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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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느닷없이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이 책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는데도, 내가 이 책으로부터 엄청난 감동도, 그렇다고 갑작스러운 자극도, 마음에 묵직한 무언가도 남지 못했는데도, 억압되거나 여전히 유예된 것만 같은 나의 ​성장기를 다시 들여다보고자 함은 더욱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해 뭔가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왜'일까. 혹시, 어쩌면, 연우를 위로하고 싶었을까. 아니라면, 태수를? 채영을? 마리를? 아니면 성장하고 있는 '누구'들? 글쎄. 쓰다 보면 알겠지.



지금 나의 서재(라고 말하기에는 비루한 책장)에는 은희경 님의 책이 두어 권 꽂혀있다. 한 권은 단연 <새의 선물>이고, 한 권은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그리고 마지막 한 권은 <태연한 인생>이다. 내가 은희경 님을 알게 된 건,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라는 책 때문이었다. 당시에 내가 읽기에는 힘들었던 기억이라, 몇 장 읽다 말고 덮어두고 말았다. 하지만 그 책을 읽지 않고도, 정말 책 제목처럼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을 것만 같다는 생각에 휩싸여 나는 한동안 시계를 멀리했었다. ‘몇 시’인지를 잊고 지냈다. 알고 싶어도 모르는 척, 꾹 참았다. 나도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책을 알게 된 것은 어린 나였는데도, 나는 퍽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행복한 사람이라니. 마음마저 유약했던 벨라야-


어쨌든,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나는 은희경 님의 책을 세 권이나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읽어본 책은 <새의 선물> 뿐이라는 것이다. 그 책은 너무나도 소중하여 두고두고 책장에 꽂아두고 싶은, 그런 책의 한 권이기도 하다. 내가 그 책을 언제 읽었나 찾아보니, 2012년이었다. 손가락 다섯 개가 부족할 만큼의 햇수가 지났다. 그런데도, 나는 그 문장들을 하나하나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그러한 기대감으로 이 책을 펼쳤을 때에, 차선에 뛰어든 고라니처럼 우왕좌왕했다. 왜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의 글은, 문장은, 이전 작품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_가 가장 큰 오류였다. 그러는 나도 일관적이지 못하면서, 너무 웃긴다.




연우다.

연우였다.

이야기는 강연우의 시선을 좇지만, 연우의 시선에 걸리는 건 독고태수와 독고마리, 채영이었다. 그리고 신민아 씨와 재욱 형까지. (아, 그리고 나는 이 서평을 쓰며 kebee의 '소년을 위로해줘'를 지나 '백설공주'를 듣고 있는 참이다. 예전에는 이런 랩도 즐겨 들었었는데, 랩 속에 들어있는 이야기들이 풍부하기 때문이었지 싶다.) 약 500페이지 속에는 여러 이야기가 난잡하지만 적당한 속도로 통과하고 있었다. G-그리핀, 카프카, 달리기, 세상 끝에 있는 우주정거장, 공항버스, 첫눈, 마라톤, 당근 아홉 개, 그림자도 아닌 마리오네트, 정체성 혼란, 싸움, 그래피티. 이를테면 그것들은, 소년들의 삶이기도 했다. 밀도와 속도에서는 균일하지 않은, (특히나) 모든 소년들의 시간 말이다.





그리고- 나는 아이가 없지만, 신민아 씨의 육아법에 대해 참 많은 공감을 했다. 한때는 나도 엄마가 될 준비를 한 적이 있었다. '우리에게 아이가 생긴다면'의 전제하에 내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과 해주고 싶은 것, 아이에게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나 하는 것들을 곰곰이 생각했었다. 그것은 결혼 1년이 되는 해의 일이었다. 신민아 씨가 연우를 키우는 방법은 내가 실천하고 싶었던 것들 나열의 연속이었다. 일상 포스팅에 잠시 언급한 적 있다. 나에게 아이가 있다면, (물론 그런 걸 내가 결정할 수는 없겠지만) 성별은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나도 내 방식대로 키운 아들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방식대로 키운'이라니, 이 얼마나 무서운 생각인가. (풉) 이 책을 읽고 있을 때 버스 창밖으로 중고등학생 남자아이들을 볼 때마다 연우와 태수 같아서, 나도 모르게 양순한 마음이 되었다. 뭐, 더 할 말이 있나. 그저,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모든 소년들에게 안녕을 고한다.



고독은 학교 숙제처럼 혼자 해결해야 하는 것이지만 슬픔은 함께 견디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슬플 때에는 반드시 네 곁에 있을게. (P.19)


비밀이 있다는 거 좋은 일이야. 비밀 그거, 사유재산이나 마찬가지지. 남몰래 인생의 부자가 되는 거니까. 근데 일단 있다는 걸 들켰으면 신고하고 세금은 내야 할걸. (P.243)


주변의 위험한 물건 다 치워놓고 마음껏 놀게 해주는 것. 그게 방목이야. 대부분 혼자 하도록 내버려 두지만 결정적일 때는 개입을 해야 해. 그러니까, 멀리 있더라도 연결은 끊어지면 안 된다 이거야. 그런 걸 방목의 기술이라고 하지. (P.251)








# 밑줄_




세계라는 공간은 시간의 파이프가 물샐틈없이 친친 감긴 기계장치로 둘러싸여 있고,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에서 그 파이프로 시간이 공급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어느 찰나에 그 시간의 파이프가 아주 잠깐 이탈했었고, 그 짧은 순간 히말라야의 크레바스 같은 끝없이 길고 좁은 틈 같은 게 생겨났으며, 거기로 소중한 무언가가 빨려 들어가서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린다면, 선로를 이탈한 시간은 문득 휘어졌다가 다음 순간 곧바로 다시 궤도로 들어섰지만, 분명 그 전과 같은 시간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P.12)



