠거 두었다. → 잠가 두었다.

p148  "항상 문을 잠거 놓고 지내라고 그랬지" →"항상 문을 잠가 놓고 지내라고 그랬지"

p216  엄마의 말에 로띠 이모가 호응했다. → 엄마의 말에 로티 이모가 호응했다.

p268  '움직이는 영상'라고 하는 게 나을까요? →'움직이는 영상'이라고 하는 게 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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