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한 보통날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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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를 지독하게 싫어했던 때가 있었다. 아니, 지금도 그렇다고 해야하나, 혹은 덜하다고 해야하나. 내용이 나와 맞지 않았을 수도 있고, 작가가 나와 맞지 않았을 수도 있고, 혹은 번역이 나와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맞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은 작가가 자신의 삶을 투영시켜가며 써낸 너무나도 지극히 그 나라만의 특유한 문화가 곁들여진 내용이 담겨 있는 그 책. 나에게 있어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사치였고, 허영이었다. 때로는 아찔한 현기증을 동반하는 가벼운 두통,이기도 했다. 에쿠니 가오리의 첫 책은 고등학교 시절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라는 책이었는데, (두번이나 읽었음에도 또렷하게 기억이 나질 않지만) 한 부부가 나오는, 무던히도 평범한 책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다가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학교 도서관에서 「반짝반짝 빛나는」이라는 책을 만났었고, (실은 그 두 작품이 같은 작가였다는 사실은 뒤늦게야 알았지만) 파란 표지가 정말 제목처럼 반짝반짝하게 빛나고 있었음에 고민도 하지 않고 집어들었던 것. 하지만, 레즈비언이라던가, 게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웃으며 받아들이기에는 나는 그런 것들을 끔찍이도 경멸했고, 싫어하는 내용을 이해하면서까지 읽어야하는 것 또한 싫었기에, 읽지 않겠다 했다. 그러나 그 후, 아주 자연스레 「홀리 가든」을 만나게 됐었다. 읽다가 조금이라도 심기가 불편하다면 미련없이 덮어버리리, 생각했지만, 결국 난 또 끝까지 읽어내려놓고 신경질을 내며 책을 덮었다. 속의 주인공들은 바쁜 삶에 치여 사는 나와는 다르게 그들은 너무나도 한가했고, 여유로왔다. 그게 질투가 났던 게다. ㅡ 그렇듯,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만이 북적거리고 있는 에쿠니 가오리의 세상 속의 사람들을 이해하기에는 내게는 힘겨움으로 다가왔다. 그때부터였다. 에쿠니 가오리라는 작가의 책은 읽지 않겠, 아니 읽기 싫다고 생각한 것이. 그러나 그 이후에도 난 그녀의 책을 몇 번이고 다시 들어 읽고 나서, 또 생각한다. 다시는, 읽지 않겠다고.

 

 

 

그럼에도 - 분명, 그녀의 문장은 달달했다. 그것때문일지도 몰랐다. 후에 다짐이 그대로 녹아버리는 까닭이. 그것은 설탕이 흩뿌려진 것과는 명백하게 다른 달콤함이었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간다 하여도, 아무런 향도 나지 않을 것 같이 말라비틀어진 부부들의 사이에서 건조하게 내뱉어지는 말들이 그들에게 위안이 된다는 사실과 또 그것을 건조하게 써내려가는 저자와 그 건조한 문장들의 조합이 무엇보다 아이러니하게 다가오더라는 이다. 그것의 예로 나는 가장 최근 읽은 「빨간 장화」를 들 수 있다. 하지만 그 건조하다는 것이 때로 맨송맨송한 피부들의 마찰음처럼 느껴지는데, 나는 그 느낌이 싫지 않다. 아니, 도리어 때로는 그립기까지도 하다. 하지만 아직도 한 켠에는 그녀를 받아들이기 위한 자리가 없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늘상 그녀의 책을 집어들 때마다 이렇게도 깊은 심호흡을 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책을 읽을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 긴장이 이 책을 읽을 때 만큼은 느슨해지는 것을 깨닫는다. 몇 번이고, 책을 덮어 저자를 확인하곤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이 책, 뭔가가 이상해. 에쿠니 가오리 책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야. 어떤 면이? 아니, 그냥. 그러다가 깔깔깔 웃어버린다.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몇 권이고 계속해서, 또 자주 읽은 것은 아니지만) 난생처음 부부 중심이 아닌 가족 중심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종전의 책들과는 분위기부터가 남달랐다. 책 속의 미야자카家의 가족들은 봄이었고, 벚꽃이었다. 소요의 이혼, 시마코의 충격 발언, 리쓰의 정학, 윌리엄의 죽음 - 그 어떤 것에도 비바람이 몰아 치며 돌풍이 부는 여름으로 넘어가던가 하는 어떠한 변화도 없다. 그저, 소요의 이혼에는 만에 하나 네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 갔다면, 그때는 거리낄 것 없이 그 사람 품으로 가거라.”라는 엄마가 있고, 결국 그녀가 다시 가족 품으로 돌아왔을 땐 가족이 다시 모였다는 것은 순수한 기쁨이며 행복한 온기 같은 것.이라며 가족의 진정성을 표출하고, 시마코의 충격 발언에는 그래봐야 우리는 언제나 시마코 언니 편이다. 라며 각자의 삶을 이해하게 되며, 리쓰의 정학에는 “괜찮아. 엄마는 정학도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 (…) 무슨 일이든 다 경험이잖아.” 라며, 꾸짖음이 아닌 포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듯, 그것이 마치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인 듯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그것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끌어안고 각자의 손을 포개어 어루만져준다. 비록 물엿처럼 찐득찐득거리는 가족愛라는 것은 책 속에서는 확연히 눈에 띌 정도로 존재하지 않으나, 소란하지만 결코 시끄럽지 않은 소소한 일상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그것이 바로 가족愛임을,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어렴풋 이해하고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가족이라는 것이 그것이지. 동떨어져 있는 듯 하다가도 세상에 홀로 남겨져 울고 있을 때, 내 손을 이끌어 줄 이들. 내 가족인 게다.

