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늪 지혜사랑 시인선 34
권순자 지음 / 종려나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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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다란 이 세상에 시인은 계속 나오고 있지만 , 내 마음 속 깊이 동경하고 있는 몇 안되는 시인 중 윤동주 시인과 김수영 시인 덕분이다. 짤막한 시도 문학이냐며 , 시집을 읽는게 책을 읽는거랑 동급이 될 수가 있냐며 비아냥거릴 때가 있었다. 하지만 가끔 몇 백마디의 소설보다 고작 짤막한 몇 줄의 시가 더 마음에 와닿을 때가 있다. 내가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 시의 모든 단어는 우리가 상상할 수 조차 없이 많은 것을 담아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을 우리는 은유라고 부른다. 그런 시를 볼 때면 , 가끔은 멍해진다. 어떻게 이런 단어를 끌어와서 썼나 싶기도 하고 ,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들을 오묘하게 조화시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시키기도 하는 마법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 고등학교 때 , 수능이라는 시험때문에 우리는 정지용 , 이육사 , 김소월 , 박목월 , 박두진 , 조지훈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인들을 만났고 , 그들의 시대에서 함께 숨쉬며 그들의 문학을 이해했다. 그 때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표현의 자유마저 보장되지 않은 시대였기에 , 우리들이 만난 시인들은 은유법을 많이 쓸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을 해부하듯 , 시를 해부하는 문학시간이 즐거웠다. 그러나 지금의 시인들은 추상어 대신 구체어를 쓰기에 다분히 직설적인 면을 보이게 된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현대 내노라 하는 시인들의 시는 읽지 않게 되었음은 물론이고 , 누가 있는지조차에 대해 관심이 없다. 또한 시를 언제 읽어보았는지 가물가물해질 정도였으니 알만하다.

 

 

그러다가 정말 오랜만에 두께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작고 얇은 시인 권순자의 시집을 손에 들게 되었다. 저자가 궁금해서 , 좀처럼 잘 보지 않는 작가소개를 제일 먼저 보았다. 이게 왠걸 , 1958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경북대 영어학과와 국민대 교육대학원 영어학과를 졸업했으며 2003년 『심상』 신인상으로 시단에 나왔다. 시집 『우목횟집』이 있다. 짤막한 글로 4줄도 채 채우지 못하는 작가의 이력을 보니 아직 페이지를 넘겨보지 못했음에도 실망스러웠고 , 기대 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읽기가 싫어졌고 급기야 인터넷에서 시인에 대해 찾아보았지만 , 헛수고였다. 제대로 된 이력이 없었다. 내가 너무 이력에 신경을 쓰느라 제대로 된 글을 읽지 못하는 건 아닐까 살짝 걱정이 되기 시작했고 , 우선은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시를 읽기 전 , 차례부터 훑어보았다. 시집을 읽기 전 버릇이다. 시집은 전의 내용과 연결되는 것이 없어서 무엇을 먼저 읽어도 매끄럽게 읽힌다는 장점이 있다. 그 중 '다시 일어서야 하는 이유'라는 제목이 유난히 눈에 띄어서 그 시가 있는 페이지로 손놀림이 가빠진다. 하지만 좋은 느낌은 제목뿐이었던 것일까 , 설레임보다는 실망이란 놈이 먼저 찾아와 괜스레 한숨을 쉰다. 그리고는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가 읽기 시작했다.

 

 

 권순자 시인의 시에선 바다 냄새가 났다. 어머니에서도, 아버지에서도, 심지어 사랑에서도 바다 내음새가 풍겨왔다. 나는 그 냄새를 코로 킁킁거리며 읽어내렸다. 멍하게 만드는 시는 없었고 , 마음을 동하게 하는 시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지문』이라는 시에선 예쁜 어감이 나는 단어는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매우 직설적이어서 이 시에 대한 해석이 알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것처럼 모두 내보였다. 따라서 해석이 필요없는 시였다. 나는 이런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읽고는 이런 것도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구나, 라는 걸 느꼈다. 그러나 『달빛 전차』에서는 은유의 끝을 보여줬다. 이제까지 보여왔던 것처럼 달빛을 뚫고 달리는 전차일 거라고만 예상했다. 아니, 사실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고 읽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시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전차가 아닌 , 욕망이었다. 그러고보니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연극이 떠올랐다. 그러고보면 전차는 , 욕망이라는 것에 자주 비유가 되는 모양이다.

