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미나토 가나에 지음, 오유리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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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 가나에의 세번째 작품인 '소녀'를 읽었다. 전작인 '고백'을 매우 재미있게 읽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 뒤를 이은 '속죄'는 전작보다 깔끔하지 못한 느낌을 받았지만 페이지가 휙휙 넘어갈 정도로 흡입력 강하게 읽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세번째 작품인 '소녀'가 나왔다. 나는 바로 구매해서 보지 않고, 좀 더 뒤에 지인에게 선물을 받아 읽게 되었는데, 읽기 전 평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치솟는 기대를 가까스로 바닥에 깔아버리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보고 싶다―. 인간의 죽은 모습을. 아니, 사오리가 본 것이 시체라면 나는 죽는 그 순간을 지켜보고 싶다. 사오리가 베스트프렌드의 시체를 봤다면 나도 그만큼 가까운 누군가의. - 누가 있지? 아쓰코를 보니 나를 맹하니 바라보고만 있다. (p37) 친구의 죽음을 목격했다고 말하는 사오리를 보며 아쓰코와 유키는 '사람이 죽는 순간을 보고 싶어!' 라는 무서운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니, 사실 그것은 유키만의 생각이고 아쓰코는 그런 유키와 멀어지지 않기 위한 최후의 발악인 셈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여름방학 동안 아쓰코는 노인요양센터에서, 유키는 소아과 병동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한다. 두 소녀는 '죽음'이라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지만, 그것은 쉽사리 두 소녀의 시야에 잡히질 않는다.

 

 

 

어떻게 사람이 죽는 순간을 보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는거지. 게다가 유키는 자신과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정말 저 생각을 하고 있는 유키를 보며 가슴에서 답답함이 차올랐다. 정말 유키가 책 속에 있는 소녀가 아닌, 실제 소녀라면 멱살을 쥐어 마구 흔들어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유키가 책 속에 있는 소녀라는게 원통하고 분해서 짜증이 났다. 그래서 곧바로 책을 덮었고, 책을 읽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런 미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유키가 싫었고,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유키를 만들어낸 미나토 가나에가 싫었다. 겨우 40페이지도 채 못읽은 이 책은 벌써 몇 년전의 일을 상기시켰고, 나는 그날 밤 악몽을 꾸었다. 온 몸이 펄펄 끓는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뜨거웠고, 땀이 줄줄 흘렀다. 곧바로 선풍기를 켰고, 책을 폈다. 선풍기로 인해 싸늘하게 식어버린 땀때문에 온 몸에 오한이 서렸다. 선풍기를 끄고 몸을 달달 떨며 책을 읽었다. 두 소녀가 1인칭 시점을 번갈아 차지하며 독백형식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데 이를 미나토 가나에가 중심에 서서 둘의 확실한 경계선을 매듭짓고, 심리변화를 정확히 꿰뚫어보아 두 소녀의 감정변화를 신랄하게 그려내야하는데, 그것들의 부재를 느꼈다. 이 책에서 '나'는 세명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1인칭 시점은 2명의 '나'가 된다. '나'는 시점이 불필요하리만큼 쉽게, 자주 바뀌어서 속이 매스꺼움을 느꼈다. 읽다보면 점점 적응해가며 이제 누가 아쓰코고, 누가 유키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긴박감이 넘쳐나거나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켜야만 하는 진정제따위는 필요도 없는 유 - 하게 흘러가지만, 한번 읽은 것처럼 결말을 뻔히 드러내보이는 이 책의 클라이막스는 억지로 끼워맞춘 것 같다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 감흥을 얻고, 재미를 얻어야 할지를 모르겠던 책 중의 하나였다. 책을 다 읽었음에도 찝찝함이 남았다. 이 찝찝함을 무엇으로 말끔하게 씻어버려야 할지 의문이다. 책을 다 읽고 발작을 하듯 갑작스럽게 애린이가 보고 싶어졌다.

