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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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인 한강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하게 되었다. 단호하지 않고 유연한 문장이, 끊임없이 서성거리는 문장이, 유약하지만 단단한 문장이 좋았다. 실은, 그래서 좋아했던 작가가 있었지. 지금도 좋아하지만 난 그 작가를 좋아해요. 라고 나는 당당하게 말하곤 하지만, 추천은 해주기 꺼려지는 나만의 작가. 그와 같은 이유로, 그래서 작가님을 좋아해요,라고 말하기에 어쩐지 마음이 종종대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작가의 <희랍어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물론 이건 종결형이 아니라 언제든 좋아했다,로 끝맺음될 수 있는 긍정적 동사다. 나는 작가의 작품을 다 읽어보지 못한 탓이다. 시간을 길게 두고서라도 작가의 책을 하나씩 입안에 공글리며 오래오래 음미하고 싶다. <희랍어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그 책은, 내가 읽기를 포기했었던 책이기도 했다. 이후에 다시 접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책을 연달아 두 번을 읽었다. 나는 그 책이 도대체가 소설 같지가 않단 말이야. 이건 소설과 시의 사이에서 적절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어떤 다른 미지의 장르 같다고. 하나 더 고백하자면, 나는 작가 덕에 숲을, 아니 ㅅ-ㅜ-ㅍ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ㅅ-ㅜ-ㅍ을 발음할 때의 내가, 퍽 투명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이제야, 작가의 시집을 만났다. 내가 뭘 쓸 수 있을까. 하다가, 시집을 읽으며 쓰였던 단어들을 나열해보기로 한다.

번지는 어둠, 틈, 희마하게, 동그랗게, 따뜻한 자궁, 연붉은 자궁, 피투성이 밤, 푸른, 푸르고, 불덩이 같은 해, 푸르러질, 검푸른 그림자, 파란 돌, 파르스름, 둥글게, 피 흘린 해, 바싹 마른 눈두덩, 바싹 마른 지옥, 구불구불 휘어진 혀, 혀가 없는 말,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 피의 수면, 눈을 잠그고 어슴푸레, 부서진 입술, 어둠 속의 혀, (아직) 캄캄하게 부푼 허파, 어스름한 저녁, 캄캄히, 시퍼렇게, 불꽃의 눈동자, 파르스름한/심장/모양의 눈, 눈송이의 정육각형, 얼음의 고요한 모서리, 선명한 파랑색 블라우스, 너덜너덜 뜯긴/식욕, 미묘하게 움츠러든, 피 흘리는 정적, 희끄무레, 눈먼 걸인, 움푹 파인 눈두덩, 콧날의 능선, 얼룩진, 물빛, 살얼음 흐른 내 뺨, 연둣빛 눈들, 투명한 칼집.

읽으면 읽을수록 미궁이었다. 알겠는데 모른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던가. 난 정말 모르겠는데 알 것 같은 이 회전목마 같은 어지러움의 근원지는 도대체 어디지.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하나하나 꾹꾹 눌러써가며 필사를 했다. 詩를 필사한다는 것은, 단어에 압축되어있는 시인의 감정도 함께 눌러쓰는 것일진대, 내가 눌러쓰는 단어들에는 왜 나의 감정이 담기어있나. 하면서 어쩐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던 필사하던 시간들. 단단한 단어들의 향연에 초대된 참 벅찼던 시간들.



*

여전히 시를 어떻게 읽어야하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시를 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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