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나
김성우 지음 / 쇤하이트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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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엄마는 여느 엄마가 그러했듯, 나의 10대를 책임져주었고, 나는 그런 점이 여전히 감사하다. 어린시절의 나는, 훗날의 나의 자식에게 나의 엄마 같은 엄마가 되고 싶었던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아들이든 딸이든 중학생과 고등학생을 지내는 6년 동안 손수 교복을 다림질해주는 그런 엄마. (물론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님에도) 맞벌이한다고 제대로 챙겨주지는 못하지만, 내 자식 집에서 이만큼의 보살핌을 받고 지낸다는 표시의 하나였다. 나는 주름치마를 입던 중학생 때, 누구보다 빳빳하고 반질반질한, 열 맞춰 정돈되어 있는 그런 교복 치마를 뽐냈었다. 엄마의 바람처럼 어디 가서 기죽지 않았고 오히려 동기생들의 부러움을 산 채로 학교를 다녔다. 또한 지금까지도 여전한 나의 아침밥을 먹어야 하는 습관은, 바쁜 와중에도 아침을 꼭 차려주었던 엄마의 부지런한 손끝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엄마와 애틋하다거나 애잔하다거나 애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다. 2015년까지는 엄마와의 관계가 다정다감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 삼 년이라는 시간 동안, ‘엄마라는 단어만 들어도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꽉 막힐 때가 분명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건조된 감말랭이도 엄마와 나의 관계만큼 건조하고 메마르진 못할 것이다. 나는 생각보다 자주 엄마와의 관계 개선을 꿈꾸지만, 그런 날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포기해야만 했다. 지금 엄마와 나의 가치관은 너무나도 다르고 그것이 충돌되어 산산조각이 나버린 것이며, 그것은 슬프게도, 길고 긴 3년의 결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주 엄마를 찾는다. 엄마의 삶을 가엾게 여기기도 하고, 애처롭게 여기기도 한다. 일정 부분에 있어서는 감사한 마음을 지니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의 전체적인 생을 부정할 수는 없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주 타인의 엄마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다른 이의 낯선 엄마의 모습에서 나의 엄마를 추억하고 그리워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엄마들이 있지만, 김성우 님의 엄마를 만났다.

21. 밥하는 노동의 가치에 대해 말을 할 때에, 나는 새삼 부끄러워졌다. 결혼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밥하는 노동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집에 들어서면 훈훈한 온기가 돌고, 밥이 있었고, 그에 걸맞은 반찬들이 있었으며, 매일 보드라운 수건이 걸려있었고, 화장실 휴지는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모든 것이 당연한 줄 알고 살았다. 그런데 결혼을 한 순간, 나는 그게 아님을 여실히 깨달았다. 모든 것이 누군가의 손을 거쳐 내가 그런 편안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 누군가는 나의 엄마였다. 세상에 이유가 없는 편안함은 없었다.

 

 

97. 성우야, 그거 아니? 사람은 자기가 본 것 이상으로는 절대 살지를 못해. 특출나게 태어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만, 자라면서 보고 배운 것 이상으로 커질 수가 없어. 내가 살아 보니 그렇더라.”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김성우 어머니의 말씀. 내가 언젠가부터 마음 깊이 되새기는 말 중 하나인,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와 비슷한 말인 것 같아서 계속 반복해서 보았던 부분. 어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는 이유는, 다시 태어나면 삼 형제를 더 잘 키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도 사람, 꼭 여자로 태어나고 싶으시다나.

 

 

 

어머니와 했던 말이 글감이 되고 그것을 엮어낸 책이다. 책은 쉽게 읽힌다. 쉽게 읽히는 책이지만, 한편으로는 부러운 마음을 지니며 읽는다. 나는 딸이면서도 같은 여자인 엄마와 속 깊은 이야기를 많이 나눠본 적이 거의 없다. 나의 어려움을 엄마에게 토로한 적도 많지 않다. 내가 엄마에게 나의 어려움을 토로했을 때는 2015년 겨울에서 2016년 봄 그 사이였다.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삐거덕댔던 것들이 그때에 부서진 것이리라. 그래서 이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밀한 관계, 특히 엄마와의 관계가 부럽게 느껴진다. 나의 마음이 이런 것처럼 나의 엄마도 그럴 테지. 하지만 거기까지 일 뿐, 나는 더 이상 용기를 내지 못한다. 나는 언제나 나의 엄마의 안녕을 바라는데, 특히나 오늘은 엄마의 평온을 바란다.