가끔 이상한 기분에 휩싸일 때가 있다. 시간이 부분적으로 정지하는 느낌 같은 것. 하나의 장면이 일시에 정지하는 게 아니라, 한 장소에 있지만 사람마다 각기 다른 시간 속에 정지되어 있는듯한 기분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마치 박물관에 전시된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았던 동물의 박제처럼 아무 관련 없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존재들이 돼버린다. (P.300)



하나의 공간에 함께 있는 순간에도 어쩌면 우리에게는 각자의 시간이 따로 있어 서로 다른 파이프를 따라 엇갈려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서로를 향해 달려왔지만, 우리가 가장 가까워지는 순간이란 이제부터 멀어져야 하는 시간이 시작된다는 뜻 아닐까. 불현듯 몸이 노곤해진다. 나에게는 이따금 이런 순간이 있지. 기쁨,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 다음의 슬픔, 그 끝의 무기력함. (P.301)



- 너는 내가 어떤 사람이든 미워하지 않은 것 같아.

- 그래?

- 결석했을 때, 너 한 번도 연락 안 했잖아. 나 혼자 아주 많은 생각을 해봤거든. 근데 마음이 불안하지 않았어. 이유 같은 건 모르겠어. 그냥 나는 네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건 믿는 거잖아.

- 강연우, 너는.

  뭐랄까,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런 게 없는 것 같아. 그렇지?

- 글쎄.

  대신 난 어른이 돼야 해.

- 어른이 되면 어떻게 되는데?

- 그건……

- 난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

  어른들이 해야 하는 일은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

  네 말대로 시간이 멈춘 장소 같은 게 있다면 좋겠어. 그런 데라면 취직할 수 있을 것 같아.

- 날짜변경선을 지키는 건 어떨까. 국경을 지키는 수비대같이. 거기에서 시간을 지키는 거야.

- 허공에 뜬 사무실에서 말이지? 우주 정거장 같은 거네?

  가보고 싶어. 세상 끝에 있는 우주정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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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회사를 떠나지 않기로 했다 - 불안한 미래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직장인들을 응원하는 책
양은우 지음 / 영인미디어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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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언젠가부터 욜로족이 증가하고 있다. 욜로(YOLO)는 ‘You only live once’의 줄임말이다. 욜로족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가치관은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그것은 내가 아닌 타인의 삶이니만큼 존중해주어야 하니까. 실제로 내 주변에도 월세와 생활비만 딱 벌어서 사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더 이상 일에 쓸데없이 저당잡히지 않는다는 삶에 대해 스스로 매우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다.

2년 전, “엄마 나 이거 하고 싶어요. 저것도 하고 싶어요. 갖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아이에게 윗집 언니는 정말 무덤덤하게 “사람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어.”라고 말을 했다. 그것이 그때 고작 네 살짜리 아이한테 한 말이어서 놀라웠지만, 나 역시도 그 논리에 공감한다. 하지만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삶에 대해 뭐라고 할 수는 없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면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까?




사람이 일을 통해서 만족하고 혹은 인생의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경제적 어려움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되 경제적으로 여유를 가질 수 없다면 그 일 또한 고통스러운 생존의 수단이 될 뿐이다. 비록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지만 경제적으로 기본적인 요구수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과연 그 일로부터 만족을 느낄 수 있을까? (P.66)​



어릴 적, 내가 아주 잠시 만났던, 기억 속의 그 사람을 꺼내어본다. 그 사람에 대해 누군가한테 이야기를 해본 적도 없었고, 할 이야기가 많지도 않았으며, 그 정도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 이야기를 이렇게 꺼내게 되다니. 당시 그 사람은 지금의 내 나이보다 좀 적거나 내 나이 정도 되었겠지. 나와 아홉 살이 차이가 났으니까. 아닌가, 일곱 살 차이가 났던가. 그 사람과 연애를 하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지만, 약간의 스킨십이 있었으니 연애를 하지 않았다고 하기에도 애매한데, 내가 그 사람과의 만남을 지속하지 않은 이유는 너무나도 단호했다. 그 사람이 (그것을 욜로라고 할 수 있을까 싶지만) 지금의 욜로족과 ‘비슷한’ 사람이었다. 서른 가까이 되는 그 사람의 직업은 사진 기사였다. 실제로 내 앞에서 카메라를 가져온 적이 없어 사진을 잘 찍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결혼식장이나 돌잔치에 카메라를 들고 가서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이었다. (아, 생각해보니 본인이 찍은 사진을 보여준 적도 있었는데, 그게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주말에는 만날 수가 없다고 말을 하기도 했다. 그는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해 할 수 있는 한 말을 아끼고 싶어했다. 말을 하지 않았으니 나도 구태여 묻지 않았는데 이따금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은 일에 대해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 사람은 그때 벌어 그때만을 사는 사람이었다. 낭비하거나 사치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일이 없으면 돈에 쩔쩔 매었다.

나는 조금 많이 두려웠다. 나는 당시에 나의 취업 전선에 뛰어들기 전 휴학을 했지만 언젠가는 직장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막연히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그 사람처럼 될까 봐. 내 용돈으로도 충분히 카페 데이트 정도는 할 수 있었는데, 데이트 장소는 인근 놀이터였던 것도 기억이 난다. 나는 그런 것들이 초라했다. 고등학교 때나 하던 그런 것들이 즐거울 수는 없었다. 나는 그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에 대해 생각도 잘 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할 때에, 오로지 그 순간만을 이야기했다. 나는 당시에 너무나도 어린 생각을 지녔기에 누군가와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적어도 그 사람은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도 확실했다.


