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개정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삶을 너무 빨리 완성했다.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는 목록을 다 지워버린 그때,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열두 살_ 그때 나는 아직 어린 아이였었다. 부모가 가꾸는 온실 속에서 자라나는 화초처럼, 그렇게 컸다. 그렇기에 삶, 그 자체를 고찰하게끔 만드는 요인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삶 - 아니 정확히는 삶을 관조하는 신, 그도 아니라면, 내가 가진 운에 대해 불만을 품었던 적은 있었다. 그 표적의 대상은 언제나 내가 가진 운이었던 것 같으니까. 예컨대, 왜 내가 숙제하지 않은 날에만 손바닥을 선생에게 허락하는가 하는 그런 것 말이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머피의 법칙, 뭐 그런거. 어느 누구에게나 적어도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하는 그런 것들. 내가 말하려는 아이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정신병자인 엄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아빠는 그것을 끝으로 아이의 곁에 있어주는 것 또한 포기하며 떠나버렸다. 때문에, 아이는 외할머니댁에 맡겨진다. 사람은, 자신에게 예기치 않게 주어진 환경에서는 눈치로 산다했던가. 아이가 딱 그짝이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간파해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좀 더 나아가서는 그들의 삶을 관통해내기도 한다. 그렇게 아이의 삶에 대한 고찰이 시작되기도 하는 셈이다. 어린애로 보이는 것은 편리하기도 하지만 비상시에는 강력한 무기도 된다. 라고 말하는 아이는 자신이 어린애인 것을 악용하기도 한다. (어린애가 어린애인 척 하는 것을 두고 악용한다는 말이 잘못된 표현일지는 모르겠으나,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질 않는다.) 이렇듯, 당돌한 계집아이다. 아이의 이름은, 강 진희.

 

 

 

고달픈 삶을 벗어난들 더 나은 삶이 있다는 확신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떠난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기보다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무 확신도 없지만 더이상 지금 삶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 때문에 떠나는 이의 발걸음은 가볍다. 장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눈동자를 굴렸는지 모르겠다. 당시 내가 느끼던 감정들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내 고개를 수그러뜨린다. 뻔하다. 당시의 나는, 그럴 수 없는 현실의 양면성에 좌절한 게 분명했다. 당시의 삶을 고달프다,로 이야기하기엔 약간 무리가 있지만, 문장을 보고 그 문장 자체로도 부럽다, 생각했을 정도로, 나는 지쳐있었으니까. 하지만 금세 또 화이팅,을 외치며 주먹 불끈 쥐고 웃는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도 광진테라 아줌마 만큼이나 지나가는 그것,을 (아줌마에게는 버스겠지만, 나에게는 생각은 가득하지만 실천할 수 없는, 그래서 - 기약없는 달력을) 오래도록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

 

 

 

