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잊은 그대에게

  정재찬

  휴머니스트  2015년 06월 15일

 

 

 

 

 

 

 

 

 

 

 

 

 

학교를 모두 마친 사람이 문학과 멀어지는 건 더는 시험을 안 봐도 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먹고 살아야 해서 거기에 마음을 쓸 수 없기도 하겠다. 난 소설이든 시든 고등학교 마치고 더 많이 보았다. 그 전에는 아예 책을 몰랐다. 왜 더 빨리 만나지 못했을까 아쉬웠다. 학교 다닐 때 국어, 문학 시간을 아주 좋아하지 않았다. 주제, 상징, 시점……, 생각나는 게 이것뿐인데 그런 거 공부하는 거 별로였다. 그냥 재미있게 봤다면 좋았을 텐데, 왜 학교에서는 그런 식으로 가르칠까. 답은 정해져 있기도 하다니. 이것 때문에 지금도 책을 보면서 맞는 답을 찾으려는 건지도. 소설이나 시 봤지만 학교 다닐 때 공부한 작가 시나 소설은 거의 안 본 것 같다. 학교에서 국어나 문학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렵다. 정해놓은 답이 아니고 자유롭게 생각하게 하면 좋을 텐데. 가르치는 것도 시험 때문에 그렇게 된 건 아닐까. 시험이 달라져야겠다. 대학만 들어가면 된다 식이니. 공부는 대학에서 더 열심히 해야 할 텐데.

 

우리나라에서 공부는 좋은 대학과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가는 거다는 생각이 크다. 그게 사람한테 중요하지만 다는 아닌데. 사람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문화생활을 하겠다. 문화생활에는 영화나 공연뿐 아니고 책도 들어갈까. 요즘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먹고 사는 건 많이 나아진 거겠지. 그래도 여전히 성공이나 행복을 돈 많이 벌고 좋은 집에서 사는 거다 여긴다. 성공도 행복도 사람마다 다른 건데(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성공과는 멀게 산다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한곳만 보는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서울로 가는 것처럼. 사람이 많으면 한사람이 가질 수 있는 건 아주 적다. 아주 작은 거라도 가지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도 있겠지. 공부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나도 어렸을 때 그런 생각 안 했는데. 생각 안 해서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게 뭔지 몰랐던가보다. 지금도 잘하는 건 없고 좋아하는 것만 있다. 좋아하는 걸 잘하면 좋을 텐데, 좋아하는 걸 하다 잘하는 사람도 많다. 좀 이상한 데로 흘렀다. 공부는 학교 다닐 때만 하는 게 아니고, 사람이 살아있는 한 해야 하는 거다. 나는 달리 하는 공부는 없지만 책을 보는 걸 공부라 여긴다. 책을 보면 여러가지 배울 수 있다.

 

이 책 보고 공부를 생각한 건 아닌데 학교에서 시를 어떻게 공부했는지 생각하다보니 저런 말이 나왔다. 여러 번 한 말일지도 모르겠는데 책을 보기만 할 때는 소설이든 시든 아무렇지 않게 보았다. 시를 먼저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노래를 좋아해서. 소설을 보다보니 시는 많이 못 보게 되고, 책을 보고 쓰면서는 시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못 보았다. 시를 보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늘 마음속에 있었다. 어쩌면 시를 보고 무언가 쓰는 사람이 부러웠기 때문일지도. 이제는 시를 보고 다 알기 어려워도 그냥 보기로 했다. 보다보면 마음에 남는 시를 만날 테니까. 소설은 재미있는 게 좋은데, 이상하게 시는 조금 슬프거나 쓸쓸한 게 좋다. 소설도 그런 거 싫어하지 않는구나. 예전에 그런 시 많이 봤다. 내 마음이 슬픔이나 쓸쓸함을 더 많이 느꼈던 걸까. 그렇게 안 좋은 어린시절을 보낸 건 아닌데. 삶에는 기쁨뿐 아니라 슬픔도 있기 때문이겠지.

 

여기에서는 시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시와 영화 노래 소설 사진 그림도 말한다. 강의할 때 사진이나 그림 보여줬을까. 몇번 ‘그게 아닌데, 난 아닌데’ 하는 생각을 했다. 갑자기 이게 책과 마주이야기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책을 보면서 생각하는 게 책과 마주이야기하는 것이겠지. 좀더 많이 생각해야 하는데 스치고 지나갈 때가 훨씬 많다.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가 하는 말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난 이 말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그대로지만 사람 마음이 바뀌는 거다. 무엇인가를 좋아할 때도 그렇지 않은가. 처음에는 그것 때문에 설레고 기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마음이 줄어든다. 다른 데 마음이 간 것이겠지. 좋아하는 두 사람이 죽을 때까지 서로만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겠지. 그런 거 바라는 사람 많을지 모르고 그런 모습 보는 거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에서 한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나도 남은 사람이 먼저 간 사람을 잊지 않는 것도. 김춘수가 그런 시를 썼다. 자기 아내만 그린 화가도 있다. 유재하는 음반 하나밖에 남기지 못했는데, 그 안에 담긴 음악 모두 한 사람을 위해 만들었다. 난 그런 걸 하고 싶은 건지, 누가 그런 걸 해주기를 바라는 건지. 누가 해주는 것보다 내가 하는 게 더 좋은데…….

 

 

 

조금 전까지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밥상은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지지미 맵싸한 냄새가

코를 맵싸하게 하는데

어디로 갔나,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내 목소리는 내 귀에 들린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

옆구리 담괴가 다시 도졌나, 아니 아니

이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

한 뼘 두 뼘 어둠을 적시며 비가 온다.

혹시나 하고 나는 밖을 기웃거린다.

나는 풀이 죽는다.

빗발은 한 치 앞을 못 보게 한다.

왠지 느닷없이 그렇게 퍼붓는다.

지금은 어쩔 수 없다고.

 

<강우>, 김춘수 (71쪽)

 

 

 

사람은 어떤 때 시를 많이 쓰고 볼까. 시는 언제 보아도 괜찮지만, 누군가를 좋아할 때 더 많이 보는 것 같다. 시인도 그럴 때 시를 쓴다. 유치환 이야기 언젠가 들었는데 자세한 건 몰랐다. 시인이어서 좋게 꾸민 것도 있으리라고 본다. 유치환 아내는 그런 남편 보는 거 괴로웠겠다. 아내가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시를 쓰고 편지를 스무해 동안 날마다 쓰다니, 이건 대단하다. 유치환을 좋아하면 안 되는 사람을 좋아해서 괴로웠겠다. 박목월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과 잠시 살다 헤어졌다. 김연수 소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이 생각난다(그건 다른 사람 이야기지만). 내가 이런 말한 건 그런 마음을 시로 나타내서다. 글은 자기 이야기여도 다른 사람이 공감할 수 있게 써야 한다. 그런 게 쓰고 싶어서. 시도 시인이나 시를 쓴 배경을 알고 보면 더 많은 걸 느끼겠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시 자체만 봐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시를 쓴 사람은 그렇게 하기를 더 바라지 않을까. 시를 보다보면 시인한테 관심이 가고 더 알고 싶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문학이라고 할까, 시와 소설은 그것 자체를 먼저 보아야 한다. 배경은 그다음이다. 이런 생각이어서 내가 작가를 잘 모르는구나. 조금만 알면 어떤가.

 

시, 바로 알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안 보는 것보다 보는 게 좋겠지. 소설과는 다른 맛이 있으니까.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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