 

 

 

나도 처음에 전작에 못 미치는 이 책을 읽고서 전작들과 비교하며 신랄하게 비판하게 될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왜 사람들이 전작인 '고백'과 '속죄'를 들먹여가며 전작보다 별로다, 라는 식의 발언을 하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 책이 약간의 미스터리 성향을 띠고 있긴 하지만, 범인을 뒤쫓는 숨막히는 추리도 없기에 구태여 그에 따른 복선을 찾아낼 필요도 없는 띠지에 붙어있는 말 그대로 미나토 가나에는 <시크릿 청춘 소설>이라는 다른 양상으로 새로운 변화를 꾀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은 독자들은 그녀의 전작들과 비교하며 이번 작품을 깎아내리기에 급급하고, 그녀의 새로운 시도에는 아랑곳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미안하게도 그녀의 새로운 시도에 갈채는커녕 미소조차 지어보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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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 끝에 네가 서 있다면 좋을 텐데 - 최갑수 골목 산책
최갑수 글.사진 / 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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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 작가의 에세이는 <당분간은 나를 위해서만> 이라는 작품을 처음으로 만났었다. 그 때 만났던 책은 사실 엄청난 감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유난히 우울에 빠져있었던 나를 더욱 더 감성적이 되게 만들었지만, 뭔가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래서 저자가 이번엔 '골목 산책'이라는 에세이로 찾아왔다는 소문을 듣고서도 나중에 도서관에서나 빌려봐야지, 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지인의 선물로 인해 품에 안고 대출 시간에 쫓기지 않으며 사진 하나, 하나 놓치지 않고 여유있게 볼 수 있음에 고마워하며 책을 펼쳤다. 몇 개의 사진을 먼저 선보여주고 '골목 산책 안내'라고 해서 차례가 있는데, '골목 산책'이라는 어감이 좋아서 계속 입 속에서 혀를 굴리며 되뇌었다. '골목'이라는 말을 듣거나 보면 나는 '뒷,골목'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살아왔고, 아직도 살고 있는 이 동네는 유난히 다른 곳보다 골목이 많은 편이고, 그로 인해 치뤄지는 많은 나쁜 사건들이 동반되기에 최적의 상태인 곳으로 손꼽히고 있고 , 혹여나 한번 발걸음을 할라치면 그 속에선 아직 젖내음이 나는 어린 아이들이 피는 담배냄새가 코를 박박 긁고 싶게 간지럽히며 내 콧털의 신경을 곧추세우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저자에겐 감성적으로 스며든 '골목'이라는 단어가 이 책을 읽기 전 , 내게는 어두운 면만을 제공하는 곳을 의미하기에 충분했다고 생각된다. 저자는 골목을 걸으며 귀가 팔랑팔랑거리는 단어들만을 초이스해서 우리에게 하나의 완성된 문장을 선보이고 있다. 그 아른아른거리는 문장들을 보며 이미 저자가 걸었던 골목들을 그의 발자취를 따라 나도 함께 걷게 된다면, 나 또한 그런 감성적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그 계단'은 친절했고 사려 깊고 다정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그 계단'에는 계단을 만든 사람의 마음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골목 여행의 매력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고작 계단 하나에서 마음을 느끼고 감동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p51) 계단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자체가 신기함을 넘어서 얼렁뚱땅하다고 생각되었다. 어느 곳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동네의 젊은이들도 한번쯤은 쉬었다 가야 할 계단에서 다른 이처럼 쉬기도 하고, 홍제동 개미마을의 높고 가팔라서 아찔했던 계단도 서슴지않고 조심스레 발을 옮기는 저자를 보며, 그 계단을 오르는 나를 상상하니 있는 짜증에 곁들여 없는 짜증까지 만들어내며 오르는 내가 상상되서 나도 모르게 미간을 있는대로 찌푸리게 됐다. 저자가 사소한 골목을 보며 늘어날대로 늘어난 감성을 글로서 쓸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저자는 현재 그런 곳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 동네 주민들이 그것으로써 느낄 힘겨움은 생각지않고 그것들에 또 다른 감정을 이입시켜 불어넣는 것은 위험하고 이기적인 처사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보게 된다.

