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어디 가?
장 루이 푸르니에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0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아이가 장애아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서프라이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장애아는 하늘이 주신 선물이야"

웃으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장애아를 가진 부모가 아니다.

이런 하늘의 선물을 받으면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아이구! 이러실 필요까지 없었는데..."
 

 

 

 

 

 

 

그는 책에선 웃고 있지만 슬픔을 두 눈에 가득 담고 웃는 사람. 그게 장 루이 푸르니에다

그의 책을 읽으며 그의 신랄하고도 직설적인 문체가 귀에 들리는 듯 하다.

그는 아이들을 머리속에 지푸라기만 들었다고 표현했다.

그래서 아이들에 대한 애정까지 없을거라고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읽은 책의 첫 페이지에는

사랑하는 아들 마튜, 사랑하는 아들 토마에게

내가 왜 이걸 이제야 봤지 라는 생각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기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있단 말인가... 그래서 단순히 지나쳐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는 멀리 공을 찾으러 간 큰 아들 마튜와 정신병원에 있을 작은 아들 토마에게 읽을 수도 없는 편지를 쓴 셈이다.

작가는 아들들에 대한 애정을 똥강아지라던가 나의 작은 새 두마리라던가 요정이라던가 ET라고 표현했다.

장애아인 아들들을 놀리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겐 작가가 아들들을 애틋하게 사랑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 단어들이다.

 

 

 

 

 

 

 

아빠 어디 가?

고속도로를 타러 간단다. 역방향으로 말이야.

알라스카로 가지. 가서 백곰을 쓰다듬어주자꾸나. 그리고 백곰한테 잡아먹히는 거야.

버섯을 따러 간단다. 독버섯을 따서, 그것으로 맛있는 오믈렛을 해먹자꾸나.

수영장에 가자. 가서 제일 높은 다이빙대에서 뛰어내리자. 물 한방울 없는 풀장으로 말이야.

몽셍미셸에 가지. 가서 움직이는 모래 위를 걸어다니자꾸나. 그러다 그 모래속에 둘 다 빠져 지옥으로 떨어지는 거야.

 

 

 

 

 

큰 아들 마튜는 밤마다 자동차소리를 내고, 작은 아들 토마는 아빠 어디가? 라고 계속 묻는다.

대답을 해주면 다시 묻고 해주면 또 다시 묻고···

아마 나같으면 짜증을 냈을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다르다. 정상적인 아이가 아니라 장애아다.

나같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책을 읽는데 장 루이 푸르니에는 웃지못할 유머로 승화시켰다.

마치 장애아인 아들을 놀리기라도 하듯이..

난 위 글을 읽을때 이 글에서 작가의 현실도피가 보였다.

안타까움에 치가 떨리고 피가 끓었다.

 

 

 

 

 

 

 

 

만일 너희들이 남들과 같았다면-

 

만일 너희들이 남들과 같았다면, 나는 아마 너희들과 함께 미술관에 갔을거야.

우리는 함께 램브란트, 모네, 터너의 작품을 감상하겠지. 그리고 또 다시 램브란트.....

 

만일 너희들이 남들과 같았다면, 나는 아마 너희들에게 클래식 음반을 선사했겠지.

우리는 우선 모차르트의 음악을 감상할거야. 그리고 베토벤, 그리고 바흐, 그리고 도 다시 모차르트.....

 

만일 너희들이 남들과 같았다면, 나는 아마 너희들에게 수 많은 책을 선사했겠지.

프레베르, 마르 셀 에메, 크노, 이오네스코, 그리고 또다시 프레베르.....

 

만일 너희들이 남들과 같았다면, 나는 너희를 데리고 영화관에 갔을거야.

그리고 함께 오래된 영화를 보는 거야. 채플린, 아인슈타인, 히치콕, 브뉴엘, 그리고 또 다시 채플린.....

 

만일 너희들이 남들과 같았다면, 나는 너희와 함께 고급 레스토랑에 갔을거야.
우리는 함께 샹볼-뮈지니를 마셨겠지. 그리고 또 다시 샹볼-뮈지니......
 
만일 너희들이 남들과 같았다면, 나는 너희와 함께 테니스를 치고, 농구를 하고 또 배구 경기를 했을 거야.
 
만일 너희들이 남들과 같았다면, 나는 너희와 함께 고딕 성당의 종탑에 올라갔을거야.
그리고 우리는 함께 조감을 느껴봤겠지.
 
만일 너희들이 남들과 같았다면, 나는 너희에게 유행하는 옷을 선물했을거야.
너희들이 최고로 멋져보이게 하기 위해서 말이야.
 