 

 

 사실 시보다 더 재미있었던 것은 문학평론가인 황정산씨의 해설이었다. 황정산씨는 이 시집을 『사랑의 문신』이라 일컬으며 전체적인 것들을 종합해서 4문단으로 나누어 해석한다. 하지만 난 NO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꾹 참고 한번 더 replay 했다. 그제서야 시들이 눈에 조금씩 익게 되었고 , 이래서 시는 두세번은 번복하고 번복해서 꼭꼭 씹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그 이유라고 한번 더 곱씹었다. 그러나 답답함은 견딜 수가 없다. 정화시켜야겠다. 윤동주의 간을 읽어야겠다.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창문을 여는 것과 같이 윤동주의 시집을 찾는 내 손길은 가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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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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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신경숙의 책이 참 좋다. 신경숙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크게 미동이 느껴지지 않는 정적의 잔잔한 물결처럼 따라흐르는 강물같은 그녀의 글이 왜 이렇게 좋으냐, 하고 나에게 되묻기도 한다. 신경숙이 쓴 책의 등장인물 또한 가지각색이 아닌 , 이 사람이 그 사람같고 , 그 사람은 저 사람같은 비슷한 그녀들의 마련한 조촐한 향연이라 볼 수 있음직하다. 혹은 그녀,그들은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여주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본다. 그녀의 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 아니 그.래.서 , 매력적이다. 같을 것으로 예상되는 인물들은 각기 다른 매력을 발산하고 있어서 읽는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또한 , 한정된 공간에서 매력포인트를 발산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녀의 글이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호소력짙게 표현되고 있다. 읽어달라고 사정하지않아도 읽게끔 만드는 , 가끔은 먹먹해서 중간에 덮어버리고 싶게 만들기도 하지만 결국은 끝페이지를 향해 달리게 만드는 그녀의 글을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다.

 

 

이 책에선 윤 , 단 , 명서 , 미루 , 윤교수 , 에밀리. 하지만 화자는 윤이고 , 때론 명서가 남겼던 갈색노트 흔적들을 간간히 보여준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주도하고 있는건 윤이지만 , 우리는 윤과 단과 명서 그리고 미루의 상처와 아픔과 더불어 그들이 느끼는 불안과 고독과 시련 , 잠시나마 느끼는 행복 , 위안을 이 짧은 책 속에서 꺼내들고 보듬어주고 위로해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확 눈에 띄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들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집중하고 들어준다면 쉬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구구절절 내 얘기만 하느라 서평의 1/3을 써버린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팔년만의 공백을 깨고 명서가 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들의 대학시절 은사였던 윤교수가 죽음을 머리 맡에 두고 있는 것이 전화의 목적이 된다. 그리고 병원을 가려고 채비를 하던 윤은 책상을 돌아보고 그 순간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그리고는 과거로 거슬러올라간다. 읽으면서 시대가 80년대를 그리고 있는 것 같아서 그 시대에 태어난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다.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더라도 그들이 느끼는 감정들은 고스란히 나도 느꼈던 감정이고 ,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를 압박해올 감정들이기에 내가 윤이 되고, 단이 되고, 명서가 되고, 미루가 되어서 이 책을 읽어나갔다. 사실 시대에 대해서는 친절하게 설명해준 것도 제대로 나와있는 것이 없다. 사실 시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 우리는 아직도 사회가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을 조금 비교해보자면 지금은 국민이 주권을 가진 민주주의가 된 지금 이 마당에 (요즈음 이게 민주주의가 맞는지 의아하긴하지만.) 엄연한 그 때의 시대를 지금이라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일거외다. 컴퓨터나 휴대전화 대신에 타자기나 공중전화로 표현한 것도 시대상의 배경을 알리려고 쓴 것이라 생각할 수 밖에 없지만 , 작가는 우리에게 80년대로 읽지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미래와 그의 남자친구가 시대에 의해 사라져버린 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단과 미루까지 희생양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너무 많은 요소들이 가미되어 있고 , 그런 것들은 현시대에도 주욱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들까지 끌어넣고 싶지가 않은게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 , 우리가 유심히 봐야할 것은 함께 있었을 때에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말로서는 다하지 못할 위로를 마음으로 주고 받는다. - 윤미루 / - …… / - 마저 얘기해…… 마음 속에 남겨두지 말고. / - 괜찮겠어? / - 함께 싸워줄게. - 왜? - 우린 지금 함께 있으니까. (p210) 신경숙의 책에서 상처라는 것은 기본적인 명제 아래 타인이 아니고서는 치료할 수 없는 관계의 중요성이라는 속뜻을 지니고 있는 듯도 하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책을 덮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은 프롤로그는 [내.가.그.쪽.으.로.갈.까] 였던 것이 에필로그에선 [내.가.그.쪽.으.로.갈.게] 로 변화하면서 그들에게도 희망이 비추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기에 우리 또한 절망보다는 희망에 한발짝 서서 그들을 웃으면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은 꿈을 꾼다. 누가 부르는 것 같아 문을 열고 나가보면 켜켜이 쌓인 어둠뿐이다. 나는 어둠 속에 내 발을 한 발 내딛고 그냥 서 있다. (p81) 나는 꿈을 꾸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내가 꾸고 싶은 예쁘고 아름답고 생기발랄한 모습의 꿈은 결코 나를 찾아와주지 않는다. 나를 찾아오는 건 매우 지독하고 고약한 꿈일 뿐이고, 그것을 꾸고 일어나면 어둠이 나를 맞이한다. 나는 어둠에 익숙해지려 노력해도 좀체 익숙해지지 않는다. 회색빛 머금은 척 하는 검정색은 점점 짙어져서 본래의 색으로 돌아와 나를 공포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그 공포는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구렁텅이로 몰아넣기보다는 내가 공포를 느끼지 못하게 하려고 어둠에서 나를 꺼내주려 애쓰지만 , 결코 나를 해방시켜주진 못한다. 또 , 여느 때엔 캄캄한 것을 빌미삼아 어둠이라는 유령은 내게 소중한 어떤 것을 가져가려고 애를 쓰고 , 나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예를 들면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있으면 눈을 잃어버린 꼴이 되버리는 것과 같은 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잘 때 불을 끄고 자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하지만 요즘은 그 누군가덕분에 불을 끄고 나면 눈을 질끈 감고 스르르 힘을 놓아버린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잠을 청하는 것은 아직 내게 무던히 노력해야하고 앞으로도 노력해야할 숙제로 남아있다.

