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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애
김별아 지음 / 문학의문학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포도 한 송이를 냉장고에서 냉동실로 옮긴지 10분, 후에 꺼내어 딱딱해진 포도를 한 알, 한 알 입에 포도알을 밀어넣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책의 마지막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 달던 포도 중 한 알이 미간을 찌푸릴 만큼 시어서 눈물이 고였다. 그 때 마침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였는데, 아이러니하게 눈물이 멈추지 않고 쪼르르, 하고 흐르는 것이 아닌가. 지금은 책을 끝낸지 2시간 남짓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이 책의 감흥은 식지 않았을 뿐더러 도리어 다홍빛이었던 것이 베어버릴 듯한 붉은 색으로 물들어가고 그 또한 더욱 더 선명해지고 있는 중이다. 사실 나는 이 책을 70페이지를 겨우 읽고 이 책을 이미 접했던 다른 이들의 서평을 들춰보았다. 그것은 전에 없던 극히 드문 일 중 하나였는데, 그것은 그녀의 책을 읽고자 하였지만 ¼이라는 분량을 읽고도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던 중 혹자의 서평에서 이 책의 결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 체한 것처럼 속이 메스꺼웠다. 그 서평에 한바탕 난리를 칠까 하다가 발을 쿵쿵 구르고 손을 꽝, 내리치며 그것을 읽은 내 잘못이라며 내 탓을 했다. 그러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실존 인물이었고 그것은 작가의 독단적인 결말이 아닌 원래에 정해져있던 불가피한 것이었음을 책을 다 읽은 지금에야 알게 된 것을 애통하게 생각한다. 이로써 내 짧은 지식에 새로운 지식을 대롱대롱 매달아준 셈이었다. 책을 읽던 중엔 읽으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말이 뇌리에 박혀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경질적으로 책을 덮고는 방치해두었더랬다. 그래도 김별아 작가, 그녀의 책을 읽어야겠다며 읽던 페이지를 찾아 책을 펴고 앉았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보다 박열과 후미코, 그들의 熱愛가 궁금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후미코, 그녀의 유년기는 끔찍할 정도로 격정적인 외줄타기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하여 어머니와 살게 되지만, 어머니는 후미코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창녀촌에 팔려고 하다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을 당하고서 외갓집에 맡겨버린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부모가 없는 것만도 못한 학대와 설움을 받게 되고, 친절하게 다가왔던 친할머니에게 가게 되지만 그곳에서의 상황 또한 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7년동안 지내다가 쫓겨난 그곳에서 간 곳은 아버지의 집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외삼촌이 가지고 있는 절의 재산을 노리고 후미코와의 결혼을 성사시키려한다. 결국 후미코는 처절하게 혼자임을 깨닫는다. 맙소사. 부모라는 작자들이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후미코의 유년시절을 읽으며 쉴새없이 방망이질하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후미코의 아픔을 고스란히 받고있자니 불에 타고 남은 재가 각막을 찢으며 들어와 머릿 속까지 갈기갈기 찢고 있다는 기분마저 들어서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감에 질려 몸을 떨었다.
지독한 외로움에 헐떡이는 그녀는 사랑이 간절했기에, 또 그것을 이용하여 다가오는 이들을 사랑이라 착각하며 자신을 위로하려 하지만 결국 사랑이 아님을 깨닫는 데에는 남들보다 더 오랜 시간과 상처와 아픔이 고스란히 잔재들처럼 깊숙히 남아있다. 아주 잠시, 그렇게 행복했다. 사랑이라고 믿기도 했다. 오랫동안 외로움을 앓던 사람에게 착각과 혼동을 불러일으키는 간사한 마음의 장난질. (p142) 그런 그녀를 보며 난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 모르겠으며, 그저 울컥하는 마음들을 억지로 달래지 않고 그저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것으로 그녀의 아픔을 감히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러다 그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라는 시를 지은 작자 박열에게 구애를 하게 되고, 그가 그녀에게 유년시절의 이야기를 하며 그의 '그리운 나라'가 어느덧 자신의 '그리운 나라'가 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사랑……. 그래. 그건 언제나 낯선 말이야. 하지만 사랑이 낯설 수밖에 없는 건 여전히 삶이 익숙지 않기 때문일 거야. 삶에 익숙해지면 사랑에도 익숙해져. 익숙해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야. 다만 누추한 관성일 뿐이지. 나는 사랑에도, 삶에도 언제까지나 익숙해지고 싶지 않아……." (p219)
혹자는 말한다. 식민지 시대라는 그늘이 짙어서 정작 책의 제목인 '열애'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것은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느끼게 해주려고 작가가 후미코와 열의 시선을 빌미삼아 꾀하고 있다 생각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음 직한데.. 같은 곳을 향한 그의 깊은 두 눈에, 삶의 풋내와 죽음의 악취를 동시에 맡고 있는 그의 우뚝한 콧등에, 그리고 수많은 말을 침묵으로 대신하는 그의 메마른 입술 위에 점점이 입맞춤하였다. 그것이 생에 마지막일지라도, 뜨거운 입맞춤의 순간 속에 그들은 영원처럼 아득하였다. (p265) (…) 어떤 이는 한 권이라는 짧은 책 속에서 '열애, 역사, 신념, 사상' 이라는 많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건져내려 무던히 애를 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후미코의 상처 가득한 유년시절과 그 이후의 처연하리만큼 애절한 사랑, 후의 결말을 오롯하게 보고 느낀 후에 그녀의 들썩이는 어깨를 잡아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던 책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