 

   


 

 

오탈자 97. 성우야, 그거 아니? 사람은 자기가 본 것 이상으로는 절대 살지를 못해. 특출나게 태어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만, 자라면서 보고 배운 것 이상으로 커질 수가 없어. 내가 살아 보니 그렇더라.” 특출하게

 

오탈자 241. 늘상 게으름이라고 부르는 것을 해부하니 노상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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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내 맘 좀 알아주면 좋겠어 - 서툰 표현 뒤에 감춰진 부부의 속마음
다카쿠사기 하루미 지음, 유윤한 옮김 / 더난출판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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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을 함께 했든 완전한 타인과 타인의 결합에는 그에 상응하는 노력이 부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싫으면 안 보면 그만! 이라는 타인들과 달리, 가깝게는 가족이 그렇고 가족 중에는 남편과 아내 즉, 부부가 그렇다. 서로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만큼 소홀할 수 있는 게 남편과 아내의 관계라고 보는 나는, 분기에 한 번 정도는 원만하고 순조로운 부부생활을 위해 부부를 위해 쓰인 책들을 찾아 읽는 편이다. 물론 그 속에 해답이 있을 리 없다. 많은 예시가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와 같은 상황이 아니고 내가 그와 같은 생각을 지닌 것이 아니라면 공감할 수 없다. 그럼에도 꾸준하게 찾아읽는 까닭은, 여러 상황들을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가상으로 만나보고 내가 비슷한 일을 겪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을 할 것인지, 이 일에 적합한 대응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을 좀 더 깊이 있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나와 비슷한 상황이나 내가 이전에 가졌던 고민들을 만나면 더없이 유익하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이번에는 책 제목을 좀 더 들여다보게 되었다. <당신도 내 맘 좀 알아주면 좋겠어>라니.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 서운해하고 섭섭해하고 속상해하는 게 비단 부부관계에 한정된 것이겠냐마는, 누구보다 가까이 있는 '가족'으로 묶인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는 무엇보다 절실한 말이 아닐까 생각했다.

부부관계에 세 가지 요점이 있었는데 자기 호감, 자기 유능감, 자기 중요감이 그에 속했다.

자기 호감 ;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

자기 유능감 ; 능력을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

자기 중요감 ; 중요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

이것은 부부라는 테두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구에 속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나와 가장 친밀한 이에게 받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요즈음 황혼이혼이 늘고 있다고 했다. 그동안 고생은 고생대로 해놓고 황혼이혼이라니? 차라리 나를 찾을 수 있을 때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했다. 황혼이혼을 요청하는 사람은 남편보다는 아내들이 많았는데, 그것은 1)도움을 청했을 때 도와주지 않았던 남편에 대한 허무감, 2)일을 우선시하는 남편의 태도가 안겨준 고독감, 3)남편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지 않다는 데서 오는 상실감이 그에 속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중 2번을 2015년에 느꼈었는데, 일을 나보다 우선시한다기보다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본인의 욕망이 있기 때문에 그로부터 오는 외로움이 좀 있었다. 대화를 해도 제자리라는 것을 느껴서 허무할 때도 있었고, 결국은 본인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욕망이 컸던 그는 오로지 본인을 위해서 '친정으로 가있으면 어떻겠냐'라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본인의 일에 대해서만큼은 의논이 아니라 통보에 가까웠다.

나는 2번 하나만으로도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이혼을 요청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전혀 모른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러던 중 교육이라는 가면은 씌워 억지로 들어야 했던 강연을 들은 계기로 그는 '일보다는 가정' 바뀌기는 했지만 당시에 나는 결혼에 대한 회의감이 심각하게 들기도 했었다. 그러면서도 야망이 없는 사람이라면 내가 그를 믿고 결혼을 했을까. 하는 모순된 생각을 가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만약 그런 상황이 지금까지도 이어졌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상하면 조금은 움찔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때 읽었던 책 전경린 <나비>가 정말 큰 도움이 됐었다.


모든 남자들은 상실한 나라를 가진 고독한 존재들이다.

알렉산더대왕, 칭기즈칸, 진시황제, 나폴레옹, 심지어 히틀러도 바로 그 나라에 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남자들에겐 세계를 다 정복한다 해도 결코 갈 수 없는 나라가 있다.