 

 

 

주민들은 카메라에 상당히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주민들의 이런 태도에 십분 공감이 간다. 자신들의 삶의 공간에 불쑥 들어와 한마디 양해도 구하지 않고 신기한 구경거리를 대하듯 다짜고짜 카메라부터 들이미는 이방인들의 무례가 달가울 리 없다. 자신들의 고단한 삶을 한낱 구경거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마냥 친절하게 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p298) 이제 얼마 남지않은 골목들이라서 사진 좀 찍는다 하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를 벗어나 옛 것인 과거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자주 찾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곳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에겐 그들은 분명 달가운 손님보다는 무례한 침입자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밤골마을이나 태극도마을의 주민들이 특히 그랬다. 그렇다해도 낯선 이방인들에게 시원한 물 한잔, 막걸리 한 잔 대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개발이 되지 않는 동네에서 살고 있는 자신들의 처지를 원망하고 있을 뿐이다. "카메라 들고 놀이 삼아 오는 사람들이야 좋지. 하지만 여기서 살아봐. 얼마나 불편한지." (p111) 아직도 현 시대와 동떨어진 곳에서 우리들은 모르는 많은 불편함을 감수하고 살고 있는 그들을 불쌍히 여길 필요도 없고, 엄숙한 분위기를 풍길 필요도 없다지만, 잠시, 적어도 우리가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전에, 가난해서, 과거에 묶여 살아서 문명의 빛을 볼 수 없는 그들의 삶을 존중해주며 예의를 갖추어야하는게 당연지사가 아닐까.

 

 

 

 

만약 당신이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밥이 아니라 사랑받고 혹은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싶다면 철길마을로 가보기를 권한다. 한나절 철길마을을 천천히 거닐어보시라. 오전 10시가 넘어서야 겨우 햇빛이 들어오는 이 곳에 아침 일찍부터 고추를 내어놓고 빨래를 널어 말리는 것도, 국화를 심어놓은 화분을 문 앞으로 밀어놓는 것도, 벽 한쪽에 자전거를 비스듬이 기대어놓는 것도, 기차가 지나다니지 않는 철로 위에 자리를 펴고 나물을 말리는 것도, 밤이 되면 가로등 불빛이 켜지는 이유도, 불빛을 받은 철길이 필라멘토처럼 반짝거리는 것도, 창문 너머에서 텔레비전 소리와 아이 울음소리와 냄비 여닫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도 이 모든 일은 어쩌면 우리가 아직은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려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p84) 우리는 사랑을 받고 있음에도 무엇인가로부터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갈구해서 받아도 받아도 끝이 없는 사막과도 같은 목마름의 근원이다. 그런 우리에게 저자는 주변을 둘러보며 사랑받고 있음을 스스로가 깨닫길 원하고 있다. 우리는 너무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살고 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으나, 물질주의인 우리는 손에 잡히는 것만을 사랑의 징표 혹은 표본이라고 생각할 뿐, 소소한 것들에 대한 행복은 그저 당연한 것이라고만 치부해버리기도 한다. 요근래 내게 힘든 일이 닥쳤을 때 그들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기에 그 일을 해결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며, 믿었던 타인들도 나를 도와줄 수 없을거라 생각하니 결국 사람 개개인은 혼자라고 생각했던 요즘, 어쩌면 나는 이 문장들에 많은 것을 위로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매미가 울고 있는 것도, 온도가 30℃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더위에 시원한 얼음물을 마실 수 있다는 것도, 밤에는 시원한 바람이라는 손님이 찾아온다는 것도, 내가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려주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내가 보고 맡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그 모든 것이 나를 사랑해주는 것들이 된다.