그리고 나서 몇 번의 연애 이후에 지금의 그이를 만났다. 일에 대한 프라이드도 있었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으며, 일에 대한 욕심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언젠가 그이는 말했다. “취미는 취미로만 해야지, 생계의 수단이 되면 안 돼. 더 이상 취미가 될 수 없어.”라고. 나는 당시 그가 내뱉는 말들에 홀랑 빠진 것 같다. 그것은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들이었다. 실제로 지금의 직업을 가지기 이전에 스물한두 살에 단순히 축구 유니폼이 좋아서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들을 토대로 이야기를 해준 것들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월급을 받으면 축구 유니폼을 다시 구입했다고 했다. 그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사진을 찍는 것도 좋아하고, 여전히 축구 유니폼을 수집하는 것도 좋아하고, 컴퓨터 조립도 잘 하고, 컴퓨터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청탁을 받기도 하지만 (그래서 집에 남의 컴퓨터를 들고 오거나 그로 인한 야근을 하는 경우는 그의 몫) 그는 그런 일들로 돈을 벌 생각이 추호도 없다고 한다. 취미는 취미로만 남기고 싶다고.

결혼 후 나는 그의 일 욕심에 힘들 때도 많았고, 지금도 그럴 때가 참 많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일하는 모습의 그이를 지지하는 것을 넘어, 나는 무척, 몹시, 매우, 대단히 존경한다는 것이다. 그이는 본인에게 주어진 어떤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고 싶어 하고, 잘 하고 싶어 하며, 최고가 되고 싶어 한다. 실제로 그는 항상 최고의 반열에 들어서고, 사람들은 그이에 대해 입을 모아 칭찬을 한다. 말뿐이라면 내가 믿을 수가 없겠지만, 그가 받아오는 보너스의 퍼센티지는 A등급도 아닌 S등급으로 늘 남들보다 월등하게 앞섰고, 그가 받아오는 표창장, 상금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이를 아는 사람들 틈에 함께 있으면 그이를 칭찬해주는 사람들 앞에서, 그이의 아내인 게 퍽 자랑스럽고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그렇기에 일에 대해서만큼은 나는 다른 누군가도 아닌 그이를 닮아가고 싶다. 하지만 이런 부분에 대해 그이를 칭찬을 하고 추켜세워주지만 굳이 말을 하지는 않는다. 이미 잘 하는 일들이 아닌 잘 하고 싶어 하는 일들에 대해 부담을 가지게 될까봐 그렇다. 나는 내가 그런 그이에게서 많은 자극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는 배움에 있어서는 투자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내가 뭔가를 배우고 싶다고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럼 해야지!”라고 묻고, 그 뒤에야 “어떤 걸 배우고 싶은데?”라고 묻는다. 나는 그의 그런 대답 방식조차 너무나 마음에 드는 것이다. (아무래도 콩깍지가 단단하다. 벗겨지긴 하나. 일에 대해서는 벗겨지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당신이 생각하는 자기계발

1. 현재 본업으로 삼고 있는 일을 본질적으로 더 잘하기 위해 자신의 역량을 향상시키는 것

2. 현재 본업으로 삼고 있는 일을 해 나가는 데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거나 기회를 창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역량을 향상시키는 것

3. 현재 본업으로 삼고 있는 일 이외에 자신이 평소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해 역량을 향상시키는 것

4. 본업과 무관하고 자신이 꼭 하고 싶었던 일도 아니지만 미래의 어느 순간엔가 현재의 본업을 대신하여 경제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 나가는 것

5. 기타 현재 본업과 관련 없지만 언젠가는 써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거나 막연히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서 공부를 하는 것

자기계발이라고 하면 나를 위해 투자하는 모든 것을 자기계발이라고 하는 생각하는 편인데,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자기계발에는 뭐가 있을까 생각하며 종이에 끄적여봤다. 크게는 건설안전기사 자격증, 한국사 강의 듣기, 한국어 교원 자격증과 독서논술지도사 자격증이 있었다. 건설안전기사는 1번에 속하고, 한국사 강의는 3번에 속한다. 한국어 교원 자격증과 독서논술지도사 자격증은 3번에 속했었지만, 2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어쩌면 4번에 속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가 현재 본업을 언제까지 이어서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과 더불어 불안함도 존재함을 느끼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고, 조금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한국어 교원 자격증 2급과 독서논술지도사 자격증은 올해 취득한 상태인데, 나는 올해 상반기에 이직할 회사를 고르는데, 여전히 본업을 중심에 두고 찾고 있다. 책에서처럼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배운 게 이거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 저자는 여기에서 1번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직장생활을 하는 순간부터 자유를 담보 잡히고 대신 소득을 보장받는다. 그리고 그 삶이 주는 편안함에 취해 버려 자기 자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데 게을러진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갈수록 높아지는 상황에서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사회적 지위의 상실 위험은 증폭되고 있다. 현대의 삶을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수단인 ‘돈’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가로막힘으로써 사회의 하류층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P.61)​

 