 전경린 , 나비」




51. 남자는 자존심에 살고 자존심에 죽는 존재.

누군가 자신을 걱정해주거나 생각해주기보다는 신뢰해주기를 원합니다.

“당신이라면 괜찮아. 난 믿어.


그는 내가 집에 와서 직장에서 있었던 일화들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런데 그가 내게 직장에서의 일을 전부 내게 털어놓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가 힘든 일이 있으면 그때그때 이야기하지 않고, 이후에 다 해결되면 이야기를 하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힘든 일이 해결되면 다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삭힐 때도 많다. 나는 내가 걱정할까 봐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것도 그것이겠지만, 자기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일이면 더욱 그랬다. 나 역시 일을 하다가 자존심에 금 가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그것을 전부 말하지는 않는다. 회포를 풀 수 있는 유대관계가 있는 회사 동료가 있다면 더더욱. 그런 면에서 그와 나는 똑같은 게 아닐까. “무슨 일 있어?”의 대답을 요하는 말보다 그가 유난히 힘들어 보일 때면 술상을 차려 그와 함께 각자가 짊어졌었던 하루의 피곤을 풀 수 있는 그런 아내가 되고 싶다.



194. 여성들은 상대 남서이 자신에게 어떻게 해줄지를 시험하고 관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일이나 기념일 당일까지 말을 안 하고, 상대가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봅니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만일 상대가 자기 뜻대로 하주지 않았을 경우 남는 것은 분노와 슬픔입니다.


이 부분에서 아차 싶었다. 내가 꼭 그렇기 때문이다. 생일이나 기념일은 그가 알아서 잘 챙기지만, 으레 회식이나 술 약속이 그랬다. 내가 정말 다녀왔으면 하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응, 그래요. 알았어. 다녀와.”라고 말하지만, 그게 아닐 경우에는 “너 알아서 해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는 나의 대답에 따라 약속을 잡거나 잡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너 알아서 해요.”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에도 없는 소리하네.”라면서 내 눈치를 살핀다. 76. 왜 먼저 알아주지 못하냐고 짜증을 내지 말고, 원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해보세요. 선택권을 줘버리고선 내가 원하는 선택지가 아니면 화가 나는 타입; 나는 내가 그러지 않으면 좋겠는데,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이번에도 글로 부부관계가 원만해지는 법을 배웠고 행동으로 다이렉트로 연결될 고리를 얻지는 못했지만,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당장은 아니지만 이런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자양분이 되어 우리 부부의 밑거름에 보탬이 될 테니까.



오탈자 156. 이혼을 하던 관계를 회복하던, '이렇게 하기를 잘했다'라고 후회하지 않는 것이 행복을 향한 첫걸음입니다. ▶ 이혼을 하든 관계를 회복하든

('-하던 '은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것이라면, '-하든'은 선택의 문제이니 '-하든'이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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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의 화첩 - 열두 가지 이야기로 그려보는 한국풍 메르헨 (컬러링북)
곰곰e 지음 / 더도어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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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안정이 필요할 때면 컬러링북을 통해 색칠을 했었다. 색채 감각이 꽝인 나이기에, 엄청난 컬러링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알고 있던 동화들을 한국풍으로 만나볼 수 있다고 하여 색다르다고 생각했다. 외국 고전인 <빨간모자<잠자는 미녀> <피터팬> <눈의 여왕<백설공주>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엄지공주>와 더불어 우리나라 전래동화인 <선녀와 나무꾼> <견우와 직녀> <해와 달이 된 오누이>까지 합하여 총 열두 편이 들어있다.

 

 

 

 

 



이건 슬쩍 넘기다가 보게 된 부분인데, 이 동그라미 안을 채워 넣고 싶었다. 나는 이번에 색칠을 하면서 설핏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하마터면 나는 이 컬러링북을 회색빛으로 전부 그릴 뻔했다는 사실.

 

 

 

 

 




이건 <빨간 모자>에 나오는 부분인데, 소녀를 꼭 칠하고 싶어서 벼르다가 의식의 흐름대로 색칠 샤삭-

동화 제목은 <빨간 모자>이지만 내 멋대로 <분홍 모자>로 변신하기도 했다.

 

 

 

 

 


내가 참 좋아하는 동화 중 하나 <백설공주>는 정말 충격 그 자체, 하회탈을 쓴 난쟁이라니!!!! 헤헤헤 거리면서 색칠을 했는데 나의 어리바리한 색채감각은 여기에서도 드러나는군.