 

 

 

이런 순간이 필요해. 마음에 드는 장소를 만나면 걸음의 속도를 늦추고 멈춰서는 일. 그저 바라보고, 감각하고, 즐기는 일. 이런 순간을 일주일에 십여 분 정도 만들어주는 것이 생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사는 것이 아닐까. (p224) 좀 더 편하게 살자며 바뀌는 나날이 발전하는 세상의 빠른 변화에 발맞추고 그것을 따라가며 나의 내면이 메말라가는 것도 모른 채 시속 150km/h로 주위를 쳐다볼 겨를도 없이 달리기만 한 것은 아닐까, 때로는 멈춰 서서 주위를 스-윽 둘러볼 때가 필요한 날이 있을텐데, 내 마음의 안식처를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줄여가고 있었다. 살면서 어느 순간은 몸을 꼿꼿이 피고 얼굴을 들어서 하늘을 바라볼 때도 필요하고, 허리를 접어서 땅을 굽어볼 때도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너무 잊고 살았던 모양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시골처럼 전부 골목길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집은 골목길을 쭉 따라와야만 들어갈 수 있기에 나는 퇴근길에 항상 골목길을 따라 집을 들어간다. 나는 항상 집에 가는 그 길을 걸으며 길이 도로처럼 아스팔트가 아니라서 구두굽이 빨리 닳는다던지, 바닥에 깔려있는 벽돌들이 화가 난 것마냥 삐족빼족 튀어나와 있어서 자주 넘어진다거나 하는 온갖 핑계란 핑계는 다 붙여서 그 길을 싫어했다. '골목'을 '뒷,골목'으로만 생각했던 내 고정관념을 '우리가 살아온 무시할 수 없는 세계'라고 정정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그런 마음을 안겨준 저자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이번 책은 하나의 주제를 엮어 만들었을지라도 읽으면서 이곳도 이곳같고, 그곳도 이곳같은 구성이 아닌 독특하진 않더라도 조금은 색다르고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테마를 원했던 나에겐 좀 지루함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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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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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려령 작가의 책을 처음 만난건 <완득이>였다. 그 책은 처음 읽을 때 사실은 아주 많은 추천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나에겐 별 감흥이 없어서 그것을 끝으로 김려령 작가를 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책이 작년즈음 새로 출간되었다는 <우아한 거짓말> 소식을 듣게 되었지만, 전작의 여파때문인지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나의 그 사람이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자꾸만 울컥하게 되서 채 읽지를 못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보고 꼭 읽어보라며 자신이 다 읽고 넘겨주겠다고 해서 얼떨결에 읽게 된 책이다. 받자마자 어떠한 내용인지 짐작도 못한 채, 표지가 참 예쁘다... 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읽고 있던 책을 끝낸 직후여서 그 자리에서 바로 읽을 수 있었던 책이었지만 , 마음 속에서 울컥하는 내용이라기에 조금 덮어두었다. 그 전에 읽은 '벽장 속의 아이'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아픈 마음에 또 한번 칼질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음을 달래줄 책을 두어권 읽고 나서야 이 책을 펼쳐들고 무슨 내용이건 김려령 작가의 글을 좇기보다는 이 책을 쓸 때의 마음을 따라 읽겠노라고 생각하며 첫 문장을 눈으로 따라 읽었다. 그 문장은 안그래도 간신히 달래놓은 내 마음을 지뢰밭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내일을 준비하던 천지가, 오늘 죽었다.

 

 

 

