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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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어렸을 때 집에 사진기가 있었던 적도 있고 없었던 적도 있다. 언젠지 잘 생각나지 않는데 집에 사진기가 없었을 때 학교에서 소풍을 갔다. 소풍을 가도 내 사진을 찍고 싶었던 적은 없지만, 그때 같은 반 아이가 사진을 찍어준다고 했다. 나중에 그 애는 사진을 주지 않았다. 아니 난 처음부터 그 애가 사진을 찍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나 혼자가 아니고 친구와 함께 찍었는데 사진 찍는 척만 했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어쩌면 그 애가 사진을 찍어준다고 한 게 아니고 친구가 그 애한테 찍어달라고 했을지도). 겉으로는 친절한 얼굴을 하고 속마음은 다른 사람 많다. 나라고 그렇게 할 때 없는 건 아니지만. 마음속으로는 싫은데 그걸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는 일. 이건 아주 나쁜 건 아니기를 바란다. 다른 일 하나 더, 어떤 사람은 자신이 먹기 싫거나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걸 남한테 준다. 본래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새로 샀다면 모르겠지만, 자기가 먹으려고 샀다가 다 먹지 않고 남았다고 남한테 주다니. 자기가 먹기는 싫고 버리기는 아까워서 그런거겠지. 그것도 친절함을 가장한 폭력 아닐까. 이 책 제목을 보니 이런 일이 잠깐 생각났다.

 

 여기에 책 제목과 같은 ‘상냥한 폭력의 시대’라는 단편은 없다. 여기 실린 소설 안에 그런 게 담겨 있어서 지은 거겠지. 가장 앞에 실린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는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세계와 이어져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여기에서는 세계와 이어져 있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그 말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속도 이야기일까. 자신은 자신대로 살기. 이건 나중에 말하고 싶었는데 처음에 말하다니. 소설 느낌은 쓸쓸하다. 이런 말은 어떤 소설에나 갖다 붙일 수 있을지도. 진짜 고양이가 아닌 고양이 인형을 갖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뜬금없이 이런 말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나, 희준이 고양이 봉제인형 샥샥과 살아서다. 난 그런 것도 못하겠다. 이름 붙이는 거 잘 못하고 말도 못할 테니까. 희준은 나중에 아버지 옛날 애인이 세상을 떠나고 남겨준 거북이 바위하고도 산다. 아버지 옛날 애인이 바로 미스조다.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지만 이 소설은 쓸쓸하면서도 따듯하다.

 

 쓸쓸하면서도 따스함이 느껴지는 이야기 하나 더 있다. <영영 여름>이다. 늘 혼자고 아이들한테 놀림받던 와타나베 리에는 아버지 일 때문에 간 K라는 나라에서 친구를 만난다. 메이. 메이는 매희로 북한에서 왔다. 리에 이름을 보면 일본 사람이지만 리에 엄마는 한국사람이다. 이런 일 실제 있을까. 이런 것부터 생각하다니. 리에는 왜 메이가 공기 놀이할 때 밀었을까. 그 일이 없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그 일이 아니었다 해도 언젠가 메이가 북한에서 왔다는 걸 알았겠지. 친구여서 좋게 여겨도 무언가를 잘하면 무서워지기도 할까. 내가 리에 마음을 잘 모르는가 보다. 한때 일어난 일이 살아가는 데 힘이 될지, 솔직히 말하면 이것도 잘 모르겠다. 그런 말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 할 뿐이다. <우리 안의 천사>에서는 나쁜 짓하려던 게 평생 죄책감으로 남지 않을까 싶다. 남우는 아버지 죽이는 일을 그만뒀을 것 같은데. 남우가 배다른 형을 만났다는 게 정말일지 알 수 없기도 하다. 이 생각은 미지가 했지만. 남우가 돈을 갖고 있었던 걸 보면 거짓말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자기 전에 생각했을 때와 다르게 쓰다니. 생각하지 않고 썼다면 좋았을 텐데 싶다.

 

 부모는 자식의 자식은 남처럼 여기기도 하는가 보다. 자식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면, 그때는 좋아하겠지만 고등학생 아이가 갑자기 아이를 낳으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지원의 딸 보미는 수학여행을 다녀오고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몰랐다니. 보미가 낳은 아이는 미숙아였다. 그래서 수술을 해야 했는데 지원은 그것을 자꾸 미뤘다. 자식 앞날이 걱정스럽다고 아기를 죽게 내버려두다니. 아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일까. 프라이팬에 맞지 않는 뚜껑을 덮어서 터지게 한 건 무엇을 나타내는 걸까. 이건 미영이 한 일이다. 미영은 아이 아빠 엄마다(보미 남자친구 엄마). 미영도 지원과 다르지 않았다. 보미가 아이가 낳았다는 걸 알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돈을 어느 정도 줄 수 있겠다 생각했을 뿐이다.

 

 여기 실린 소설에 공통으로 담겨 있는 건 ‘그래도 살고 죽는다’다. 앞에서 말한 고등학생 보미도 살아가겠지. 아이가 죽으면 평생 아픔으로 남겠지만. <밤의 대관람차>에서 양은 스물다섯해를 관성으로 움직였다 한다. 그건 양이 S여자고등학교에서 선생으로 일한 시간이기도 하다. 이것을 보면서 여기 나오는 사람들 나이가 좀 많다고 느꼈다. 서른살도 있지만. 양은 오래전 애인 ‘박’과 S여자고등학교 이사장 ‘장’이 비슷하다고 느낀다. 잠시 양이 장과 이야기를 할 때도 있지만 별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관성이 사라질 뻔한 거였을까. 얼마 뒤 양은 박이 죽었다는 걸 며칠 지난 신문에서 본다. 속았지만 무를 수 없는 일도 있다. <서랍속의 집>에서 진과 유원은 전세계약기간이 다 돼서 이사할 집을 알아보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소개한 집을 사기로 한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보여준 집은 1703호가 아닌 603호였다. 이때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면 좋았을까. 집주인은 진과 유원한테 집이 어떤지 말하지 않았다. 그저 집값을 조금 더 갂아주었다. 진은 이사하기 전날 이사할 집에 가 본다. 그 집에서 나온 건 가구가 아닌 쓰레기 더미였다. 쓰레기를 치우고 문을 열어두면 사람이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을 속이고 팔다니. 사정을 말하면 아무도 사지 않으리라 여긴 거겠지.

 

 마지막에 실린 <안나>도 씁쓸하다. 경이 자신은 안나보다 잘산다 생각하는 것도 그렇지만 아이를 영어 유치원에 보내려는 것이. 이제는 한국도 유치원에 들어가기 힘들어진 건가. 경은 아이가 유치원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걱정하면서도 다른 유치원도 영어를 하는 곳을 알아본다. 원장이 한학기 낸 유치원비를 돌려줄 수 없다 말하니, 경은 남편이 방송국 간부와 알고 자신한테는 변호사 사촌이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원장은 나머지 돈을 돌려준다. 안나는 쓸쓸한 사람이었는데, 잠시나마 경한테 자기 이야기를 해서 좀 나았을까. 경과 안나가 좋은 사이로 남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 관계는 오래 가지 않을까(오래전에 댄스동호회에서 만나고, 지금은 보조교사와 아이 부모다). 나도 비슷한 일 있었던 것 같다. 난 인터넷 안에서 만난 사람과 친구고 싶었는데 그게 어려웠다. 아니 사람은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는 거겠지. 그것을 잘 받아들여야 할 텐데.

 

 모두한테 잘할 수 없겠지만 다른 사람 마음도 좀 생각하면 좋겠다.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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