 

 

 

때로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시간에 대해, 그동안에 생기는 일과 생기지 않는 일에 대해, 갈 장소와 가지 않을 장소에 대해 그리고 지금 있는 장소에 대해. 대개는 낮에 인생을 생각한다. 그것도 아주 날씨가 좋은 낮. 싸늘한 부엌에서. 전철 안에서. 교실에서. 아빠를 따라간 탓에 혼자서만 심심한 책방에서. 그런 때, 내게 인생은 비스코에 그려진 오동통한 남자애의 발그레한 얼굴처럼 미지의 세계이며 친근한 것이었다. 내 인생. 아빠 것도 엄마 것도 언니들 것도 아닌, 나만의 인생. p188

 

“무슨 얘기를 하면 좋을까, 인생에 대해서.” 에쿠니 가오리는 ‘가족’이라는 전체적인 덩어리에서 각자의 ‘인생’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만, 맴맴 도는 생각들이 유영하는 것을 바라보기만 할 뿐, 결코 어떻다, 단정짓지는 않는다. 나는 호젓한 거리를 걸으며 상념에 잠기기를 꽤 좋아한다. 그것은 때로 누군가라는 인물이 될 수도 있고, 어떤 무엇이라는 사물이 될 수도 있으며, 그 무엇도 아닌 추상적인 개념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늘 ‘인생’ 혹은 ‘삶’ 이라는 단어로 직결되기 마련이다. 경험에 의하면, 그것은 결코 어떤 하나로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생각 끝에 인생을 만들어줄 재료를 추출해야 비로소 완성되고, 그 완성이라는 것에도 오류가 생겨 사는 동안에 수 십, 수 백, 혹은 더 많게 필요한 것과 아닌 것을 넣고 빼며 다시 꿰매야 한다. 물론, 개개인의 인생은 각자의 손에 달렸겠지만, 적어도 책 속의 여섯 인물의 집합체, 미야자카家의 인생은 12월 첫째주 토요일에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는 것, 1월 2일에는 새해맞이 글쓰기를 하는 것, 고등학교 때까지 아침은 정해진 메뉴를 먹는 것, 스무 살이 넘으면 생일 선물은 돈으로 받는 것, 책을 읽는 것을 독서 놀이라고 칭하는 것, 버스를 타면 남남 놀이를 하는 것, 1년에 한번 엄마의 생신 때만 외식을 하는 것, 부엌일을 거들기와 옆에서 책읽기 중 선택하는 것, 가족 중 입학하는 사람이 있으면(유치원 졸업은 예외) 전날에 항상 사진관에서 가족사진을 찍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것이 그들을 한 울타리에서 살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함께 공존하며 애정을 표하는 데 있어 무리가 없는 그것들-. 

 