+

뿐만 아니라,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는 한국풍으로 그렸을 때 무엇인지 아는가! 난 보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어???”해버렸는데, 정말이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면서 깜짝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던 부분들이 분명 많았다. 완성된 그림에 색을 칠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의 사고를 전환시켜 조금은 신기한 경험을 하게 해주는 컬러링북이었다. 나의 경우는 한 페이지를 전부 칠하기보다는, 조금씩 마음에 드는 인물, 마음에 드는 물건, 마음에 드는 물건 등을 하나씩 색칠하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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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조각 - 불완전해서 소중한 것들을 위한 기록
하현 지음 / 빌리버튼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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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적인 영역을 아우르는 작가 본연의 에세이를 읽어 내는 것이 퍽 힘이 든다'라고 자주 생각했었다. 그렇게 에세이를 '잘' 읽지 못하고, 읽지 않으려는 나의 주관적인 태도는 정말이지 언제 생각해도 황당무계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맥이 다시 풀렸다. 이런 느낌은 강세형님 이후로 좀 오랜만이었다. 에세이를 읽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를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해보자면, 처음 지녔던 에너지가 점점 뒤로 갈수록 소모되고 닳아없어지는 느낌을 꽤 자주 받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떤 에세이들은, 다른 책의 구절을 발췌함으로써 그 간극을 메우려는 시도를 한 에세이도 있었으니 말 다 했다. 어쨌든, 나는 이번에, 개인적으로는 끌어안고 싶을 정도로 좋은 에세이를 만난 것 같다.



조금 오랜만에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서 누군가 읽고 반납한 곳에 이 책이 있었다. 무심하게  페이지를 넘기다가, 기존에 빌리려고 했던 책 한 권을 포기하고 책을 함께 빌렸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보기 하루 전이었다. 달의 조각을 활자로 만나기 이전에, 달의 차오름을 먼저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좋았다.


사흘 동안 이 책을 가까이하는 동안에 읽고 있는 페이지가 닳을까 봐 심하게 버둥거렸고, 속도는 더뎠다. 단어를 고민하는 시간들, 그렇기에 쉽게 쓰이지 않은 글들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의 근거는 분명했다. 한 페이지에 당신의 마음을 읽고, 한 페이지에 마음을 나누고, 한 페이지에 위안을 받으며, 한 페이지에 당신에게서 배우고, 한 페이지에 당신을 부러워도 하며, 한 페이지에 완전히 방심해져버리고, 한 페이지에 나를 사랑하는 시간과 한 페이지에 나의 배우자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는 동안 그동안 꽉 막혔던 것들이 조금씩은 뚫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평온함이라는 호사를 기꺼이 누렸던 까닭이다.

책을 읽고 난 후에는 꼭 거리를 소요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는데, 부러 그러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조용한 곳에서 마음을 다독이는 시간을 가지고 싶어 도서관 열람실에서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글은 섬세하고도 분명하여 글에 깃든 애정조차도 투명했다. 달 속에 물이 차 있는 것인지, 물속에 달이 들어찬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오늘 오후, 열람실에서 이 책을 다 읽었고 나오는 길에 열람실 앞에 놓인 반납함과 마주쳤다. 어쩐지 나의 책을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기분이 들어 반납하지 않고 열람실을 도망치듯 나왔다. 그리고 그 책은 오늘 외출했던 가방 속에 고이 들어있다.




한결같은 호흡을 꾸준하게 유지하며 나는 당신의 글을 읽었다. '나'는 미완의 '당신의 글'을 읽고 더욱 '미완의 인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책을 읽기 전이나 책을 읽은 지금이나 여전히 나는 미완의 시대를 산다. 나는 당신의 문장들의 행간에 자주 서서 당신과 나의 간극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아는 것을 나도 알고 싶었고, 그로 인해 나는 조금 더 위로받고 싶었다. 위로를 받으면서 간극의 틈이 좁혀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완전한 착각이었다. 당신과 나의 간극은 좁혀질 수 없었다. 당신과 나의 경험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완연하게 달랐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따금 호쾌한 사람인 척하는 나 자신이 역겨워 견딜 수가 없을 때가 있는데, 그런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방법을, 시간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음에 감사한다.


