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구원
임경선 지음 / 미디어창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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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 작가의 책이다. 평소 같았으면 당연히 패싱 했을 작가였다. 나는 이 작가에 나는 무척이나 인색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책은 고작 두 권 읽었다. 그중 <태도에 관하여>를 읽었을 때 느꼈던 부정적인 충격이 아직도 선연하다. 내 인생에 실망은 있었을지언정, 실패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을 근거로 나의 직립된 가치관은 빛을 발했다. 내가 잘난 줄 알고 지냈다. 2015년 가을 전까지는. 그리고 2015년 가을부터는 나는 세상에 대한 모든 회의를 지니게 되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을 상실했고, 그로 인해 내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이 전부 흔들리던 시절이었다. 때마침 그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그때 느꼈던 그 괴리감,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글을 쓰는 것이 그 사람의 일이라면, 그 글을 읽고 판단하는 것은 오롯한 내 일이었다. 그 판단에 오류가 있든 없든, 어쨌든 읽히라고 쓴 글이 아니던가. 이 사람은 어떤 일에 대해 실패를 해본 적 없겠고, 중요한 것을 ‘상실’ 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겠다. 그렇기에 가치관이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사람이겠구나. 그러니까 이렇게 사물과 현상에 대해 타인이 받을 상처는 생각 않고 확실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겠구나. 솔직함을 가장한 무례함이 있다는 것을, 그의 글을 읽고 처음 느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내가 읽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구나. 이 사람의 글을 읽어내는 것이, 내게는 나의 상실을 극대화하는 것이겠구나. 그럼 이만 안녕.하고 돌아섰다. 일말의 미련도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와서 한참을, 고민했다. 그때와 같은 느낌이 들면 당장 덮어버리겠다는 결심을 한 후에야 나는 책장을 펼칠 수 있었다. 그는 부모님을 여의고 깊은 상실감에 빠져있었다. 현실에 숨이 턱턱 막혀올 때 생각난 곳이 있었으니, 그곳은 리스본이었다. 열 살 때 부모님과 함께 살던 곳을, 그때 자신의 나이와 꼭 닮아있는 딸과 함께 떠났다. 올리브 나무의 암녹색을 떠올리게 한다는 리스본에.

그런데 읽을수록 나는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난을 하거나 책망하거나 힐난하는 눈초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글을 쓸 때에 유약해진 탓에 퍽 감상에 젖어 그런 걸까, 둥근 돌을 매만지는 기분이었다.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상냥해진다는데, 행복이 전부였던 시간을 보냈던 그곳에 나의 모든 것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이와 함께 있으니 더욱 그렇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내게 다정한 구원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늘 달랐다. 어떤 시기에는 기차 플랫폼이었고, 어떤 시기에는 계절마다 나무색이 다르게 비치는 호수였으며, 어떤 시기에는 지는 해를 볼 수 있는 다리(