만일 너희들이 남들과 같았다면, 나는 너희 둘과 약혼녀들을 오픈카에 태우고 무도회로 데려갔을거야.
 
만일 너희들이 남들과 같았다면, 나는 조용히 너희에게 좋은 공연표를 건넸겠지. 그러면 너희는 그것을 약혼녀에게 선사하는거야.
 
만일 너희들이 남들과 같았다면, 우리는 함께 너희의 결혼 피로연을 즐겼겠지.
 
만일 너희들이 남들과 같았다면, 나는 손자들을 봤겠지.
 
만일 너희들이 남들과 같았다면, 나는 아마 미래를 두려워했을거야.
 
하지만 너희들이 남들과 같았다면, 너희는 남들과 다를 바가 없었을거야.
아마 학교를 땡땡이를 쳤을지도 몰라.
잘못된 길로 빠져들어 비행청소년이 되었을지 몰라.
더 큰 소음을 내기 위해 오토바이 배기관을 바꿨을지 몰라.
백수가 되었을지도 몰라.
장-미셀 장르를 좋아했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짜증나는 여편네랑 결혼했을지도 몰라.
그리고 이혼을 할지도 모르지.
장애아를 둘지 또 누가 아니?
다행이야. 이런 일을 모두 피해갈 수 있어서...
 

 

 

 

 

 

 

 

 

 

우리에게는 기쁠 수도 행복할 수도 우울할 수도 짜증날 수도 슬플 수도 화날 수도 있는

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그들은 머리에 지푸라기밖에 든 것이 없어서 항상 남들과 격리되어 살아야한다는 사실...

솔직히 나 역시 장애인들을 보면 먼저 피하고 그들이 다가오면 멀리하게 되는게 다반사다.

이 책을 통해 내가 그동안 그들에게 무심코 했던 행동들이 표현못하는 그들이라고 해도 왜 모르겠는가

내가 그동안 했던 행동들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자책을 느끼고 안타까워했다.

세상의 장애아들을 다른 시선으로 보기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이제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야겠다는 내 생각을 바꿔준 장 루이 푸르니에 작가에게 난 정말 많이 감사해야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속죄
미나토 카나에 지음, 김미령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속죄: 어떤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하여 그 대가를 치르고 속량받는 일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에 범인을 찾아내. 아니면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속죄를 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난 너희들에게 복수할거야."(p96)

 

이 말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벌어진 사건에 대해 겨우3년 뒤인 중학교 1학년이던 네 명의 아이들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에미리의 죽음으로 인해 그녀의 엄마인 아사코에게 속죄할 의무가 주어졌다는 것부터가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게다가 대놓고 "너희는 살인자야"라니.. 이런 억지가 어디있는가 말이다. 그 아이들도 딸과 같은 아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진 말을 했었어야만 했는지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않았고, 생각하기도 싫었다. 자식을 잃은 엄마의 입장에선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이 다 끝날 듯한 아픔이지만 같이 놀던 친구가 죽었는데 그 아이들이라고 마냥 아무렇지 않다고만 생각한걸까. 처음 겪어본 상황에 아이들에게도 분명 충격임에 틀림이 없는데, 어떻게 저런 말을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 죽음에 대한 슬픔의 무게가 엄마인 자신보다 가벼웠던 것이 죄라면 그만한 억지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아사코가 원한 그 속죄라는 건 죄없는 아이들 모두 에미리를 따라 죽어야만 했던 것일까 아니면 불안에 떨며 생활조차 하지 못하는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 결국엔 정신병원신세를 지는 것인가? 아사코의 미칠듯한 슬픔을 잠재워 줄 만한 것은 범인을 찾는 일 외에는 없었을진데, 그 책임을 아이들에게 전가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들의 15년을 고스란히 빼앗아간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마지막 아사코의 고백을 들으며 15년동안 그 공포와 자책에 힘겹게 싸워야했을 사에, 마키, 아키코, 유카가 너무 가엾어서 인생을 다시 돌려주고 싶음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미나토 가나에의 신간이 나왔다. 전작인 <고백>보다 좋다는 평도 있었고, 그렇지 않다는 평도 있었다. 그래서 기대를 하며 봤던게 화근이었을까? 같은 레파토리에 그저 '원래 이게 이 작가의 스타일인가'하며 빠져드는 흡입력에 훅 읽었다. 아쉬웠던 것은 아사코의 고백을 끝으로 범인이 밝혀졌을 땐 너무나도 억지스러운 결말. 미나토 가나에가 너무 우연전인 반전을 꾀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많은 실망을 했다. <고백>을 읽을 땐 책을 다 읽고서도 후유증이 와서 한동안 그 책을 놓지 못했었는데, 이번 <속죄>는 여느 추리소설과 마찬가지로 '아 이게 뭐야? 역시..' 하는 마음에 가슴 한켠에 차고 쓸쓸한 바람이 불어올 정도였다.

