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음, 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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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새로 나오는 책을 다 만나지 못하지만 우연히 어떤 책이 나오는지 보기도 한다. 제목을 보고 마음에 들면 어떤 책일까 조금 관심을 갖기도 하고, 그냥 넘어가기도 한다. 이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겠지. 내가 몇해 전부터 시를 봐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해선지, 많은 사람이 나처럼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선지 시를 말하는 책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얼마 전에도 《시를 잊은 그대에게》(정재찬)을 보았다. 그 책과 이 책 좀 다르다. 이 책 제목이 《시의 힘》이어서 그 책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먼저 했다. 이 글을 쓴 서경식이 재일교포라는 것만 알고 다른 건 몰라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미술 이야기도 써서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하리라 생각했는지도. 책은 못 봤지만 다른 책 제목은 결코 부드럽지 않은데 왜 그랬을까. 내가 시를 그런 것만 보려 해선지도 모르겠다. 변명한다면 지금은 모두와 함께 싸워야 할 커다란 무엇이 없어서다. 아니 있는데 내가 잘 못 보는 거겠지. 나는 단순하게 살지만 그게 내 삶이다. 지금은 다들 자기 살기 바쁘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전쟁을 겪고 군사독재정치를 겪었다. 그때를 살고 글을 쓴 사람은 글로 저항하기도 했다. 학교 다닐 때 그런 시인 소설가 많이 배운 것도 같은데. 이상화, 한용운, 윤동주. 이밖에도 더 있겠지. 한용운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님이지만 딸이 있었는데 그때 힘들었다고. 이런 이야기는 라디오 방송에서 주워들었다. 일본은 조선 사람이 창씨개명 안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한용운 시 <님의 침묵>에서 님은 조국이라고 배운 게 떠오른다. 지금은 이 시를 다르게 볼 수도 있다. 다른 사람 시도 마찬가지겠다. 일본 도시샤 대학에 윤동주 시비가 있다는데, <서시>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을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이라 옮겼다 한다. 그랬다니. 비슷한 말이다 여길 수 있지만 뜻을 생각하면 차이가 난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은 목숨 있는 건 언젠가 죽기에 불쌍하다는 뜻 아닐까.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이라 하면 애틋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며칠전에 본 책에서도 윤동주 시 이야기를 했는데, 여기에서도 하다니. 윤동주와 고종사촌 송몽규 두 사람이 함께였지만, 시를 남긴 윤동주가 더 잘 알려졌다.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는 송몽규 그림자 같다고 한다. 어떤 생각을 잠깐 했는데 그건 쓸데없다는 생각이 든다. 윤동주 자신이 무엇인가 할 수 없어 안타까웠을 테니까.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사람도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 시를 읽은 걸로 안다. 일본에서 자기 나라를 비난하는 글 쓰기 쉽지 않을 텐데. 그때 그런 사람이 아주 없지 않았겠지. 루쉰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의학공부를 하러 갔구나. 몰랐던 거다. 일본말로도 글 잘 쓴다고 말해서, 일본에 공부하러 간 걸 몰랐을 때는 일본말 어떻게 공부했을까 했다. 루쉰 이름은 알지만 잘 모른다. 다른 사람이 쓴 글에서 루쉰은 글로 사람들을 일깨우려 애썼다고 한 말만 보았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게 길어지자 많은 작가가 일본에 좋게 글을 썼다. 그런 일이 그때만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로 민주주의를 외친 김지하도 달라졌다. 이렇게 말하지만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른다. 그런 말을 조금 들었을 뿐이다. 내가 시를 보기 시작했을 때 신동엽, 김수영, 신경림, 김지하, 박노해, 최영미, 정희성 시를 보았다. 정희성과 김수영 시집은 못 봤구나. 김수영은 학교 다닐 때 배워서일지도. 김남주도 있는데, 서경식은 김남주는 모르는가보다. 나도 예전에나 사회참여시를 보았지 지금은 잘 안 본다. 최영미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그때 무슨 뜻인지 알고 봤을까. 그때 내가 어떻게 봤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조금은 알았다고 믿고 싶다. 최영미가 왜 《청동정원》을 썼는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그 소설 읽지도 않았는데 이런 말을 하다니. 내가 생각하는 건 내 생각일 뿐일지도.

 

글을 쓰는 사람은 역사와 사회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 틀리지 않지만 모든 사람이 그래야 할까. 그것을 더 많이 생각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쓰면 안 될까. 이런 말이나 하다니. 내가 글을 전문으로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저런 말 때문에 나는 안 되겠구나 한다. 그것 때문에 부끄럽기도 하고. 아주 모르는 척하는 건 아닌데. 모르는 척하는 것보다 아예 모르는 게 더 큰 죄일지도. 개인이 없이 나라가 있을까. 갑자기 다른 말로 넘어갔다. 서경식은 제국주의가 다시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것을 걱정한다. 그건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거 있다. ‘나라를 위해’ 이런 거. 그렇게 된 건 일본한테 지배받은 영향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때는 일본이었고 지금은 한국이 된 거다. 나는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아쉽기도 하고 마음 편하기도 하다(어디는 어딜까, 사람은 어딘가에 들어가고 싶어한다. 나는 그런 게 없다는 거다. 한쪽만 생각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어중간해서 더 안 좋아 보일지도). 서경식은 일본에서 조선사람으로 살기 힘들었겠다. 우리나라에 오면 일본 사람이라 본 사람도 있겠지. 어디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처지 다는 아니지만 조금은 안다. 그런 곳에 있기에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기도 하겠지(나는 그렇게 못하지만). 서경식이 교포기 때문에 한국에 좋게 말하는 게 아니고, 객관성을 가지고 일본을 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나 후쿠시마 사고. 여러가지 생각하면 내가 일본에서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만약 내가 일본사람이면 어땠을지. 일본 정부 잘못을 비판했을까. 상상하기 어렵다.

 

서경식은 개인에서, 나라 그리고 세계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지금은 자기 나라 이익만 생각하면 안 된다. 지구에서 사는 사람이라 하는 게 좋겠다.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 일과 제대로 마주해야 한다. 전쟁 이야기나 유대인 학살 이야기가 자꾸 나오는 건 그래서겠지. 그것 말고 우리가 모르는 일도 많을 거다. 글을 쓸 수 없어서 알리지 못한 일도 많겠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글로 쓸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시뿐 아니라 글에는 사람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남을 속이는 글은 안 되겠지. 서경식하고 처지가 다른 우리는 무엇을 써야 할지. 아픈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척하지 않기,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십년도 더 전에 《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을 보았는데 서준식이 서경식 형이라는 거 이제야 알았다.

 

 

 

희선

 

 

 

 

☆―

 

‘문학’이 저항의 무기로 유효한지 의심스럽다. 내가 쓰는 것을 ‘문학’이라 할 수 있을지는 더욱 의심스럽다. 그런데도 이런 책을 내려는 까닭은 본문에서 루쉰이 한 말을 빌렸듯, “걸어가면 길이 되기” 때문이다. 아직 걸을 수 있는 동안은 걷는 수밖에.  (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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