 

 

 

윤은 도시에 익숙해지기 위해 도시를 걷는다고 했다. 걷는 윤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찾아냈고 그것을 접목시키니 윤이 내가 되고 , 내가 윤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윤과는 조금 다른 이유로 걷는다. 스무 살 때 고약한 일을 겪었다. 난 그로 인해 방황했고 , 매우 슬퍼했다. 그래서 시끄러운 음악이 함께 하는 곳에서 함께 술을 마셨고 , 그들은 내가 술을 좋아해서 마시는 거라 그들 편한대로 생각하며 단정지었다. 날이 지날수록 몸이 더이상 버텨주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고는 몇 개월을 술로 의지했던 생활을 단숨에 놓아버리게 된다. 그리고 택한 것이 잠이었는데 , 꿀 때마다 악몽을 꾸었고 , 급기야 마음을 편하게 가져야겠다고 생각하고 산책을 시작했다. 그런 산책은 도보로 이어진다. 도보라고 칭했더니 얼굴이 화끈거리고 민망해지기까지해서 주위를 한번 스윽 , 둘러보게 되는걸 보니 난 그냥 걷는 것일 뿐이었던가보다. 나는 사람들이 걷는 이유를 몰랐고 , 지금도 모른다. 전에는 시간이 남아도는지 , 교통비가 없는지 , 운동을 하는지. 무슨 이유가 있어야만 걷는거라 생각해왔던 내가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왁자지껄했던 마음 속이 잔잔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고 , 그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 그래서 지금도 마음이 불편할 때면 무작정 걷는다. 누군가 스트레스 해소법을 묻는다면 , 난 주저없이 걷는 것을 추천하지만 , 내 주위의 지인들은 절레절레 고개를 젓기 일쑤다.