당신은 유난히 꼬리가 긴 사랑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면 차라리 도마뱀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도마뱀이 되지 않았기를, 오지랖을 떨면서라도 바라고 싶다. 당신이 도마뱀이 되었다면 당신의 사랑은 꼬리가 길었을 테니. 무심코 내뱉는 말의 폭력성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를 바랐고, 대신 당신이 쉽게 행복해지는 순간들이 조금 더 자주 있으면 바랐다. 나는 당신의 시선으로 써낸 겨울을 읽으며, 나도 처음으로 '겨울을 좋아해 보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당신의 이야기는 겨울이었다. 당신 자체가 겨울이었을는지 모른다. 당신을 떠올리면 나는 쉽게 겨울을 떠올린다. 나는 봄이 오는 것을 미루고, 이미 차오를 대로 차오른 겨울의 달을 당신과 떠먹는 달큼한 경험을 했다. 나는 당신에게 퍽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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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다
김재식 지음, 김혜림 그림 / 쌤앤파커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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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다니, 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말인가.  하지만 나는 이 말을 타인에게서,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듣는다면 되물을 것 같다. "(부정적인 표현의) 정말? 왜? 어째서?" 사람이 어떻게 내가 아닌 타인을 매일매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결코 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는 강약이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다툼을 통해 사랑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노력을 한다면 그건 사랑이라고 불릴 수 있지만, 다투고 미워하는 과정도 '사랑'이라고 말해버린다면 그건 분명 억지이고, 명백한 미화에 해당된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대부분의 '다툼'은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고, 나를 위해서인 경우가 많기에, 우리는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말한다기보다는, 상대방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편이 오히려 옳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당신을 위한다'는 말을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결국은 '나를 위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곤 하니까.

 


 

내가 평소에는 거의 찾지 않는 사랑 에세이를 찾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사랑의 이야기는 언제나 읽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는 하지만, 모음집을 굳이 찾아서 읽는 편은 아니다) 극도로 J에게 징징거렸던 나날들이었다. 이런저런 이유가 많았지만 가장 큰 틀은 결국은 ‘주말부부’였다.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 (이건 평소가 아니라, 특히 술 약속이 있을 때 그는 정말 나라는 사람은 잊고 사는 것만 같다. 평소에는 '어쨌든 집에 들어오니까'라는 믿음이 있었다면, 지금 우리 상황은 좀 다르다고 생각하기에 그 부분은 그가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다는 것), 우리가 살 집이 있는 지역에 처음 갔을 때 너무 아무렇지 않게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나를 마중 나왔던 것 (당시에는 화가 나서 회식 때도 이러고 나가지는 않지 않냐.고 말했다. 나는 이날 데이트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런 생각을 한 내가 멍청하다고 비난했다. (나에게 있어 멍청하다는 의미는 내가 나에게 제일 하고 싶지 않은 말 중 하나의 종류의 단어다)), 내가 다음 날 본인이 있는 지역으로 갈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날의 술자리에서 조절을 하지 않는 것, 그래놓고 나를 만나서는 피곤하다고 말을 했다. 물론 나는 그가 말을 하기 전부터 그의 피곤을 살폈다. 그는 그것을 단순히 '아직 업무에 적응되지 못해서'라고 말을 했다. 그건 내가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반복되는 문제들에 지쳐버렸고, 이 사람이 내가 함께 살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실망스럽기까지 했었다. 심지어 이건 연애 때도 없던 괴기한 행동들의 연속이었다.


주말부부를 하니 연애 때의 감정이 되살아날 것이라고 착각한 것도 아니었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와 함께 지냈던 몇 년 간의 생활들이 초기화된 듯한 모습들을 보였고, 급기야 나는,“나는 짝사랑을 해본 적이 거의 없는데 요즘 당신을 나 혼자 짝사랑하는 감정을 느껴.”라고 말했다. 쌓이고 쌓였던 감정들이었다. 결국은 우려했던 상황들이 봇물 터지듯 터졌다.
문득, <빨간 장화>에서 “나랑 헤어져도 쇼짱은 분명 괜찮을 거야.”라고 말하던 히와코의 말이 나의 생황과 오버랩됐다. 그는 아니라고 펄쩍 뛸 테지만, 내가 그에게 다시 읽어보라고 준 <빨간 장화>나 읽었으면 좋겠다. 그날은, 모든 것이 전부 외롭다고 느낀 밤이었다. 내가 베고 있는 베개, 덮고 있는 이불, 몸을 누인 침대, 내가 있는 공간마저도 부정하고 싶은 상태였고, “혹시 그는, 내가 필요한 게 아니라-”로 시작되는 문장들을 메모장에 휘갈겼고 그에게 내보였다. 예닐곱 줄의 문장밖에 안 되는데, 글을 전부 옮기지 않는 건, 내가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기분을 다시 끄집어내지 않기 위함이다. 이미 끝난 일이어서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쓰다 보니 또 화가 나서 여기서 멈춰야겠다.



