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평전
안도현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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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래전 친구가 준 백석 시집

백석이라는 이름을 알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뿐

내 마음과 눈이 어두웠던 탓

시간이 흘러 또 다른 친구는 시 <흰 바람벽이 있어>를 새롭게 보게 해주었다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는 언제 다시 보았을까

 

안도현은 백석 시를 스무살에 만나 읽고 베껴쓰고 시를 썼다

서른해가 흘러 백석평전을 세상에 내놓았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북쪽으로 간 사람 글은 볼 수 없었다

사상 때문에 북쪽으로 간 사람도 있지만,

백석은 부모가 있고 고향이어서 그곳에 남았다

세상을 조금 살펴보고 남으로 왔다면 좋았을 텐데

친구 허준 정현웅이 북으로 와서 백석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까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백석은 시를 쓰기보다 러시아 소설과 시를 번역하였다

순수한 시를 쓰지 못하는 백석이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조금 자유롭게 써도 괜찮다고 여긴 것은 아동문학이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그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백석은 평양에서 쫓겨나 추운 삼수군에 가서 양치기를 한다

다시 시를 쓰고 싶어했으나 북에서는 백석을 내버려두었다

자신은 일을 해서 개조되었다고 보여주기까지 했는데

그런 시를 쓴 백석 마음은 어땠을까

자기 마음과 다른 말을 써야 하는 건 괴로울 듯하다

일제시대 때도 백석은 언제나 우리말로 시를 썼는데,

그때 마음이 꺾이었구나

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2

 

무엇보다 백석이 북한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알게 되었다. 다른 것은 벌써 알고 있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모두 다 처음 안 일이다. 아니,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나오는 나타샤가 자야를 가리킨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자야는 기생인 김진향이다. 시에 나오는 나타샤가 자신이라고 한 여성이 많았다고 한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일은 다른 나라에서도 있었다. 에드거 앨런 포가 쓴 <애너벨 리>다. 여성도 그런 일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남성이 누군가를 만났을 때 영감을 더 받는 듯하다. 더욱이 백석은 친구 허준 결혼 축하 자리에서 만난 통영 아가씨 박경련을 만나고 마음에 들어한다. 백석은 통영에 다녀오고 시도 썼다. 박경련을 ‘난’이라 하기도 했다. 그때 함께 있던 친구 신현중 마음에도 박경련이 자리하고 말았지만. 자야를 처음 만났을 때는 ‘지금부터 너는 내 마누라다’ 했는데, 그때도 백석은 박경련을 생각했다. 그럴 수가. 박경련이 신현중과 결혼했을 때는 아주 놀랐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에 백석은 박경련한테 청혼했다. 그런데 신현중이 백석 어머니를 나쁘게 말해서 그 일은 이뤄지지 않았다. 신현중은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사랑을 골랐구나. 백석은 부모 때문에 결혼을 여러번 했다. 결혼하기만 하고 함께 산 시간은 짧았나보다. 그 부분은 왜 자신이 확실하게 하지 못했을까, 그런 시대였기 때문일지도. 북에서 백석은 서른네살에 열네살(스물) 어린 리윤희와 결혼하고 자식까지 두었다. 혹시 다른 사람은 아이를 낳지 못해서 헤어졌던 걸까. 백석 스스로 그런 게 아니고 부모가 그렇게 하게 만든 건 아닐지.

 

백석은 최정희, 노천명, 모윤숙과도 친하게 지냈나보다. 세사람이 백석을 말하는 게 재미있다. ‘사슴’ ‘사슴군’이라 했다. 백석은 오산고보를 나오고 한해쯤 집에서 보냈다. 집이 가난해서 공부를 더 할 수 없었다. 그 시간 동안 백석은 글쓰기를 생각하고 썼다. 백석이 학교 다닐 때는 김소월 시를 보았다. 김소월은 백석보다 여섯살 많다. 1940년 백석은 정주 출신 사업가 방응모 때문에 일본 아오야마학원에 공부하러 간다. 영어사범과다. 백석은 시골에서 교사를 하면서 시를 쓰고 싶었는데 일본에서 돌아와서 한 일은 신문기자다(함흥에서 학생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리고 시집 《사슴》을 100부 낸다. 이 시집을 좋게 말한 사람도 있지만 안 좋게 말한 사람도 있었다. 시가 33편 담긴 것을 다르게 해석한 사람도 있다.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백석이 어떤 뜻을 가지고 그렇게 한 건 아닌 것 같다. 백석이 우리나라 독립을 바라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앞에 나서서 무엇인가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시로 말한 건 아닌가 싶다. 우리말 거기에서 평안도 사투리로 시를 쓴 것 말이다.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때 백석은 시를 쓰지 않았다. 우리말로 쓸 수 없었으니까. 그때 많은 문인이 친일을 했다. 전쟁에 나가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말하는 시도 있었다. 억지로 그런 글을 쓴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진짜 그런 마음으로 쓴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우리가 힘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구나. 지금도 우리는 힘을 못 내고 있는 듯하다.

 

백석보다 다섯살 밑인 윤동주는 백석 시집을 구하지 못해 애태웠다. 1937년 8월 도서관에서 《사슴》을 빌리고 공책에 베껴쓰고 감상을 적었다. 그 뒤에도 백석 시를 좋아하게 된 시인은 많을 거다. 역사에 휩쓸려 산 사람은 백석만이 아니다. 일제시대 때는 자신의 신념이라는 것을 지켰지만 북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때 백석이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은 아닐까. 백석이 쓴 동시는 아이들 정서에 도움이 될 텐데, 북한에서도 아직 자유롭게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3

 

백석 님,

이젠 마음껏 쓰고 싶은 시 쓰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서는 그 시를 만날 수 없겠지만,

어느 눈이 푹푹 나리는 날

고조곤히 우리를 찾아올지도 모르겠지요

 

 

 

희선

 

 

 

 

☆―

 

‘유아들이 읽을 동시이므로 길이가 짧아야 하고, 지나치게 사상성이나 계급의식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어린아이일수록 동물에 관심이 많으므로 동물 생태에 더욱 유의해서 쓰자.’  (342쪽)

 

 

“본래 남편은 글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지요. 삼수군으로 와 농장원으로 일했지만 농사일은 제대로 하지 못해 마을 사람들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어요. 남편은 도리깨질을 못해서 처녀애들에게 배웠을 정도였고, 너무 창피해서 달밤에 혼자 김매기를 연습하기도 했지요.”

 

지윤희 증언은 이어졌다.

 

“남편은 하루에 한사람을 열번 만나도 그때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고 지나가곤 했어요.”

 

일본 유학 뒤 조선일보사에서 일할 무렵 백석은 “녹두빛 ‘더블부레스트’를 젖히고 한대 바닷물결을 떠올리게 하는 검은 머리 ‘웨이브’를 휘날리면서 광화문통 네거리를 건너가는 한 청년”이었다. 그는 남들이 자주 잡는 문 손잡이를 잡지 않던, 결벽증이 심한 모던보이였다. 그런 백석이 삼수군 관평에서는 누구보다 인사성이 밝고 겸손했으니 삼수군 사람들 가운데는 백석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백석은 삼수군 문화회관에서 가끔 청소년들에게 문학 창작 지도를 했고, 그에게 배운 학생 가운데는 평양 중앙무대에서 상을 받거나 우수한 평가를 받은 청년들도 있었다.  (371~372쪽)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당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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