)이기도 했다. 이것은 내가 생활하는 곳이 매번 달라지는 까닭이다. 그것 외에 더 확실하고 명확하게 나를 위무해준 것은 포르투갈의 호카곶이었다. 가감 없이 행복했던 때를 기억해내라고 하면 단연 몇 시간 남짓의 그곳이었다. 그렇다고 그곳에서 뭘 한 것도 아니었는데, 힘들어죽을 것 같은 날에는 그때를 떠올렸다. 그날의 날씨, 그날의 공기, 그날의 햇빛, 그날의 감정, 그날의 나, 그리고 당신, 우리. 하나도 잊을 수 없다. 그렇기에 다시 갈 생각은 (아직까지는) 없다. 그때의 행복을 꽁꽁 잠그고 원하는 때에 들여다보고 싶다. 그날의 날것들을 다시 느낄 리 만무하므로. 나에게 호카곶은 그날의 호카곶으로도 충분하다. 그때를 상기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처음 느껴보았는데, 그런 행복감을 느낄 날이 앞으로도 종종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덧.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면서 이번 책의 다정함 때문에 혹여라도 내가 이전 작()을 오해했나 싶어 부러 찾아 펼쳐들어 중간 페이지부터 읽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미간을 찌푸리며 책을 꽂아두었다. 그럼 그렇지. 책의 서두에 쓰셨던 것처럼, <위대한 개츠비>의 "누구를 비판하고 싶어질 땐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좋은 조건을 타고난 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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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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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인 한강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하게 되었다. 단호하지 않고 유연한 문장이, 끊임없이 서성거리는 문장이, 유약하지만 단단한 문장이 좋았다. 실은, 그래서 좋아했던 작가가 있었지. 지금도 좋아하지만 난 그 작가를 좋아해요. 라고 나는 당당하게 말하곤 하지만, 추천은 해주기 꺼려지는 나만의 작가. 그와 같은 이유로, 그래서 작가님을 좋아해요,라고 말하기에 어쩐지 마음이 종종대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작가의 <희랍어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물론 이건 종결형이 아니라 언제든 좋아했다,로 끝맺음될 수 있는 긍정적 동사다. 나는 작가의 작품을 다 읽어보지 못한 탓이다. 시간을 길게 두고서라도 작가의 책을 하나씩 입안에 공글리며 오래오래 음미하고 싶다. <희랍어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그 책은, 내가 읽기를 포기했었던 책이기도 했다. 이후에 다시 접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책을 연달아 두 번을 읽었다. 나는 그 책이 도대체가 소설 같지가 않단 말이야. 이건 소설과 시의 사이에서 적절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어떤 다른 미지의 장르 같다고. 하나 더 고백하자면, 나는 작가 덕에 숲을, 아니 ㅅ-ㅜ-ㅍ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ㅅ-ㅜ-ㅍ을 발음할 때의 내가, 퍽 투명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이제야, 작가의 시집을 만났다. 내가 뭘 쓸 수 있을까. 하다가, 시집을 읽으며 쓰였던 단어들을 나열해보기로 한다.

번지는 어둠, 틈, 희마하게, 동그랗게, 따뜻한 자궁, 연붉은 자궁, 피투성이 밤, 푸른, 푸르고, 불덩이 같은 해, 푸르러질, 검푸른 그림자, 파란 돌, 파르스름, 둥글게, 피 흘린 해, 바싹 마른 눈두덩, 바싹 마른 지옥, 구불구불 휘어진 혀, 혀가 없는 말,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 피의 수면, 눈을 잠그고 어슴푸레, 부서진 입술, 어둠 속의 혀, (아직) 캄캄하게 부푼 허파, 어스름한 저녁, 캄캄히, 시퍼렇게, 불꽃의 눈동자, 파르스름한/심장/모양의 눈, 눈송이의 정육각형, 얼음의 고요한 모서리, 선명한 파랑색 블라우스, 너덜너덜 뜯긴/식욕, 미묘하게 움츠러든, 피 흘리는 정적, 희끄무레, 눈먼 걸인, 움푹 파인 눈두덩, 콧날의 능선, 얼룩진, 물빛, 살얼음 흐른 내 뺨, 연둣빛 눈들, 투명한 칼집.

읽으면 읽을수록 미궁이었다. 알겠는데 모른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던가. 난 정말 모르겠는데 알 것 같은 이 회전목마 같은 어지러움의 근원지는 도대체 어디지.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하나하나 꾹꾹 눌러써가며 필사를 했다. 詩를 필사한다는 것은, 단어에 압축되어있는 시인의 감정도 함께 눌러쓰는 것일진대, 내가 눌러쓰는 단어들에는 왜 나의 감정이 담기어있나. 하면서 어쩐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던 필사하던 시간들. 단단한 단어들의 향연에 초대된 참 벅찼던 시간들.



*

여전히 시를 어떻게 읽어야하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시를 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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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
김나연 지음 / 문학테라피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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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이 책을 주로 지하철에서 읽었는데... 책 표지에 쓰인 <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게 잘 가려서 읽었었다. (...작가님 죄송) 이제까지 내가 누군가의 사생활을 이토록 침해해도 되나 하는 생각을 부모님과 남동생, 남편말고는 가져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느낌을 갖게 하는 사람이 하나 더 생겼다. 우습게도 생면부지의 김나연 작가가 그 사람이다. 읽는 내내, 내가 이 사람의 사생활을 너무 깊이 들어온 거 아닌가? 이 정도면 침해 아니야? 허락된 무단침입을 감행했다, 내가.