 

 

 

 

이 소설에서 어쩌든 슬픔을 딛고 사랑 가까이 가보려 하는 사람의 마음이 읽히기를, 비관보다는 낙관 쪽에 한쪽 손가락이 가 닿게 되기를, 그리하여 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언젠가'라는 말에 실려 있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꿈이 읽는 당신의 마음속에 새벽빛으로 번지기를……(p378)

 

청소년기를 앙드레 지드나 헤세와 함께 통과해온 세대가 있었다면 90년대 이후엔 일본 작가들의 소설이 청년기의 사랑의 열병과 성장통을 대변하는 것을 보며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한국어를 쓰는 작가로서 우리말로 씌어진 아름답고 품격있는 청춘소설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내가 지금 쓰려는 소설이 그런 소설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지금 청춘을 통과하고 있는 젊은 영혼들의 노트를 들여다보듯 그들 마음 가까이 가보려고 합니다. 더 늦기 전에요. 청춘에만 갇혀서는 또 안되겠지요. 누구에게든 인생의 어느 시기를 통과하는 도중에 찾아오는 존재의 충만과 부재, 달랠 길 없는 불안과 고독의 순간들을 어루만지는, 잡고 싶은 손 같은 작품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p374)

 

이 책은 프롤로그로 시작해 에필로그로 끝이 난다. 아니 , 정확히 말하자면 작가의 말로 끝이 난다. 나는 에필로그 , 프롤로그 , 전체적인 내용보다는 작가의 말이 가장 가슴에 박히는 말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청춘을 통과하고 있는 나에게 어떤 책이 청춘소설이 될 수 있었을까. 사실 이 서평이 계속 늦어지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도저히 나의 그 한 권을 찾지 못하겠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책들도 그저 그때뿐 , 그 이상의 가치를 느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나에게 청춘소설이 되기란 무리가 있을 듯하다. 하지만 이 책은 적어도 방황하는 내 마음을 다잡아주기엔 충분했다고 생각된다. 또한 , 이 작품에서 가장 흔하고 흔하게 쓰이는 말 중 하나는 '언젠가'라는 단어이다. 그 단어는 불안한 현재를 꽉 잡게 만들어주는 원천이고 ,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이 책 중에서 단연 돋보였던 점은 타인에겐 어떻게 다가갈진 몰라도 나에겐 번역된 일본의 청춘소설보다 더욱 더 값진 청춘소설이었다는 점이다. 이정도면 신경숙은 이 소설을 쓴 목적을 한 독자에게 오롯하게 전해졌다고 볼 수 있겠다. 함께 있을 때 , '오.늘.을.잊.지.말.자'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소망하기보다는 먼저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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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8 제너시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7
버나드 베켓 지음, 김현우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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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은 내 안에 머무르는 거야. 내가 세상 안에 있고, 세상도 내 안에 있는 거라고.

나를 통해 우주가 스스로 알아가고, 그 어떤 기계도 나를 만들어낼 수는 없어. 내가 바로 의미야.”

 

 

 


이 작품에서 우리는 정확한 년도를 알 수가 없다. 처음엔 제목에 2058이라는 특정 숫자가 들어가있기에 2058년을 그리고 있는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 세명의 시험관과 아낙시멘더가 '아담 포드의 삶과 그의 시대, 2058년부터 2077년까지'라는 주제로 면접을 봄으로써 이미 책에서는 2077년조차 훨씬 뛰어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발버둥쳐도 살 수 없는 시대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안고서 등을 꼿꼿이 펴고 책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혼란에 빠져있던 어느 날  , 2032년에 사우디 아라비아 서방측이 의도적으로 자행한 것으로 보이는 테러가 발생했고 , 그로 인해 촉발된 전쟁으로 세계는 걷잡을 수 없이 혼란 속에 빨려들어가게 된다. 그 전쟁으로 인한 폐해로 인류가 멸망에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된다. 그러나 인류가 직면했던 진정한 위험은 정신의 쇠퇴였다고 말하고 있다. 즉 , 타인을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는데 , 사람들은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고 , 따라서 그 문제에 당당히 맞설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그에 플라톤은 한 섬에 정착하게 되고 그곳을 외부 세계와 철저히 격리시킨 채 공화국을 만들어낸다. 그리고는 공화국 주민들에게 안정과 질서에 바탕을 둔 사회를 창조하는 것만이 위대한 인류문명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안이라고 역설했다. 플라톤의 해결책은 급진적이지만 , 공포에 질린 상태의 사람들은 플라톤의 비전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주민들은 게놈 해독을 거친 뒤에 노동자, 군인, 기술자, 철학자로 나뉘게 되고 , 플라톤의 철저한 통제 아래서 지배되며 살아가고 있다.