p153 , 09째줄 : 게단 → 계단

p249 , 11째줄 : 콧등이 약간 빨갰지만, 이미 울고 있지는 않았다. → (문맥상) 콧등이 약간 빨갰지만, 울고 있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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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엄마 엄마 - 자살을 결심한 엄마와 그 시간을 함께한 세 딸이 전하는 이야기
조 피츠제럴드 카터 지음, 정경옥 옮김 / 뜰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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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라는 단어가 안겨주는 애잔함을 감히 어떤 것과 견줄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글쎄. 그 무엇도, 라는 것이 내 대답이다. 헌데, 그런 존재가 언제부터 내가 마음대로 대할 수 있는 존재로 전락했단 말인가. 며칠 전, 의견 차이로 엄마와 충돌이 있었는데, 그 일 이후로 냉전이 지속되고 있다. 문제의 짤막한 원인이라 함은, 모진 사람들이 꾸려낸 세상으로부터 튕겨나가기를 원하고 좋은 사람들이 꾸려낸 세상으로 가는 것이 엄마만의 도피,라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런 엄마의 도피를 이해하지 못했고, 엄마는 조금도 이해하려 노력조차 하지 않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가족,이라는 옹골진 단어 속에서 태동하는 우리가, 왜 그래야만 하는지 답답했다. 아니 실은, 엄마가 먼저 손을 내밀었던 적이 있지만, 그것을 차가운 말로 내치는 내가 있었고, 그런 내가 엄마에게는 지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터다. 그래서 아무 일 없었던 듯 천연덕스레 엄마를 부르고 싶게 만드는「엄마, 엄마, 엄마」 - 라는 이 책을, 쉬이 들 수 없었던 것도 그 까닭이다. 또, ‘엄마’를 소재로 한 책들 중, 깔깔 웃으며 읽었던 책은 단 한 권도 없다,는 것도 한 몫 했으리라. 그것은 응어리진 눈물 방울들을 대롱대롱 매달고 엄마에게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한 책들 뿐이었는데, 「엄마를 부탁해」가 그랬고 「바보 엄마」가 그랬다. 그런데 이 책, 뭔가 이상하다. ‘자살을 결심한 엄마와 그 시간을 함께한 세 딸이 전하는 이야기’ - 자살을 결심한 엄마라니. 아, 이건 악몽이다. 글귀를 보자마자 나는, 그동안의 일들을 새까맣게 잊은 채 그대로 엄마 품으로 돌진할 뻔 했음을.

 

 

 

울형성 심부전증, 천식, 만성 폐질환, 골다공증, 관절염, 저혈압, 그리고 이십 년도 넘도록 앓아온 파킨슨 병 - 보기만 해도 막막하게 나열된 병들, 그것을 앓고 있는 일흔다섯의 마거릿.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병은 해도해도 너무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결국 투병에 지친 그녀는 자살을 꾀한다. 하지만 딸들은 그런 결정이 경미한 우울증과 자제력을 과시하고 싶은 병적인 집착에서 오는 것이라고 가볍게 여겼지만, 자살할 날짜까지 정해놓고 딸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때 쯤이면 마무리를 하기에 적당하다’던가 하는 말들을 소풍가는 날짜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며 그것을 실행하겠다, 라는 암시를 주어 딸들의 마음을 더욱 바스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마무리’가 되는 날은 이미 두 번이나 바뀌었고, 헬륨가스, 세코날 수면제, 모르핀, 단식…과 같이 죽음에 이르는 방법 또한 결코 만만치 않다.

 

 

 

마거릿을 그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기엔 충돌하는 것들이 있었다. 나 역시도 훗날에,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링겔이라던가, 산소호흡기라던가, 하는 그런 모든 것들은 거부할 요량에 있다. 생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완치될 수 없는 병에 억지로 링겔을 꽂은 팔에 주사액이 투여되고, 고르지 않은 희미한 숨통을 조금이라도 잡아보고자 산소호흡기를 꽂아 산다면 그때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생각하고, 지인들을 생각하고, 무엇보다 나를 생각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고 여태까지 생각해왔던 것들 중 하나이니까. 그런 내가, 투병에 지쳐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그녀에게 가타부타 이야기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 따지고 보면, 행복전도사 최윤희도 그러하지 않았는가. 힘든 것은 자신인데, 누가 그녀를 함부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딸들에게 자신의 마지막 날을 통보하는 엄마,라는 점에서도 그녀가 내 엄마가 아님에도 야속한 생각에 몸서리를 쳤지만 후에, 딸들이 그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하나의 준비 과정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조심스레 가져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자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닐지만. 그래서 실화임에도 불구하고 슬픔이 가득 서려있기 보다는 제 3자의 눈을 빌어 썼다고 표현해도 대수롭지 않을 만큼 꽤나 담담하고 조금은 여유로운 문체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에 들어온 것은 아닐까. 처음엔 그 탓에 ‘체념’이라 착각할 뻔 하였던 것도 사실이나, 책 속에는 결코 그것과 연관시킬 하나의 자투리도 없었음을 밝힌다.