천지는 열네살이라는 숫자만으로도 예쁜 나이에 자살을 선택했다. 안타깝다는 마음이 들어야 마땅하지만 왜 그랬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 튀어나온다. 작가의 글을 따라가다보면 그 질문의 답을 찾게 된다. 어느 날 아침 몇 달이나 남은 생일선물로 mp3를 사달라고 하는 천지에게  전세 보증금을 올려줘야 한다며 거절하는 엄마. 그 날 천지는 세상과 작별을 고한다. 고작 mp3라는 이유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모르는 뭔가가 있을거라며 언니인 만지는 천지가 남겨놓은 흔적을 따라 천지가 닿았던 자취를 좇게 된다. 원인은 화연때문이었는데, 화연 역시 집에서 생계에 바쁜 부모님 대신에 학원으로 돌려지게 되고, 그로 인해 제대로 된 사랑 한번 못받은 화연은 애정 결핍이 생기게 됨으로서 아이들에게 애정을 받기 위해,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천지를 골탕먹이고 친구라는 위선적인 명목 하에 천지를 거리낌없이 가지고 놀게 된다. "애들이 자꾸 나만 술래 시켜." "안 한다고 해." 그렇게 얘기해봤어요, 엄마. "그래도 자꾸 시켜." "그럼 걔들이랑 놀지 마." 그럼 나는 누구랑 놀아, 언니? 그날부터입니다. 친구에 대해 더 이상 엄마와 언니에게 상의하지 않게 된 때가. (p20) 천지는 분명 가족에게 SOS를 청했지만 엄마와 언니, 그 누구도 대수롭게 생각하는 이가 없었다. 아이의 보호막 , 울타리 역할이 되주어야 할 가족의 무관심의 끝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내가 학교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한 반에 한명씩 왕따가 존재한다. 내가 중, 고등학교 때는 왕따라는 개념이 확연히 달랐다. 중학교 때는 한 아이를 두고 괴롭혔다고 한다면, 고등학교 땐 아이들이 놀아주지 않는 아이를 왕따라고 칭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무리를 지어다니는 애들을 일컫는 말도 되었다. 우리는 그들을 두고 끼리끼리 논다라고 칭하기도 했고, 그들이 지나가면 수군수군대기 일쑤였다. 읽으며 나는 누구였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같이 어울려다니는 애들 앞에서는 웃다가도 싫은 사람이 말을 걸면 정색하며 싫은 티 팍팍 내며 무표정하게 대답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고보면 나는 화연이나 주변 아이들보다 더 끔찍했던 것 같다. 누가 누구를 왕따시키든 말든 관심도 없었기에 그것에 동조하지도 않았으며 난 내 할 일만 하면 되었다. 간혹 아이들이 꺼려하는 그들은 나에게 말을 시키곤 했는데, 사실 나는 그게 무척이나 싫었다. 내가 같은 처지가 될까봐 싫었던 것이 아니라, 애들이 싫어하면 그런 이유가 있겠지, 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 책을 읽고 화연이와 주변 아이들을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며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그들을 욕하면서 이야기를 읽어내려갔다. 우리는 누굴 피해자라 부르고, 누굴 가해자라고 하는가. 그런 상황이 다시 온다고 한다면, 나는 천지와 같은 아이들을 감싸안아줄 수 있을까? 아니, 사실 그러진 못할 것 같다.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 천지는 회의감이 얼마나 들었을까, 나같으면 난리났었겠다고 생각하며 천지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착하디 착한 천지는 그러지 못했다. 털 뭉치 속에 엄마, 언니, 미라, 화연, 그리고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편지를 남겨두고 세상과 안녕,하고 돌아섰다.

 

 

 