 

실질적인 피해자라는 이유만으로 역시 같은 사건으로 인해 상처받았을 또 다른 피해자들에 대해 자신의 분노의 외침들을 고스란히 전달해서 그들의 삶의 주인노릇을 해도 정당한건지 생각해보게 된다.

 

 

- 이것으로 약속을 지킨게 되나요? … 그때야말로 진정한 해방감을 만끽하며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전 조금도 괴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 제 마음은 굉장히 편안합니다. 당신들이 오기 전, 깨끗한 공기를 당연하게 마시던 나 자신으로 가까스로 돌아온 기분이 드네요. -p60

 

 

소중한 외동딸을 잃은 건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범인이 잡히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주머니시겠지요. 하지만 딸을 잃은 슬픔과 범인이 잡히지 않는 데서 오는 분함,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초조한 심정을 같이 놀던 아이들에게 전가한 것은 잘못된 게 아니었을까요? -p1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 해피 데이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쿠다 히데오. 나는 그의 책을 <공중그네>를 처음으로 접하기 시작했는데, 단편을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유쾌하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공중그네>의 2편이라고 불리우는 <인더풀>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공중그네>에 비해 약간 부실한[?] 스토리에 약간 실망을 했고, 가장 최근에 읽은 그의 작품 중<내 인생, 니가 알아?>라는 작품과 <오수다>에 차례차례 실망을 해서 그의 작품에 뻗치는 손을 잠시 내려놓고 있었다. 그래서 신작이라고 나온 <오 해피데이>도 멈칫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익살스럽게 생긴 여자아이와 인사하고 책장을 넘기면서 역시 오쿠다 히데오의 책은 이런 맛이지. 라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책에 관해 지독히도 부정적인 나의 생각을 깨주기엔 제격이었다.

 

이번 작품은 공중그네와 같이 여러 단편집에 한 주인공이 나오는 것과는 달리 각기 다른 부부들 중 남편 또는 아내가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sunny day :) 따분하고 무료한 일상 속에서 전업주부로 살아가던 노리코는 옥션에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집 안에 필요없던 물건을 하나하나 팔기 시작하면서 결국 머릿 속엔 '다음엔 뭘 팔지..' 란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다 남편의 물건에까지 손을 뻗치게 되는데……

 

나는 읽고 싶은 책은 많지만 그때 당시 고르는 책마다 나와 맞지 않아 읽다가 놓기 일쑤여서 책을 찾아 삼만리하다가 북카페를 알기 시작하고 나눔게시판이라는 것을 알고 나눔을 시작했다가 '다음엔 무슨 책을 나눔하지'라는 생각으로 꽉 차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sunny day'를 읽을 때 노리코의 상황이 그때 당시 나와 같아서 배실배실 웃으면서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또 다른 단편으로는 '우리집에 놀러오렴' , '그레이프프루트 괴물' , '여기가 청산' , '남편과 커튼' , '아내와 현미밥'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단편은 분명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소소하지만 그렇다고 웃을 수 있는 소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쿠다 히데오 특유의 유쾌함으로 잘 처리하고 있다. 마음이 답답함을 외쳐올 때 가벼운 마음으로 실실 웃으며 읽을 수 있는 책임엔 틀림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를 만나는 스무살 철학 - 혼돈과 불안의 길목을 지나는 20대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김보일 지음 / 예담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무 살이 되면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항상 공부가 되던 안되던 공부만 죽어라 시키던 고등학교를 벗어나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너무나도 설렌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었던 스무 살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돌아갔고, 내 잘못된 선택들에 따른 후유증은 후회로 나를 덮쳐왔다. 난 그것을 감당해낼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때 나는 무엇에 의지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그저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라 주저앉아 펑펑 울었던 것 같다. 그런 일들이 몇번씩 반복되자 의지박약이 되면서 내 선택보다 남의 선택이 우선이었고, 남과 나와 선택이 다르다면 난 조금은 망설이다가 남의 선택을 따라가는 형식을 택했다. 그러면 잘못되더라도 내 선택이 아니었으니까 적어도 자책하진 않을 것 같다는 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내 경험 중 한 예로 대학교 1학년 중 반년 동안은 조별활동을 해도 난 뒤로 빠져있는 형식을 취하곤 했다. 그러다가 조별활동 중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형편없는 학점을 맞은 경우가 생기면서부터 내가 아닌 그 사람들의 선택이 항상 옳다는 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고, 잠자코 보고만 있다가 남을 따라가서 후회할 거라면 차라리 내가 해보고서 후회하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나와 다른 남의 생각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좀 더 폭 넓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언들이라고만 받아들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사실 지금도 완전하게 실천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 스무 살의 그때를 생각 하며 책을 읽고 있을 때 책의 한 구절을 발견했다. 너의 삶은 너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의 삶은 너의 선택에 달렸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선택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운명이다. 그러나 우리는 운명 앞에서도 어떤 태도를 가질 수 있는가는 선택할 수 있다. 어떤 상황은 이미 주어진 것일지 몰라도, 그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할 것인가 하는 답은 온전히 우리들 각자의 몫이다.(p85) 이 구절을 갈팡질팡하던 그때 봤다면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잘되든 잘못되든 불안해하지 않고 내 선택을 온전히 믿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을 것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땐 나만 잘난 줄 알고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듣던 나였으니 말이다. 그 때의 경험들이 있기에 지금은 눈꼽만큼이라도 성장한 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지금의 불안과 혼돈의 중심지대에 서 있는 20대들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우리네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인간의 선택이란 늘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p73) 그렇기에 그 선택이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다음에는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거라고. 하지만 누구나 다 알다시피 어떤 선택이든간에 후회는 있기 마련이라 제일 중요한 건 긍정적마인드라는 것. 삶에 리플레이는 없다. 잘못 선택했다고 반품할 수도 없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현명한 선택이 요구되지만 현명함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73p)