 

 

 

책을 다 덮었을 즈음, 엄마를 생각했다. 내 엄마는 아직 건강하고, 또 그렇게 믿고 싶다. 발꿈치를 들어 올려서 팔을 주욱 뻗어도 손이 하늘에 닿지 않는 것처럼, 나는 그것들이 그만큼의 거리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허나, 언젠가 그런 일들이 나에게 닥친다고 가정했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이다. 엄마를 어떻게든 막아야 올바른 것인가, 엄마를 도와주어야 올바른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손을 놓고 체념한 채로 바라봐야 하는 것인가. 둘 중 어떤 것도 올바르다,라고 장담할 수 없는 게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옥죄어옴과 동시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것을 느낀다. 아직도 나는 엄마가 홀연히 떠나버리는 꿈을 꿀 때면, 엉엉 울며 엄마에게 달려가 엄마의 고른 숨소리를 듣고 그곳에 내 숨소리가 얹어지고 나서야 겨우 잠들 수 있다는 사실을, 난 너무 오래도록 잊고 있었다. 책을 덮음과 동시에, 그동안의 엄마와의 냉전을 끝내려 하는 내가 있고, 엄마를 완전하게 이해할 순 없지만, 내가 사랑하는 엄마니까 이해하려 노력하겠다고, 문자를 보낸 후에야 비로소 불안정했던 맥박들이 가지런하게 뛰는 것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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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살 여자가 스무살 여자에게
김현정 지음 / 토네이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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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껏 쓰던 서평을 홧김에 delete 해버리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다. 한풀이하듯 써놓은 서평을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밖에 안나오더란 말이다. 지지난주부터 나는, 꽤 괴상망측하게도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혀 제대로 된 어떠한 일들이 잡으려고 해도 잡히질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자리에 앉아 엉엉 우는 일들 뿐이었다. 그런 일들이 마구잡이로 나를 향해 돌진해올 때면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고 픽,하니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를 찾게 되는데, 나는 늘 그 누군가를 찾다가 혼자 삭히게 될 때가 많다. 그것은 친밀한 관계일수록 더욱 아득하게만 느껴지는데, 자존심이 굉장한 나는, 때때로 나의 치부가 바람에도 들썩거리는 플레어처럼 쉬이 들춰지는 것이 달갑지 않은 까닭이다. 간혹,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에 이야기를 꺼낼까, 고민하다가도 내게 짐인 일이 그 사람에게도 혹여나 짐으로 여겨질까 더욱 조심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그것은 이미 어떠한 것으로도 풀 수 없을 만큼 딱딱한 무언가가 되어 있고, 그것은 그대로 굳어졌다가 어느 순간에 나를 또 다시 조여온다. 마치, 빼내어야 할 이를 그대로 방치해 두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과 같이.

 

 

 

그렇게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던 날에 「서른 살 여자가 스무 살 여자에게」의 저자 김현정을 만났다. 책을 읽기에 앞서 내가 서른 살이 되면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아직 서른이라는 나이에 근접하지 않은 내가 생각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다,며 서른 살에 난 뭐가 되어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생각을 해보기도 전에, 텅 비어있음을 확인하고 금세 시무룩해진다. 아니, 내가 한 나라를 통치하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 했는가, 만인에게 사랑받는 연예인이 되고 싶다 했는가, 그도 아니면, 만물을 다스리는 신이 되고 싶다 했는가. 나는 왜 서른의 나를 상상하지 못하는가 말이다. 나의 서른 살. 생각을 안해본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쉬이 상상할 수 없는 까닭은, 서른에 좁힐 수 없는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내 미래에 확신할 수 없어서는 아닐까,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을 하게 된다. 혹은, 스물이나 서른이나 다를 것이 무어냐, 라는 것이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들었다. 어쩌면, 위로를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직은, 그렇게 멀리에 있는 것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그도 아니라면,..-

 

 

 

스무 살 시절에는 자신을 삶과 미래의 중심에 놓고 동선을 그려 나가야 합니다. 중심에 서는 일은 괴롭습니다. 하지만 중심에 설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꿈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고, 그 바라봄의 시선을 통해 새로운 날들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내가 중심에 없으면 세상도 없고 삶도 없고 꿈도 없습니다. 오직 내 것이 아닌 세상의 빈방만을 기웃거릴 뿐입니다. 변방만 기웃거리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 바로 당신의 ‘청춘’입니다.

 

나는 전에 어떤 책을 읽고 그런 말을 쓴 적이 있다. 십대에서 이십대로 건너가기 바로 직전에, 내 스무 살은 누구보다 밝게 빛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정말, 그땐 그랬다. 내 스물이란 나이는 감히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역량을 지닐 줄로만 알았다. 十年이 두번을 지나니, 뭔가가 특별해 보였는가 보다. 하지만 다를 바 없는 생활들은 나를 급기야 따분한 스무 살로 기억하게 했고,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스무 살을 살게 했다. 그러다가 내가 내 인생을 살아보자, 한 것이 자기계발서를 미친듯이 읽어제끼던 스물 두해를 살던 어느 날이었고, 나를 억압했던 전의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끊어내는 것을 시작으로 주변을 주욱 둘러보고 정돈했었다. 학교를 복학하고 나서도 이것이 정말 내 꿈일까 끊임없이 의심했고, 우선 시작하는 것, 최선을 다해보자, 생각하여 방학 때에도 교수님의 옆자리를 차지하여 보조 노릇을 곧잘 하며, 내 자리를 넓혀갔다. 그땐 이렇게 해서 나한테 남는 게 뭐가 있어, 라며 온갖 투정들을 다 부렸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분명 남는 것이, 있었고, 여전히 그때의 온기가 내 옆에 가지런히 머무르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성취감과 보람도 없이 아침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하는, 매월 꼬박꼬박 통장에 입금되는 월급을 위안으로 삼는 삶은 그저 사육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요.