 

 

 

책을 읽을 땐 몰랐는데 , 책을 다 읽고 서평을 쓰려고 폼잡고 앉아서 등장 인물의 이름을 끄적끄적대다가 피식 - 웃음이 나왔던 이유는 , 이 책의 등장 인물들은 철학자 이름을 빌렸다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 , 페리클레스 , 플라톤. 따라서 적어도 그들이 어떤 주장을 내세웠었었는지 알게 되면 이 책을 읽는 재미를 한껏 더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다 알진 못하더라도 이 책을 읽는데 문제는 전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측면까지 노린 작가의 세심함은 나를 경악케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 나는 이 책에 왜 이런 제목이 붙었는지 궁금했다. 구약성서 제 1권인 창세기를 뜻하는 genesis. 그러니까 아담 포드의 삶이 시작한 2058년이 되는 것일수도 있고 , 혹은 gene+sis를 더한 단순한 제목일 수도 있다. 하지만 '2058 제너시스' 잠시나마 대한민국의 프랜차이즈 기업의 자동차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책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우리의 미래는 결코 밝지않다. 아니 , 너무 어두워서 손전등을 켜보아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 어디서부터 해결 책을 찾아나가야 하는지 손도 대지 못할 정도로 어둡다. 그런 우리에게 작가는 이제 니들 몫이다 라며 , 경고장과 함께 염려하는 글을 듬뿍 담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 한낱 소설 속에서 전해주는 경고장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엔 그 결말이 어마어마하게 끔찍하다.

 

 

 

인간과 기계의 차이는 인간에겐 복합적인 감정선이 마구잡이로 연결되어 있어서 변수가 많지만 , 기계는 프로그램 자체에 문제만 없다면 소모품만 갈아주기만 하면 변수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읽으며 생각과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는 아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것인지 , 아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고 , 그것은 자유다. 하지만 미래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아트의 말에 손을 들어줄 수가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항상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길 바란다. 우리는 조만간 우리를 대신해서 로봇이 청소를 하고 , 음식을 해주는 둥 우리를 대신해 무엇이든 해주는 그런 세상. 그러다가 로봇이 우리보다 우위에서 세계를 지배하려고 든다면 , 우리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런 세상이 오는 날을 고대하고 기대하고 있다. '2058 제너시스'에서 보이는 끔찍한 미래는 당장의 혹은 영원한 편안한 삶을 누리기 위한 인간의 욕심에 대한 처벌이 아닐까. 특정한 누군가가 내리는 처벌이 아닌 , 인간이 인간에게 내리는 벌. 그때쯤이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테지만 , 내 후손들이 살아갈 미래에 대한 걱정에 소름이 돋고 , 가슴이 쿵쾅거리며 , 안절부절 못하겠다.

 

 


"나는 기계가 아니야. 기계가 어떻게 아침의 풀잎 냄새와 아이의 울음소리를 알겠어? 나는 내 피부에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의 느낌이고, 나를 덮치는 차가운 파도의 감각이야. 나는 절대 가 본 적 없지만 눈을 감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장소이고, 다른 이의 숨결과 그녀의 머리카락색이야."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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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마무리
법정(法頂) 지음 / 문학의숲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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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삶을 이루는 소박한 행복 세 가지는

스승이자 벗인 책 몇 권, 나의 일손을 기다리는 채소 밭,

그리고 오두막 옆 개울물 길어다 마시는 차 한 잔이다.”

 

 

 


얼마 전 법정스님이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살아계실 때 그 분의 책이 몇권씩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그 중 한 권도 접해보지 않았던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법정스님의 책을 소장할까 하는 고민을 두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무소유를 주장하던 법정스님의 외침은 뭇 사람들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모기소리일뿐이었나보다. 더이상 법정스님의 책이 출간되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욕심많은 자들은 값을 정가보다 더 높이 부르며 그 분의 책을 흥정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그 욕심 가득한 생각과 꼬락서니가 더럽고 아니꼬와서 안사고 안보고 만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 그것도 분명 사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팔았겠지 - 하는 생각에 조금 씁쓸해지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올해까지만 법정스님의 책을 펴낸다는 소리에 아마 정가보다 더 비싸게 주고 샀을 사람들은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는가. 그러던 중 나는 지인이 선물해주어서 읽으려고 계획잡았던 책들을 모조리 싹 다 뒤로 미루고 그 책 먼저 집었더랬다.

