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싹한 연애 - Spellbound
영화
평점 :
현재상영


 

 

이민기, 손예진 주연의 「오싹한 연애」가 개봉한다고 했을 때에도 기대는커녕, 봐야겠다 - 는 생각조차 없었어요. 귀신이 등장한다는 소식(?)에 헬로우 고스트가 떠올랐거든요. 남들이 재밌다, 재밌다 - 해도 저는 감흥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때문에 보기 싫다,는 마음까지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친구의 너무 재밌다는 말에 혹해서 그에게도 우리 이거 보자! 하며 가게된 극장. 읭? 그와 저는 상영관을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조구의 전 여자친구(?)가 사과를 깎아주는 장면부터 보게 됐습니다. 그 여파로, 그는 잘 몰라도, 저는 그게 가장 강렬하게 남는다며. 크크크크크. - 아, 영화를 보는 내내 손예진이 너무 예뻐서 넋을 놓고 봤어요. 같은 여자인데도 어쩜 이렇게 다른가요? 이래서 전 손예진을 좋아하나봅니다. (읭??????? -,-) 그와 한바탕 웃으며, 또 질질 울으며, 너무너무 사랑스럽게 보았던 영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션 임파서블 : 고스트 프로토콜 - Mission: Impossible - Ghost Protocol
영화
평점 :
현재상영


 

 

2011년 12월 23일에 보았던, 마지막 영화였어요. 데이트를 할 때면, 전 심야영화가 참 보고 싶었어요. 장거리 연애라서 못했던 심야영화. 크리스마스를 가장한 휴일(-,-)을 여유롭고 느긋하게 보내자,라며 심야영화를 선택했지요. 전 퇴근 직후 와서 본 거라서 눈에 쇳덩이를 올려놓은 듯한 피곤함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면서도 아찔한 장면들에 쉽사리 눈을 감을 수가 없었어요. 와, 정말. 이래서 미션 임파서블, 미션 임파서블 하는가 보다, 싶더라니까요. 사실 전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를 본 적이 없어서 그가 처음 이 영화를 보자고 했을 때에도 내심 걱정했었더랬지요. 난 시리즈 안 봤는데…. 라며. 그러니까 그는 자기가 IMF만 설명해주면 된다고 해놓고, 설명도 안 하고 무작적 상영관으로 들어가버린. 흥!!! (그나저나 이건 4D로 안 나오나요? 아니면 - 촌동네라서 4D가 없었던 건가요? 쳇!) 보는 내내 긴장감이 몸을 에워쌌던 영화였어요. 이것 여파로 전편까지 보고 싶어졌.. 크크크. TV에서 가끔 방영하던데, 찾아봐야겠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더풀 라디오
영화
평점 :
현재상영


 

요즘 들어, 영화보는 재미가 참 - 쏠쏠합니다. 전에는 로맨스 영화,하면 뻔하고 뻔한 이야기들뿐이라는 생각에, 외국영화들만 찾기 바빴는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한국영화에도 눈이 슬슬 돌아갑니다. 아, 그런데 이 영화. 이재익님의 작품인 「원더풀 라디오」였군요! 저는 몰랐...스ㅂ...죠. 그냥 그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이재익 작가 얘기를 좀 한 것도 같은데, 어떤 얘기를 했나 - 잘 생각이 나질 않아요. 그냥 그 작가의 「압구정 소년들」을 첫 작품으로 읽었는데, 생각외로 꽤 괜찮았다 - 라는 것 외에는 말이죠. 영화는 달샤벳, 컬투, 이승환, 정엽, 김종국, 개리 등, 많은 카메오 출연으로 눈이 싱글싱글 웃게 만드는 영화였어요. 특히나, 배우 이광수에 대해 조금 삐딱한 시선을 가지고 있던 저였는데, 영화를 보고 나선 호감으로 바뀌었달까. 풉. 물론,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진부하고, 뻔한 스토리일지언정, 추운 겨울에 마음을 살살 녹여주기엔 (개인적으로) 적격이었다고 생각해요. 영화를 본 주는 일에, 사람에, 그리고 자신에 치여 지쳐있던 저에게 미소지을 수 있는 여유와, 남의 사연을 들으면서, 아니 정확히는 보면서 - 눈물을 찔끔찔끔 거릴 수 있는 감성을 선물해준 영화였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개정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삶을 너무 빨리 완성했다.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는 목록을 다 지워버린 그때,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열두 살_ 그때 나는 아직 어린 아이였었다. 부모가 가꾸는 온실 속에서 자라나는 화초처럼, 그렇게 컸다. 그렇기에 삶, 그 자체를 고찰하게끔 만드는 요인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삶 - 아니 정확히는 삶을 관조하는 신, 그도 아니라면, 내가 가진 운에 대해 불만을 품었던 적은 있었다. 그 표적의 대상은 언제나 내가 가진 운이었던 것 같으니까. 예컨대, 왜 내가 숙제하지 않은 날에만 손바닥을 선생에게 허락하는가 하는 그런 것 말이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머피의 법칙, 뭐 그런거. 어느 누구에게나 적어도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하는 그런 것들. 내가 말하려는 아이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정신병자인 엄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아빠는 그것을 끝으로 아이의 곁에 있어주는 것 또한 포기하며 떠나버렸다. 때문에, 아이는 외할머니댁에 맡겨진다. 사람은, 자신에게 예기치 않게 주어진 환경에서는 눈치로 산다했던가. 아이가 딱 그짝이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간파해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좀 더 나아가서는 그들의 삶을 관통해내기도 한다. 그렇게 아이의 삶에 대한 고찰이 시작되기도 하는 셈이다. 어린애로 보이는 것은 편리하기도 하지만 비상시에는 강력한 무기도 된다. 라고 말하는 아이는 자신이 어린애인 것을 악용하기도 한다. (어린애가 어린애인 척 하는 것을 두고 악용한다는 말이 잘못된 표현일지는 모르겠으나,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질 않는다.) 이렇듯, 당돌한 계집아이다. 아이의 이름은, 강 진희.