 

현재의 내 삶이 만족스럽다,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겠다. 허나, 이것은 불특정 대다수에게 물어보아도 마찬가지의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대표적인 물음 중 하나이다. 만족하지 못한다면, 만족하게끔 만들 수는 있다. 로마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지금의 정보통신이 비단 오늘만의 일인가. 하물며, 지금 나의 몸뚱아리 역시 엄마의 자궁에서 태동하며 눈, 코, 입, 팔, 다리를 다 만들어 무려 열 달을 살다 나왔는데, 꿈이 그렇게 쉬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는가 말이다. 한달 전, 작가 폴 오스터의 「보이지 않는」이라는 책에서 인생은 뭉그적거리기에는 너무 짧거든. 이라는 문장을 만난 적이 있다. 그것은 당시에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로 꿈, 아니 망상만을 좇던 내게 도전하라는 말처럼 들렸고, 그동안 해야겠다,라고 말로만 되뇌었던 공부를 시작했던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흘려보내도 무색하지 않은, 누구나 할 수 있는 한 문장이, 가끔은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어 무언가를 하고 싶다, 혹은 해야겠다,라고 마음 먹게 만들어 게으른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계발을 읽었다. 이 책 속에서 다른 자기계발과는 색다르다던가, 특별하다던가, 하는 것을 발견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역시, 다른 책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사랑에 앓아누워라, 고비가 오면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고 그 속에서 해답을 찾아라,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등등. 누가 모르겠는가. 책을 읽지 않아도,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고, 느꼈을 법한 이야기들이다. 적어도 나는, 나를 움직이게 하고 싶었다. 미친듯이 몰아치는 회오리 바람 속에서 엉엉 울고 있는 나를 구출해야했고, 그러려면 일어서야 하는데, 나를 일어서게 만들 간식거리가 필요했을 뿐이다. 이 책이 좋은 책이라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저 각자의 이상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대한민국 삼십 대 여성들을 아니, 이웃집 언니들을 만나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 삶을 되돌아 본 것,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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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궁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한밤의 궁전 안개 3부작 3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김수진 옮김 / 살림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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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소설이라는 장르를 좋아하지 않았다. 또, 여전히 달가워 하지는 않는다. 세상과는 동떨어진 미스터리하고 괴기한 이야기가 그저 유치하다,고만 생각했던 이유로 재미를 느끼지 못한 것이 그 까닭이다. 그래서 중학교 시절에, 이른바 모든 아이들의 ‘제 2의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해리포터」 시리즈에 눈길 한번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에게서 편지를 한 통 받았는데, 자세한 내용까지는 생각이 안나지만, 그때 당시, 지금도 물론 밸라, 혹은 벨라 라는 별명을 가진 나에게 ‘안녕, 벨라요정. 난 헤르미온느야.’ 라고 시작되던 그 편지를 첫 문장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손발이 오글거릴 만큼의 강력한 거부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생각한다. 분명 그때의 나라면, 그 편지를 찢어버렸겠지만,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편지함 상자에 자신의 자리 한켠을 마련하고 있다. 난 아마 그것을 읽으며 욕설을 내뱉으며 상자에 던졌겠지. 그런데 그런 내가, 「해리포터」 그것을 읽었다. 그것도 3일이라는 최 단시간 내에 마지막 편을 제외한 모든 시리즈를 말이다. 때는 대학 일학년인 스무 살. 모델 구상을 해야하는데, 딱히 마땅한 도안이 떠오르지 않아 눈만 빙빙 돌리고 있었을 것이다과오빠가 중학생인 자신의 동생에게 읽힌다며 대출받아놓았던 책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손에 들고 우리 중학교 때도 참 많이 읽었었는데,라며 운을 떼고 몇 장 읽기 시작했는데, 어라, 재미있네 -.

