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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이 책을 2010년에 읽고 난 이후 정말 오랜만에 손에 들었다. 이 책을 읽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이 책을 내게서 떠나보내기 전 마지막 애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이 책을 2010년에 읽었을 때 그렇게 좋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주위에 많은 분들이 좋은 책 혹은 괜찮은 책이라고 품평을 한 까닭이었다. 사람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 않나. 내가 봤을 때는 별로이긴 하지만, 다른 이들이 좋다고 하면 다시 한 번 쳐다보게 되는 것. 이번에도 좋지 않다면 내게서 떠나보내리라 작정을 하고 있던 터였다. 그리고 너무나 우연하게도 유월에 같은 책을 읽고 편지를 나누기로 한 민정님이 이 책을 후보에 올렸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 정돈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이 책은 시작되었다.
내가 이전 서평에 이런 내용을 썼던가, 문장의 행간이 참 고집스럽다고. 고집스럽지만 이내 그곳에 빠져들었다고. 하지만 그 고집을 나는 내내 배타적으로 대했다. 빠져들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단순하게 지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 컸다. 글을 쓴 것은 작가이지만, 내 호흡대로 책을 읽고 싶은 욕구가 더 컸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꾸만 나는 대립되었다. 문장의 행간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중간 즈음에서였다. 어느 부분인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부터 서서히 나는 그 속도대로 책을 읽고 있었다. 분해야 하는데, 분함보다 평온함이 더 컸다. 참 우스운 일이다.
이 책의 어느 부분부터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눈을 맞으며 그녀는 서 있었다.
올 줄 몰랐어요.
하지만... 기다렸잖아.
나는 이 부분을 책의 처음이자 마지막 부분.이라고 믿고 싶다.
진심으로.
실은 나, 이 책을 2010년에 읽었을 때에는 이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2010년에 썼던 서평을 보니, 자기 연민에 치우친 한 여자의 회고록이라고 판단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난 이후에 찾아본 서평은, 무척이나 부끄러워 비공개로 전환해둘까 하고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니, 어쩔 수 없잖아.
하지만 우스운 점은, 그때의 시선이 지금은 완전히 사그라든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배우라는 신념으로 똘똘 뭉친 미남과 그 옆에서 어딘가 모르게 머뭇하던 박색의 여인의 전례가 있었기에 그는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여전히 하고 마니까.
그렇기에 나도 묻고 싶었던, 131. 그 친구를.... 좋아하고 싶은 거니, 아니면 좋아해 주고 싶은 거니?
나도 계속해서 의문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아버지를 더 많이 닮은 그는, 어머니를 同情하기에 생긴 결과물이 아닐까 하고.
하지만, 고마웠어요. 라는 말에 지구가 정지한 느낌이었다면,
동정, 호의, 연민. 세 개의 창 중에서 하나는 사랑임에 틀림이 없었겠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혹은 그렇게 믿고 싶거나.
54. 종착역에 이를 때까지 기차에서 내리지 못하는 인간처럼, 인생의 어느 지점까지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일부가 있다는 사실을...
나도 몰랐다. 나는, 너는, 우리는, 항상 지금만을 사니까. 종착역에 도착하지 못한 사람이 아직도 무수히 많다. 타인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그 종착역에 도착해보지 않으면 절대 모르는 것. 하지만 어느 순간, 나에게 비밀이라는 게 생기면서부터는 완전히 타인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어야 하고 믿을 수밖에 없고 믿고 싶은 사람의 경우에는 인정하려고 해본다. 책의 말처럼, 내가 그 사람의 종착역을 가본 것은 아니지 않나. 또 그 사람이 종착역에서 내렸는지, 내리지 않았는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며 후회하는지, 후회하지 않는지, 하는 것들을.
71. 절대 단련할 수 없는 급소가 몇 군데 있어. 그중 하나가 눈이야! 그중 하나가 눈이라고,
나는 눈에 대한 콤플렉스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내가 그 콤플렉스를 말해버리면 타인은 내 눈을 유심하게 쳐다보았다. 지금은 전처럼 그렇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 순간의 시선을 참지 못해 눈을 내리깔고 만다. 지금은... 정말 시시하게 여기고 있으면서 아닌 척하면서 살고 있지만, 어릴 때 받았던 눈에 대한 상처는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그때의 공격은 내 두 눈을 찌르다 못해 실명시키기에 틀림이 없는 사건이었다. 눈이라는 게 왜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잔뜩 가졌던, 초등생 2학년.의 사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체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어냐, 라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눈이라고 말한다. 모순이래도 어쩔 수가 없다. 결국, 눈이다.