조금 우스운 사실이 있다. 책 제목만 보더라도, <나는 회사를 떠나지 않기로 했다>​인데, 저자는 회사를 떠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현재 저자는 오랜 시간 동안 강연이나 강의를 꿈꾸며 지냈지만 이제 나는 ‘과연 이것이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막연히 이 일이 좋아 보였던 건 아닌지 반성하고 있다. (P.75)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라고 타인에게 말했지만 실제로 본인의 꿈꾸던 삶이 냉혹한 현실과 맞닥뜨리면서 얼마나 허황된 것들이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저자는 책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은, 회사를 무작정 떠날 생각 말고, 그곳에서 본인의 본업을 통해 자기전문화를 꾀하라고 말한다. “삶의 자유도와 행복은 자신이 하는 일의 전문성과 비례한다”는 말에 대해 나는 깊이 공감한다. 전문성을 갖춘 사람은 그 전문성으로 인해 높은 시장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와 사회로부터 버려진 개인은 스스로를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 이 책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 국가와 사회에 압력을 가하면서도 그 압력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를 대비하여 우리는 스스로 노력을 할 수밖에 없다. 국가와 사회는 개개인들을 위해 쉽게 변하지 않으려는 성질을 지녔기 때문이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퇴보하고 뒤처지며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다. 사회는 경쟁이라는 말을 굳이 쓰고 싶지 않지만, 평생직장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대한민국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해져서 만연해있는 게 사실이니까.

시간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투자하여 차별화된 역량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축적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자산을 이용하여 보이지 않는 자산을 만들어 내는 것이 자기계발


저자는 계속해서 역설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계발’이 아니라 ‘자기전문화’가 필요하다고. 그래야만 우산 속에서 당당히 걸어 나올 수가 있을 것이라고.

내가 이 책을 읽기로 했던 이유는 단순하게 나도 회사를 떠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말하는 회사를 떠나지 않기로 한 것은, 이 책과는 좀 다르다. 이직을 최소화하고 몇 년이 되었든 그곳에서 좀 깊이 있는 일을 하고 싶은 까닭이었다. 기존에 나의 바운더리에서 벗어나 조금 더 색다른 일을 하고 싶어서, 하고 싶은 일은 페이가 맞지 않아서 등등의 이유로 이직을 감행했다. 그 결과, 부끄럽지만 7년이라는 경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떤 것에도 전문화를 갖추지 못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물론 지금도 알아보는 일들 중 원하는 일에 대해서는 페이가 맞지 않는 일이 참 많다. 특히 내가 가려는 곳이 그렇다. 오히려 그보다 쉬워 보이는 일들의 페이가 좀 더 센 것도 많아서 좌절하기를 몇 차례. 2012년의 힘겨움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돌아갈 곳은 그곳뿐인 것 같으니까 나는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서 내 전문화를 좀 더 꾀하고 싶다.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되니까, 내 미래를 위해서라도. 좋아하는 일을 찾지 말고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라는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의 말을 되새기면서, 나의 역량을 좀 더 키워가야지. 개인적으로는 이직을 앞둔 상태이고 근래에 일에 대한 고민이 많았기 때문에 이 책은 꽤 많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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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라테
김흥숙 지음 / 서울셀렉션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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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 우선 커피를 탔다. 커피를 타기 전에는 항상 고민을 한다. 믹스를 마실지, 블랙을 마실지, 우유를 데워 마실지. 아마 카누가 있었다면 난 일말의 고민 않고 그것을 타 마셨겠지만, 집에 있는 커피는 G7뿐이어서 믹스를 탔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근래에는 믹스커피를 마시면 니글거림이 더 심해진다. 그런데도 믹스커피를 꾸준하게 타서 마시는 이유는, 두 모금 때문이다. 첫 한 모금의 달콤함과, 또 한 모금의 안도감. 기실 그것은 직장인의 하루를 열어주는 활력이 되었던 기억 때문에, 집에서도 종종 그 시간을 즐기곤 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커피향. 믹스커피는 향이 좋다. 누추한 곳에서 맡는 믹스커피일수록 더욱 그렇다. ​나는 어쩐지 믹스커피에 뭔가를 첨가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지녔는데, (이를테면 우유) 그럴 거면 카페에서 파는 값비싼 커피를 한 잔 마시는 게 낫지! 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예전에 그렇게 마셔봤는데, 흡사 라테 맛이 날까.하고. 그런데 맛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핑계를 대고 변명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카페에 홀로 있을 때, 생각이 많아진다. 커피를 한쪽에 밀어놓고, 그동안의 생각을 정리한다. 도서관에 갈 때는 독서노트도 있어야 하고 책도 있어야 하고 메모지도 있어야 하고 그 외의 부수적인 것들도 있어야 하지만, 카페에 갈 때 책을 읽을 게 아니라면 메모지와 펜만 있으면 된다. 카페에 혼자 가면, 사람들을 구경하고 (혹은 관찰하고) 그 모습을 보며 자연스러운 생각을 적기도 하고, 그동안 나를 억눌렀던 것들에 대해 조곤조곤 풀어내는 시간을 갖기도 하며, 나의 방향을 다시금 잡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카페에서 오롯하게 혼자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들이다. 가끔 혼자 맥주를 마실 때가 있는데 약간의 생각을 제외한 심도 있는 생각은 해보려고 시도해보지도 못할 것 같다. 나는 술을 한 병을 마시든, 한 캔을 마시든, 한 잔을 마시든, 한 모금을 마시든 내 정신은 그때부터 온전치 못하게 되는 까닭이다.