 

 

 

그 이후로도 평생 읽을 것 같지 않던 판타지 소설이라 불리는 책을 (내 나름대로) 꽤 많이 접했다. 생각할 거리가 가득했던 「위저드 베이커리」 , 그저 로맨스 소설이라는 것에 국한될 줄만 알았지만, 그 역시도 로맨스에 판타지라는 밑바탕이 깔려있었던 「시간 여행자의 아내」 와 「트와일라잇」 , 그리고 이번에 읽은 청소년 판타지인 「한밤의 궁전」 - 이 책을 겨우 몇 장 넘겼을 때만 해도, 추리 소설인 줄로만 알았다. 이렇게 미치도록 화창한 봄날에 추리 소설을 읽는 것은 실례인데, 라며 책을 펴들었으니까. 책에 대한 어떠한 정보가 없는 상태였기에, 음산하게 그려진 표지만을 보고 판단한 것이리라. 아니, 실은 책을 읽고 난 후부터도 역시 100페이지가 넘어가기 전까지도 난 그런 장르의 것이라 생각했던 것. 중간마다 그가 비를 멈추게 한다던가, 백지 상태의 편지가 몇 시간 후에 채 마르지도 않은 빨간 잉크로 써있었다는 점을 미루어 본다면, 충분한 복선이었음에도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절대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그 당시에 일곱명 중 (어쩌면 여덟명) 한 아이, 이언. 그의 독백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의 마음을 에워싼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야기의 시작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누군가의 독백을 듣게 된다는 것은 김이 빠지는 일이기에, 또,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읽는 것은 순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이야기를 읽고 다시 읽어보기로 하고, 과감히 건너뛰기로 한다. 독자들이 직접 작품과 맞닥뜨리는 게 바람직하다고 이야기하던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그의 말처럼. 그래서 나에게 이 이야기는 1916년 후글리 강으로부터 시작된다. 한 남자가 갓난쟁이 두 아이를 품에 안고 무작정 달리고, 누군가 그의 뒤를 밟으며 희미하게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 그 남자는 아이들을 ‘아르야미 보세’에게 무사히 양도하지만, 그녀는 아이 둘 모두를 살리기 위해 한 아이만을 캘커타의 한 보육원에 맡기게 된다. 아이는 그곳에서 자라면서 ‘차우바 소사이어티’라는 이름으로 일곱 명의 아이들과 비밀 결사단을 만들고, 보육원에서 내보내야 할 나이인 16세가 되어 이제 2주 후가 되면 그 보육원에서 나가 홀로 설 준비를 해야한다. 그때, 한 남자가 그를 찾아왔다. 아이를 찾던 그 사람. 자와할. 그는 무엇때문에, 아이를 쫓고, 무려 16년동안이나 기다려왔는가.

 

 

 