슬픔. 그렇다. 내 마음속에 들어차고 있는 것은 명백한 슬픔이다. 그러나 나는 자아 속에서 천천히 나를 분리시키고 있다. 나는 두 개로 나누어진다. 슬픔을 느끼는 나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 극기훈련이 시작된다. ‘바라보는 나’는 일부러 슬픔을 느끼는 나를 뚫어져라 오랫동안 쳐다본다. 찬물을 조금씩 끼얹다보면 얼마 안 가 물이 차갑다는 걸 모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똑똑히 집요하게 바라보자. 진희에게도 첫 사랑,이라는 존재가 찾아온다. 바야흐로, 열두 살. 염소와 남자의 실루엣과 곧이어 들려오는 하모니카 소리. 그것은 통째로 진희의 마음속을 벅찬 느낌이 들게끔 허락하는 것이다. 그가 누구였든, 아이가 허석,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허석이었을 게다. 그게 아니면, 아이의 사랑이 짓밟히는 게 아닌가, 하는 괜한 오지랖을 부리고 싶은 내 생각일 뿐이겠지만.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랑이 깨진자리에 들어선 이별이라는 녀석을 관조하는 아이의 시선은 꽤나 서정적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냉담하다고 느끼리 만큼 냉소적이기도 했다. 사랑이 아무리 집요해도 그것이 스러진 뒤에는 그 자리에 오는 다른 사랑에 의해 완전히 배척당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장소가 가지는 배타적인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랑, 새로운 사랑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해온 사랑이 흔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사랑은 당연히 사랑에 대한 냉소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빠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든지 다시 사랑에 빠지며, 자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유지의 감각과 신랄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착 없이 그 사랑에 열중할 수가 있다. 사랑은 냉소에 의해 불붙여지며 그 냉소의 원인이 된 배신에 의해 완성된다. 적지 않은 (실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엔 사랑을 느끼고, 이별의 가슴 아픔을 깨닫기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는 - 하지만, 그것을 겪는 나이가 따로 있으랴,라는 생각에) 열두 살이라는 나이에 느낀 진희의 그 감정들이 고스란히 마음에 묻혀 새싹을 새로이 돋아나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진희가 헤어짐을 이야기할 때의 디테일한 문장들은, 나로 하여금, 노오란 고름을 짜낸 것처럼 이내 울긋불긋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금세 따끔따끔거려서 오래도록 시간을 들이는 부분 중 한 부분이었다. 완전히 헤어진다는 것은 함께했던 지난 시간을 정지시킨다. 추억을 그 상태로 온전히 보전하는 것이다. 이후로는 다시 만날 일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시간에 의해 지나간 시간의 기억이 변형될 염려도 없다. 그러므로 완전한 헤어짐이야말로 추억을 완성시켜준다. 현석오빠와 완전히 헤어짐으로 내 첫 키스라는 추억의 박제는 완성되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쁘고 좋기만 한 고운 정과 귀찮지만 허물없는 미운 정이 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 정으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확실한 사랑의 이야기 있는 고운 정은 그 이유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지만 서로 부대끼는 사이에 조건 없이 생기는 미운 정은 그보다는 훨씬 질긴 감정이다. 미운 정이 더해져 고운 정과 함께 감정의 양면을 모두 갖춰야만 완전해지는 게 사랑이다. (…) 어쩌면 미운 정이란 고운 정보다 훨씬 더 얻기 힘든 무르익은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이따금 나는 성장 소설을 읽을 때면,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그것은 물론, 상대가 어린아이라는 것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겠지만, 내 어린 시절을 꺼내어 들추어 볼 수 있다는 데서 생기는 너그러움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장 소설들 중 가장 좋았다고 생각하는 외딴방(신경숙)의 ‘나’, 구경꾼들(윤성희)의 ‘나’, 나의 아름다운 정원(심윤정)의 ‘동구’를 대할 때의 나의 시선은 어릴 적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것마냥 따스함이 감돌았다. 하지만 작품의 ‘진희’의 열두 살을 바라볼 때에는, 스물 다섯의 나와 동등한 수평선이 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지배적이다보니, 약간은 냉소적으로 바라본 부분도 있긴 있을 터다. (어느 부분인지 나조차도 지각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가끔은 어쩔 수 없는 진희의 어린아이같은(아, 어린아이에게 어린아이같은,이라니. 이보다 아이러니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모습에 나도 모르게 반가웠달까. 이모는 할머니가 낳은 딸이고, 나는 할머니가 낳은 또 다른 딸의 딸이기 때문에 자신은 할머니의 딸은 될 수가 없다. 진희는 (할머니가 이모에게 가지고 있는) 미운 정을 얻기 위해 함부로 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 완전한 사랑은 자신의 차지인데도, 미운 정을 가진 이모를 질투하고 부러워하는 게다. 그것은 급기야, 기우제 때 바치는 처녀 이모와 자신 중, 어두컴컴한 동굴 속으로 자신이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된다. 그것이 진희가 가진 간절함이다. 어른스러운 아이였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리 이리저리 굴려 애늙은이로 만들어버렸어도 - 아이는, 아이었던 것이다. 진희가 가진 외로움이 녹여지지 않은 것처럼.

 

 

 

이제 성숙한 나는 삶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또 어린애의 책무인 ‘성숙하는 일’을 이미 끝마쳐버렸으므로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내게 남아 있는 어린애로서의 삶이 지루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진희는 열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스스로 성장을 멈췄지만, 나는 아직도 성장이 필요하다. 현재 올해로 스물다섯 해를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은 내가 아직도 이해못하는 많은 괴리를 참아내라,고 요구하는 것만 같고, 그 괴리를 감당해내기에 나는 정신적으로 아직도 한참 어리다,는 판단에서다. 작품을 접하며 많은 부분에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류를 범했고, 그것은 작품을 음미하는 것을 반감시켰는데, 그것은 - 아이를, 아니 진희를 어린 아이로만 생각했던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분명, 열두 살에 성장을 멈춘 진희는, 서른 여덟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열두 살 - 일텐데 말이다. 그래서, 난 그녀를 배척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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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3-08-03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 잘 읽고 가요.
이 때의 독서록은 따로없고 다시읽을때마다 책의 여백에 년월일과 단상들을
끄적이곤 했는데..서른여덟을 다가가는 지금,
님의 글속에 진희가..
오롯하게 제,가 되어버리는군요.
조금 더 어린 진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