어쨌든 나는 카페에서 결제까지 다 끝내고 나서는, 아이스가 아닌 이상에야 “뜨겁게 해주세요.”라고 한 번 더 힘주어 주문한다. 그럴 때면 간혹, “HOT으로 주문한 거 아니세요?” “뜨거운 커피는 뜨겁게 나와요.”라고 말하는데, 그럴 땐 그냥 대꾸를 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말하는 ‘뜨겁게’는 ‘기본으로 나오는 뜨겁게 보다 몇 단계 위인 뜨겁게’가 맞다. 나는 커피를 앞에 두고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어서 그 생각이 멈추고 커피를 마실 때에 그 커피가 적당히 뜨거웠으면 하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J랑 같이 갈 때도 얘기하느라 바쁘기 때문에 그때도 그런 걸 보면, 그냥 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일이 서투른 사람인 걸까.)

 

 

 

그래서 <생각라테>가 궁금했다. tbs 교통방송 ‘즐거운 산책 김흥숙입니다’의 ‘들여다 보기’코너에서 읽은 적이 있는 이 글들이라고 했다. 단순히 커피를 마시고 생각을 하는 시간들을 공유하고 싶었다고 한다면 너무 화려한 수식어고, 그냥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그게 궁금했다. 김흥숙 그녀는 라테를 마시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 라테는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그렇게 한 생각은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지, 뻗어나간다면 과연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는지, 나의 마음에도 사뿐히 내려앉는 것은 아닐지, 나는 그로 인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뭐 그런 것들. 나는 항상 책을 읽을 때면 기대감을 가지고 책을 읽곤 한다. 누구나 그렇지 않나? 나만 그러나? 기대했다가 실망한 적도 많고, 별로였지만 기대 이상으로 좋았던 적도 많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엿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의외로 흥미진진한 일이니까.

 

 

 

 

 

 

책은 꼭 사람 같아서 얼굴도 속내도 각양각색입니다. 그러니 책을 많이 읽고도 자기와 ‘다른’ 생각이나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책을 잘못 읽은 것이겠지요.

이 부분을 읽고 꽤 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나는 뭔가를 깨닫기 위해 책을 읽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채찍질을 받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재미만을 추구하며 책을 읽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책을 왜 읽지? 단순히 시간이 남아서? 예전에는 책을 읽는 것에 대해 이유가 분명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이유가 휘발됐다. 다만 소설을 읽는 이유에 대해서는 늘 생각한다. 소설을 읽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는 까닭은,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해 J군은 ‘단지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읽는 책’이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내가 딴죽 걸면 안 되겠지만은, 그래도 난 그가 소설에서만 얻을 수 있는 삶의 본연한 투명함들을 함께 공유하고 향유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 외의 책들에 대해서는, 단지 읽고 싶은 책이 있고 그 책들을 손에 쥘 수 있고 그 책들이 옆에 있으니까, 그래서 읽는다. 예전에는 그 사람의 생각을 내가 모방하게 될까 봐 남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게 두렵지 않고 이 사람은 어쩌다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를 궁리하곤 한다. 그러다 보면, 그 작가의 전반적인 생이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는, 나와 다른 생각이나 행동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는 것이 문제다. 일반인보다는 작가나 유명 연예인에게서 그런 부정적인 시선을 더 많이 가지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통’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내가 그들의 생각을 읽거나 듣기만 할 때는 좀 달라진다. 그건 ​‘일방적인’ 말이 되기 때문에. 그게 내게 별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아, 이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지나칠 수가 있지만, 한 번쯤 ‘왜 그렇게 생각해?’ 라고 묻고 싶은 말에 그는 대답해주지 못하고 대답해주지 않는다. 그속에서 친절하게 그 이유를 설명해주는 사람도 있지만 그게 충분치 못할 때가 많고, 대개는 자신이 어쩌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냥 매체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만을 말한다. 그게 상대에게 관철이 되든 되지 못하든. (그래서 어떤 것도 억압하지 않는 소설을 좋아하기도 한다. 단지 인물만을 미워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기피하는 사람이 한둘인가. 책을 잘못 읽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책을 읽는 방식은 분명 편협한 나의 사고방식을 더 편협하게 만들지도 모르고, 평생 그 속에서만 헤엄치는 게 세상의 전부인줄 아는 개구리처럼 살게 할지도 모르겠다. 정말 잘 모르겠다.

 

 

 

이사는 이별이고 만남입니다. 살던 집과 헤어져 새 집을 만나고, 익숙한 풍경, 낯익은 공기, 친숙한 사람들과 헤어져 낯선 동네, 서먹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사 날짜까지 다 정했고, 이번 주에는 기필코 모든 것을 계약하고 돈을 지불할 예정이어서 이제 정말 곧 이사를 앞두고 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집에 대해 얼마나 부정적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어제 하루를 되돌아보며 이 집에 오기까지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생각해보면 얼른 이사를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서도, 지금 내가 있는 이 집이 너무 추워서 비록 오늘 배송되어온 황토 냉온찜질팩을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이 집에 대해 남을 게 전혀 없는 것 같은데도 이제 정말 이사 날짜를 잡고 나니 마음 한쪽이 휑뎅그렁한 것이다. 이건 어쩐지 알 수 없는 배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친숙함에서 떨어지는 게 (그이에게 말하면 분명 걱정할테니 말할 수는 없지만) 몹시 두렵기도 하다. 그래서 김흥숙 님의 저 글은 꼭 내 마음을 대변한 것 같아 잠시 울컥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전에 이 문장을 쓸 때보다 좀 더 오래 이 문장을 들여다보았다. 나, 잘 지낼 수 있겠지!