우아함을 가장하여 가해지는 멸시는 극단적인 '죽음'이라는 선택을 코 앞에 두게 만든다. 그들은 죽기 전 유서를 쓰고, 그 유서에는 짐작컨대 이렇게 적혀져 있을 것이다. '내가 죽음으로서 너희에게 복수할 것이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왜 그런 안타까운 상황을 만들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얘기하진 않겠다. 하지만 정말 복수하는 길은 그 안에서 살아서 행복하게 사는 길 뿐이다. 사실 나같아도 내가 싫어하는 골칫덩어리가 없어지면 룰루랄라하겠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 아이들은 나는 무서워서 생각지도 못할 자살이라는 것을 뻑하면 한다. 그래서 유명연예인이 죽었다고 하면 '또 죽었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들릴 때도 있다. 나는 사실 자살한 그들을 두둔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불쌍하다 여기지도 않는다. 그저 그들 자신이 힘들고 괴로워서 찾은 돌파구일 뿐이다. 그들은 매우 이기적이라서 남은 사람 생각따위는 애초에 하지 않는다. 하지만 썩은 물에 고기를 넣어둔다고 그 고기가 온전히 살지 못하는 것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살으라고 독촉할 수는 없는 일이고 또 그만큼 괴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보니, 세상은 생각했던 것처럼 화려하고 근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리 세상을 버렸다면 보지 못했을, 느끼지 못했을, 소소한 기쁨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애초에 나는 큰 것을 바란게 아니니까요. (p227) 작가의 말을 보고 또 한번 느낀다. 아무 대가없이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 먼저 내미는 손이 그들에게 절실할 것이라고. 그러면 내가 힘들어 할 그 어느 날에 그들이 내 손을 꼬옥 쥐어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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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장 속의 아이
오틸리 바이 지음, 진민정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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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오틸리바이가 써내려간 프랑스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책을 써내려간다. 새 아빠에게 장에게서 전 남편이 떠올려진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던 어느 날 , 다섯살 난 아이의 당연한 행동일 수 있는 침대에 오줌을 쌌다는 이유만으로 벽장에 갇히게 된다. 아이는 엄마에 의해 자기가 오줌을 싸서 벌을 받는거라고 인식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9개월이라는 짧지않은 시간동안 벽장에 갇히게 된다. 나는 1인칭 서술에서 아이의 눈으로 옮겨가며 느낄 수 있는 아이의 내면 심리 파악이 오틸리 바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가장 눈 여겨 보았던 것 중 하나였다. 아이는 처음엔 엄마가 자신을 꺼내줄거라 믿고 있고, 자신이 반성할 때까지만 벽장에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이 자꾸 보채면 보챌 수록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엄마가 새 아빠에게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벽장에서 버티게 된다. 하지만 엄마는 늘 희망만 갖게 할 뿐,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않고, 새 남편인 폴과의 아이 '노엘'이 태어나면서부터는 그조차도 철저히 외면해버리며 무관심의 끝을 향해 내달린다. 그것을 알아차린 아이의 마음은 아.. 정말 상상하고 싶지가 않다. 왜 그 아이가 다섯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벌써 그런 감정을 느껴야하는지조차 또한 이해불가였기에 분노는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제발 폴, 내가 이렇게 빌게. 떠나지 마. 나 당신 없인 못 산다는 거 잘 알잖아. 애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그렇지만 떠나지 마, 떠나지만 마……" (p25) 도대체 세상 어디에 이런 정신나간 엄마가 있단 말인가. 남의 아이가 아닌 온전히 자신의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끔찍한 정도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다. "엄마, 머리는? 머리 안 잘라줄 거야?" "됐어. 나 시간 없어. 다 씻고 갈아입었지? 그럼 어서 네 벽장으로 들어가." (p139) 엄마는 아이의 자리가 벽장이라고 생각하는 듯 , 네 방으로 들어가라는 평범한 말처럼 네 벽장이라는 말도 안되는 말을 자연스레 내뱉는다. 다시 암흑이, 구덩이가, 삶이 아닌 삶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그곳, 벽장. (p113) 벽 장속 귀퉁이에 있는 어둠이 아이를 잡아삼킬 듯 옆에서 숨죽이고 있을터다. 낮에도 햇빛은 커녕 빛도 보지 못하는데 , 밤이면 얼마나 더 끔찍한 공포를 느끼게 될까.. 아이의 허덕임을 보면서 '죽지마, 죽지마'를 연발했다. 읽는 내내 입이 바싹바싹 말라오는데도 물 한 모금 마실 수가 없었고, 책을 잠시 내려놓고 화장실을 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물을 두고도 마실 수 없고, 화장실을 바로 옆에 두고도 갈 수 없음과 아이가 고스란히 받았을 고통이 더해져 곧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내 숨통을 미친듯이 흔들어댔다.

 
 
 