 

 

이토록 솔직하고 대담하고 용감하고 거침없는 글이 존재하다니, 그런데 그 글이 밉지가 않다니, 오히려 더 빠져든다니. 이것은 내게 모순임을 안다. 그도 그럴것이 나는 솔직한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나의 협소한 독서 경험으로는 솔직한 글들은 대개 고집이 세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 글들은 내가 읽기엔 아집으로 똘똘 뭉쳐져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물론 내가 이따금 쓰는 나의 보잘것없는 글들도 그런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 작가의 이야기는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다. 더 깊숙하게 들어가 그의 내면과 그를 이루는 풍경까지도 면밀하게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싶어지기까지 하다.

 

 

 

65. 왜, 보통 내가 누구한테 상처를 줬을 땐 나도 모르게 그러는 경우가 많잖아. 물론 작심하고 할퀴고 싶을 때도 있지만 나는 사람들이 언제나 타인을 찢어발길 준비를 하고 산다고 생각하지 않거든?

 

그렇다고 해도 내가 부지불식간에 타인에게 상처를 입힌 게 무죄가 되진 않아. 상처를 받은 사람이 과민한 게 아니라, 거기까지 미처 배려하지 못한 내가 무심했던 거라고 생각하는 게 현대 지성인의 자세 아닐까?

 

그러니까 모르는 건 죄야.

늘 죄인의 마음으로 살아.

 

 

타인이 내게 무례함을 범한 순간들을 생각하다가, 내가 타인에게 무례함을 범한 일들을 생각한다.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면 나는 내가 사과를 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무례함에 대해 사과하는 시간을 갖는다. 물론 이건 일회성임을 안다. 나는 일회성 인간이다. 책을 읽어도, 공부를 해도, 다짐을 해도 일회성으로 끝나버릴 때가 많다. 하지만 그 일회성은 많은 작용을 한다. 그러니까 나는 일회성 사과를 건넨다. 무수한 타인들에게, 내가 나도 모르게 범한 무례함에 대해.

 

 

 

97. 이상형

침대에서 독서와 섹스를 함께 할 수 있는 남자를 찾습니다.

 

많이, 제법, 꽤, 매우, 굉장히 멋있는 이상형이라고 생각했다. 이 이상형을 나는 J한테 보여줬다. 그는 매우 당당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히 본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새였다. (웃긴 녀석,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멋있다고 생각했던 이상형을 나는 가지고 있었네. 라고 생각하니 좀 우스웠다. 각도에 따라 맞는 말이기도 했고, 틀린 말이기도 했으므로. 그와 나는 침대에서 밥을 먹는 일을 제외하고는 모든 일을 다 하기 때문이다.

 

 

 

218. Life is full of tragic comedies

사는 거 너무 어려운 게, 돈도 벌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책도 봐야 하고, 잠도 자야 하는데 그 틈틈이 음식물 쓰레기도 버려야 하고 날짜 맞춰 분리수거도 해야 돼.

 

책에는 가족과 사랑, 그리고 그를 이루는 주변의 풍경까지 말하고 있다. 결국 이 책은 작가의 ‘나 자신’이 되는 것이었다. 이 책에 대해 작가는 에세이인지 소설인지 모르겠다고 한 점에 대해 어떤 독자가 “소설이 아니라면 어쩌려고...” 라며 난색을 표한 서평을 읽었다. 개인적으로는 나는 이 책이 솔직하게 쓰인 일기였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내밀한 이야기를 쓰면서 자신도 몰랐던 마음의 응어리도 풀어내었으면 싶었고, 외로움의 냄새에 대해서도 좀 더 다가갔으면 싶었다. 그 외로움의 냄새와 비슷한 사람을 만났으면 싶기도 했고 이따금은 외로움의 냄새를 껴안아줄 어떤 다른 향의 냄새와 뒤섞여 외로움의 냄새가 좀 옅어졌으면 싶기도 했다. 비록 연두색 별이 뜨는 방 천장에서 쓴 글은 아니(겠)지만, 마음에 연두색 별을 간직한 채로 성장한 한 인간의 일기를 나는 게걸스럽게 먹었고, 만족감에 트림도 마음껏 토해냈다. 이런 글을 읽을 수 있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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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와 빈센트 (반양장) -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스페셜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윤동주 지음, 빈센트 반 고흐 그림 / 저녁달고양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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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에 미쳐있던 때가 있었다. 시인의 시를 소화하고 싶었고, 시인에 대한 글이라면 다 읽고 싶었던 때였다. 그 열망은 그때보다는 좀 엷어졌지만 여전히 시인에 대한 갈망은 남아있다. 언제 어디서든 시인의 시를 보면 마음이 차오름을 느낀다. 그러다가 알게 된 <동주와 빈센트>는 내게 매우 설렘을 안겨주었다. 이전에 두고두고 읽었던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한 <열두 개의 달 시화집 十月. 달은 내려와 꿈꾸고 있네>는 고흐의 그림에 윤동주 외 다른 시인들의 시가 혼합되어있는 것이었다면, 이번 <동주와 빈센트>는 윤동주와 빈센트 반 고흐, 오로지 둘만의 하모니였다.

