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읽어도 재미있다

 

     Kindred (1979)

  옥타비아 버틀러   이수현 옮김

  비채  2016년 05월 31일

 

 

 

 

 

 

 

 

 

 

 

 

 

 

 

어떤 것보다 소설을 많이 읽었지만 별로 못 본 게 있어. 그건 SF야. 다시 생각하니 SF만 별로 안 본 건 아니군. SF를 글로는 별로 못 봤지만, 만화영화나 영화로는 조금 봤어. 그런 거 좋아하기도 하는 것 같아. 만화영화나 영화는 보여주어서 어렵게 보이지 않는 거겠지. 기계나 로봇이 어떤지 설명하는 글은 뭐가 뭔지 알기 어렵잖아. 과학소설은 과학을 잘 알아야 할 것 같은 느낌도 들어. 이건 잘못된 생각일지도 모르겠어. 과학소설에도 사람 이야기가 없는 건 아닌데, 좀더 넓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지구를 벗어나 우주로 나가기도 해. 지구도 사람한테는 넓은데 우주는 그것보다 훨씬 더 넓고 모르는 게 많아. 그런 걸 상상하는 게 어려운 건지도 모르겠어. 지구에 살아도 세계를 다 돌아보지 못하는데. 지구는 우주의 한 부분이고 그 안에는 사람도 들어가지. 우주를 생각하면 사람이 얼마나 작은지 깨닫기도 해. 사람이 우주를 생각하고 겸손해지면 좋을 텐데, 우주를 어떻게 이용할까를 더 많이 생각하지. 이건 과학이 발달한 뒤겠군. 그전에는 신을 생각하고 무서워했잖아. 신화나 별자리 같은 걸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도 잘 몰라. 우주라는 말을 하니 저런 게 생각났어.

 

과학소설이라고 해서 다 우주, 외계인이 나오는 건 아니군. 시간여행도 SF에 넣기도 해. 이런 건 쉽게 볼 수 있고 나도 여러 번 봤어. 기계로 하는 시간여행 이야기도 있지만 우연히 자신이 사는 시대가 아닌 다른 시대에 가는 이야기도 있어. 이게 그래. 어떤 건 법칙 같은 게 나오지 않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그런 게 나와. 다나는 다나 조상 루퍼스 목숨이 위험해지면 19세기로 가고, 다나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느낄 때 자신이 사는 20세기(1976년)로 돌아와. 규칙은 없어. 자신이 가고 싶을 때 가지 않고 갑자기 다른 시대로 가. 바라지 않는 일은 갑자기 일어나기도 하지. 다나는 1976년을 사는 흑인 여성으로 소설을 쓰고 그게 팔리기를 바라. 다나 남편 케빈은 백인이고 소설가야. 둘 다 소설을 쓴다고 말해도 될 텐데. 다나가 쓴 소설은 팔리지 않았지만 케빈은 책을 세권 내고 잘 팔리기도 했어. 지금도 인종차별이 없는 건 아니지만, 1976년에는 더했겠지. 아주 없지 않았겠지만 흑인과 백인이 결혼하는 게 쉽지 않았을 거야. 실제 두 사람 친척은 두 사람 결혼을 반기지 않았어. 1976년도 이런데 다나가 가는 19세기는 더했지. 그때 미국에는 노예제도가 있었잖아.

 

