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아이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욱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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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언제부터 읽었는지 모르겠다. 아주 오래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데, 2008년인지 2009년인지. 내가 많이 본 일본추리소설은 미야베 미유키와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것이다. 지금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처음에는 더 모르고 봤다. 그래서 예전에 본 것은 거의 잊어버렸다. 그때 《모방범》이나 《낙원》을 읽었는데, 좀 더 나중에 봤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시대 이야기는 2010년부터 봤다. 올해 나온 거 빼고는 다 봤다는 것을 얼마 전에 알았다. 2010년부터는 책을 보고 늘 쓰려고 해서 조금 더 오래 기억하기는 했는데, 그것도 시간이 흐르는 것과 함께 잊어가고 있다. 잊지 않을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하다. 잊을 때쯤 다시 읽는 것이다. 하지만 읽고 싶은 책은 자꾸 나오기에 그럴 수가 없구나. 아니 아주 좋아한다면 몇번이고 볼 수 있을지도. 그런 책을 만나는 것은 행복한 일이겠지. 《외딴집》이나 《모방범》은 한번 더 보고 싶기도 하다. 《외딴집》은 재미있기도 슬프기도 하다. 《모방범》은 무섭다. 《낙원》도 그랬던 듯. 그것을 읽으며 ‘세상이 무서워’ 하기도. 나는 세상의 어두운 면을 소설을 보며 알게 되었다. 소설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기는 하다. 바로 뉴스다. 뉴스에서는 사건 사고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나니까. 지금은 거의 안 보기는 하지만. 뉴스는 어떤 일이 있었다고만 하지만(자세히 말해주는 곳이나 방송도 있으려나), 소설은 더 자세히 들려준다. 그래서 책을 보는 거겠지. 마음을 알기 위해서.

 

이번에 읽은 《눈의 아이》는 내가 본 미야베 미유키 소설에서 몇번째일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아쉽게도 몇번째인지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 본 책을 써보면 알 수 있을 텐데. 이 책을 안 것은 지난해다(더 전인가). 우리나라에서는 《눈의 아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지만 일본에서는 《지요코(チヨコ 치요코)》로 나왔다. 이 책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초코’라고 읽었다. 책 앞에 있는 토끼인형 이름을 초코라고 지은 건가 했다(일본에서 나온 책 앞에는 토끼인형이 있다). 몇 달 전에 우리말로 나왔을 때 지요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글자를 잘 보니 ‘초코 チョコ’가 아닌 ‘지요코 チヨコ’였다. 이 책이 안 나왔으면 나는 언제까지나 ‘초코’라고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읽은 게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일본 사람은 지요코(치요코)를 초코라고도 했다. 별명 같은 거다. 이것을 몰랐다면 이 말을 하지 않았을 텐데. 우연히 알게 되는 게 도움이 되기도 하는구나. <지요코>는 인형탈을 쓰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사람이 자신이 어릴 때 좋아했던 인형을 떠올리는 이야기이다. 소중하게 여긴 게 없는 사람은 다른 나쁜 것에 씌이는 것이 아닌가 했다. 마음을 잃는 것과 같은 것인지도.

 

여기에서는 어린이라고 할지라도 나쁜 마음을 먹고 행동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책 제목과 같은 <눈의 아이>가 그렇다. 하지만 그 일은 그 사람의 삶을 바꾸어버렸다(이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자신은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행복해지기 위해 한 일이지만, 더 행복해지지 않았다. 질투는 어린이만 하는 게 아니다. 어른은 더하지 않나 싶다. 지금 생각하니 질투가 바로 마귀(요물) 같은 거구나. 거기에 먹히면 안 된다. 자신이 한 일에 대가는 치러야 하니까. 이것은 꼭 다른 사람이나 사회가 죄를 묻는 것은 아니다. <돌베개>에도 자신이 사람을 죽인 것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 자신이 한 일의 무게에 짓눌린 것인지도. 사회에서 해결해주지 않으면 우연이라도 일어나서 잘못을 한 사람한테 벌을 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성흔>에서는 죽어도 마땅한 사람은 없다고도 한다.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뉘우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닌데 사람이 쉽게 뉘우치지 않아서 말이지. 그래도 미야베 미유키는 사람이 가진 착한 마음을 믿고 있는 게 아닐까. 나도 그러고 싶다.

 

앞에서 다른 말이 잠깐 생각났는데 그 말을 어떻게 꺼내면 좋을지. 이야기에서는 하나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질투를 한번 더 생각해보면, 이것은 자신만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아니 질투 때문에 하는 행동이 그렇겠다. 자신만 보고 남을 보지 않기 때문에 나쁜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말이 있던가. 이런 마음은 아주 착하거나 깨달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보통 사람도 남을 생각할 수 있다. 자기가 마음이 편하기 위해 나쁜 소문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어쩐지 어설픈 말이 된 것 같기도 하다.

 

미야베 미유키가 쓰는 단편은 거의 도시전설 같다. 생각나는 것은 《지하도의 비》와 《홀로 남겨져》뿐이지만. 이것은 에도시대 이야기와도 닿아 있다. 여러권 봤기에 이런 말도 할 수 있구나. 마지막 말도 멋지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구나. 언젠가는 잘 말할 수 있을까.

 

 

 

희선

 

 

 

 

☆―

 

나는 생각해 보았다. 엄마와 아들 등에 달라붙어 있던 기분 나쁜 검은 손, 세상에 떠돌고 있는 나쁜 손에 대해서. 누구든 그 손에 붙잡힐 위험이 있다. 그 손에 붙잡히면 나쁜 짓을 하게 된다. 물건을 훔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사람들이 거의 모두 그렇게 되지 않는 건, 몸에 두르고 있는 인형과 장난감이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무언가를 소중히 여겼던 추억.

 

무언가를 좋아했던 추억.

 

사람은 그런 기억들한테 보호받으며 살아간다. 그런 기억이 없는 사람은 서글프리만큼 쉽게 검은 손을 등에 짊어지게 된다.  (74쪽)

 

 

사람은 달라진다. 달라지지 않으려고 결심해도 달라진다. 그래서 삶은 우스꽝스럽고, 슬프고, 이상한 재미가 있다. (……) 나는 가만히 있는데 자꾸만 세상이 바뀌어간다고 생각한다. 그건 착각이다. 움직이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자신이다.  (101쪽)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보는 것은 자기 마음속뿐이다. 좋은 것도, 좋지 않은 것도, 아름다운 것도, 못난 것도.  (123쪽)

 

 

―아버지,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죽어 마땅한 사람은 없어요. 내가 한 짓은 잘못된 거예요.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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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7 1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28 0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28 0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29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3-08-28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번에 안주를 봤는데, 미야베 미유키를 좋아하는 사람이 왜 많은지 알 것 같았답니다. 단편이 거의 도시전설같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 비유가 장편에서도 적합할 것 같아요. 다만 괴담이라거나 흉흉한 그런 도시전설이라기보다는 좀 따뜻한 그런 도시전설이랄까

희선 2013-08-28 02:47   좋아요 0 | URL
안 좋은 일어나도 그 안에서 따듯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지 않나 싶습니다 에도 시대 소설이 그런 면이 많은데, 지금 시대 소설 장편도 그런 게 아주 없다고 할 수 없죠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나오기도 하거든요 그것은 예전에 읽어서 잊어버리기도 했지만...


희선