 

 

 

책에는 총 124편의 시와 129점의 그림이 수록되어있다. 시인과 화가의 공통점이라고 하면, 둘 모두 을 노래하고 그렸다는 점이다. 그에 맞게 첫 페이지에는 시인의 <서시>와 화가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실려있었다. 시와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불현듯 그들에게 별은, 자신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을 사랑한 나머지, 별이 되어버린 그들이었다.

 

 

 

이외에도 시와 그림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들에 나는 꽤 자주 시선이 머물렀다. 단지 이 시에 특정 단어가 들어가 있어서 그 그림이 매칭된 것 같다고 생각한 부분도 없잖아있었지만, 특유의 분위기가 같다고 생각하는 부분들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시화집을 보면서 시인과 화가의 시대와 나라는 다르지만,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둘의 고민은 너무 다르면서도 같았겠지. 같은 점은, '굉장히 하고 싶은 일을, 여건이 되지 않아 하지 못함'

 

 

 

개인적으로 난 시인의 산문 역시 참 좋아하는데, 이 시집에는 산문도 뒤편에 실려있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이전에 시인의 시집을 한 권쯤은 소장을 하고 싶어서 가장 클래식한 시집을 한 권 샀는데, 87편의 시만 수록되어있어 아쉬움이 컸었기 때문에, 이 시집이 내게는 의미가 깊다.

 

 

 

 

 

 

 

아쉬운 점은, <쉽게 쓰여진 시>에서 띄어쓰기가 잘 되지 않은 부분을 보았다. (P213)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잡는 최초의 악수

 

 

▼▼▼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당분간 시인의 시를 필사해야지.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시 한 편 발췌해본다.

 

 

 

<사랑스런 추억> 윤동주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간신히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트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ㅡ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까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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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해도, 나답게 살겠습니다
장새롬(멋진롬) 지음 / 진서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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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을 어슬렁거리다가, 블로그 이웃님이 <결혼해도, 나답게 살겠습니다>라는 책이 참 괜찮았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리고 덥석 집어왔다. 이 책의 제목만으로는 끌리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결혼해도 나답게 살겠다니, 결혼이 어떤 목줄이라도 된다는 걸까 하는 으레 부정적인 마음이 먼저 들었다. 결혼이라는 것은, 두 사람의 결합 외에도 임신과 출산, 육아가 포함이 되어있는 거대한 단어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경험하지 않을 일이었기에 애써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책은 제목을 보고 별로,라고 말하기에 미안할 정도로 내게는 큰 자극이 되었다.



막연하게 책방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책방을 한다면 ‘벨라 책방’이나 ‘리라 책방’이라고 지어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내 현실과는 다른 세계였다. 나는 거창한 말로 ‘사업’을 할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것과 책을 읽는 것과 책을 파는 것은 엄연히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점을 난 너무나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배우자에게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한 평짜리 작은 곳에 키높이 책장 하나 가득, 맥심커피는 한 잔에 300원~ 아니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200원~ 그곳은 너무 더울 때나 추울 때, 잠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있는 곳. 그게 딱 적당했다. 그곳의 이름은 ‘시간의 공간’ (이라고 적어두고 혹시나 해서 찾아봤는데 아뿔싸, 뭐야, 왜 있지? 이럴 땐 좀 억울하다.) 내가 그 계획을 말하면 배우자는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냐고 다시 되물었다. 그래도 본전은 찾아야 하는데 나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던 모양. 나의 그런 꿈은 현실과 빠르게 타협했다.