 

 

 

고달픈 삶을 벗어난들 더 나은 삶이 있다는 확신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떠난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기보다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무 확신도 없지만 더이상 지금 삶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 때문에 떠나는 이의 발걸음은 가볍다. 장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눈동자를 굴렸는지 모르겠다. 당시 내가 느끼던 감정들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내 고개를 수그러뜨린다. 뻔하다. 당시의 나는, 그럴 수 없는 현실의 양면성에 좌절한 게 분명했다. 당시의 삶을 고달프다,로 이야기하기엔 약간 무리가 있지만, 문장을 보고 그 문장 자체로도 부럽다, 생각했을 정도로, 나는 지쳐있었으니까. 하지만 금세 또 화이팅,을 외치며 주먹 불끈 쥐고 웃는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도 광진테라 아줌마 만큼이나 지나가는 그것,을 (아줌마에게는 버스겠지만, 나에게는 생각은 가득하지만 실천할 수 없는, 그래서 - 기약없는 달력을) 오래도록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

 

 

 

슬픔. 그렇다. 내 마음속에 들어차고 있는 것은 명백한 슬픔이다. 그러나 나는 자아 속에서 천천히 나를 분리시키고 있다. 나는 두 개로 나누어진다. 슬픔을 느끼는 나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 극기훈련이 시작된다. ‘바라보는 나’는 일부러 슬픔을 느끼는 나를 뚫어져라 오랫동안 쳐다본다. 찬물을 조금씩 끼얹다보면 얼마 안 가 물이 차갑다는 걸 모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똑똑히 집요하게 바라보자. 진희에게도 첫 사랑,이라는 존재가 찾아온다. 바야흐로, 열두 살. 염소와 남자의 실루엣과 곧이어 들려오는 하모니카 소리. 그것은 통째로 진희의 마음속을 벅찬 느낌이 들게끔 허락하는 것이다. 그가 누구였든, 아이가 허석,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허석이었을 게다. 그게 아니면, 아이의 사랑이 짓밟히는 게 아닌가, 하는 괜한 오지랖을 부리고 싶은 내 생각일 뿐이겠지만.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랑이 깨진자리에 들어선 이별이라는 녀석을 관조하는 아이의 시선은 꽤나 서정적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냉담하다고 느끼리 만큼 냉소적이기도 했다. 사랑이 아무리 집요해도 그것이 스러진 뒤에는 그 자리에 오는 다른 사랑에 의해 완전히 배척당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장소가 가지는 배타적인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랑, 새로운 사랑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해온 사랑이 흔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사랑은 당연히 사랑에 대한 냉소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빠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든지 다시 사랑에 빠지며, 자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유지의 감각과 신랄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착 없이 그 사랑에 열중할 수가 있다. 사랑은 냉소에 의해 불붙여지며 그 냉소의 원인이 된 배신에 의해 완성된다. 적지 않은 (실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엔 사랑을 느끼고, 이별의 가슴 아픔을 깨닫기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는 - 하지만, 그것을 겪는 나이가 따로 있으랴,라는 생각에) 열두 살이라는 나이에 느낀 진희의 그 감정들이 고스란히 마음에 묻혀 새싹을 새로이 돋아나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진희가 헤어짐을 이야기할 때의 디테일한 문장들은, 나로 하여금, 노오란 고름을 짜낸 것처럼 이내 울긋불긋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금세 따끔따끔거려서 오래도록 시간을 들이는 부분 중 한 부분이었다. 완전히 헤어진다는 것은 함께했던 지난 시간을 정지시킨다. 추억을 그 상태로 온전히 보전하는 것이다. 이후로는 다시 만날 일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시간에 의해 지나간 시간의 기억이 변형될 염려도 없다. 