모든 것이 시시하게만 여겨지는 여름,에 아버지는 새로운 사람과 결혼식을 올렸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는 추녀를 만난다.
추녀라니. 누가 누굴 보며 추녀라고 단언하는 거야.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은 그것이었다. 왜, 예쁨을 강요하지. 왜, 예뻐야 하는 거지. 그렇다면 못생김의 기준은 뭐지. 누구라도 와, 저 사람 진짜 못생겼네. 라고 할 만한 사람인 건가. 그럼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 거지. 1980년대의 美의 기준과 2019년의 美의 기준이 조금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이 불쾌함은 뭐지. 정말 별로다.
156. 인간은 대부분 자기(自己)와, 자신(自身)일 뿐이니까. 그래서 이익과 건강이 최고인 거야. 하지만 좀처럼 자아(自我)는 가지려 들지 않아. 그렇게 견고한 자기, 자신을 가지고서도 늘 남과 비교를 하는 이유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끝없이 가지려 드는 거야.
나는 자족하며 산다고 말하지만, 정말 자족하며 살고 있을까 의심을 할 때가 있다. 가지고 싶으면 나도 가지면 되지, 라고 생각은 하지만 왜인지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때도 분명히 있기는 있다. 그게 때에 따라 좀 다를 뿐이지.
나는 부러움은 인간이 지닌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질투나 시기는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부러움은 부러움으로 그쳐야지, 질투나 시기로 번지면 비교가 되고 결국 나 자신을 나락으로 빠트리는 것이 되어버리니까. 그러면 인생은 결국 늪에 빠져버리고 만다. 켄터키 입간판의 작은 <희망>이 흐릿하게 보이다가 결국 점멸하고 마는 것처럼...
164. 세계라는 건 말이야, 결국 개인의 경험치야.
세계가 그렇게 좁아터졌던가, 라고 반발하려다가 내 세계는 어떻지? 하고 생각해보니 결국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내 세계는 그리 넓지 않으니까. 오히려 편협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래서 자조 섞인 웃음으로 화답했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괜찮다는 생각이, 서평을 쓰며 문득 들었다. 경험이 늘어야 세계를 넓힐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세계도 결국 편협한 거 아닌가. 어쨌든 자기의 경험치잖아. 이래도 편협하고 저래도 편협하다면 넓고 좁은 것은 아무 차이가 없네. 편협한 세계 속에 옹그리며 살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지키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크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나의 신념을 때때로 들여다봐주는 것. 그것이 바뀌면 바뀌는 대로 반질반질 투명하게 닦아내어 나의 갈 길을 가는 것.
244. 세상은 거대한 고아원이다.
세상은 거대한 고아원이라지만, 그와 그녀, 그리고 요한은 고아원의 일원이었다.
그것도 무척 친밀한.
185. 그게 사랑이지. 인간은 누구나 하나의 극(極)을 가진 전설과 같은 거야. 서로가 서로를 만나 영혼에 불을 밝히는 거지. 누구나 사랑을 원하면서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까닭은, 서로가 서로의 불 꺼진 모습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무시하는 거야. 불을 밝혔을 때의 서로를... 또 서로를 밝히는 것이 서로서로임을 모르기 때문이지.
192. 아마도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겨울이었을 것이다. 무엇을 해줄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런 보잘것없는 기억의 편린조차도 더없이 눈부신 순은(純銀)의 반짝임으로 떠오른다. 인생에 주어진 사랑의 시간은 왜 그토록 짧기만 한 것인가. (…) 왜 인간은 지금 자신의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니 망각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2174. 영원한 장소도 영원한 인간도 없겠지만, 영원한 기억은 있을 수 있겠다 생각이 드는 밤이었다. 느린 마차처럼 서울로 돌아오던 버스와... 그 속의 지친 공기, 누군가 벗어둔 신발의 말똥 냄새마저도 그저 인간이 발할 수 있는 인간의 체온으로 느껴지는 밤이었다.