1982년 8월에 프랑스에서는 '다비드 비송(david bisson)' 사건이 크게 문제가 되었다고 했다. 나는 그것을 이 책을 통해 알았고 , 이 책이 그 실화를 모티브로 삼은 소설이라는 것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다비드는 4살부터 12살이 되던 해까지 8년이라는 시간동안 학대를 받아왔다고 한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몇 년은 욕실의 수도관에서 지내고 , 몇 년은 새아빠와 엄마가 쓰는 침대 다리에 묶여 지내고 , 그러다 발견되기 전까지는 벽장에 갇혀 지내야 했다고 한다. 또한 , 아이에게 토사물을 억지로 먹이기도 했고 , 물을 가득 받은 욕조에 머리를 쳐박아야 했고 , 펄펄 끓는 물에 손을 넣어야만 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학대를 받아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번 들어 여전히 ( 아니 , 더 심각해진 ) 전세계에서 아동학대가 심각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고 ,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다. 가장 최근 아동학대 가해자 83%가 부모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TV 프로그램 중 'SOS 24시'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 노인학대 , 부모학대 , 아동학대 등 여러방면으로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있고 , 고립되어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사회 속에서 돌보아준다. 그 중 아동학대로 나왔던 사례 중 작년즈음에 '멍투성이 둘째'라는 제목으로 나왔었는데 , 미숙아란 이유로 짜증이 난다며 5살된 아이에게 엄마가 무자비하게 때리는 일이었다. 정말이지 볼 때마다 분노와 함께 아이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니 눈물이 가슴 속에 차올라서 숨도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아프다. 이런 프로그램은 활성화가 되어야 하고 그로 인해 아동학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세상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겐 분명히 있다.


 

 


장은 소리들을 듣는다. 발소리, 엄마가 움직이는 소리, 냄비에서 나는 소리…… 마치 예전에 창문을 통해 들리던, 점점 커지던 길가는 사람들의 목소리, 자동차 브레이크 소리, 그리고 컹컹 개 짖는 소리들을 듣듯이. 그러나 지금 장에게 바깥세상의 소리들이란 바로 부엌에서 나는 소리들이다. (p47)



경제사정이 열악하고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느끼고 부모들의 이혼이 높아지면서 학대가 늘고 있다는 기사였는데 , 어른들의 잘못으로 왜 애꿎은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불안해해야하는지 이해할 수도 없고 , 이해해서도 안된다. 그들은 부모라는 명목 아래 자신이 낳은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화풀이 대상 혹은 자신의 희생양인듯 아무렇지 않게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만행을 저지를 수가 있는지 분노가 치미는 만큼이나 역겹고 , 더럽고 , 혐오스럽다. 아니 , 이런 단어로도 표현되지 않는 그들에겐 일말의 양심이 있는지마저 의심스럽다. 세상 다 등 돌려도 누구보다 아이의 편이 되주어야 할 부모가 그런다는 것이 끔찍하게만 느껴졌고 , 그 어떤 것보다 특단의 조치가 요구되어야한다고 생각된다. 또한, 우리의 무관심으로 인해 지금도 우리의 미래를 짊어지고 가야할 어린 꿈나무들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벽장 속에서 한줄기 빛을 갈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너는 너, 나는 나' 라는 이기주의적 편견을 버리고, 이웃에 대한 애정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위험에 빠진 아이들을 당연한 그들의 권리라는 자리에 돌려놓고 보살핌으로서 그들을 어루만져주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 현재에도 있을 아동학대에 대한 반발심으로 인해 마음에 살얼음이 하나 더 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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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늪 지혜사랑 시인선 34
권순자 지음 / 종려나무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넓다란 이 세상에 시인은 계속 나오고 있지만 , 내 마음 속 깊이 동경하고 있는 몇 안되는 시인 중 윤동주 시인과 김수영 시인 덕분이다. 짤막한 시도 문학이냐며 , 시집을 읽는게 책을 읽는거랑 동급이 될 수가 있냐며 비아냥거릴 때가 있었다. 하지만 가끔 몇 백마디의 소설보다 고작 짤막한 몇 줄의 시가 더 마음에 와닿을 때가 있다. 내가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 시의 모든 단어는 우리가 상상할 수 조차 없이 많은 것을 담아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을 우리는 은유라고 부른다. 그런 시를 볼 때면 , 가끔은 멍해진다. 어떻게 이런 단어를 끌어와서 썼나 싶기도 하고 ,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들을 오묘하게 조화시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시키기도 하는 마법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 고등학교 때 , 수능이라는 시험때문에 우리는 정지용 , 이육사 , 김소월 , 박목월 , 박두진 , 조지훈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인들을 만났고 , 그들의 시대에서 함께 숨쉬며 그들의 문학을 이해했다. 그 때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표현의 자유마저 보장되지 않은 시대였기에 , 우리들이 만난 시인들은 은유법을 많이 쓸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을 해부하듯 , 시를 해부하는 문학시간이 즐거웠다. 그러나 지금의 시인들은 추상어 대신 구체어를 쓰기에 다분히 직설적인 면을 보이게 된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현대 내노라 하는 시인들의 시는 읽지 않게 되었음은 물론이고 , 누가 있는지조차에 대해 관심이 없다. 또한 시를 언제 읽어보았는지 가물가물해질 정도였으니 알만하다.