 

 

 

법정스님의 책은 한결같이 종교적인 느낌이 강할거라고 단정지었던 나의 예상이 삐걱거렸다. 우리가 이 세상에 한 인격체로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마음가짐을 우리보다 오래 이 세상에 계셨던 그 분이 깨우치고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종교적 색채가 때때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 하기야 법정스님이 불교라는 특정종교에 몸 담고 계셨기에 , 그 부분을 송두리째 간과하진 못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스님은 우리가 소유하려는 것 자체가 욕심이라고 얘기하고 있고 , 무소유를 소유하려는 것 역시 소유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무소유 또한 내가 읽은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말하고 있는 내려놓음과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올 때 맨 몸으로 오고 갈 때도 맨 몸으로 가는데 , 누구나 어떤 것에 대한 소유욕이 적어도 하나쯤은 있을테고 , 그것이 나에게는 화장품과 책이었으나 , 화장품은 쓰면 쓸수록 사라지고 , 유통기한도 있기에 소유할 수 없음을 실감하고 난 뒤로부터는 책만이 내가 가장 유일하게 소유하고 싶은 산물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스님은 그것도 한 권이면 족하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지만 나는 그 한 권이 아닌 여러권을 가지고 있으니 책을 읽었음에도 실천하려면 아직 까마득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생을 마칠 때까지도 소유욕은 끊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책을 익는 사람들이 자칫 빠져들기 쉬운 것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에 읽히는 경우이다.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책이 나를 읽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주객이 뒤바뀌어 책을 읽는 의미가 전혀 없다. 이런 때는 선뜻 책장을 덮고 일어서야 한다. 밖에 나가 맑은 바람을 쏘이면서 피로해진 눈을 쉬게 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면서 기분을 바꾸어야 한다. 내가 책에서 벗어나야 하고 또한 책이 나를 떠나야 한다. 표현을 달리하자면, 책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비로소 책을 제대로 대할 수 있다는 뜻이다. (p238)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 책에 대한 법정 스님의 자세였다. 저 위의 문장들을 두어번씩 읽으며 나는 어쩌면 가슴 속에 책을 새기기보다는 그저 읽는 것만 치중하지 않았던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기에 스스로 대로 읽었다고 생각하더라도 몇 일, 몇 달, 몇 해가 지나면 너무나도 자연스레 잊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끔 책을 읽다보면 다른 생각에 빠져 책장을 넘기면서도 내가 책을 읽고 있는지 글자를 읽는건지도 모를 상황까지 간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고 그때마다 나는 그 책을 억지로 읽으려다가 시간낭비만 했던 적도 여러번 있었다. 어느 때고 책이 읽히지 않을 경우엔 그 책을 붙잡고 글자 수만 헤아리기보다는 스님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책장을 덮고 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처음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책 제목을 접하고는 나에게 정말 필요한 제목이었기에 더더욱 흥미가 일었던 책이었다. 모름지기 사람이란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있어야하고 , 자신이 있었던 자리는 다음 사람을 위해 깨끗하게 치워줘야하는게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 실천하기란 조금의 마음만 가지고는 참 어렵다. 그 마무리를 배우고자 책을 집어들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고자 했던 건 그런 뜻의 마무리뿐만 아니라 , 여러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름다운 마무리란 - 이다.' 라는 문장이 수없이도 많았다. 그 중 와닿지 않았던 것이 없었지만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과 비움 그리고 내려놓음이었다. 법정스님이 펴낸 이 책은 우리가 어느 순간 아차 ! 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아닌 , 언젠가는 깨우칠 수도 혹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도 깨우치지 못할 내용들이 한가득 담겨있다. 우리가 스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모조리 실천하려면 시간이 그만큼 필요할테고 , 뜻대로 되지않을 때도 있겠지만 한번쯤은 시도해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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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화속으로 - 71-Into The Fir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

 

 

 

 

