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중국소설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 책에 손을 뻗게 된 까닭은 책의 소개글에 오롯이 나와있는 책의 본문 중 "왜 피를 팔았어요?" "샴푸를 한 병 사고 싶었어요." 이라는 대화를 보고나서였다. 그럼에도 어둠이 빽빽 찬 책의 표지를 보자마자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부담스러움이 손에 안기는 기분이었고 급기야 책꽂이 가장자리에 억지로 밀어 붙여넣고는 눈길조차 보내지 않고 설령 그곳에 눈길이 닿는다 하더라도 힐끗 보고는 누가 볼새라 다시 시선을 거두곤 했다. 내 애정어린 시선이 가닿는 곳에 '딩씨 마을의 꿈'은 늘 제외대상이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기 바로 전 나 자신을 삼킬 듯한 생각지도 못한 흡입력으로 골든 슬럼버를 이틀 꼬박 읽고는 이젠 어떤 책을 읽어야하지, 고민하던 중 이 책을 집어들고 책의 표지를 보고는 신경질적으로 가방에 구겨넣어놓고 가방에 책이 있는지조차 모른 채로 3일 내내 들고 다니느라 고생만 하다가 읽기를 시도한 것이 서너차례가 되고 읽히지 않아 두어장 읽다 관뒀더랬다. 그러니까 나는 책의 첫부분인 황혼에 물든 늦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만 서너번 읽은 셈이다. 더 이상은 안되겠다 싶어 '한번 읽어나보고 그래도 안되면 어쩔 수 없이 덮어야지.' 라는 무책임한 마음으로 책을 펼쳐들고 어지러운 머릿 속을 가라앉히고는 출근 20분 전 집 앞 놀이터에 앉아 한스러운 매미의 일정한 간격의 맴맴 소리를 들으며 나보다 좀 더 앞선 황혼에 물든 늦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를 다시 한번 곱씹으며 매미 소리를 떨쳐버리고 책의 계절을 따라가려 애쓰며 그들의 이야기를 천천히 입에 삼키고 있었다.

 

 

 

'마오쩌둥의 사상을 모욕했다'라는 이유로 당국에 의해 판금 조치를 당했던 소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군대 상관 부인과 취사병 간 성적 흥분을 유발하는 '최음제'로 전락된 소설로 불리고 있다)의 작가 옌롄커를 나는 '딩씨 마을의 꿈'을 통해 처음 접했다. 그의 작품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판금 조치를 당했던 이유는 노골적인 성적 묘사때문이라기 보다는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문제를 표면으로 표출시키려했기 때문에 국가에서 지레 겁을 먹은 모양새겠지, 라는 생각으로 작가가 쓴 <한국 독자들께 드리는 글>을 읽는데, 이 또한 판금 조치가 내려졌다고 한다. 도대체 왜? 이도 중국인들이 흔히 말하는 '금기를 범했고', '민감한 사안을 건드렸기 때문'일까. 실화에 입각한 픽션이 물밀듯 출간되는 지금, 유독 이 책만이 판금 조치를 당한 것은 무엇인가. 이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려는 것을 독자인 내가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을런지, 그럴 수 있다면 좋을텐데..

 

 

 

"피 삽니다. 피 파실 분 안 계세요?" (p114)

 

상부의 주도 아래 대대적인 '매혈' 정책이 시행된다. '딩좡'이라는 마을도 역시 예외일 수는 없지만, 매혈이 가져다주는 효용가치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사람들을 관가는 매혈을 통해 부를 축적한 마을에 견학을 시켜준다. 피를 팔기만 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고 난 마을 사람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팔을 걷어부친다. 그러던 중 정부에서 주는 몫에서 조금 더 얹어주는 '나'의 아버지 딩후이에게 매혈하는 딩씨 마을 사람들은 하나의 주사기와 하나의 탈지면으로 여러 사람이 나눠쓰게 되는 비위생적인 체혈 방법으로 그들이 일컫는 '열병' ,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에이즈'에 감염된다. '나'의 할아버지는 그의 아들인 딩후이의 죄값을 덜기 위해 열병에 걸린 사람들을 학교에 모아 그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는데, 그 속에서조차 끊임없이 갈구하는 그들의 탐욕을 보는 것은 절로 토악질이 날 듯한 비린내를 동반하지만, 그것이 추악한 우리의 자화상이라는 이름으로 나동그라져있는 모양새를 깨닫고 나서야 아차, 하며 온 몸에 부르르 떨었다.

 

 

 

책을 덮고나서 5분을 멍한 표정으로 초점없는 동공으로 책의 표지를 바라봤다. 거진 500페이지가 되는 이 책의 줄거리를 고작 7줄로 써놓고나니 어디서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눈 앞을 안대로 가린 것처럼 캄캄하다. 아웃사이더의 입장으로 책을 통해 본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추악함을 밑바닥에 깔아놓고 누가 더 추악한지 시합을 하는 듯함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옳고 그름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난 지금엔 내가 이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판별 할 수 있는 권리가 손에 쥐어져 있는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마을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만큼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으리라. 그것을 뒤로 하고 이 책의 화자를 살펴보면 아버지 딩후이의 이기적인 행동들로 인해 마을 주민들이 발라놓은 독이 발린 토마토를 먹고 살해당한 고작 열두살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조금도 베베 꼬임없는 그대로로 바라볼 수 있어서, 그래서 안타까움이 배가 됐던 것일까. 단순히 화자가 어린 아이의 시선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것 또한 안타까움의 잔재로 남아 머릿 속에 표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좀처럼 게워낼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책 제목이기도 한 '딩씨 마을의 꿈'을 생각해보게 되는데, 마을 사람들의 꿈은 부(富)에서 모두 오늘은 있지만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p91) 그렇기 때문에 즐겁게 사는 것(喜)으로 변화되지만,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인간의 소유욕이 무욕으로 변화되기는커녕 그것은 점점 방대해져 탐욕과 욕망으로 탈바꿈되고 결국 그것은 그들에게 도덕적 타락을 의미하는 동시에 영혼의 몰락이라는 결과를 안겨준다. 그러나 작가는 유토피아가 붕괴된 자리에 남은 잔재들로 디스토피아를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희망이 있음을 새롭게 펄쩍펄쩍 뛰는 세상을 보았다. (p455) 이라는 마지막 문장을 통해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오탈자  p21 , 12째줄. 이 나서 → 샘 
          p91 , 8째줄. 고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 교실
          p148 , 18째줄. 따스함과 고용함이 가득했다 → 고요함
          p191 , 15째줄. 열쇠를 꼽고꽂고
          p195 , 7째줄. 어제 까지만 해도 → 
          p222 , 7째쭐. 남쪽으로 가서 밥을 짓고 시작했고 → 짓기
          p289 , 11째줄. 부부가 될 수 잇을 것이고 → 있을
          p401 , 3째줄. 장기를 두거나 마장을 하거나 → 마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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