 

 

그러다가 정말 오랜만에 두께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작고 얇은 시인 권순자의 시집을 손에 들게 되었다. 저자가 궁금해서 , 좀처럼 잘 보지 않는 작가소개를 제일 먼저 보았다. 이게 왠걸 , 1958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경북대 영어학과와 국민대 교육대학원 영어학과를 졸업했으며 2003년 『심상』 신인상으로 시단에 나왔다. 시집 『우목횟집』이 있다. 짤막한 글로 4줄도 채 채우지 못하는 작가의 이력을 보니 아직 페이지를 넘겨보지 못했음에도 실망스러웠고 , 기대 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읽기가 싫어졌고 급기야 인터넷에서 시인에 대해 찾아보았지만 , 헛수고였다. 제대로 된 이력이 없었다. 내가 너무 이력에 신경을 쓰느라 제대로 된 글을 읽지 못하는 건 아닐까 살짝 걱정이 되기 시작했고 , 우선은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시를 읽기 전 , 차례부터 훑어보았다. 시집을 읽기 전 버릇이다. 시집은 전의 내용과 연결되는 것이 없어서 무엇을 먼저 읽어도 매끄럽게 읽힌다는 장점이 있다. 그 중 '다시 일어서야 하는 이유'라는 제목이 유난히 눈에 띄어서 그 시가 있는 페이지로 손놀림이 가빠진다. 하지만 좋은 느낌은 제목뿐이었던 것일까 , 설레임보다는 실망이란 놈이 먼저 찾아와 괜스레 한숨을 쉰다. 그리고는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가 읽기 시작했다.

 

 

 권순자 시인의 시에선 바다 냄새가 났다. 어머니에서도, 아버지에서도, 심지어 사랑에서도 바다 내음새가 풍겨왔다. 나는 그 냄새를 코로 킁킁거리며 읽어내렸다. 멍하게 만드는 시는 없었고 , 마음을 동하게 하는 시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지문』이라는 시에선 예쁜 어감이 나는 단어는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매우 직설적이어서 이 시에 대한 해석이 알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것처럼 모두 내보였다. 따라서 해석이 필요없는 시였다. 나는 이런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읽고는 이런 것도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구나, 라는 걸 느꼈다. 그러나 『달빛 전차』에서는 은유의 끝을 보여줬다. 이제까지 보여왔던 것처럼 달빛을 뚫고 달리는 전차일 거라고만 예상했다. 아니, 사실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고 읽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시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전차가 아닌 , 욕망이었다. 그러고보니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연극이 떠올랐다. 그러고보면 전차는 , 욕망이라는 것에 자주 비유가 되는 모양이다.

 

 

 사실 시보다 더 재미있었던 것은 문학평론가인 황정산씨의 해설이었다. 황정산씨는 이 시집을 『사랑의 문신』이라 일컬으며 전체적인 것들을 종합해서 4문단으로 나누어 해석한다. 하지만 난 NO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꾹 참고 한번 더 replay 했다. 그제서야 시들이 눈에 조금씩 익게 되었고 , 이래서 시는 두세번은 번복하고 번복해서 꼭꼭 씹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그 이유라고 한번 더 곱씹었다. 그러나 답답함은 견딜 수가 없다. 정화시켜야겠다. 윤동주의 간을 읽어야겠다.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창문을 여는 것과 같이 윤동주의 시집을 찾는 내 손길은 가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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