이 책은 분명, 가독성은 있다. 아니,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점점 길어질수록 늘어지며 헐거워지는 것을 보기가 힘겨웠고, 끝내는 작가에 따라 나 역시도 슬렁슬렁한 마음으로 책을 보았던 것을 고백하다. 그 까닭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하나를 집어내자면 - 혹여, 이 이야기가 영웅 스토리를 살리고자 했다면, 인물 묘사가 아쉬웠음을 얘기한다. 독자는, 아니 나의 경우는 대개 이런 식의 소설을 마주할 때면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위해 저자가 저당 잡아놓은 인물이 아닌, 이야기를 끌어갈 만한 또 다른 인물을 구축해놓는다. 그리고 홀로 저자와는 약간 다른 생각을 해가며, 이럴 땐 이 사람이 나와줘야 하는데, 라는 식의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벤’은 이미 저자가 저당 잡아놓은 단 한명의 인물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 사건들이 적어도 비밀 결사단에 의해 풀린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까닭이다. 아니, 구지 그렇게 따지자면 ‘벤’ 역시 스스로 한 일은 하나 없다. 그저 남들 하는 만큼만 했을 뿐. 어찌됐건 난 ‘벤’을 제외한 ‘마이클’을 잡아놓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그 어떤 인물도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볼 수 있는 이는 없다. 아, 단 한 사람. ‘피크 중위’ - 내가 ‘차우바 소사이어티’의 인물들에 대해 약간이나마 알 수 있었던 것은 이언의 독백을 통해서였는데, 고작 세 장만을 통해 인물을 알아가기엔 무리수를 둔 것이 아닌가. 그 세 장에는 ‘누구는 어떻고~’ 식이었는데, 그것이 아닌, 그들끼리의 대화를 통해 독자 스스로가 ‘아, 이 아이는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구나.’ 라고 생각해야 하고, 부족한 때에 작가가 끼어들어 다른 인물을 통해 부연설명할 수 있는 발언권을 갖는 것이다, 라고 적어도 나는 생각한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독자 개개인의 까다로운 입맛을 다 맞추진 못하지만, 인물 묘사가 뛰어나야 한다는 점은 추리 혹은 판타지 소설에서 간과되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아니, 설령 그런 장르의 책이 아니라 하더라도, 배경이 이야기의 소재가 되지 않는 이상 결코 뒷전으로 미룰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두번 째는 시시각각 변하는 시점이었다. 특유의 개성도 없는 아이들을 떼어놓고 이리저리 굴린다 한들, 내 머릿 속에는 제대로 각인되어 있는 아이들이 없다. 그저 인도 박물관 도서관에서 자와할에 관련된 서류를 찾는 아이들이 있었고, 역사 상단에 둘러쳐진 돌출대에 있었던 아이들이 있었고, 지터스 게이트 역사 제일 상단부에 있었던 아이들이 있었으며, 터널에 있었던 벤이 있었다. 라는 것밖에는 남아있는 기억이 없다. 그 시점들 사이에서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었다. 이 역시 첫번 째의 까닭과 자연스레 연결되는 문제가 아닐까. 세번 째는 ‘권선징악’ -. 과연 이 책이 청소년 판타지라서 그럴까, 글쎄. 이야기의 마무리가 결국 이렇게 밖에 될 수 없었구나, 라고 체념하는 데에는 작가에 대한 희망마저 실린 것이다. 작가의 책을 난 이 책으로 이제 겨우 한 권을 읽은 셈이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게 만든 것이. 사실 처음 자와할에게 쫓기던 피크 중위를 볼 때는 이 책이 흥미진진하겠구나, 생각했다. 하루만에 다 읽어버릴 수도 있는 책이겠구나, 생각했다는 말이다. 이야기란 도입부보다 클라이맥스에서 독자를 안달복달하는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난 그때 손을 놓았다. 또한, 처음에 궁금증을 자아내던 것들은 노부인의 한 번의 거짓말로 인해 한꺼번에 틀어지고, 진실을 이야기할 때 즈음에 설레야 할 이야기들이 설레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앞서 말했듯, 헐거워진 이야기는 결국 그렇게 끝이 나고, 책장을 다 덮은 후에도 뭔가 모를 찜찜함이 남아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는 작가가 책을 통해 하려는 말을 이 책을 통해 정확하게 짚어내지 못했다. 아비의 사랑일까, 그들의 우정인가, 그도 아니면 정말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권선징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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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과 쓸개
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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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어느 날, 공부 할당량을 누구에게 쫓기듯이 가까스로 채워넣고 더 이상은 무리,라며 무료하게 퇴근 시간만을 바라보다가, 다소 시니컬해보이는 표지를  신경질적으로 툭, 떼어내고 이 책의 첫 문장을 시작했다. 어쩌면,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내 안의 모든 장기들을 두 손에 꼬옥 거머쥐고 몇 번이고 확인하며 읽어내려야 한다는 것을. 김 숨은 나의 그것들을 억압해왔다. 특히, 무엇보다 우리네의 삶을 철저하게 판박이처럼 닮은 그 이야기들에 그곳들은 아파했고, 쓰라려 하며 아우성을 치는 꼴이 되었다. 헌데, 그것을 감히 발악,이라고 표현해도 될까. 그래도 될까. 그 단어가 이 책에 어울리는가 말이다. 그럼에도 내 비루하기 이를 데 없는 머릿 속에 유영하는 단어는 단연코 그 뿐이다. 그러니, 그렇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그래서 내가, 주말 자정이 훨씬 더 넘도록 김 숨과 함께 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고, 또 그래야만 했다. 그들의 소리없는 발악의 끝이 내 손 안에 고스란히 쥐어지길 바랬다. 그런데-. 나는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끝끝내 자유로이 내뱉을 수 없었던, 길었던 숨을 내쉰다. 마치 해방감,이라고 표현해도 무색하지 않을 만큼의 숨-. 그것 말이다.

 

 

 

첫번째 단편, 간과 쓸개에서 67세 간암 환자인 ‘나’는 밥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거울 속의 늙은 남자와 조우한다. 죽은 남자라도 바라보듯 아무런 감흥도 없이 ‘나’를 빤히 응시하던 이는 두렵게도, 자신이었다. ‘죽음’이 머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유년 시절에 큰누님과 함께 갔던 ‘저수지’를 연상케 한다. 그것은 시시때때로 ‘나’를 억압한다. 어느 날, 저수지의 축소판, 수도기 계량기통에서 죽은 귀뚜라미 떼들을 보는데, 유독 한마리만 살아남아 버둥대고 있더란 것. ‘살아 있다는 것이, 더할 수 없이 구차스럽고 징글징글 하다.’고 그는 생각하지만, 알고보면 그 역시도 그와 다를 바 없다. 친구가 억지로 떠안긴 골목을 받아 뒷마당에 내팽개치듯 버려두었는데, 일주일 뒤 표고버섯이 자그마치 여섯 개나 열려있는 것을 보고 ‘나’는 새삼스럽다. 죽은 것도, 그렇다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닌 골목이 말이다. 거기서 그는 골목에 자신의 삶을 얹어놓는다. 그는 그동안 미루고 미뤘던 담낭관을 담석이 틀어막아 쓸개즙이 고여 있다가 다른 장기들로 스며드는 병을 가진 누님과 대면한다. 그런데, 뜻밖의 말을 듣는다. 저수지에 ‘나’와 함께 간 사람은 마흔 살도 안 되어 죽은 셋째누님 을숙. ‘나’는 결국 ‘죽음’에 져버린 누님을 생각하고, 이젠 그것이 ‘나’의 간을 뜯어먹고 있다, 생각한 것일까. 노인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노인이 우는 것을 본 적이 없고, 울음소리 또한 들은 적 없다. 그런데 그것이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내게 다가온다. 이 단편 말고도 모든 단편이 그러하다. 책을 덮은 지금에도 난, 노인의 흔들리는 어깨가 보이는 듯 하고, 처연한 울음이 들리는 듯 하다.