결국은 내가 이 책을 읽으려고 한 것은, 내가 하고 있고 알고 있던 사랑에 대한 이면의 모습 때문이었다. 매번 공감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알게 될까 싶어서였다. 사랑이라는 게, 아니- 해보지도 못한 짝사랑이라는 감정이 이런 거지발싸개 같은 감정이라면 나는 당장에라도 그만두고 싶었다. 내 사랑이 어리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읽고 싶지 않은 마음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껏 위안받고 위로받고 싶었다. 이 책을 읽는 행위는, 암사자가 물소를 잡기 전 물을 축이는 행동과도 비슷했다. 나는 우선 좀 차분해질 필요가 있었다.



 


 

255.

나를 울게 한 것도 사랑이지만

다시 웃게 하는 것도 사랑이기에

우리는 또다시 사랑을 시작해야 한다.

올해 1월에 떠났던 ​부산 여행에서 노래를 하나 들었다. 가을방학의 <너로 인해>라는 노래였는데, 이 노래는 분명 고양이에 대한 노래였는데, 나는 자꾸 J가 거기에 대입되더라는 것이었다. ‘그래 난 너로 인해 많이 울게 될 거라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보다 많이 행복할 거라는 걸 알아’ 그래. 내가 J 때문에 많이 울기도 하지만, 많이 웃기도 한다. 행복해하기도 하고. (고양인가)

하나하나 차근차근 읽어내려갔다. 내 인생을 통틀어 연애라는 것을 하면서 나는 이별에 그다지 아파하지 않았다. 며칠만 앓고 일어나면 금세 괜찮아졌다. 그 부분에 대해 난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주변 사람들은 내가 신기하다고 말했다. 시간이 흐른 후에 생각해보니 이유는 두 가지였다. 정말 좋지 못한 사람과 연애를 했거나 끝이 남지 않는 연애를 했거나. 끝이 남지 않는 연애라는 것은, 내 이기적인 성격 때문에 뒤늦게 상대방에게 미안해하는 일이 많을지언정 나는 매 순간 진심을 다했었기에 미련이 남지 않는 연애를 말한다. 그래서 주변 지인들이 연애하고 이별했다고 슬퍼하거나 드라마에서 남녀 주인공이 이별을 할 때 슬퍼하는 연기를 할 때면 잘 공감하지 못했던 축에 속했기에 나와는 별개의 세상으로 알고 지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며 이별에 저릿저릿한 마음이 느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J와의 관계에서 헤어짐을 염두에 두고 있거나 헤어질 수 있다는 상상을 하면서 사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현재 모든 '이별'에 민감해지고 예민해지는 시기다 보니 더욱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우리는 사랑을 했었다면 사랑을 다시 시작해야하고, 사랑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랑에 집중해야한다. 그랬을 때에 비로소 사랑과 마주 설 수 있다. 사랑은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사랑이 컨트롤이 가능한 것이라면, 세상 어느 곳에도 '진심'이라는 싹은 틔울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5.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오랫동안 함께하기를 바랐다.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받아들여야만

우리는 온전히 그 안에 살 수 있다.



나는 그 사람만의 색깔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확신하지는 않는다. 이걸 인정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대로 무조건적인 수용 역시 올바른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특히 둘의 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한다면 더더욱. 상대방이 싫다고 하는 것이나 해줬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 받아들이라고 하기 이전에 '노력'이라는 것을 해줬으면 한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는 그게 가깝든 가깝지 않든 '노력'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일임에 분명하니까. 무조건적인 이해가 무서운 건, 이해가 아니라 체념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116.

한 세상을 살면서 오랫동안

한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는 건

참 멋진 일이다.


계절이 바뀌어 꽃이 피고

비가 쏟아지다가 하얗게 눈이 내리고

얼었던 강물이 따뜻한 햇살에 녹아도

서로의 곁에 머무르고 있다는 건

함께하기로 약속한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 사람은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힘겹게 당신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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