 

 

어떤 책이건 간에 성공에 관해서라면 마시멜로를 예로 드는 것 같다. 아이들이 15분을 참으면 2개를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못참고 먹는다는 것. 그걸 작가는 15분을 참았던 아이들이 그렇지 못한 아이들보다 학업 성적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친구들과의 관계도 원만했다. 그들은 스트레스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미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성적을 비교한 결과도 보상을 오래 기다린 아이일수록 좋은 성적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오래 기다린 아이들이 평균적으로 좋은 대학에 진학했으며, 사회적으로도 성공했다. 반면 참지 못하고 일찍 벨을 누른 아이는 문제아가 되는 비율이 높았다. 또 학교다니는 기간 내내 교사들에게서 나쁜 평가를 받았다.(p202) 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 부분을 읽을 때 난 거부감이 들었다. 상대는 어린 아이이다. 비율이 그렇다는 얘기지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인데 이런 식으로 얘기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러나 작가는 그것이 나쁘냐면서, 우리는 우리의 몸을 즐겁게 할 권리가 있다(p205)고 말한다. 그 부분만 세번은 넘게 읽은 것 같은데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저 부분을 읽을 때 작가는 오래 기다림이 미덕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뒤로 갈수록 그에 반대되는 얘기를 하니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서평들을 찾아보았는데, 그것에 관한 얘기가 하나도 없어서 내가 잘못 읽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철학이라는 말에 걸맞게 우리가 고등학교때 윤리시간에 배웠을 법한 익숙한 철학자들이 대거 나온다. 그래서 그런지 어려움 없이 술술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말이 나올 타이밍이 아닌데 갑자기 왜 나와?'하는 부분도 간혹 있었기에 내가 보기엔 그저 그 목차에 따라 끼워넣은 것 같다는 생각을 안할 수 없었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결말이다. 난 사실 마지막장을 읽을 때 뭔가가 더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길게 늘어뜨려놓고 결말을 그런 식으로 지어놔서 '이게 뭐야? 그래서 어쩌라는거야'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은 책인 것 같다. 다음에 한번 더 읽을 기회가 있다면 지금보다 좀 더 다른 느낌이길 기대해본다.

 

 

이 책은 스무살을 겨냥한 책으로 <스무살 철학>이라고 제목이 붙었지만, 스무살에 포커싱을 맞췄다기보다 우리 인간들의 삶에 포커싱을 맞췄다고 할 수 있을 법한 책이다. 불
완전해서 청춘이지 완전해서 청춘이 아니다(p252) 지금의 삶이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삶이 불완전하다고 생각된다면 우리는 모두 청춘인 셈이다. 청춘인 지금, 완전함을 찾기보다는 불완전한 현재를 즐기며 살아가는 것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크로아티아 블루
김랑 글.사진 / 나무수 / 200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의 표지가 무척이나 예뻐서 항상 탐내고 있던 책이었지만, 여행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갈팡질팡하던 책이었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그 순간...