 

 

 

그들은 그렇게 죽었다, 혹은 살았다, 아니 - 둘의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죽어 가고 있다앞서 말한 간과 쓸개>의 ‘나’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숨통을 틀어막는 가래때문에 거동도 불편하여 <북쪽 방(房)>에서 유배되듯 살아가는 노인이 있고, 뒤를 이어, 흑문조>에는 간암으로 두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긴 노인이 있으며, 내 비밀스런 이웃들> 중에는 네번째 뇌수술을 받아야 하는 사내가 있다. 그들 모두는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늙고 추레하다. 그렇기에 있는대로 위악을 부려도 용서받을 수 있는 자들이었다. 헌데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혹은, 못했다. 그 대신, 진물이 터져나온 그곳에 바람을 쏘이고자 작가는 그들에게 외출을 선사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모일, 저녁>소주를 사러간 아버지도, 사막여우 우리 앞으로>사막여우 우리 앞에서 만나기로 한 동생들도, <북쪽 방(房)>우족을 사러간 아내도, 흑문조>집에 구멍을 뚫어놓은 배관공도, 룸미러>상황을 보고 온다며 차에서 내린 남편도, 육(肉)의 시간>불온한 욕망의 대상이었던 여자의 육체를 안았던 남편도, 내 비밀스런 이웃들>그들과 함께 떠난 남편도, 럭키슈퍼>물건을 사러왔던 사람들도, (혹은, 유통기한이 다 된 아버지.) 외출을 감행했다. 그런데, 왜 당신네들인가. 외출의 대상은, 당신들이 아니지 않은가. 정작 외출을 허락받아야 할 그들은 허락받지 못했다. 혹은, 스스로가 나가지 않았을 수도. 구태여 그것을 묻는다면, 그들에게는 질서가 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 가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이, 더할 수 없이 구차스럽고 징글징글하지만, 귀뚜라미처럼, 표고버섯처럼, 붉은얼굴원숭이처럼, 새처럼, 흑문조처럼, 자라처럼, 생태를 에워싼 구더기처럼 오늘도, 살아가고 있을 터다. 그러니까, 이들 모두는 죽은 것도 그렇다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닌 골목이다.

 

 

 

김 숨의 아롱진 눈물방울의 까닭은 ‘죽음’이었으나, 그 끝에는 그럼에도 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그래서, 떨어지려는 그것을 붙잡기 위해 눈에 핏발이 서도록 지켜내려는 게다. 그것이 얼룩조차 아름다운 까닭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에 ‘만만찮다’고 표현했고, 이 책이 어떻느냐 묻는 질문에도 그리 답할 수밖에 없다. 쉽게 읽히는 단어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문장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느꼈고, 숨 쉬기를 느리게 할 때의 그 갑갑함을 오롯하게 안아야했다. 탁한 공기의 마찰들에 숨이 막혔다. 그런 상태에서 책을 읽었다. 아니, 책을 읽었다고 해야하나, 책이 읽혔다고 해야하나. 그것조차도 모르겠다,는 것이 나에게서 자조적인 웃음을 띠게 한다. 그럼에도 내가 확신할 수 있는 하나는, 작가가 그려낸 그들은 모두 살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산다는 것, 아간다는 것,에 집요하리만큼 파고 들어갔다. 그래서, 그것은 내게 회의적으로 다가왔고, 그에 대한 회의는 마침내 ‘우리는, 살아야 한다’,로 굳혀졌다. 따라서 우리는 질서정연하게 살아가려는 그들을 따라 낮은 곳에서 숨을 끌어모으는 숨쉬기를 배워야 한다. 어느샌가 그들은 우리가 되고, 우리는 그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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