다나는 자신이 바라지 않는 시간여행을 해. 다나는 처음 그곳에 가서 루퍼스라는 백인 남자아이를 구해. 다나가 그곳에 갔다 온 시간은 단 몇초였어. 바로 그날 또 루퍼스를 구하는데, 루퍼스는 강에 빠졌을 때보다 커 보였어. 두번째 때 다나는 루퍼스가 자신의 조상이라는 걸 알고 자신이 루퍼스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해. 세번째 때는 남편 케빈도 함께 그 시대로 가. 그게 좋았던 건지 안 좋았던 건지. 다나가 자기 시대로 돌아올 때 케빈이 바로 옆에 없어서 혼자 왔거든. 다나가 다음에 그곳에 가니 다섯해가 흐른 뒤였어. 루퍼스는 다나를 도와주는 것처럼 하면서 케빈한테 편지를 보내지 않았어. 대신 흑인을 재산으로만 생각하는 루퍼스 아버지가 케빈한테 연락했어. 아주 오랫동안 함께 지내지 않아도 마음에 남는 사람이 있겠지. 루퍼스한테 다나가 그랬을까. 루퍼스는 흑인 앨리스를 좋아하면서도 다나가 곁에 있기를 바랐어. 그 마음은 무엇일까. 앨리스가 루퍼스를 받아들였다면 달랐을지도 모를 텐데. 앨리스가 그러지 못한 건 루퍼스가 19세기 미국 남부 사람이어서일지도.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때(19세기) 사람, 거기에서도 남자는 흑인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어. 루퍼스는 앨리스를 사람으로 좋아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거지. 그래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겠지. 그때 많은 흑인과는 다른 다나를 만나고 루퍼스가 달라질까 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이 소설을 쓴 사람은 흑인 여성이야. 그것 때문에 이런 소설을 쓴 건 아닐까 싶기도 해. 흑인 인권만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여자나 남자 피부색과 상관없이 사람을 봐야 할 텐데. 루퍼스가 그랬다면 더 좋았을 텐데, 루퍼스가 그 시대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아쉬워. 루퍼스는 그랬다 해도 그 시대에도 흑인이나 여성을 존중한 사람 있지 않았을까. 피부색과 상관없이 위험한 사랑을 한 사람도 있었을 것 같아. 지금도 인종 문제가 다 사라진 건 아니야. 여성이 살기에 힘든 세상이기도 하고. 남자 여자 조금 다르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함께 살면 좋겠어.

 

 

 

 

☆―

 

노예는 노예일 뿐이다. 노예한테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루퍼스는 루퍼스였다. 그는 변덕스러웠고 관대하다가 잔인해지기를 되풀이했다. 그를 내 조상으로, 내 남동생으로, 내 친구로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내 주인으로, 내 애인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507쪽)

 

 

 

 

 

 

 

    

 

    

 

    

 

    

 

 

 

 

 

 

 

이중의 어려움을 가졌지만

 

  블러드차일드   Bloodchild and other stories (1996)

  옥타비아 버틀러   이수현 옮김

  비채  2016년 05월 31일

 

 

 

 

 

 

 

 

 

 

 

 

 

 

 

소설을 쓴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소설에 나오는 사람을 상상할지도 모르겠다. 한국사람이 쓴 소설을 보면 거기 나오는 사람도 한국사람이려니 한다. 지금까지 흑인이 쓴 글 본 적 있는지 잘 모르겠다. 있었는데 내가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지만(아프리카 사람이 쓴 거 본 적 있다), 백인보다는 아주 적은 듯하다. 그뿐 아니라 중국사람이나 다른 아시아 사람이 쓴 것도 별로 못 봤다. 미국이나 영국을 비롯한 유럽 사람이 쓴 글을 보면 거기 나오는 사람을 백인이라 생각했던가. 이건 잘 모르겠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미국 사람으로 여성이고 흑인이다. 책을 읽다 여기에 흑인이 많이 나온다는 걸 느꼈다. 모두 흑인일지 몇몇사람만 흑인일지. 한국사람이나 백인은 쉽게 생각해도 흑인은 쉽게 생각하지 못하는 듯하다. 왜 그럴까. 자주 안 봐서 그런 것일지도. 세상에는 이런저런 피부를 가진 사람이 사는데, 백인을 더 생각하지 않나 싶다. 한국소설에 외국사람이 나오면 이름이나 겉모습으로 외국사람임을 나타내야 하고, 이건 흑인도 마찬가지다. 미국 사람이나 다른 나라 사람도 한국사람을 소설에 나오게 할 때 한국사람이라 하겠다.