 

 

작가를 따라다니며 함께 여행을 하고 싶었지만, 왠지 작가와 나는 함께 가는 게 아니라 작가는 작가대로 나는 나대로 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나는 계속 길을 헤매기 일쑤였고, 작가가 생각한 것만 머리 속에 들어왔다. 크로아티아라는 곳에 대해서는 '행복이 번지는 곳, 크로아티아'를 한번 읽어보았기 때문에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니었는데, 왠지 이 책은 갈팡질팡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동행인의 마음 속을 꿰뚫어볼 수가 없어서 나조차도 멈칫멈칫 거리던 책이 아닌가 싶다.

 

강 동쪽으로는 가로수가 터널을 이루며 바다를 향해 뻗어있고 험한 바위산 아래로는 옛 마을이 형성 돼 있었다. 마을 뒤로 겹겹이 쌓인 바위산은 트래킹과 암벽등반 코스로 유명하다고 했다 (p247) 나는 이 구절을 읽고 말이 안나왔다. 자기는 가본 곳이기에 본 것만 얘기했지만, 난 도대체 어떻게 생긴 모양새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진이 훌륭한 것도 아니었고, 이건 도대체 이 글이랑 사진은 무슨 상관관계이기에 이게 페이지수를 차지하고 있는거야? 라고 생각한 그림들도 몇몇 있었다. 뭐 당연히 작가가 하려는 말을 내가 전달받지 못함도 있겠지만 말이다.

 

늘어진 여행의 막막함을 깨우는 건 언제나 기대하지 않던 작은 풍경들이고, 외로움을 태우는 건 그 속에서 만난 소박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한가지 공감할 수 있는 말이 있었다면, 이 구절이 아닐까 싶다. 여행을 하는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그 속에서 만나는 풍경들과 사람들은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과도 같이 값진 것이다.

 

두브로브니크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은 쪽이 있는데, 이건 교과서를 읽은 기분이었다고 해야할까. 가보지 않은 내가 사진으로 얼핏 보아도 아름다운 이 도시를 가본 사람이 이렇게 딱딱하게 교과서 식으로 몇세기엔 어땠고 몇세기엔 어땠고, 정말 이런 식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는지 의아했다.(p280) 그게 한쪽반이나 되는 분량이었음에도 무슨 생각으로 읽었는지도 모르겠고, 다 읽고 난 지금 기억나는게 하나도 없다. 다시 읽어봐도 처음 보는 것일 것만 같다. 여행서는 그곳에 가보지 못한 독자가 언젠간 가보려고 혹은 가보고 싶어서 혹은 대리만족 등으로 읽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나로서는 이렇게 해서 정말 가보고 싶어질 수 있는건지 너무나도 의아한 책이었다. 여행서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 책이 읽은 여행서 중 손에 꼽히는 책인데, 만약 여행서가

모두 이런 식이라면 난 앞으로도 여행서를 읽어낼 자신이 없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느냐 묻는다면, 지금 내 서평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묻겠다.

 

 중세의 두브로브니크는 라구사라는 이름의 독립국가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피사, 아말피, 제노바와 함께 5대 해상왕국으로 번성했습니다. 지금도 두브로브니크의 이탈리아 이름이 라구사입니다. 아드리아 해에서는 베네치아와 경쟁한 유일한 해상무역 도시국가였지요. 13세기에 두브로브니크의 자랑인 두브로브니크 고성을 완성하고, 14세기부터는 해상무역을 통해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수준 높은 문화를 누렸습니다. 14세기에 세계 최초의 검역 병원과 지금도 운영되는 세계 최초의 약국이 문을 열었고, 양로원을 지었지요. 15세기에는 노예무역을 금하고 고아원을 지었습니다.

 두브로브니크는 견고한 고성과 강력한 부를 바탕으로 이슬람에 맞서 유럽문화를 지켜낸 선봉장이기도 했습니다. 유럽과 이슬람의 길목에 버티고 서서 꿋꿋하게 투르크와 맞서 싸웠고, 서유럽 국가들은 이런 크로아티아를 두고 유럽문화의 방파제라고 불렀지요. 다른 동유럽 국가와 달리 크로아티아는 종교도 로마 카톨릭입니다.

 

당신은 이 글을 읽으며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며 읽어낼 재간이 있습니까. 이 말을 바꿔 나에게 묻는다면 난 없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