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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여인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2011년의 마지막을 장식하고자 구매했던 신경숙 작가의 모르는 여인들은 2011년과 2012년을 이어주는 마지막이자 첫 책이 되었다. 한 번에 주루룩 - 읽을 수 있을줄 알았던 일곱 편의 단편을 한 달 반 가량이라는 시간이 걸리도록 읽었는데, 책을 다 끝냈던 어젯 밤, 차라리 그래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안도감이 밀려왔다. 혹자는 책 속에 담긴 이야기들의 본질은 ‘소통’이라 하였고, 또 작가도 그리 말하고 있지만, 나는 그것에 하나를 더 보태고 싶다. SOS! 구해줘! 그에 따른, 순환.
고향에 잠시 들른 순옥언니가 가는 게 싫어 언니의 신발을 숨기던 나,는 언니의 부츠 속에 자신의 발을 넣어보고 생각지도 못한 (예컨대, 순옥언니가 자신의 등을 쓸어주는 듯한) 위로를 받게 된다. 단절된 시간 동안, 불의의 사고로 깨어났으나 자신의 상황에 세상과 완전히 작별을 고하고자 했던 순옥언니는 깨어나긴 했으나 어린애가 되어있었고, 낙천아저씨의 죽음으로 그곳을 찾게 된 나. 그리고 그곳을 떠나기 위해 신발을 찾는데, 신발이, 없다? 나의 신발을 숨겼을 순옥언니,를 바라보는 눈빛에 따스한 기운이 감돈다.
단절되었던 소통이 원할하게 되다. 위의 「세상 끝의 신발」에서는 ‘신발’이 소통이라는 끈을 이어주는 역할이라면, 「화분이 있는 마당」에서는 여자가 만들어준 오이무름이 나의 소화 장애와 언어 장애를 치유하며 그간 하고 싶어도 못했던 말을 하게 함으로써 나,의 숨통을 트이게 한다. 「어두워진 후에」에서는 극악무도한 연쇄살인범에 의해 가족을 잃은 남자가 있다. 가족을 잃은 슬픔과 더불어 살인이 직업이라는 연쇄살인마의 말 또한 이해할 수 없어 방황을 하던 중 한 여자의 삶에 잠시 들어간 남자는, 그 여자의 삶을 통해 세상을 다시금 살아갈 원동력을 얻게 되며,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성문 앞 보리수」에서는 독일로 떠난 친구의 말 못할 사정을 듣기 위해 십 년을 기다린 S. 함께 벼룩시장도 가고 마라톤에도 참가하게 된 둘은 비로소 소통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며 또 다른 친구인 수미의 상황도 함께 내어놓는다.
“오빠, 올케의 왼손이 사실은 오빠에게 하고 싶은 올케의 말을 대신하고 있는 거 아니야?” 반면에 아이러니하게, 소통을 단절하는 동시에 원활하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가 지금 풀숲에서」에서 외계인손증후군을 앓고 있는 아내의 왼손은 아내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옆에 있는 물건을 집어 던지기도, 남의 물건을 슬쩍 훔치기도, 퇴근하고 들어온 나(남편)의 따귀를 후려치기도 한다. 남편은 그 길로 집을 나가는 것으로 소통은 완전히 단절이 된다. 하지만 남편은, 풀숲에 누워 아내가 자신과 결혼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아내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다. 무자비한 아내의 왼손은, 소통을 단절일까, 화해일까.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들을 생각하고 있으면 너무 막막하고 곧 안절부절못하게 됩니다. 적막이 마음 안에 쌓이고 쌓여 비명을 지르고 싶어져요. 어느 때는 귓구멍을 손으로 막고 가만히 있어볼 때도 있죠. 그런데 소리를 듣지 못하는 고양이들은 움직이는 것이나 흔들리는 것에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더군요. 바람결에 무엇인가 흔들리면 혼절하도록 그 움직임을 따라다녀요. 방에 어쩌다 개미가 지나가면 방바닥의 조그만 개미를 주시하며 사뿐사뿐 따라다니다가 기어이 개미를 발로 차기도 해요. 창밖 나무 위에 새가 날아와 앉으면 창문에 달라붙어 새의 움직임을 끝도 없이 지켜보곤 하죠. A를 다시 보게 되면 말해주고 싶어요. 저 귀머거리 고양이들이 소리를 못 듣는 대신 움직임에 민감한 것에 대해 말이에요. 매사가 그런 이치라면 좋겠어요. 한구석이 모자란 대신 다른 구석이 풍성하다면 살아 있는 것들의 균형은 저절로 이루어질 텐데. (p215)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 둘이 있다. 하나, 「숨어 있는 눈」에서는 길 잃은 고양이(도둑고양이)를 키우는 A. 점점 늘어나는 고양이때문에 집을 나가버린 남편과 그로 인해 고양이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 후배. A는 행방은 돌연 묘연해지고, 그렇게 A의 남편과 후배가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알고보니, 고양이는 귀머거리.