 

 

 

생각해보면 요즘 세상이 갈수록 사나워지는 건 뼈 같은 사람은 많고 관절 같은 사람은 적어서일지 모릅니다. 뻣뻣하게 제 주장만 하는 뼈와 달리, 뼈와 뼈의 협력을 돕는 관절. 그렇게 평생 애쓰다 보니 염증도 생기고 고통도 겪었겠지요.

나는 철저하게 뼈 같은 사람인데, 이제는 뼈와 관절의 사이 정도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뼈 같은 사람을 해보니 정말 피곤한데, 관절 같은 사람이 되는 일 역시 내 입장에서는 이게 아닌데 참아야 하는 일이 많을 것 같아 그 역시 얼마나 답답할까. 그러니까 그 중간의 사람. 이렇게 말하니, 물러터진 내 친구 김지혜는 내게 그런 말을 했었다. 본인과 나를 반반씩 섞어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그래, 생각해보니 그 말이 딱 맞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반반을 딱 섞을 수 없으니, 내가 노력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좀 더 융통성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얻는 방법을, 고심해야 하는 수밖에. 어떻게 하면 융통성 있게 살아갈 수 있지? 음. 그러려면, 어쩌면, 난 우선 모든 것을 다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보기 싫어도 보고, 듣기 싫은 말이어도 한 귀로 흘리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꾹 참고, 그러면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나? 생각하다 보면 끝이 없다. 나는 좀 더 편하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지금은 그게 전부인 줄 알지만, 내가 조금씩 나의 삶에 애착을 가지고 살아가다 보면, 지금의 나의 생각과 행동들이 뚜렷하게 보이겠지. 아! 그러지 말걸! 이라고 생각했던 20대의 내 모습을 회상하는 30대의 내 모습이 있는 것처럼.

 

 

 

 


읽기가 편했다. 정말 쉽게 읽히는 글이 있다면, 좀 더 생각을 하게 하는 글도 있었다. 그런 글들은 갇혀있던 나를,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내 주변을, 환기시킬 수 있었던 시간들이 많았다. ​오늘따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공기가 맑다. 따뜻한 우유 한 잔 데워서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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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만 남기고 버려라 - 쓸데없는 것들을 버리고 1%에 집중하는 기술
후지요시 타쓰조 지음, 이은정 옮김 / 제이플러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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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는 내가 쓰던 물건을 남기고 버리는 일을 일부러라도 찾아서 하는 편이다. 단순하고 간결한 것들로 이루어진 삶을 살고 싶은데, 내 소망과는 다르게 나는 쓸데없는 것들로 꽉꽉 채워진 삶을 살고 있던 건 아닐까. 물건에 국한되었다고만 생각했는데, 비단 물건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조차도 그렇다는 것을 느낀다. 나에게 좋지 않은 버릇이나 습관들로 나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나 살펴보면, 몇 덩어리는 빼서 버리고 싶을 정도이니. 그렇게 떼어내버리면 나라는 사람이 없어질 것만 같은 착각이 인다. 하루에 하나씩, 내가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좋지 않은 습관을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기 이전에 나는 어떤 것을 버리고 싶은지, 그것을 버리려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우습게도 내가 가지고 싶은 습관에 대해서는 무던히 노력을 하면서도 갖지 못하는 게 많기도 했지만, 버리고 싶은 습관에 대해서도 노력을 하면서 버리지 못하는 것도 많았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이 노력의 여하와 내가 얼마나 그것에 절실한가에 따라 다른 것이라는 생각도 하기는 했지만, 나 같은 경우는 의식하며 살지 않는 이상 좋지 않은 습관은 이미 몸에 배어있어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행동들이 많기에 평생 나를 따라다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량 부족의 덫’에 걸려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모두 뭔가를 하려고 한다. 시도해보지 못한 것에 시도를 해보려고 하기도 하고, 이미 시도한 것을 더 열심히 하려고 하기도 하며, 어떤 것은 처음부터 시도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기도 한다. 포스팅을 하는 오늘, 내가 시도해보지 못한 것을 시도하려고 했던 것은 꼬막무침이었고, 이미 시도한 것을 더 열심히 하려고 한 것은 걷기였으며, 처음부터 시도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은 택시 타지 않기였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로 오늘은 택시를 탔다. 난 택시 특유의 향과 더불어 백미러로 하여금 마주쳐지는 기사님과의 눈인사를 결코 좋아하지 않는데) 타인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내가 그들의 입장을 세세하게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적어도 나는, 항상 무언가를 하고, 하려고 하고, 하지 않기도 하려고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는 나의 하루는, 책에서 말한 것과 같이 ‘용량 부족의 덫’에 걸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책에서 네 가지에 대해 주의 깊게 읽었다. ‘아직 시간이 있다는 마음’과 이별하기, ‘언제라도 행동할 수 있다’와 이별하기, ‘이미 예정된 스케줄’과 이별하기, ‘SNS’와 이별하기였다. 특히 ‘아직 시간이 있다는 마음’과 이별하기에서 단순히 날짜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 기간 중에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해야 한다.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유한하다는 것을 명심하라. 였다. 내가 주의 깊게 읽었던 것 중, 아직 시간이 있다는 마음과 언제라도 행동할 수 있다는 마음은 어쩌면 동일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시간이 많으니까 괜찮아. 시작하려고 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어. 라고 말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특히 공부에 관해 그런 점을 알 수 있다. (더 잘 하고 싶어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니까 따위의 말도 안 되는 핑계들이지만) 어쨌든 현재 미루고 있는 것은 단연 그것뿐이다. 나는 한 가지 일밖에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공부를 하면 자연스레 저 공부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우선순위를 정해놓고 차근차근해야 하는데, 하나를 끝내야 또 하나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인 거다. 물론 내 공부 방식이기 때문에 누구도 내게 그것에 대해 “너 틀렸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리고 SNS를 하는 시간, 수동적으로, 그리고 습관적으로 SNS에 접속하는 습관을 내려놓으라고 하며, ‘NO SNS TIME’을 정해두라고 한다. 내가 SNS에 접속을 하지 않을 때가 언제지? 하고 생각해보면, 내가 순간적으로 집중할 때밖에 없었는데, 이럴 때는 정말 핸드폰 중독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책을 읽을 때에는 방해를 받고 싶지 않지만 핸드폰이 옆에 있으면 자연스레 핸드폰으로 손이 가게 되니, 일부러 핸드폰을 멀찍이 떨어뜨려놓고 책을 읽을 때가 많다. 편리한 삶은 집중력을 저하시키는데 탁월한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게 아니라면 내 의지력이 문제일지도 모르고.