71명 학도병의 감동실화 | 6월, 그들을 기억하라!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한국 전쟁이 시작된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무장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쪽으로 진격을 거듭하고, 남한군의 패색은 짙어져만 간다. 전 세계가 제 3차대전의 공포에 휩싸이자 UN은 엄청난 수의 연합군을 대한민국에 파병할 것을 결정한다. 이미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남측은 연합군의 도착을 기다리며 낙동강 사수에 모든 것을 내걸고 남은 전력을 그곳으로 총집결 시킨다. 포항을 지키던 강석대(김승우)의 부대도 낙동강을 사수하기 위해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이제 전선의 최전방이 되어버린 포항을 비워둘 수는 없는 상황. 강석대는 어쩔 수 없이 총 한 번 제대로 잡아 본 적 없는 71명의 학도병을 그곳에 남겨두고 떠난다. 유일하게 전투에 따라가 본 적이 있다는 이유로 장범(T.O.P.)이 중대장으로 임명되지만, 소년원에 끌려가는 대신 전쟁터에 자원한 갑조(권상우) 무리는 대놓고 장범을 무시한다. 총알 한 발씩을 쏴보는 것으로 사격 훈련을 마친 71명의 소년들은 피난민도 군인들도 모두 떠난 텅 빈 포항에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른 채 석대의 부대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영덕시를 초토화 시킨 북한군 진격대장 박무랑(차승원)이 이끄는 인민군 766 유격대는 낙동강으로 향하라는 당의 지시를 무시하고 비밀리에 포항으로 방향을 튼다. 영덕에서 포항을 거쳐 최단 시간 내에 최후의 목적지인 부산을 함락시키겠다는 전략. 박무랑의 부대는 삽시간에 포항에 입성하고, 국군사령부가 있던 포항여중에 남아있던 71명의 소년들은 한밤중 암흑 속을 뚫고 들려오는 소리에 잠을 깬다. 고요함이 감돌던 포항에는 이제 거대한 전운이 덮쳐 오고,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강석대 대위는 학도병들을 걱정할 틈도 없이 시시각각 모여드는 인민군 부대와 맞서야 하는데…

 

 

 

 







 

 

 

 

오랜만에 극장가서 본 영화. 사실 이런 영화가 있다는걸 어제 볼 때 알았다-_- 그래서 영화보기 전 포스터 달랑 한 장보고, 아 이런 영화구나 - 라는 생각으로 기대 하나도 안하고 봤던 영화. 아마 6.25전쟁이 올해로 60주년을 맞았기 때문일까 6.25전쟁을 다룬 내용이었다. 6.25전쟁을 다룬 영화는 '태극기 휘날리며'와 '동막골'이 있는데, '태극기 휘날리며'는 그때마다 사정이 생겨서 이러니 저러니 보지도 못했고, 언젠가는 봐야지했었는데 여지껏 까먹고 있었던... 좌우당간 처음에 이 영화는 실화라는 사실이 자막에 뜨지만 '뭐 그렇겠지' 라는 생각만 들 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영화가 끝나고 한번 더 실화라는 자막이 뜨는데, 그제서야 '아 - ' 하는 생각이 들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화려한 휴가'는 보면서 엄청 울었던 기억이 나는데, 이 영화에선 어디를 눈물포인트로 잡은 것인지를 몰라서 찔끔찔끔 거리기만 했다. -_- 마음이 꼼틀꼼틀거렸던 대사를 뽑자면 김승우 역의 강석대와 최승현 역의 오장범이 말하는 학도병은 군인인가, 군인이 아닌가? 라는 대사는 마음이 참 아파왔다. 펜을 잡고 공부를 해야할 학도생들에게 너무 힘든 짐을 맡겨놓은 것 같아서.. 그리고 오장범이 말한 제가 알고있는 북한군은 머리에 뿔달린 괴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우리와 같은 '어머니' 였습니다. 라는 대사였다. 솔직히 처음엔 아이리스에서 몹쓸 연기(-_-)의 소유자 top이 연기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의 이름 석자를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사투리에 집중해서 그런지 들을 때마다 웃겼던(-_-) 권상우, 비중이 너무 없어 아쉬웠던 김승우도 함께 나오지만 단연 돋보였던건 역시 차승원. 인민군으로 나오지만 역시 그의 매력은 철철 넘친다.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건 최승현과 권상우를 뺀 나머지의 69명의 학도병 역할을 충실해 해내준 조연들도 함께해 더 빛났던 영화. 실제 전쟁 당시 포항에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펜 대신 총을 잡고  싸웠을 71명의 학도병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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