그러므로 완전한 헤어짐이야말로 추억을 완성시켜준다. 현석오빠와 완전히 헤어짐으로 내 첫 키스라는 추억의 박제는 완성되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쁘고 좋기만 한 고운 정과 귀찮지만 허물없는 미운 정이 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 정으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확실한 사랑의 이야기 있는 고운 정은 그 이유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지만 서로 부대끼는 사이에 조건 없이 생기는 미운 정은 그보다는 훨씬 질긴 감정이다. 미운 정이 더해져 고운 정과 함께 감정의 양면을 모두 갖춰야만 완전해지는 게 사랑이다. (…) 어쩌면 미운 정이란 고운 정보다 훨씬 더 얻기 힘든 무르익은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이따금 나는 성장 소설을 읽을 때면,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그것은 물론, 상대가 어린아이라는 것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겠지만, 내 어린 시절을 꺼내어 들추어 볼 수 있다는 데서 생기는 너그러움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장 소설들 중 가장 좋았다고 생각하는 외딴방(신경숙)의 ‘나’, 구경꾼들(윤성희)의 ‘나’, 나의 아름다운 정원(심윤정)의 ‘동구’를 대할 때의 나의 시선은 어릴 적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것마냥 따스함이 감돌았다. 하지만 작품의 ‘진희’의 열두 살을 바라볼 때에는, 스물 다섯의 나와 동등한 수평선이 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지배적이다보니, 약간은 냉소적으로 바라본 부분도 있긴 있을 터다. (어느 부분인지 나조차도 지각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가끔은 어쩔 수 없는 진희의 어린아이같은(아, 어린아이에게 어린아이같은,이라니. 이보다 아이러니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모습에 나도 모르게 반가웠달까. 이모는 할머니가 낳은 딸이고, 나는 할머니가 낳은 또 다른 딸의 딸이기 때문에 자신은 할머니의 딸은 될 수가 없다. 진희는 (할머니가 이모에게 가지고 있는) 미운 정을 얻기 위해 함부로 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 완전한 사랑은 자신의 차지인데도, 미운 정을 가진 이모를 질투하고 부러워하는 게다. 그것은 급기야, 기우제 때 바치는 처녀 이모와 자신 중, 어두컴컴한 동굴 속으로 자신이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된다. 그것이 진희가 가진 간절함이다. 어른스러운 아이였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리 이리저리 굴려 애늙은이로 만들어버렸어도 - 아이는, 아이었던 것이다. 진희가 가진 외로움이 녹여지지 않은 것처럼.

 

 

 

이제 성숙한 나는 삶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또 어린애의 책무인 ‘성숙하는 일’을 이미 끝마쳐버렸으므로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내게 남아 있는 어린애로서의 삶이 지루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진희는 열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스스로 성장을 멈췄지만, 나는 아직도 성장이 필요하다. 현재 올해로 스물다섯 해를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은 내가 아직도 이해못하는 많은 괴리를 참아내라,고 요구하는 것만 같고, 그 괴리를 감당해내기에 나는 정신적으로 아직도 한참 어리다,는 판단에서다. 작품을 접하며 많은 부분에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류를 범했고, 그것은 작품을 음미하는 것을 반감시켰는데, 그것은 - 아이를, 아니 진희를 어린 아이로만 생각했던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분명, 열두 살에 성장을 멈춘 진희는, 서른 여덟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열두 살 - 일텐데 말이다. 그래서, 난 그녀를 배척할 수가, 없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3-08-03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 잘 읽고 가요.
이 때의 독서록은 따로없고 다시읽을때마다 책의 여백에 년월일과 단상들을
끄적이곤 했는데..서른여덟을 다가가는 지금,
님의 글속에 진희가..
오롯하게 제,가 되어버리는군요.
조금 더 어린 진희.
 
