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라테
김흥숙 지음 / 서울셀렉션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기 전, 우선 커피를 탔다. 커피를 타기 전에는 항상 고민을 한다. 믹스를 마실지, 블랙을 마실지, 우유를 데워 마실지. 아마 카누가 있었다면 난 일말의 고민 않고 그것을 타 마셨겠지만, 집에 있는 커피는 G7뿐이어서 믹스를 탔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근래에는 믹스커피를 마시면 니글거림이 더 심해진다. 그런데도 믹스커피를 꾸준하게 타서 마시는 이유는, 두 모금 때문이다. 첫 한 모금의 달콤함과, 또 한 모금의 안도감. 기실 그것은 직장인의 하루를 열어주는 활력이 되었던 기억 때문에, 집에서도 종종 그 시간을 즐기곤 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커피향. 믹스커피는 향이 좋다. 누추한 곳에서 맡는 믹스커피일수록 더욱 그렇다. ​나는 어쩐지 믹스커피에 뭔가를 첨가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지녔는데, (이를테면 우유) 그럴 거면 카페에서 파는 값비싼 커피를 한 잔 마시는 게 낫지! 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예전에 그렇게 마셔봤는데, 흡사 라테 맛이 날까.하고. 그런데 맛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핑계를 대고 변명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카페에 홀로 있을 때, 생각이 많아진다. 커피를 한쪽에 밀어놓고, 그동안의 생각을 정리한다. 도서관에 갈 때는 독서노트도 있어야 하고 책도 있어야 하고 메모지도 있어야 하고 그 외의 부수적인 것들도 있어야 하지만, 카페에 갈 때 책을 읽을 게 아니라면 메모지와 펜만 있으면 된다. 카페에 혼자 가면, 사람들을 구경하고 (혹은 관찰하고) 그 모습을 보며 자연스러운 생각을 적기도 하고, 그동안 나를 억눌렀던 것들에 대해 조곤조곤 풀어내는 시간을 갖기도 하며, 나의 방향을 다시금 잡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카페에서 오롯하게 혼자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들이다. 가끔 혼자 맥주를 마실 때가 있는데 약간의 생각을 제외한 심도 있는 생각은 해보려고 시도해보지도 못할 것 같다. 나는 술을 한 병을 마시든, 한 캔을 마시든, 한 잔을 마시든, 한 모금을 마시든 내 정신은 그때부터 온전치 못하게 되는 까닭이다.

어쨌든 나는 카페에서 결제까지 다 끝내고 나서는, 아이스가 아닌 이상에야 “뜨겁게 해주세요.”라고 한 번 더 힘주어 주문한다. 그럴 때면 간혹, “HOT으로 주문한 거 아니세요?” “뜨거운 커피는 뜨겁게 나와요.”라고 말하는데, 그럴 땐 그냥 대꾸를 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말하는 ‘뜨겁게’는 ‘기본으로 나오는 뜨겁게 보다 몇 단계 위인 뜨겁게’가 맞다. 나는 커피를 앞에 두고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어서 그 생각이 멈추고 커피를 마실 때에 그 커피가 적당히 뜨거웠으면 하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J랑 같이 갈 때도 얘기하느라 바쁘기 때문에 그때도 그런 걸 보면, 그냥 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일이 서투른 사람인 걸까.)

 

 

 

그래서 <생각라테>가 궁금했다. tbs 교통방송 ‘즐거운 산책 김흥숙입니다’의 ‘들여다 보기’코너에서 읽은 적이 있는 이 글들이라고 했다. 단순히 커피를 마시고 생각을 하는 시간들을 공유하고 싶었다고 한다면 너무 화려한 수식어고, 그냥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그게 궁금했다. 김흥숙 그녀는 라테를 마시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 라테는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그렇게 한 생각은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지, 뻗어나간다면 과연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는지, 나의 마음에도 사뿐히 내려앉는 것은 아닐지, 나는 그로 인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뭐 그런 것들. 나는 항상 책을 읽을 때면 기대감을 가지고 책을 읽곤 한다. 누구나 그렇지 않나? 나만 그러나? 기대했다가 실망한 적도 많고, 별로였지만 기대 이상으로 좋았던 적도 많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엿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의외로 흥미진진한 일이니까.

 

 

 

 

 

 

책은 꼭 사람 같아서 얼굴도 속내도 각양각색입니다. 그러니 책을 많이 읽고도 자기와 ‘다른’ 생각이나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책을 잘못 읽은 것이겠지요.