그러다가 자꾸만 나의 겨드랑이를 간질거리는 그런 책들을 한 권씩 꼭 접하게 된다. 한 권은 이도우 작가님의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의 ‘잘 자요 책방’이 그랬고, 이번에 읽은 <결혼해도, 나답게 살겠습니다>의 ‘동쪽바다 책방,’이 그랬다.




10시-4시 : 동쪽바다 책방,


책을 읽으며 누군가가 부럽다는 생각을 한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것도 평소에는 잘 읽지 않(아 부러 읽으려고 노력하)는 에세이를 읽고 말이다. 어쨌든 실행,이라니. 자각하지 못했는데 시시때때로 나는 새로운 것에 겁을 잘 내는 사람이었다. 일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그런 점을 깨닫고 그러지 않으려고 하지만 내 성격의 기본은 편하고 익숙한 것에 안주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며 나의 미래의 한 조각이 조금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감도 얻었고. 물론 그것이 실행이 될지 아닐지는 논외로 한다.



아이들을 데려온 선생님의 말 한마디, “대형서점과 다르게 작은 서점이 좋은 점은 사장님이 책방에 어떤 책이 있는지 다 아신다는 거야."라는 큰 울림을 주었다. 정말이구나. 정말 그렇겠구나. 책방은, 나의 결점과 약점, 나의 행복과 불행, 나의 가치관까지도 보일 수 있는 것이구나. 책방을 운영한다는 것은 곧, 나를 보이는 일이겠구나- 생각하니 문득 엄청난 일인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35. 도전은 돈은 못 벌어도 경험을 번다. 사람들에게 호응을 못 얻는다고 겁먹을 것 없다. 호응을 얻도록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 쉬운 도전보다 약간 어려운 도전이 나를 더 성장시키는 것은 분명하니까!


정말 새기고 싶던 말이었다. 도전은 돈은 못 벌어도 경험을 번다니. 정말 딱 맞는 말. 나한테 수영이 그랬고, 피아노가 그랬다. 하지 못할 것만 같은 것들이었는데 결국은 했고, 하고 있다. 그것들을 배우면서 끝까지 할 생각이 아니라면 시작도 하지 말자,라고 생각했던 나의 가치관이 서서히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것들을 배우고 경험하는 순간들이 기쁘면 되었다,라는 마음이 지금은 훨씬 더 크다. 내가 도전하는 것들은 그것에 기반을 둔다. 나의 즐거움.




274. 20대 때에는 미래 계획을 세우고, 미래 걱정을 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다음에 뭐 하고 뭐 하고, 내년에 뭐 하고, 몇 년 뒤에 뭐 하고, 계획이 너무 많았다. 계획하느라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과거 반성과 미래 계획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지금을 사는 것인데, 과거 후회와 미래 계획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20대였다.

그런데 어느새 나는 현재를 살고 있다. 터닝포인트라고 하자면, 결혼이었다. 한곳에 오래 머물며 살았다면, 한 달 뒤에 하지, 내년에 하지, 5년 뒤에 하지 생각하며 미룰 수 있는 일도, 신랑 직장을 따라 언제 여기를 떠날지 모르니까 바로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읽다가, 어느 순간부터 혹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역시나!였다.

그랬구나,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더 마음이 더 갔던 거였구나. 그런데도 저자는 참 부러울 만큼 열심히, 잘, 살고 있네.

나도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자꾸 징징대면서 살았던 걸까.

지금도 이따금 징징대고 있고. (하하) (그래도 지금은 이전과는 좀 다른 이유로 징징)



근데 블로그가 있구나. 구경을 가볼까, 하다가 아직도 망설이고 있다.

오래전에 책을 읽고 좋아서 들어간 블로그에서 실망을 한 것은 두고두고 내게 이런 망설임을 준다.

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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