모르는 여인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1년의 마지막을 장식하고자 구매했던 신경숙 작가의 모르는 여인들은 2011년과 2012년을 이어주는 마지막이자 첫 책이 되었다. 한 번에 주루룩 - 읽을 수 있을줄 알았던 일곱 편의 단편을 한 달 반 가량이라는 시간이 걸리도록 읽었는데, 책을 다 끝냈던 어젯 밤, 차라리 그래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안도감이 밀려왔다. 혹자는 책 속에 담긴 이야기들의 본질은 ‘소통’이라 하였고, 또 작가도 그리 말하고 있지만, 나는 그것에 하나를 더 보태고 싶다. SOS! 구해줘! 그에 따른, 순환.

 

 

 

고향에 잠시 들른 순옥언니가 가는 게 싫어 언니의 신발을 숨기던 나,는 언니의 부츠 속에 자신의 발을 넣어보고 생각지도 못한 (예컨대, 순옥언니가 자신의 등을 쓸어주는 듯한) 위로를 받게 된다. 단절된 시간 동안, 불의의 사고로 깨어났으나 자신의 상황에 세상과 완전히 작별을 고하고자 했던 순옥언니는 깨어나긴 했으나 어린애가 되어있었고, 낙천아저씨의 죽음으로 그곳을 찾게 된 나. 그리고 그곳을 떠나기 위해 신발을 찾는데, 신발이, 없다? 나의 신발을 숨겼을 순옥언니,를 바라보는 눈빛에 따스한 기운이 감돈다.

 

단절되었던 소통이 원할하게 되다. 위의 「세상 끝의 신발」에서는 ‘신발’이 소통이라는 끈을 이어주는 역할이라면, 「화분이 있는 마당」에서는 여자가 만들어준 오이무름이 나의 소화 장애와 언어 장애를 치유하며 그간 하고 싶어도 못했던 말을 하게 함으로써 나,의 숨통을 트이게 한다. 어두워진 후에」에서는 극악무도한 연쇄살인범에 의해 가족을 잃은 남자가 있다. 가족을 잃은 슬픔과 더불어 살인이 직업이라는 연쇄살인마의 말 또한 이해할 수 없어 방황을 하던 중 한 여자의 삶에 잠시 들어간 남자는, 그 여자의 삶을 통해 세상을 다시금 살아갈 원동력을 얻게 되며,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성문 앞 보리수」에서는 독일로 떠난 친구의 말 못할 사정을 듣기 위해 십 년을 기다린 S. 함께 벼룩시장도 가고 마라톤에도 참가하게 된 둘은 비로소 소통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며 또 다른 친구인 수미의 상황도 함께 내어놓는다.

 

“오빠, 올케의 왼손이 사실은 오빠에게 하고 싶은 올케의 말을 대신하고 있는 거 아니야?” 반면에 아이러니하게, 소통을 단절하는 동시에 원활하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가 지금 풀숲에서」에서 외계인손증후군을 앓고 있는 아내의 왼손은 아내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옆에 있는 물건을 집어 던지기도, 남의 물건을 슬쩍 훔치기도, 퇴근하고 들어온 나(남편)의 따귀를 후려치기도 한다. 남편은 그 길로 집을 나가는 것으로 소통은 완전히 단절이 된다. 하지만 남편은, 풀숲에 누워 아내가 자신과 결혼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아내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다. 무자비한 아내의 왼손은, 소통을 단절일까, 화해일까.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들을 생각하고 있으면 너무 막막하고 곧 안절부절못하게 됩니다. 적막이 마음 안에 쌓이고 쌓여 비명을 지르고 싶어져요. 어느 때는 귓구멍을 손으로 막고 가만히 있어볼 때도 있죠. 그런데 소리를 듣지 못하는 고양이들은 움직이는 것이나 흔들리는 것에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더군요. 바람결에 무엇인가 흔들리면 혼절하도록 그 움직임을 따라다녀요. 방에 어쩌다 개미가 지나가면 방바닥의 조그만 개미를 주시하며 사뿐사뿐 따라다니다가 기어이 개미를 발로 차기도 해요. 창밖 나무 위에 새가 날아와 앉으면 창문에 달라붙어 새의 움직임을 끝도 없이 지켜보곤 하죠. A를 다시 보게 되면 말해주고 싶어요. 저 귀머거리 고양이들이 소리를 못 듣는 대신 움직임에 민감한 것에 대해 말이에요. 매사가 그런 이치라면 좋겠어요. 한구석이 모자란 대신 다른 구석이 풍성하다면 살아 있는 것들의 균형은 저절로 이루어질 텐데. (p215)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 둘이 있다. 하나, 「숨어 있는 눈」에서는 길 잃은 고양이(도둑고양이)를  키우는 A. 점점 늘어나는 고양이때문에 집을 나가버린 남편과 그로 인해 고양이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 후배. A는 행방은 돌연 묘연해지고, 그렇게 A의 남편과 후배가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알고보니, 고양이는 귀머거리.