그 외에는 적당히 가져도 괜찮을 습관들도 있어서 ‘굳이?’라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글을 읽다 보면 버리고 싶은 사람들도 있겠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무언가를 이별하라면서 그에 대한 페이지는 두세 페이지밖에 되지 않다 보니, 이런 것들을 버리는 것에 대해 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며 저자가 조금 무책임하고 무성의한 사람이 아닐까 했다. 하지만 그것들을 버리려고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이 되는 것이니 가볍게 저자의 말을 조언 삼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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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질문들 - 당신의 견고한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지 모를
김가원 지음 / 웨일북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당연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해가 뜨면 해가 지는 것도,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다는 것도,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단풍이 물든다는 것도 모두 당연하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입장은 언제나 인간에서 시작된다. 이를테면, 해가 뜬다면 둥실둥실 뜨는지 부끄러워하며 뜨는지, 해가 진다면 슬프게 지는지 아름답게 지는지 섹시하게 지는지, 여름에 더우면 얼마나 더우며 겨울에는 얼마나 추운지, 봄에는 어떤 꽃이 어떻게 피고, 가을에 물드는 단풍은 마음에 어떤 동요를 불러일으키는지,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봄에 피어야 하는 개나리가 겨울에 핀다면, ‘왜’ 개나리가 피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우리는 그것을 ‘이상한 현상’이라고 속단해버리곤 한다.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한다. 세상을 조금 낯설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책에서는 감각, 믿음, 마음, 욕망, 타자, 진리에 관하여라는 타이틀 아래, 총 서른 개의 질문에 대해 묻고 대답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중에서 마음에 와닿았던 몇 가지를 풀어보고자 한다.



 


1. 가까이에 있어서 크게 보이는 것인가. 크게 보여서 가까이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한 번쯤은 원근법을 표현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멀고 가까운 물체를 제대로 캐치하여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우리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다. 거리감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서 습득되는 것이기 때문에그럼 나는 내 경험을 비추어 묻고 싶다. 어릴 적 나는, 산과 나무, 집과 사람을 한 스케치북에 그릴 때 비율을 무시하고 그림을 그렸다. 왜? 아직 어리기 때문에 사람은 집보다 훨씬 작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해서? 음. 표현력이 부족해 내 생각을 다 풀어내기는 좀 힘이 들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이 궁금한 부분이기는 하다.


2. 읽던 책을 덮고 손도 아래로 내려놓고 눈을 감아라. 책이 있는가?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데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나?

책은 보여서 있는 것이다. 감각되지 않는 한 그 어떠한 것도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있다(존재한다)고 말하고 싶다면 그것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의 영역에 서야 할 것이다. 외부 세계는 감각되는 순간에만 그렇게 있을 뿐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단순히 책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사랑’에도 반영을 시켰다. (물론 책에는 사랑에 대해서도 쓰여있기는 하지만, 그것들보다는 이 부분이 더 와닿아서) 사랑도 물론, 보이지 않는다. ‘그가 나를 사랑할 것’이라는 믿음 아래 우리는 그 사랑을 지속하고 유지할 수 있는 것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외부 세계는 감각되는 순간에만 그렇게 있을 뿐이지만, 내부 세계는 감각되는 순간으로는 절대 알 수가 없는 법이니까.

3. 전망대가 있는 타워 근처에 사는 당신, 거실에서 타워가 보인다. 가까이 보고 싶어 타워까지 걸어간다. 가까이서 본 타워는 거대한 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전망대를 올라간다. 내가 사는 곳이 내려다보이고 하나의 도시가 장난감처럼 보인다. 타워 속으로 들어왔으니 타워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거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반드시 어딘가에 서 있을 것이고 그 자리에서 보는 세상은 그 자리의 관점일 뿐이다. 어느 누구도 나와 같은 자리에 동시에 서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조금씩 다른 각도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나는 곧잘 그이에게 나와 함께 있었으니까, 나와 함께 보았고, 들었고, 먹었고, 맡았으니까 그이 역시도 나와 같은 감정을 공유할 것이라는 착각을 자주 범하곤 한다. 그것은 그이와 나는 다른, 독립된 인격체라는 사실을 자주 잊곤 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그랬으면 좋겠다는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내가 이렇게 하면 당연히 그이가 이렇게 해주겠지. 이런 것들 말이다. 그래서 나의 감정과 다르거나 때로 내 기분을 이해해주지 않거나 내가 예상하던 것과 다른 것들에 대해 서운함을 넘어 서러움을 느낄 때도 적지 않다. 지금은 그것에 대해 나름대로의 고찰을 통해서 다를 수 없음을 인정하는 시간을 자주 갖는 편이지만, 그래도 이따금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곤 한다. 나는 여전히 노력이 더 필요함을 느낀다.