 

지난번에 옥타비아 버틀러 소설 《킨》을 보고 재미있어서 단편은 어떨까 하고 보았다. 여기에는 작가가 그 글을 쓰게 된 이야기도 있다. 《킨》은 시간여행을 하는 것으로 흑인 여자 다나가 노예제도가 있는 미국에서 자신의 조상을 구한다. 흑인이어서 그런 이야기를 쓴 건 아닐까 하기도 했는데. 여기 실린 단편은 SF와 판타지다. SF는 잘 안 보는 건데. 왜 읽기 힘들까 생각하니 실제 있는 것이 아니어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SF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우주나 외계인이 나온다. 여기에도 외계인이 나오는 거 있다. <블러드차일드>와 <특사>다. <블러드차일드>에 나오는 사람은 거의 흑인이 아닐까 싶다. 노예였던 사람이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간 거니까. 그곳에서 사람은 틀릭의 숙주가 된다.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다. 한식구에서 한사람이다. 작가는 남자가 임신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집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하는데. 영화 <에일리언>에서도 사람 안에서 외계 생물이 자라지 않았던가. 거기에서는 여자였지만. <특사>에 나오는 건 커뮤니티라고 한다. 사람을 감싼다고 해서 조개 같은 게 떠오르기도 하는데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기 어렵다. 커뮤티니가 오고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말도 있다. 어떤 사람은 노아처럼 커뮤니티가 시키는 일을 하려고 한다. 커뮤니티 통역을 하는 노아는 커뮤니티와 사람이 좋은 관계가 되기를 바랐다.

 

암을 치료하는 약 때문에 DGD가 되고 DGD 부모 때문에 DGD가 된 아이. DGD인 사람은 규정식을 먹어야 한다. 언젠가는 ‘표류’를 하는데 그건 자폐증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DGD와 DGD 사이에서 난 사람에는 DGD를 안정시키는 냄새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 이건 현실에서 무엇을 나타내는 걸까.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아도 될까. 이 이야기는 <저녁과 아침과 밤>이다. 약 때문에 이상한 증상이 나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과 소리>에서는 많은 사람이 질병에 걸렸다. 죽은 사람도 많고 말하는 능력을 잃거나 책을 읽고 글을 쓰지 못하기도 한다.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은 몸짓으로 말한다. 라이는 남편과 아이가 죽고 혼자 살다 다른 곳에 사는 친척이 아직 살았는지 찾아가보기로 한다. 라이가 탄 버스에서 소동이 일어나고 한 남자를 만난다. 라이는 친척을 찾아가기보다 그 남자와 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데 남자는 다른 사람한테 죽임 당한다. 사람이 죽임 당해도 경찰이 없으니. 절망스러울 때 말을 할 수 있는 아이 둘이 나타난다. 이건 희망이겠지.

 

여기 실린 글 가운데서 <가까운 친척>은 쉬운 편이다. 이건 SF도 판타지도 아니다. 이런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근친상간이니까. 어머니는 딸한테 비밀이 들킬까봐 딸과 거리를 두었다. 딸은 어머니가 그러지 않아야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지만 아버지는 아직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다른 사람한테 말할 수 없지만. <마사의 책>은 소설 쓰는 마사가 신을 만나고 사람이 좋은 꿈을 꾸게 하는 이야기다. 꿈이 유토피아라고. 꿈에서만 좋고 현실은 어두워도 괜찮을까. 마사는 사람이 좋은 꿈을 꾸면 현실도 잘 살아가리라고 하는데. 꿈만 꾸려고 하는 사람이 많으면 어쩌려고. 꿈속에서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이 잠들게 하는 만화도 있다. 그걸 반대하는 사람도 있어서 주술을 풀려고 한다. 마사가 말하는 꿈은 책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는 것도 꿈을 꾸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책을 읽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이건 괜찮은 거겠지.

 

미국에서 흑인이고 여성으로 글을 쓰는 건 무척 어려웠을 거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어렸을 때 이모한테 자신은 작가가 되어 돈을 벌겠다고 하니 이모는 흑인은 안 된다고 했다. 그런 말에 옥타비아 버틀러가 뜻을 굽히지 않고 글쓰기를 그만두지 않아 다행이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끈질기게 썼다고 한다. 글을 쓰는 데 성별이나 피부색은 상관없기는 하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물고 늘어져서 쓰라 한다. 끈기가 있어야겠구나.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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