 

 

내게는 영원히 찾아올 것 같지 않았던 평화가 거기 있었다. 다시 한 사람을 향한 격정 속에 빠져서 매 순간을 휘둘리고 싶지 않다. 한 사람을 욕심내는 일은 격정만 주는 게 아니라 절망을 함께 준다. 그래서 가차없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입혀버리기도 한다. 그 격정과 절망 속에 다시 나를 밀어 넣고 싶지 않았다. (p232) , 「모르는 여인들에서 나,는 관절때문에 수술을 받은 남편을 두고 스무 살때 연인이었던 채를 만나러 간다. 왜 롯데백화점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고 그렇게 도망쳤어?라고 묻는 채에게서 한 노트를 건네받게 된다. 노트에는 채의 아내와 가정부가 번갈아 쓴 노트였고, 초기에 주된 이야기는 -해달라, -해놓았다로 시작되고 끝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노트에는 두 여자의 우정이 싹트게 된다. 채의 아내는, 남편에게는 말하지 않는 비밀을 가정부인 여자에게 이야기한다. 그때문에 채가 그녀에게 그런 물음을 해온 것. 나,는 채를 만나고 돌아와 남편의 메마른 발가락을 하나하나 펴서 닦아주기에 이른다.

 

 

 

이렇듯, 신경숙은 특유의 감성으로 가슴 언저리에 묵직한 무언가를 얹어준다. 그래서 좋다. 그녀의 글이. 읽고 나면 - 여유가 없어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던 머리가 조금씩 돌아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까닭이다. 이번에 나온 모르는 여자들,은 생각 만큼 기대감을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비단 단편이라는 틀에 박혀있어서,라는 까닭만이 아니고, 「딸기밭」에서처럼 단편만이 아니라 중편도 있을거라 생각했던 착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짧게짧게 끝나는 이야기가 아쉬워 이야기 하나를 끝내놓고서도 개운치 못한 어떤 것은,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은 욕심이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젖을 충분히 먹고서도 허기가 가시지 않아 칭얼칭얼대는 아이처럼, 나도 칭얼칭얼대는 격이다. 나는 오늘도 신경숙의 강에서 허우덕댄다. 가능하면, 슬픔에 빠진 사람들 곁에 오랫동안 남겨졌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말은 마음을 징 - 하게 울린다. ps. 하지만, 작가의 작품에 실려있는 해설은 왠만하면 가능한 한, 없었으면 싶다. 항상 작가의 글을 읽고 나면, 그것이 방해가 된다. 작가의 글을 읽으며, 아니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사유했던 모든 것이 한순간 물거품되는 순간이랄까. 느낌이란 게, 오롯하게 읽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같은 것인데, 그걸 채 느끼기도 전에 - 해설을 따라야 한다는 것. 그것은 참, 마음에 안 차는 일이 되버리니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3-08-03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처음, 제가 인터넷으로 책을 구입한 사건(응?!)이고...
또,정말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여인에게
닉네임만 알던..여인에게 선물로 보낸 책이었죠.
무심하게..무심한 마음으로 읽어보라고...하하하

모르는 여인들"을 시작해 놓곤...저역시 허우적 대느라..
작가의..지난책..아름다운 그늘"을 다시 꺼내서..거실에선 ..여인을..
침대에선 그늘을"....서성서성 거리느라...
오래도록 손에서 놓지 못한 기억이...

그리고, 내가 위로받기위해
즐기던 어느 공간이..어느덧
나를 구원하고 밝음으로 너그럽게 만들어주고있음을..
알게되면서..모르는 이들과의 소통이..글로써 가능함을
고마워하게 되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