4. 친구가 울고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몇 해 전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네 마음 나도 알아. 힘들지?” 정말 친구의 마음을 아는가? 아는 것은 당신의 슬픔 아닌가?

당신은 친구의 마음에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진짜 공감하고 있는 것인가? 당신은 친구를 바라보며 당신 자신의 경험을 떠올린다. 그리고 슬프다. 그 슬픔은 친구를 거쳐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친구의 슬픔으로. 그러나 나로부터 출발하여 다시 돌아온 감정일 뿐이다. 그 친구가 어떤 마음일지는 알 수 없다. 공감은 영원한 착각일지 모른다.

이 부분을 읽고 나서는 한동안 멍했다. 나는 공감에 대해 굉장히 서투른 편이다. 특히나, 나는 위로를 정말 잘 하지 못하는 편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았을 때 느꼈던 그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전달을 해준 적이 거의 없다. 내가 위로를 많이 받아보지 못한 탓이다. 그 감정일 때 어떤 위로를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나는, 위로를 잘 건네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다. 나는 이미 내 마음이 아물었거나 아물고 있는 상황일 때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편이었다. 위로를 받기 위해 그랬다기보다는, 나는 그냥 그때 그랬어. 정도를 말하고 싶었다. 그럴 때면 친구들은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넸는데 내게는 그 이야기를 해도 정말 아무렇지 않을 때였기 때문에 그렇게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그저 당시의 나를 위로하려는 친구들의 마음이 고마웠다.

그런데 나는, 정말 위로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은 모르는 척하고 넘어갈 때가 많은데, 여전히 잘 모르겠다. 고등학생 때 친구의 아버지께서 편찮으셔서 친구들끼리 병문안을 간 적이 있지만,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아무도 몰랐다. 친구는 알리지 않았고, 찾아가 보지 못했다. 나는 그게 그렇게 한스럽다. 친구가 그때의 일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때가 간혹 있는데, 그때마다 나는 불에 덴 것처럼 마음이 따갑다. 친한 친구가 가장 힘들 때 찾아가지 못한, 곁에 있어주지 못한, 밥 한 끼 같이 먹어주지 못한 슬픔이다. 내가 가서 뭘 할 수는 없었겠지만, 뭔가를 하지 않아도 힘들 때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이 됨을, 이제는 잘 알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더 아프다.

그리고 그이. 그이는 내게 모든 것을 다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내가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힘들어할 것 같은 일들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어쩌다가 내가 알게 된 사실들에 대해 그를 위로를 해주는 것이란 게, 겨우 그를 안아주는 일이고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차려주어 마음을 덮이는 일이다. 나의 위로 방식은 여전히 소극적이며 미온하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그에게 잠시라도, 아주 잠시라도 세상과 그를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기를 소망한다.


5. 당신은 당신이 만들어낸 생각에 화가 난 것이다. 모든 것은 당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신은 철저하게 당신의 생각에 따라 상황을 판단하고 이해했다. ‘화’란 그런 것이다. 우리에게 화를 유발하는 것은 상대가 아니다. 상대를 나의 마음에 대입할 때 발생한다. 상대에게 나의 마음을 이입해서 그를 이해하는 방향이 아니다. 상대를 나의 자리에 놓을 때 나는 나의 생각에 따라 상대의 행동을 판단하고 재단한다. 그러나 당연히 상대는 나와 같지 않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간극이 발생하고 그 간극은 나의 오해들로 채워진다. 그러므로 나에게 화를 유발하는 대상은 상대가 아닌 바로 ‘나’의 생각이다. 화를 푸는 방법은 간단하다. 바로 마음의 방향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 상대의 마음을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상대로 향하게 하는 것. 그의 말을 들어 보고 그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 나의 는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나는 가지치기를 잘 하는 사람이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상상하여 그것을 사실로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는, 매우 아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마음에 두고두고 간직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야경을 보기 위해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떠났던 2015년을 생각했다. 나의 욕심대로라면 매일매일 야경을 보고 싶었지만 하루는 부다 왕궁에서 국회의사당 야경을 보았고, 하루는 다뉴브강에서 페리를 타고 국회의사당과 부다 왕궁의 야경을 보았으며, 하루는 도심 속에서 머물며 마무리했다. 그러면서 내게 주어진 4박 6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원했던 만큼의 야경을 보지는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에게 말을 했었다. “우리는 야경 속에 들어와 있어. 다른 사람들이 국회의사당이랑 세체니 다리를 보고, 사진을 찍을 때 우리가 이곳에 있잖아.”라고. 나는 알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는 늘, 야경 속에 있었다고. 그것을 그 당시에 깨달은 것은 정말 천운이었다. 그것을 지나고나서 알았더라면 당시의 아름다움보다 아쉬움이 더 컸을 테니. 모든 것이 그랬다. 나의 시선이나 관점도 조금만 바꾸면 달리 생각할 수 있었다. 매번 주어지는 당연한 일상들 역시 감사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세상에 감사할 일은 없었다. 감사함은 삶의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대개 익숙하고 친숙한 것에 대해서는 “왜?”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 힘이 든다. 그래서 나는 사고의 전환을 낯섦과 동일시했다. 낯선 것에 대해서는 궁금하고, 궁금하기 때문에 물음표가 따른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에 대해 탐구를 하고 고찰해야만 한다. 그랬을 때, 우리의 익숙함은 낯섦과 마주 설 수 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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