내게는 영원히 찾아올 것 같지 않았던 평화가 거기 있었다. 다시 한 사람을 향한 격정 속에 빠져서 매 순간을 휘둘리고 싶지 않다. 한 사람을 욕심내는 일은 격정만 주는 게 아니라 절망을 함께 준다. 그래서 가차없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입혀버리기도 한다. 그 격정과 절망 속에 다시 나를 밀어 넣고 싶지 않았다. (p232) 둘, 「모르는 여인들」에서 나,는 관절때문에 수술을 받은 남편을 두고 스무 살때 연인이었던 채를 만나러 간다. 왜 롯데백화점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고 그렇게 도망쳤어?라고 묻는 채에게서 한 노트를 건네받게 된다. 노트에는 채의 아내와 가정부가 번갈아 쓴 노트였고, 초기에 주된 이야기는 -해달라, -해놓았다로 시작되고 끝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노트에는 두 여자의 우정이 싹트게 된다. 채의 아내는, 남편에게는 말하지 않는 비밀을 가정부인 여자에게 이야기한다. 그때문에 채가 그녀에게 그런 물음을 해온 것. 나,는 채를 만나고 돌아와 남편의 메마른 발가락을 하나하나 펴서 닦아주기에 이른다.
이렇듯, 신경숙은 특유의 감성으로 가슴 언저리에 묵직한 무언가를 얹어준다. 그래서 좋다. 그녀의 글이. 읽고 나면 - 여유가 없어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던 머리가 조금씩 돌아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까닭이다. 이번에 나온 모르는 여자들,은 생각 만큼 기대감을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비단 단편이라는 틀에 박혀있어서,라는 까닭만이 아니고, 「딸기밭」에서처럼 단편만이 아니라 중편도 있을거라 생각했던 착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짧게짧게 끝나는 이야기가 아쉬워 이야기 하나를 끝내놓고서도 개운치 못한 어떤 것은,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은 욕심이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젖을 충분히 먹고서도 허기가 가시지 않아 칭얼칭얼대는 아이처럼, 나도 칭얼칭얼대는 격이다. 나는 오늘도 신경숙의 강에서 허우덕댄다. 가능하면, 슬픔에 빠진 사람들 곁에 오랫동안 남겨졌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말은 마음을 징 - 하게 울린다. ps. 하지만, 작가의 작품에 실려있는 해설은 왠만하면 가능한 한, 없었으면 싶다. 항상 작가의 글을 읽고 나면, 그것이 방해가 된다. 작가의 글을 읽으며, 아니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사유했던 모든 것이 한순간 물거품되는 순간이랄까. 느낌이란 게, 오롯하게 읽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같은 것인데, 그걸 채 느끼기도 전에 - 해설을 따라야 한다는 것. 그것은 참, 마음에 안 차는 일이 되버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