이 부분을 읽고 꽤 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나는 뭔가를 깨닫기 위해 책을 읽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채찍질을 받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재미만을 추구하며 책을 읽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책을 왜 읽지? 단순히 시간이 남아서? 예전에는 책을 읽는 것에 대해 이유가 분명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이유가 휘발됐다. 다만 소설을 읽는 이유에 대해서는 늘 생각한다. 소설을 읽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는 까닭은,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해 J군은 ‘단지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읽는 책’이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내가 딴죽 걸면 안 되겠지만은, 그래도 난 그가 소설에서만 얻을 수 있는 삶의 본연한 투명함들을 함께 공유하고 향유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 외의 책들에 대해서는, 단지 읽고 싶은 책이 있고 그 책들을 손에 쥘 수 있고 그 책들이 옆에 있으니까, 그래서 읽는다. 예전에는 그 사람의 생각을 내가 모방하게 될까 봐 남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게 두렵지 않고 이 사람은 어쩌다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를 궁리하곤 한다. 그러다 보면, 그 작가의 전반적인 생이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는, 나와 다른 생각이나 행동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는 것이 문제다. 일반인보다는 작가나 유명 연예인에게서 그런 부정적인 시선을 더 많이 가지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통’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내가 그들의 생각을 읽거나 듣기만 할 때는 좀 달라진다. 그건 ​‘일방적인’ 말이 되기 때문에. 그게 내게 별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아, 이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지나칠 수가 있지만, 한 번쯤 ‘왜 그렇게 생각해?’ 라고 묻고 싶은 말에 그는 대답해주지 못하고 대답해주지 않는다. 그속에서 친절하게 그 이유를 설명해주는 사람도 있지만 그게 충분치 못할 때가 많고, 대개는 자신이 어쩌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냥 매체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만을 말한다. 그게 상대에게 관철이 되든 되지 못하든. (그래서 어떤 것도 억압하지 않는 소설을 좋아하기도 한다. 단지 인물만을 미워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기피하는 사람이 한둘인가. 책을 잘못 읽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책을 읽는 방식은 분명 편협한 나의 사고방식을 더 편협하게 만들지도 모르고, 평생 그 속에서만 헤엄치는 게 세상의 전부인줄 아는 개구리처럼 살게 할지도 모르겠다. 정말 잘 모르겠다.

 

 

 

이사는 이별이고 만남입니다. 살던 집과 헤어져 새 집을 만나고, 익숙한 풍경, 낯익은 공기, 친숙한 사람들과 헤어져 낯선 동네, 서먹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사 날짜까지 다 정했고, 이번 주에는 기필코 모든 것을 계약하고 돈을 지불할 예정이어서 이제 정말 곧 이사를 앞두고 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집에 대해 얼마나 부정적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어제 하루를 되돌아보며 이 집에 오기까지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생각해보면 얼른 이사를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서도, 지금 내가 있는 이 집이 너무 추워서 비록 오늘 배송되어온 황토 냉온찜질팩을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이 집에 대해 남을 게 전혀 없는 것 같은데도 이제 정말 이사 날짜를 잡고 나니 마음 한쪽이 휑뎅그렁한 것이다. 이건 어쩐지 알 수 없는 배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친숙함에서 떨어지는 게 (그이에게 말하면 분명 걱정할테니 말할 수는 없지만) 몹시 두렵기도 하다. 그래서 김흥숙 님의 저 글은 꼭 내 마음을 대변한 것 같아 잠시 울컥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전에 이 문장을 쓸 때보다 좀 더 오래 이 문장을 들여다보았다. 나, 잘 지낼 수 있겠지!

 

 

 

생각해보면 요즘 세상이 갈수록 사나워지는 건 뼈 같은 사람은 많고 관절 같은 사람은 적어서일지 모릅니다. 뻣뻣하게 제 주장만 하는 뼈와 달리, 뼈와 뼈의 협력을 돕는 관절. 그렇게 평생 애쓰다 보니 염증도 생기고 고통도 겪었겠지요.

나는 철저하게 뼈 같은 사람인데, 이제는 뼈와 관절의 사이 정도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뼈 같은 사람을 해보니 정말 피곤한데, 관절 같은 사람이 되는 일 역시 내 입장에서는 이게 아닌데 참아야 하는 일이 많을 것 같아 그 역시 얼마나 답답할까. 그러니까 그 중간의 사람. 이렇게 말하니, 물러터진 내 친구 김지혜는 내게 그런 말을 했었다. 본인과 나를 반반씩 섞어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그래, 생각해보니 그 말이 딱 맞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반반을 딱 섞을 수 없으니, 내가 노력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좀 더 융통성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얻는 방법을, 고심해야 하는 수밖에. 어떻게 하면 융통성 있게 살아갈 수 있지? 음. 그러려면, 어쩌면, 난 우선 모든 것을 다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보기 싫어도 보고, 듣기 싫은 말이어도 한 귀로 흘리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꾹 참고, 그러면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나? 생각하다 보면 끝이 없다. 나는 좀 더 편하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지금은 그게 전부인 줄 알지만, 내가 조금씩 나의 삶에 애착을 가지고 살아가다 보면, 지금의 나의 생각과 행동들이 뚜렷하게 보이겠지. 아! 그러지 말걸! 이라고 생각했던 20대의 내 모습을 회상하는 30대의 내 모습이 있는 것처럼.

 

 

 

 


읽기가 편했다. 정말 쉽게 읽히는 글이 있다면, 좀 더 생각을 하게 하는 글도 있었다. 그런 글들은 갇혀있던 나를,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내 주변을, 환기시킬 수 있었던 시간들이 많았다. ​오늘따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공기가 맑다. 따뜻한 우유 한 잔 데워서 마셔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