214. 모든 인간은 투병(鬪病)중이며,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누군가를 간호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228.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주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거야.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시시해질 자신의 삶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지.
299. 사랑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328.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살아야 하고,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서로를 스치거나 만나야만 했던 것이다. 왜 모두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그런 이유로 우리는 겨우 이곳에서의 외로움을 견디고 모면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기대를 걸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포기를 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존재이다. 신의 기대대로 살 순 없다 해도, 그래서 인간은 끝까지 스스로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동물이다.
사랑이 있는 한
인간이 서로를 사랑하는 한은, 말이다.
내 사랑은 어떤 형태인지 다시 한 번 들여다보게 했던 문장들.
덩달아 사랑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던 문장들.이기도 했다.
사랑은 사랑으로써 아름다워야지. 사랑이니까, 그러니까,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378. 당신이 무사해서... 당신이 무사하니까 이제 저도 무사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느릿한 몇 곡의 재즈와 함께 나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느낌이었고, 그 순간이 지나고 나자 다시 사소한 말들, 아무것도 아닌 말들이 필요한 시간이 우리에게 돌아왔다.
터널이 느릿느릿 올 수도, 길게 올 수도, 시시때때로 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분명한 것은, 내가 지금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이 순간들이, 이 시간들이 나를 고여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필요한 것이라는 것. 모를 리가 없지만, 난 또 모르겠다. 잃지 않으면 지금의 소중함들도 소중하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게 바로 인간일 테니까. 소중하다고 생각해야지, 하면서도 나는 금세 잊을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확신한다.
오로지 진실인 이유로 평범할 수밖에 없는 문장들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늘 곁에 있어서,
아무렇지 않게 읊조리는 말들이지만,
진심이 아닌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고.
책 속의 밑줄_
55. 인생은 늘 막연하면서도 확연한 안개와 같은 것이었다.
68. 젊은 아버지의 얼굴 앞에서 특별한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를 사랑해 온 인간의 마음은 오래 신은 운동화의 속처럼 닳고 해진 것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어떤 빨래로도 그것을 완전히 되돌리진 못한다... 변형되고, 흔적이 남은 채로... 그저 볕을 쬐거나 습기를 피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115. 누구에게나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시절이 있는 법이다.
140. 사람의 웃음이...창(槍)처럼 사람의 배를 찌를 수 있다는 걸 믿으세요? 믿어...하고, 나는 뿔이 잘린 트리케라톱스처럼 고개를 끄덕였었다. 결국, 세상의 매듭을 푸는 것은 시간이다.
152. 버스는 오지 않고 여전히 달이 자신의 이면(異面)을 감춘 채 하늘의 서편에 머물러 있는 새벽이었다. 인간은 끝끝내... 자신의 내면을 감춘 채 사라지는 저 달과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164. 태양과 바다와 꽃들은 실은 언제나 이 세계에 머물러 있고, 우리에겐 그 사실을 망각하지 않을 테크닉이 필요할 뿐이었다.
174. 그게 인간이야. 모든 인간에게 완벽한 미모를 준다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 (…) 왜 다수가 소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야. 그건 끝없이 부끄러워ㅡ하고
부끄러워하기 때문이야.
217. 그 사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지금의 후회를 조금은 줄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결국 <그때>의 인간처럼 무능한 인간은 없다.
220. 보잘것없는 인간들의 세계는 그런 거야. 보이기 위해, 보여지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봐줄 수 없는 거라구.
346. 추억이란 이런 것이다. 결국 인간의 추억은
열어볼 때마다 조금씩 다른 내용물이 담겨 있는 녹슨 상자와 같은 것이다.
360. 잠을 자고 난 머릿속이 멸망해 버린 세계처럼 텅 비어 있는 느낌이다. 아닌 게 아니라 모든 것이 사라진 세계다.
361. 누군가를 사랑한 삶은 기적이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던 삶도
기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242. 숙제처럼 밀려 있던 날과, 아무런 검사도 받지 못한 지난 날들이 엎드린 시체처럼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누워 있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